(제 42 회)
상편
대궐주추돌을 피로 물들이다
제 2 장
정사가 부패하면 성돌이 썩는다
6
(1)
조헌은 전라도고향으로 돌아가는 정암수를 고을이 끝나는 지경밖까지 근 70~80리를 함께 가서 바래주고 해가 저무는 저녁무렵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몸보신에 쓰라고 정암수가 주고간 산삼 세뿌리와 인삼 삼십근을 귀중히 잘 보관해두라고 신씨에게 당부하고서야 저녁상을 받았다.
왜놈들의 흉악한 본성이 독사의 혀처럼 날름거리고있는 이때에 놈들을 때려잡을 병쟁기를 만드는 야장간을 차려놓아야 하겠는데 자금이 모자랐다. 그래서 인삼을 팔아 보충하려는것이였다.
《죽산선생이 떠나시면서 하루세끼 인삼을 달여서 어른께 올리라고 중히 당부하였는데 보관해두라니 무슨 말씀이시니까. 오늘저녁부터 달여드릴가 하오이다.》
조헌은 안해가 고마왔지만 머리를 조용히 가로저으며 빙그레 웃었다.
《그 인삼은 나보다도 부인이 먼저 써야 하리라만 그 사정도 다 잊고 잘 보관해두라고 하였으니 얼마나 긴요하게 쓰일것인지 부인도 짐작되겠는데 그러우.》
그는 인삼을 팔아서 야장간을 차리겠다고 하면 안해가 《어른께서 있고야 야장간도 있소이다.》 하고 막무가내로 인삼을 달일것이였다. 그때문에 인삼을 긴요하게 쓸데가 있다고만 말하였다.
조헌은 그날저녁 초불을 밝히고 충청도관찰사 리성중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서두에 인사례절을 간단히 쓰고 그다음에 도내 백성들의 가련한 처지와 질곡을 있는 그대로 썼다.
《…백성들은 굶주린 배를 그러안고 성을 쌓기에 고생하고있소이다. 지금은 한창 밭을 갈고 씨뿌리는 때인데 논밭엔 사람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소이다. 올해는 땅을 묵일 작정이오이까. 성도 나라를 지키자고 쌓는것인데 백성들이 농사를 짓지 못해 굶어죽으면 누가 성을 쌓고 누가 왜적을 막아내리까. 비록 군사가 있다 해도 군량이 없으면 저절로 패할수밖에 없다는것은 관찰사어른도 잘 알고계실것이니다. 성쌓기와 부역같은것은 농번기에 중지하였다가 농한기에 해야 하오리다. 군사들과 백성들이 배불리 먹고 왜놈들이 달려들면 족쳐버리도록 소신의 건의를 받아주기를 바라오이다.》
조헌은 리성중을 호되게 질책하고싶었지만 그것을 애써 누르고 편지를 점잖게 쓰는데 그쳤다.
다음날 그는 고을관가를 찾아갔다. 리성중에게 보내는 편지를 정식으로 고을관가를 거쳐 보내기 위해서였고 또 하나는 야장간을 차려놓을 일을 미리 통고하여야 했던것이다. 관가에서 모르게 야장간을 차려놓고 개인이 병쟁기를 벼린다는것은 어떤 변란을 일으키려는 행위로 보이게 되고 역적고변을 당할수도 있는것이다.
집에서 관가까지는 십여리 떨어져있어서 해가 한발이나 올라온 뒤에야 고을에 들어설수 있었다.
고을원은 조헌에 비해 10년이나 아래로 보이는 젊은 사람이였다. 그때문인지 아래사람들에게 본때를 보여서 권력의 진미를 한껏 맛보고있는것같았다.
그는 큰키에 흰 무명도포를 입고 갓을 쓰고 다박수염을 정히 다듬은 선비 하나가 삼문을 거침없이 넘어들어오는것을 이윽히 내려다보다가 문득 놀라서 일어났다. 그리고 급히 섬돌을 내려 선비앞에 깍듯이 인사례절을 차리였다.
《조헌어르신께서 수고로이 오셨소이다. 소신이 고을에 갓 부임되여와서 바쁜 핑게를 대고 어르신을 한번 찾아가 문병을 못하였소이다. 참말 죄송하오이다.》
《원, 별말씀을 하시오. 관장의 일이 산같은데 언제 짬을 내리오.》
《자, 어서 들어가시오이다. 여봐라, 게 누구 없느냐.》
기다린듯 새파랗게 젊은 통인이 《예, 여기 있소이다.》 하고 쭈르르 달려와 량수거지를 하였다.
《너 얼른 다담상 하나를 차려서 내아로 들이도록 해라.》
《예이.》
통인이 부름을 받았을 때처럼 쭈르르 주방채로 달려갔다. 다담상이란 손님대접으로 간단히 차리는 음식상이다.
《그러지 마시오. 소신은 아침을 먹고왔소이다. 한두가지 관장에게 부탁하고는 돌아가겠소이다. 여기서 지체할 시간이 없소이다.》
《사양마시오이다. 어르신은 아직도 이 젊은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시는군요.》
고을원은 더더욱 반기는 기색을 내보이며 조헌을 이끌었다.
《으응?!》
조헌은 눈을 크게 뜨고 고을원을 바라보았다. 흘러간 지난날의 갈피갈피를 한순간에 번져가듯이-
그는 마침내 《아, 공주향교에서… 그때 향시에서 으뜸으로 합격하였던 구만석이구만, 반갑소. 하하하.》 하고 구만석의 손을 쓸어잡았다.
《옳소이다. 선생님이 그때 교수로서 가르쳐주시던 구만석이오이다. 어서 내아로 들어가십시다.》
향시란 도내 지방관내에 사는 선비들에게 보이는 과거를 말한다.
향시에 합격한 사람이라야 장차 조정에서 치르는 과거를 볼수 있는 자격을 받는다.
조헌은 옛 제자를 만난 기쁨에 그가 권하는대로 하였다. 잠간사이에 다담상이 나왔다. 그는 간단한 과일이나 차를 내오리라고 생각하였는데 들여온 상은 다담상이 아니라 큰 연회상이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풍성히 차릴 짬이 없었겠는데 상우에는 없는것이 없었다. 갑자기 차리는 음식상이 이럴진대 매일 매끼, 하루 삼시에야 보나마나 산해진미를 다 올려놓은 상앞에 고을원이 앉을것이였다.
조헌은 지난날 통진고을원으로 부임되여갔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 저녁상을 들여왔는데 지금처럼 잔치상과도 같이 차리였다.
《너희들의 성의는 고맙다만 나는 이런것을 먹을수 없느니라. 백성들이 굶주리고있지 않느냐. 어서 퇴하고 쪼각상에 김치와 된장, 산나물과 같은것을 챙기면 그만이니라.》
조헌은 고을원을 지낼 때 내내 그렇게 하였었다.
그러나 오늘은 오래간만에 만난 제자이고 고을원인 구만석의 성의를 마다할수 없어서 점잖게 웃으며 사양하였다.
《소신은 아침을 먹고온데다가 또 약을 먹고있는중이여서 술과 고기, 기름진 음식을 못하오. 허허…》 하고 그는 품에서 편지를 꺼내였다.
《관장을 찾아온 리유는 이 편지를 감영에 전해달라는것이 첫째이고 둘째는 우리 동네에 야장간 하나를 차려놓고 농쟁기를 벼리고 또 앞으로 병쟁기도 벼려서 왜놈들을 방비할수 있게 미리 통고하자는것이요.》
《그거야 어려울것 없소이다. 하오만 병쟁기를 벼린다는것은 좀 생각해볼 일이올시다.》
《허, 관장은 아직도 깊은 잠에서 깨여나지 못했구려. 왜놈들이 극히 수상스러운데 어찌 태평히 계시려우, 내 알건대 고을군기소가 피페해져서 장공인들도 몇이 없고 야장간의 풀무에 거미줄이 너흘거린다는데 왜놈들이 달려든다면 무엇으로 막아내리오.》
《그렇기는 하오만 개인이 병쟁기를 벼린다는것은 안될 일이오이다.》
《관가에서 안된다면 할수 없지.》 조헌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그러면 농쟁기나 벼리는 야장간을 차려놓겠소.》
《그것은 관가의 허락없이도 할수 있으니 어르신의 료량대로 하옵시오.》
조현은 당장 병쟁기를 벼릴수 없다 해도 앞으로 병쟁기가 될 쇠붙이를 부지런히 모아들이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 편지는 관찰사 리성중에게 보내는것인데 편지에 지금은 밭갈이, 씨뿌리기철인것만큼 백성들을 성쌓는데 내몰지 말고 밭으로 내보내야 한다고 썼소. 관장도 그리 알고 백성들이 농사에 힘쓰도록 조처하시오.》
《하오나 관찰사가 매일같이 독촉한즉 어느 령이라고 제마음대로 백성들을 떼여내리오리까.》
《그렇다고 이해 농사는 짓지 않구 백성들을 굶겨죽이려우? 백성들이 있고야 고을원도 있고 관찰사도 있을게 아니요.》
구만석은 조헌의 쏘는듯한 눈길을 마주바라볼수 없어서 빈입만 다시다가 관찰사가 다 알아 할 일이지 나야 상전이 하라는대로 할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소신이 관찰사에게 편지를 쓴거요. 고을원은 백성들의 부모나 같은거요. 제 자식이 당장 죽어가는데 부모로서 누가 이래라저래라 하기를 기다리고있겠소? 그렇게 강건너 불을 보듯 하면 백성들을 잃고 고을을 잃고 나라도 잃고 망하는것이요.》
조헌은 옛시절의 교수로서 소년선비들을 가르치던 때처럼 구만석을 절절히 타이르듯 하였다. 구만석은 향교시절 배운대로 행동에 옮기려고 애썼었다. 그래서 조헌이 그를 기특히 여겼다. 그런데 지금 보니 바람따라 돛단다는 격으로 상전에게는 아부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에게 포악한 관리들과 다름없이 번져지는것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