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4 회)
상편
대궐주추돌을 피로 물들이다
제 3 장
또다시 올린 상소문
3
(3)
의원을 데리러 갔던 사람이 돌아왔다. 그는 관찰사일행을 못본체하고 곧장 조헌이 앞으로 갔다.
《의원의 집을 찾아가니 거기서도 엊그제 성을 쌓다가 돌에 치운 사람을 급히 치료하고있었소이다. 여기에 올 시간이 없으니 상한 사람을 데려오라고 하셨소이다.》하며 가지고온 들것을 내려놓았다.
《수고하였네. 자, 그러면 이 사람을 들것에 옮겨 눕혀야겠소.》
《알았소이다.》
모두들 조헌의 말을 따라 상한 젊은이를 들것에 조심히 옮겨 눕혔다.
《어서 떠나자구.》
《알았소이다.》
들것을 전후좌우로 네사람이 들고 행길에 나섰다.
조헌은 윤선각이 자기의 등뒤에 서있다는것을 알았지만 돌아보지도 않고 들것을 따라갔다.
그들을 못마땅히 보고있던 윤선각의 비장이 참지 못하고 꽥 소리를 질렀다.
《네놈들이 끝내 허락도 받지 않구. … 게 섰거라. 례의도 모르는 불학무식한 놈들. … 안설테냐?》
들것을 든 사람들이 주춤거리였다.
《왜들 그러느냐? 생명이 촌각을 다투는줄 모르느냐? 어서 가자. 사람을 살리는것이 례의중에도 첫째 례의인줄 알아야 한다.》
조헌은 들것을 든 사람들에게 이같이 엄히 독촉하였다. 이 말은 곧 비장이 들으라는 대답같은것이여서 목소리가 커지고 정정당당함이 서리발처럼 비껴들었다.
관찰사 윤선각앞에 엎드려 하회를 기다리고있는 사람들은 조마조마한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불안해하였다.
(저 사람이 어쩔려구. … 그러다가 형틀에 올라 졸경을 칠라)하고 조헌을 놀라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비장은 감히 뻣뻣한 언행으로 자기의 말을 거역한 사람이 있을줄 몰랐다가 뜻밖에 부딪치니 성이 상투끝까지 뻗쳐올랐다.
《아니, 저게 어떤 놈이야? 하루강아지 범무서운줄 모른다더니. … 이놈, 돌아서지 못할가.》
윤선각의 비장 하교남의 눈에는 허술한 바지저고리에 맨 망건바람인 조헌을 어느 농사군으로 알았던지 들것을 따라가는 그의 팔을 잡아 비틀어 돌려세웠다. 허지만 조헌이 하교남의 손을 어떻게 잡아내쳤던지 하교남이 비칠거리며 넘어질듯하다가 다행히도 바로섰다. 그의 머리에서 벗겨진 전립이 딩굴딩굴 굴러났다.
조헌은 그러거나말거나 못본체하고 태연히 걸음발을 옮겨갔다.
하교남은 조헌을 뒤쫓아가서 《에라, 이놈 맞아봐라.》하고 륙모방망이로 그의 어깨를 세괃게 내리쳤다. 허나 그 순간에 조헌의 손이 번개처럼 비껴올랐다. 하교남의 손에서 방망이가 땅에 뚝 떨어져내렸다. 하교남의 입에서 《어이쿠-》소리가 나오고 팔목을 싸쥐고 깜짝 놀라 조헌을 두렵게 바라보았다. 일하려고 돌아가던 백성들이 그 꼴을 보고 키드득거리였다.
조헌은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던것처럼 땅에 딩구는 비장의 전립과 륙모방망이를 집어들고서 전립은 그의 머리에 올려놓아주고 방망이는 그의 손에 내밀어주었다.
《그대는 차후 이것으로 망나니짓을 삼가하오.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내는 일은 모든 일에 앞세워야 할 일이요. 알겠소? 그대는 돌아가서 윤선각관찰사에게 아뢰이시오. 농번기철에 성쌓는데 백성들을 부려서 백성들의 농사를 전페시키는것은 스스로 중한 죄를 자초하는것이라고. 내가 이에 대해 관찰사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왜 아직 받아들이지 않느냐고 여쭈오. 민심은 지형지물보다 낫고 하늘이 준 기회보다 낫다는 말을 부디 잊지 말랬다고 하오. 나는 돌에 치운 사람이 위급하여 빨리 가야겠소.》
조헌은 들것을 들고가는 해동이네들을 뒤따라 씨엉씨엉 걸어나아갔다.
《허어, 저놈이 례사놈이 아니구나.》 윤선각이 지체높은 관찰사답게 너그러운 아량을 보이면서 한마디 하였다. 하기는 관찰사치고 일반백성 하나와 시비를 가르는데 끼여든다면 오히려 관찰사의 지체가 일반사람의 지체로 떨어지는것과 같은것이다.
그는 돌아가는 《례사놈》의 뒤모습이 어데선가 본듯이 눈에 익어보였지만 그가 바로 조헌인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옥천고을원에게서 보내온 조헌의 편지를 받고 성이 독같이 나서 조헌의 집에서도 성쌓는데 내보내라고 했었는데 조헌이 직접 나오리라는것은 짐작도 못했거니와 먼지땀이 내배인 허술한 옷을 입고있는지라 가려볼수도 없었던것이다.
《아뢰옵기는 황송하오나 저놈을 당장 잡아다가 형장맛을 보이는 것이 합당할가 하오이다.》
희덕고을원이 그렇지 않느냐 하듯이 옥천원 구만석을 힐긋 바라보았다. 그의 눈길엔 자기 고을엔 저런 엉뚱한 놈이 없으니 네가 버르장머리가 없는 놈을 맡으라는 얄미운 빛이 어려있었다.
구만석은 처음부터 조헌을 알아보았지만 모른척하였다.
조헌을 보기도 딱했거니와 조헌이 성쌓는데 직접 나오게 해서 농번기철에 백성들을 내모는 그릇된 처사를 보이게 했다고 윤선각이 질책할것같았기때문이였다.
윤선각은 희덕원의 말대로 저 《례사놈》을 형틀에 올려 물고를 내리고싶기도 하였다. 허나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겠다고 하는 사람을 죄인으로 다스린다면 여론이 깨끗치 못할것이였다. 그 《례사놈》이 언사불공이라고 말투가 공순치 못할뿐만 아니라 제멋대로 놀아나면서 관찰사를 본체만체 하였지만 꾹 눌러참았다.
조헌이앞에 망신만 하고 돌아온 하교남이 윤선각에게 아뢰였다.
《이자 그 사람이 관찰사어르신님께 편지를 올렸다 하오이다. 농번기에 성쌓기를 중지하라고 건의하였다고 하면서 민심은 지형지리보다, 또 하늘이 준 기회보다 낫다는 말을 잊지 말라고 하였소이다. 암행어사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도록 하오니…》
《으흠, 알겠다. 그런 편지를 보내온 사람이 있었다. 그런즉 그 사람이 중봉이였고나.》
윤선각은 비장 하교남의 말을 끊으면서 옥천고을 구만석에게 도끼눈을 부릅떴다.
《옥천, 공은 어찌하여 중봉을 성쌓기에 내보내서 민심이요, 하늘이 준 기회요, 지형지물이요, 이러쿵저러쿵 떠들게 하는가. 조헌의 집 종이나 하인을 내보내라고 하지 않았는가?》
《글쎄올시다. 중봉이 직접 나올줄은 몰랐소이다.》
윤선각은 한동안 구만석을 되게 꾸짖었다.
《그 사람은 정신에 이상이 생긴 사람인것만큼 오늘 당장 집으로 돌려보내시오. 성을 쌓는데 지장이 되지 않게, 응?》
《예, 알겠소이다.》
민심은 하늘이 준 기회보다 낫고 또 지형지물보다 낫다는 고사는 오랜 옛날 나라와 나라사이 싸워서 이기기도 하고 패하기도 하는 과정에 생겨난 말이다.
…3 000년전 서로 앙숙인 동쪽과 서쪽의 두 나라가 해를 두고 싸우고있었는데 하루는 동국이 하늘이 준 기회를 얻었다.
그것은 서국의 착하고 어진 임금이 자기의 생신날에 연회를 크게 차리고 군사들과 백성들을 잘 먹여서 모두 술에 취해버렸던것이다. 그야말로 하늘이 준 기회였다. 즉시 동국의 군사들이 이 천시를 놓칠세라 서국에 덮쳐들었다. 서국의 군사들은 어떤 위험이 닥쳐왔는지, 세상이 오는지 가는지 모르게 코를 골고있었다. 몇백명의 군사들만이 험준한 지세에 의지하여 적과 싸웠다.
동국의 수천의 대군은 서국을 맹렬히 공격하였다. 그러나 서국의 지경을 한발자국도 넘어서지 못하고 수많은 시체만을 남기였다. 나중엔 여지없이 패하고말았다. 서국은 한사람이 능히 천을 담당할수 있는 지세를 차지하였기에 승리할수 있었다. 이를 두고 전쟁에서 하늘이 준 기회를 얻는것보다 지형지물을 얻는것이 낫다는 경구가 생겨났었다.
10년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서국에서는 포악한 임금이 옥좌에 올라 군사와 백성을 돌보지 않고 전쟁준비에만 가혹하게 내몰았다.
전쟁이 터졌다. 했더니 서국이 패했다. 포악한 임금은 망국왕이 되여 자살하였다. 왜 이런 처참한 일이 벌어졌던가. 유리한 자연지세와 무진막강한 군력을 갖추고있었지만 군사들과 백성들은 포악한 임금을 위해 싸우려하지 않고 모두 달아나버렸기때문이다.
이것이 하늘이 준 기회를 얻고 지형지물을 얻는것보다 민심을 얻는것이 낫다는 천고의 교훈을 낳았다.
윤선각은 이 교훈을 알고있었지만 그것을 어느 고망옛적의 먼지가 끼고 고삭아버린 야사로 돌려놓은지 오랬다.
《지금이 어느때라고 아직도 케케묵은 고담따위를 들고다니면서 누구를 가르치려 드는거냐.》
윤선각은 머리를 가로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