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5 회)

상편

대궐주추돌을 피로 물들이다

제 3 장

또다시 올린 상소문

4

(1)

 

조헌을 두고 누구보다도 탄복한 사람은 신각이였다. 그는 연안성 부사로 있다가 지난해 병조의 당상관벼슬에 올랐었다.

그는 조헌이 귀양지에서 돌아오는 길에 또다시 상소를 올렸다가 임금이 받아주지 않아서 대궐주추돌에 머리를 짓쪼아 죽으려 했던것을 안 다음부터 더욱더 그를 당대의 제일충신으로 여겼다. 그런데 이번에 또다시 죽을 각오를 하고 의로운 상소를 올리지 않았던가.

신각은 그를 곡진히 위문하고싶었다. 외로운 그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편지를 보내고싶었다.

그는 덕보를 불렀다.

《너는 지난해에 옥천에 가서 수고가 많았지만 또 옥천에 가야하겠다. 그가 이번에 다시 올린 상소를 두고 내 감복됨이 그지없어서 조헌어른앞에 편지를 썼다. 그의 부인이 위급하게 앓고있는데 위문편지 겸 썼으니 그걸 가지고 가야 하겠다.》

《네, 알았소이다.》

《네가 가면 부인님병문안을 먼저 해야 하니라.》

《네, 알았…소이다. …》

덕보는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자기를 삼녀와 혼례를 치르어주면서 너희들의 기이한 인연은 하늘이 맺어준것이니 아들딸 많이 낳고 오래오래 잘 살것이라고 기쁘게 웃음짓던 마님이 떠올랐던것이다.

신각의 바래움을 받으며 길을 떠난 덕보는 밤낮으로 걸어서 사흘만에 충청감영이 있는 공주고을을 지나고 또 하루만에 청주고을이 멀리 보이는 어느 시내가에 이르렀다.

시내는 예전처럼 맑은물이 시원히 흐르고 여울목에도 예전그대로 징검다리가 놓여있었다.

덕보는 감개무량하여 강기슭에 서있는 버드나무아래로 다가갔다.

(여기가 아니였던가. 이 버드나무아래서 두 젊은이들이 천렵놀이를 하면서 술을 마시였지. 나를 감영으로 압송해가던 보은현 꺽다리 맹영달과 형리가 비위짝이 함박만 해서 젊은이들의 술을 사양치 않고 마시고 취해 쓰러졌던 곳, 그놈들이 곤드레만드레 잠에 곯아떨어졌을 때 나를 구원하여준 젊은이들, 그들은 완기형님, 해동이형님들이였지. 누가 나를 이처럼 아껴주고 살려주고 신각부사님께 보내주었나. 조헌나리님이시다.)

덕보는 조헌나리님도 보고싶고 삼녀, 완기, 해동형님들이 보고싶어 이내 시내가를 떠나 걸음을 다그쳤다.

그는 옥천고을을 백여리 앞에 두고 어느 길가 객주점에 들려 막걸리 한사발과 국밥을 청해먹었다. 옆에서도 두서넛 길손들이 밥을 먹고있었는데 그들속에는 머리를 빡빡깎은 어떤 중 하나가 끼여있었다.

《참으로 훌륭한 선비가 충청도에 살고있다는데 어디서 사는지 좀 알려주실수 없소이까?》 중이 느닷없이 자기옆의 길손에게 물었다.

《스님은 누굴 두고 하는 소리요?》

탁주사발을 쭉 기울이고 늙은이 하나가 수염을 씻으며 중을 바라보았다.

중은 《조헌이라는 선비인데 소문에 부처님과 같다고 하오.》하였다.

《부처님은 몰라도 그분은 백성들을 제 살붙이처럼 여기는분이시라우.》

이번엔 베잠뱅이를 입은 상투쟁이 하나가 밥을 다 먹고 한무릎 나앉으며 하는 말이다.

덕보는 다름아닌 조헌나리님을 부처님같다고 하는 중이 은연중 고마와서 그 중을 이윽토록 바라보았다. 그런데 인상은 좋지 않았다. 하관이 빠르고 두눈이 유별나게 동그랗고 낯갗은 바람과 해빛에 그슬려선지 가무잡잡하였다. 그러나 머리는 방금 깎은것처럼 하얗다.

《그러기 말이오이다. 그 선비가 충청도 선비중에는 제일 청렴강직하고 대발라서 조정의 재상, 대신들의 비행을 용서치 않구 규탄한다니 하- 참말 생불같은분이요.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중이 두손을 합장하며 동그란 두눈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이 사람, 저 사람을 건너다보았다. 사람들이 제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동정을 살피는것같았다.

《그분은 왜놈들이 저희네가 명나라를 치겠으니 길을 빌리자고, 만약 그렇게 하지 않을 때에는 재난을 면치 못하리라고 우리 사신들을 위협했다는 소식을 듣고 분연히 일어나 왜놈사신놈들을 당장 목베이라고 상소한분이시우. 그리고 왜놈들이 쳐들어오면 족쳐버릴수 있게 방비대책을 철통같이 다지자고 하였소.》

《나무아미타불… 소승도 들었소이다. 대체 그분이 어느 고을에 계시는지 한번 만나뵙고싶은 마음이 간절해지오이다.》

덕보는 조헌나리님을 모르는 사람이 없고 까까머리중까지도 돋보는것이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중의 언행이라든가 또 머리가 방금 깎은것처럼 하얀것이라든가 동그랗고 작은 눈이 불량스러워보여서 마음이 께름직하였다.

그는 객점구면이라고 조헌나리님을 찾아가는 길이니 나를 따라오소하고 중에게 말해야 옳겠으나 그러고싶지 않았다.

덕보는 주막집주인에게 먹은 값을 치르고 옥천을 향해 부지런히 걸었다. 붉은 술이 달린 벙거지를 꾹 눌러쓰고 담벽처럼 넓고 억세인 가슴과 바위같은 두어깨, 푸른 더그레를 입은 그 모습은 씩씩하고 담차보였다.

덕보는 다음날 이른새벽에 잊지 못할 사람들이 사는 옥천집에 들어섰다. 열려진 문안으로 보이는 뜨락에서 《얏》, 《얏》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이리 뛰고 저리 날으면서 수박치기를 하는 사람들이 언뜻언뜻 보여왔다. 그는 저절로 온몸에 힘발이 일어서는것을 느끼며 그들의 무술수련을 구경하려고 가만히 대문을 넘어갔다.

마당 한가운데 조헌나리님이 우뚝 서있고 그 앞에서 완기, 해동이 그리고 삼녀까지 맞붙어 번개치듯 돌아치는데 매개 동작이 민첩령활하고 재주와 슬기가 무쌍하여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아- 나리님께서 삼녀까지도 택견을 수련시키시누나. 이렇게 가가호호마다 아녀자들까지도 무술을 익히면 왜오랑캐들이 다 무엇이랴. 덕보는 용기와 신심이 넘쳐 가슴을 들먹이였다. 또 돌덩이같이 가슴에 매달리던 마님에 대한 근심걱정이 봄날의 눈석이마냥 스르르 풀리는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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