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7 회)

상편

대궐주추돌을 피로 물들이다

제 3 장

또다시 올린 상소문

4

(3)

  

얼근히 취기가 오르기 시작한 중은 닭다리 하나를 뚝 떼내여 씹는듯 마는듯 넘기고는 제손으로 술을 부어마시였다. 중이라면 고기도 술도 먹지 않는다는데 이놈은 그 계률을 지키지 않았다. 삼녀는 이놈이 더욱 수상스러웠다. 중으로 변신한 놈이 분명하였다. …

《고맙소이다. 아가씨가 앞으로 옥동자를 보도록 부처님께 빌어드리리다.》

음심이 동해난 중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입에 가져갔던 술사발을 상우에 내려놓았다. 그만 마셔야 했다. 술에 취하여 오늘저녁 조헌을 처리하지 못하면 안된다고 생각하였던것이다. 그리고 의심이 번쩍 들었다. 고운 계집이 사내를 녹여내는것같은감이 났던것이다.

(계집이 모르는척 하면서 나를 꾀여들었구나. 내가 거기에 속다니… 이제는 이년을 소리없이 죽여버리고 도망칠수밖에 없구나.) 하고 그놈은 가슴에 품고있는 비수를 꺼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정신이 가물가물해지고있었던것이였다. 그놈은 흐리멍텅해지는 머리를 털어버리려고 하였지만 어쩔수없이 취기에 못이겨 그자리에 털썩 꼬꾸라져서 코를 골았다.

밖으로 나온 삼녀는 완기와 덕보, 해동이가 기다리고있는 할멈방의 문을 똑똑 두드리였다. 완기네들이 나왔다.

《중놈이 곯아떨어졌소이다.》

《수고하였다. 너는 할멈과 함께 자거라.》

완기네 셋은 굵은 바줄을 가지고 사랑방으로 갔다. 중놈은 네활개를 펼치고 코를 드렁드렁 골고있었다. 완기네들은 그놈의 팔다리를 묶고 굵은 통나무를 등에 대고 통나무와 함께 그놈을 묶었다. 깨여나 일어서려고 해도 일어설수 없게 하고는 술상을 치웠다. 그리고 그놈이 실컷 자도록 내버려두었다. 저절로 깨여나야 정신이 멀쩡해져서 묻는 말에 대답할수 있을것이였다.

중놈의 몸에 비수가 있었는데 그것을 그대로 두었다. 중놈의 바랑에는 비상이 두어근이나 들어있었다. 그것도 그대로 두었다. 비상이 두근이면 수십명을 독살할수 있는 량이다.

새벽이 희붐히 밝아올무렵에 중놈이 깨여났다. 놈은 한동안 눈을 꺼벅꺼벅하더니 몸이 불편했던지 일어서려 하였으나 꼼짝 움직일수 없었다. 놈은 이 웬일인가 하여 고개를 좌우로 비틀어 주위를 돌아보았다. 헌데 이게 뭔가. 어제밤 아가씨는 간곳 없고 억대우같은 젊은이들이 자기를 지그시 노려보고있지 않는가. 그놈은 화닥닥 놀라 일어나려고 하였지만 꼼짝할수 없었다. (이제는 죽었구나.)하는 생각이 온몸에 전률을 일으켰지만 태연한체 중얼거렸다.

《이게 무슨 장난이요? 자는 사람을 묶어놓다니… 어서 풀어놓으시오.》

《그놈을 풀어주어라.》

조헌이 방으로 들어오면서 침착하게 하는 말이였다.

《네, 알았소이다.》

덕보가 얼른 놈의 포박을 풀어주는데 손을 묶은 바줄은 그대로 두었다. 그리고 놈의 겨드랑이를 껴들어 조헌의 앞으로 앉혀주었다.

《너는 누구냐?》

조헌이 중놈에게 엄하게 물었다.

《소승은 청주성밖 안심사 주지로소이다.》

《안심사 주지는 내가 친히 알고 지내는 스님이시다. 너의 대답이 벌써 거짓말이니 바른대로 말하지 않으면 너는 살 가망이 없다.》

《소승이 무슨 죄가 있어서 살 가망이 없다고 하오니까. 이 집에서 하루밤 먹고 잔것밖에 없지 않소이까.》

《네놈을 미리 묶어놓지 않았다면 너는 극악한 살인행위를 하였을것이다. 네놈은 왜놈으로서 조선말을 잘하여 중으로 변장하고 나를 해치러 왔다. 이놈의 몸을 들추어보아라.》

덕보는 중놈의 몸에서 비수를 꺼내놓았다.

조헌은 비수를 살펴보고 완기에게 넘겨주었다.

《그걸 증거품으로 건사해두어야 하겠다.》

조헌은 다시 왜놈을 엄하게 바라보았다.

《너의 바랑에 무엇이 들었느냐?》

《어떤 백성이 시주한것뿐이오이다.》

《그것이 무엇이냐?》

《좁쌀가루인지 기장가루인지 좌우간 먹을것이오이다.》

《먹을것이라면 이 자리에서 한숟가락 먹어보아라. 해동이는 그것을 한숟가락 먹여보아라.》

《알겠소이다.》

해동이는 비상을 한숟갈 떠서 왜놈의 입에 가져갔다. 왜놈은 입을 이리저리 비틀면서 먹으려 하지 않았다. 조헌과 완기, 해동이, 덕보가 하하 웃었다.

《네가 먹으면 죽을줄 알고 한사코 먹지 않는것은 비상이기때문이다. 너는 이 조헌을 없애려고 비수를 품고왔으며 칼로 해칠수 없다면 내가 먹는 우물에 비상을 풀어서 해치려 하였다.

너는 흉악한 왜놈의 자객이다. 이실직고하라, 너는 누구이며 어떤 놈이 너를 보냈느냐? 네가 솔직하면 너를 포로로 인정하겠다. 이 말은 너를 살려준다는 말이다.》

왜놈은 그때에야 조헌을 모살하려고 했던 자초지종을 다 뱉아놓았다.

한성 왜관에 상주해있는 왜인들은 하나같이 교활하고 악착스러운 밀정놈팽이들이였다. 놈들은 지난해 그믐달부터 조헌을 주시해보기 시작하였다. 상소를 올렸다가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귀양까지 갔던 사람이 귀양이 풀려 돌아오는중에 왜놈들을 강경히 대처하며 백성들을 잘 돌봐주어 민심을 바로잡고 왜적을 방비해야 한다는 상소문을 또다시 올린 사람은 지금까지 이 사람밖에 없는데다가 임금이 그 상소문을 받아보고 대노하여 불태워버린것도 보기 드문 일이고 또 그때문에 제 머리를 주추돌에 찧어 자기의 죽음으로 임금을 돌려세우려고 한 사람은 이 사람밖에 없는 일이라 왜관에 있는 놈들도 깜짝 놀라 그를 주시하게 되였던것이다.

그런데 조헌이 일년이 지난 오늘에, 그것도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그 준비를 한창 맹렬히 다그치고있는 이때에 마치 그 비밀을 말끔히 알고있는것처럼 《왜나라사신의 목을 베이라!》, 《왜놈들과 싸워 나라와 백성을 지키자!》하고 분연히 일떠선것이다.

왜관놈들은 조선의 문무관리들속에서도 조헌의 주장을 옳게 여기고 거기에 따라서는 기운이 날로 짙어가는것을 내탐하였다. 만약 조선의 임금이 조헌의 상소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어떤 예상치 않은 일이 빚어질지 알수 없는것이다. 조헌의 제의대로 일본사신의 목을 치고 일본과 단호히 련계를 끊으며 조선의 군사들과 백성들을 불러일으키고 나라의 방비를 굳건히 한다면 조선을 쉽게 먹어버릴수 없는것이다.

별치 않은 한점의 불티가 큰 산불을 일으키듯이 조헌이라는 선비 하나가 일본의 조선침략기도를 불태우는 불씨로 되고있다. 그 불씨가 위험하였다. 그 불씨를 제때에 꺼버려야 하였다.

그리하여 왜관놈들은 조헌을 없애버릴 흉계를 실현할수 있도록 비밀급보를 쯔시마에 보냈다.

전쟁이 터지면 충청도로 쳐들어갈 분담을 맡은 적장 가테이는 조선말에 능하고 교활무쌍한 심복부하 하나를 자객으로 골랐다.

《너는 조선의 충청도로 급히 떠나라. 중으로 가장하든 장사군으로 변신하든 어떤 계책을 다해서라도 조헌이라는 선비를 죽여버려야 하겠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가시가 눈을 찌른다고 조헌이도 그와 같다. 그를 제거해야 한다. 만약 일을 성공시키면 큰상을 받되 성사시키지 못하면 대신 네가 죽어야 한다.》

자객놈은 가테이가 내주는 날카로운 비수를 깊숙이 품고 밀수군의 작은 배를 탔다. 그밤으로 전라도에 기여들어 처음에는 밀수업자로, 다음에는 중으로 정체를 바꾸어가면서 충청도로 왔었다.

완기와 해동이, 삼녀, 덕보는 소스라치듯 놀라 당장 그놈을 때려죽이고싶었지만 조헌이 말려서 불끈불끈 틀어쥔 주먹들을 부들부들 떨었다.

덕보가 아니였다면 일이 어떻게 될번 하였는가. 생각할수록 머리카락이 쭈삣쭈삣 솟구치였다.

조헌은 왜놈들이 우리 나라를 침략할 세밀한 흉책을 짜놓고 벌써 그것을 은밀히 실천하는 길에 들어섰다는것을 알수 있었다.

그는 자객놈을 금시라도 불태워버릴것같이 불길이 펄펄 이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너는 우리 충청도를 쳐들어올 분담을 맡은 왜장수가 너를 파견하였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충청도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의 다른 도들을 하나씩 맡아안은 장수들도 있을것이다. 너는 그것을 말해야 한다.》

왜놈자객놈은 조선8도를 하나씩 분담맡은 왜장수들을 다 임명해놓고 조선을 쳐들어갈 준비를 다그치고있는것은 사실이지만 왜장수들의 이름까지는 자기가 알수 없었다고 토설하였다.

자객놈은 고을관가로 압송되고 거기서도 조헌을 모살하려던 흉모를 포함하여 조헌이 앞에서 뱉아놓은 그대로 이실직고하였다.

다음날 자객놈은 감영으로 압송되여가다가 강물에 뛰여들어 자결하였다. 그것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던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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