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1 회)
하편
의병장 조헌
제 4 장
임진년 4월
1
량반관리들은 배부르고 백성들은 배고프며 민심은 돌아앉아 날마다, 달마다, 철마다 불안스럽던 신묘년이 어언 지나가고 임진년이란 해가 찾아왔다.
이해에도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가난과 굶주림, 피눈물과 절망만을 자아낼 일년열두달을 안고온것이다.
백성들의 원성은 하늘땅에 사무치고 이 나라를 침략하려는 왜놈들의 흉심은 나날이 더더욱 악랄해지고있었다.
이렇게 불안한 정월이 가고 2월이 흐르는중에 조헌의 집에는 불상사가 덮쳐들었다. 조헌의 가장 귀중한 부인 신씨가 세상을 떠난것이다. 그러나 무정한 세월은 한가정의 불행같은것은 돌아보지도 않고 흘러 4월에 들어서서 이 나라에 일찌기 없었던 큰 재앙을 불러왔다.
그날은 4월 13일이였다. 이날 왜놈들은 드디여 바다를 건너 우리 나라를 침략하여왔다.
이날 부산첨사 정발은 군졸들을 데리고 절영도에 들어가 사냥을 하고있었다.
헌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갈매기들과 바다새들이 떼를 지어 처량하게 울부짖으며 머리우를 지나갔다.
정발이 이상하게 생각되여 바다를 바라보니 왜놈들의 배가 온 바다를 덮었는데 기치창검이 무수히 번쩍이고 북소리, 나팔소리가 바다를 뒤흔들었다.
《왜놈들이다. 어서 돌아가 왜놈들을 막아내자!》
정발이 깜짝 놀라 군졸들을 데리고 부산성으로 들어갔다.
성문을 닫기도전에 왜적이 벌써 가까이 다가들었다. 근 2만명의 적들이 부산성을 에워싸고 일제히 조총을 쏘았다.
고막이 터질듯한 총성이 벼락치는듯하고 철알들이 성문에 박혀들고 남문루의 기와장을 부시였다. 코를 찌르는 화약내와 초연이 안개처럼 가득차서 앞이 보이지 않았다. 왜놈들은 이렇게 몰사격으로 부산성 군사들과 백성들을 기겁케 하였다.
조총사격이 문득 끊어지더니 금빛갑옷에 금빛투구를 쓴 적장 고니시 유끼나가가 말을 타고 성문앞에 이르러 웨치였다.
《우리는 명나라를 치러가는 길이다. 길을 빌려달라. 그러면 너희들을 다치지 않겠다. 어서 성문을 열어라.》
첨사 정발이 성문루에 우뚝 서서 고니시에게 엄하게 꾸짖었다.
《너희들이 명나라를 치러간다면 바다로 곧추 가야 할텐데 어찌 길을 열어달라 하느냐. 그따위 허튼소리로 우리를 속이지 못한다. 돌아가라.》
왜놈들이 쳐들어왔다. 부산성의 군사들과 백성들이 용감하게 맞받아싸웠다. 왜놈들은 첫번째 공격에서 수백의 사상자를 내고 물러섰다.
그러나 다시 악착하게 달려들었다. 성안의 군사들과 백성들은 놈들의 두번째 공격도 용감하게 물리치고 놈들에게 무리죽음을 주었다. 왜적은 전술을 바꾸어 성벽보다 약간 높은 서북쪽 산봉우리로부터 공격하여왔다. 첨사 정발은 군사들과 함께 목숨이 다할 때까지 적들과 싸웠다. 그는 수십놈의 왜적을 목베여내치면서 성난 호랑이처럼 칼을 휘두르다가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군사와 백성들은 다 그처럼 전사하였다.
부산성을 함몰한 왜놈들은 다음날인 4월 14일 한낮때 동래성으로 달려들었다.
부사 송상현은 《죽기는 쉬워도 길은 빌려줄수 없다.》하고 군사들과 백성들을 불러일으켜 수십배나 되는 적과 마지막 한사람까지 싸웠다.
경상도좌수사 박홍은 당황망조하여 도망하고 좌병사 리각은 겨우 백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동래로 가다가 왜적이 그리로 가는것을 보고 기겁하여 뒤로 물러섰다.
송상현은 우리 군사들이 적과의 싸움에서 장렬하게 최후를 마치고 십여명이 남은것을 보고 가슴을 쳤다.
《신이 변방을 지키다가 도적을 막지 못하고 도적의 손에 죽사오니 하늘은 굽어보소서.》 하고는 무명지를 깨물어 피를 내여 종이우에 글을 썼다.
《불효자 상현은 나라의 변방을 지키다가 왜적을 당해내지 못하여 영결하오니 천지망극하여이다. 바라옵건대 부모님들은 옥체만강하옵소서.》
송상현은 그것을 자기의 통인에게 주어 성을 탈출케 하였다.
왜장은 왜군을 거느리고 송상현을 겹겹이 에워쌌다. 그자는 빼들었던 칼을 칼집에 꽂아넣으며 기뻐하였다.
《부사는 나를 알고있지 않소이까.》
송상현은 왜장을 무섭게 쏘아보았다.
(그래 옳다, 네놈이구나. 오대산의 해인사 중이라고 하면서 내앞에 나타났던 놈, 해인사에 120간이나 각을 짓고 보관하고있는 8만대장경을 마치 제가 관리하고있는듯이 자랑하던 놈, 천년이 지났지만 목판의 글이 새로 새긴것같은데 산새들도 그 각을 피하여 그 지붕우에 앉지 않으니 이는 실로 신기한 일이다, 하오니 동래성에도 절간을 짓지 않겠느냐 하고 자기의 정체를 숨기였던 놈이였구나. 내 그때는 이놈을 몰라보고 동래성에 절간을 짓는것은 내 자의대로 할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 이놈을 잘 대접하여 보내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놈이 중으로 변장하고서 동래성안팎을 말끔히 알아가지고갔다가 동래성을 치려고 왔구나, 아, 분통하도다. 내 네놈한테 속았구나.)
송상현은 추상같이 호령하였다.
《네가 중대가리를 하고 나타났더니 이제는 살인강도가 되여 나타났구나. 이 교활무쌍한 놈아, 어서 나를 죽이라.》
왜장은 능글능글 웃었다.
《내 비록 장수가 되였으나 그때 부사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는 잊지 못하니 어찌 해하리오. 그대를 구원코저 왔으니 옷을 갈아입고 바삐 도망하오이다.》
《내 너의 간사한 꾀에 속아서 나라앞에 죄를 지었는데 또 불충이 되라느냐. 내 어찌 살기를 바라겠느냐.》
왜장은 삽시에 승냥이낯짝이 되여 송상현을 죽이였다.
이리하여 동래성이 함락되였다.
밀양부사 박진은 젊은 장수로서 지략이 있었다. 그는 부산과 동래가 함몰되였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군사를 모아 동래로 가는 길에 도망하는 좌병사 리각을 만났다. 그는 리각에게 《소산을 지키지 못하면 령남은 우리 땅이 아니 될지라 내 마땅히 그 앞을 막을테니 공이 뒤를 받쳐주면 적을 능히 물리칠수 있으리라.》 하고 500명으로 진을 쳤다. 허나 리각은 무수히 달려나오는 왜적앞에 겁을 먹고 황급히 달아났다. 박진은 후원이 없어서 적과 싸우지 못하고 밀양으로 돌아왔다.
경상감사 김수는 적세를 보고 황겁하여 관하 백성들에게 피난하라고 하고는 제먼저 산속으로 도망하였다.
부산을 점령한 왜놈들은 김해로 침입하여왔다. 김해부사 서례원은 남문을 지키고 초계군수 리유검은 서문을 지키고있었는데 이날밤에 리유검은 성을 돌아본다고 거짓말을 하고 남문을 지키고있는 군사를 찍어버리고 도망하였다.
서례원은 리유검을 쫓아가 잡는다고 하면서 성을 나와 도망하였다. 이로써 경상도일대가 빈공간, 무인지경이 되였다.
왜놈들은 더욱 승승장구하여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활개치며 쓸어들었다.
부산과 동래, 량산과 김해를 강점한 왜적은 세갈래로 갈라서 북쪽으로 올라왔다. 가운데 길은 대구-상주-문경-조령-충주로 통하는 길이였고 동쪽길은 경주-영천-문경-조령-충주로 통하는 길이였으며 서쪽길은 김해-성산-금산-추풍령-청주로 가는 길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