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3 회)
하편
의병장 조헌
제 4 장
임진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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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는 잠시 붓을 멈추고 안해의 령위앞에서 마음속으로 편지를 읽어주었다. 했더니 《참, 잘 썼소이다. 임금님께서 김여물목사를 살려줄것같소이다.》 하는 안해의 목소리를 마음속으로 들었다. 조헌은 《여보, 고맙소.》 하고 흑흑 느껴울었다.
잠시후 그는 나라를 지켜낼 방도에 대하여 썼다.
《…적이 침입해오는 로정은 령남과 호남이 첫 상륙지로 되며 호서(충청도)나 해서(황해도)는 필연코 호남의 배사공들을 길잡이로 삼아가지고 침범해올것입니다. 그런데 호남(전라도)과 령남(경상도) 접경일대에는 지금까지 배길의 험악여부를 료해하였다가 유사시에 도움을 줄만한 장수가 없습니다.
전하는 생각이 깊어서 적을 막아낼 면밀한 계획을 듣고싶어 할것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나라가 무사할 때 대처할 방도를 진술해올리지 않고있습니까.
경비와 로력을 절약하여 백성들에게 고통과 부담을 주지 않는 방향에서 연해를 따라 그 일대를 튼튼히 방어하고 배길의 험악여부를 잘 타산하여 지키면 불의에 침공하는 적이라도 능히 격파할수 있습니다.
훌륭한 계책을 깊이 생각해내여 전하께 한번 말씀을 올려주었으면 하는것이 간절한 소원입니다.
나라에 대한 근심이 깊던 나머지 감히 분수밖의 말을 대감께 터뜨렸습니다.
신은 면목이 없을뿐더러 외람되고 번거로와 직접 전하께 호소할 길이 없습니다.》
그는 붓을 놓고 안해의 령위를 이윽토록 바라보았다.
초대가 다 타서 꺼져가는 초불을 새로 갈았다. 불송이가 밝게 타올랐다. 안해도 이렇게 다시 살아났으면 얼마나 좋으랴 하는 생각이 눈물을 또 자아냈다.
조헌은 안해의 령위앞에 새로 술을 부었다. 뜨거운 눈물이 술잔에 떨어지고 방금 써놓은 편지우에 떨어져 얼룩점을 그려놓았다.
조헌은 이튿날 아침 너무나 울고울어서 눈이 부어오르고 목이 쉰 완기, 해동이, 삼녀를 불러앉히고 자기의 곡진한 뜻을 말한 다음 그들을 데리고 옥계동야장간에 올라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창과 칼을 벼렸다.
장공인들도 조헌의 마음을 알아서 눈물을 머금고 일손을 다그쳤다.
야장간을 지어놓은지 근 일년가까이 되여오는 이때까지 싸움칼 100여개와 긴 창 60여개를 만들어냈다. 농쟁기를 벼리면서 관가의 눈에 띄지 않게 하자니 이렇게밖에 만들어내지 못하였다. 그들은 왜놈자객사건이 있은 다음부터 병쟁기를 만들어내기 시작하였다.
처음에 장공인을 구하는것이 제일 큰 애로였다. 고을군기소 장공인은 늙어서 일을 못하였는데 그나마도 먹을것이 없어서 굶주리고있었다.
조헌은 이 늙은이를 만나 왜 야장간을 짓고 병쟁기를 만들어내야 하는가를 차근차근 말해주고 도움을 청하였었다.
늙은 장공인은 조헌의 사람됨을 일찍부터 알고있는지라 그가 하는 일이라면 다 옳게 믿어지게 되는것이여서 차마 거절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식량까지 대주니 이런 고마운 일이 또 어디에 있으랴 하고 자기가 아는 쌍메질군 젊은이들까지 불러왔었다. 조헌은 윤선각이 상이라고 내려보내준 쌀과 콩을 장공인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백성들이 이른 봄부터 산에 올라 나물과 풀뿌리를 찾아헤매고있는데 배곯지 않게 먹으면서 하는 일도 의로운 일이라 성수가 나서 일손을 다그치고있었다.
조헌은 창 1 000개, 싸움칼 1 000개를 만들어내리라고 마음을 굳히였다.
그는 왜놈들이 쳐들어올 날이 박두해왔음을 매일, 매 시각 느끼였다. 항간에서는 여러가지 불길한 소문들이 떠돌았다. 서해의 청어떼가 모두 종적이 없어졌다, 어느 강이 갑자기 말라버렸다, 또 어느 집 우물이 난데없이 끓어넘쳤다, 하늘엔 살별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날아가더니 떨어졌다, 또 어느 남쪽바다가에 이때껏 보지 못한 큰 고기 하나가 사람처럼 울더니 바다깊이 들어갔다고 별의별 소문이 나도는것을 그대로 믿을바는 아니지만 나라에 큰 재앙이 들이닥칠 조짐을 예고하는 민심의 반영임이 틀림없었다.
조헌은 이 임진년 올해에 왜란이 터질것이라고 믿어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그러면 어느달에? 어느 절기에?
병서에는 불침 동북, 불침하남이라고 겨울철에는 북방으로 침략하지 말고 여름철에는 남방으로 침략하지 말라는 글이 있다. 병서대로 한다면 왜놈들은 추운 겨울에, 혹은 무더운 여름에 우리 나라를 침략하지 않을것이다.
(그러면 이 봄에?)
조헌은 가슴이 선뜩하였다. 교활무쌍한 이 왜놈들이 4월을 놓치지 않을것이다. 그래서 이달 4월에 들어서면서 조헌은 불안초조하여 밤낮으로 일손을 놓지 않았다.
드디여 왜란이 터졌다는 소식이 옥계동에 날아들었다. 헌 쇠붙이를 모으러 마을을 돌아다니던 삼녀가 허겁지겁 달려와 조헌에게 고하였다.
《
《응, 그게 사실이냐? 누가 그러더냐?》
조헌은 다급히 삼녀를 다그었다.
《제가 동구길을 지나오는데 어떤 말탄 군사가 먼지를 뽀얗게 일으키며 달려가면서 <왜란이 터졌다! 어제 왜놈들이 부산, 동래를 함락하고 량산, 김해로 쳐들어갔소.> 하고 연해연방 소리치며 지나갔사오이다.》
싸움칼자루를 맞추던 완기도 벌떡 일어나 창고밖을 뛰쳐나오고 해동이도 풀무타령을 뚝 그치고 우뚝 일어났다. 장공인들도 화닥닥 놀라 삼녀를 바라보았다.
《왜놈들이 부산성과 동래성의 백성들과 성밖의 사람들을 닥치는대로 죽이고 민가들을 불지른다 하오이다. 흑흑… 으흑…》
삼녀는 터져나오는 오열을 참아내지 못하였다.
조헌은 불길이 펄펄 이는 눈으로 남쪽하늘가를 바라보았다. 그는 지금껏 왜란이 터질것같아서 매일, 매시각 불안초조하던 마음이 오히려 가라앉고 응당 맞이할것을 맞이한듯이 침착해졌다.
조헌은 완기와 해동이, 장공인들을 돌아보았다.
《왜놈들이 끝끝내 병란을 일으키고야 말았구나. 그러나 놀랄것도 없고 겁낼것도 없다. 왜놈들이 반드시 침략해올것이라고 생각해서 우리가 병쟁기를 만들고있지 않느냐. 너도나도 온 나라가 들고일어나 싸우면 우리가 이기지 왜놈들이 이기겠나. 자, 임자네들은 당분간 벼림질은 그만하구 이미 만들어놓은 창날에 창대를 맞추고 칼날에 손잡이를 먼저 해야겠네. 로인님, 그래야지요?》
늙은 장공인은 조헌이 자기에게 의논조로 묻자 그것이 고마운듯 황송히 대답하였다.
《그래야 하구말구요. 그것부터 해놓구 또 벼림질을 해야 하오이다.》
《그럼 그래주시우. 나는 완기와 해동이를 데리고 관가에 가보아야 하겠소이다. 삼녀는 울지 말구 어서 집에 내려가 저녁준비를 해서 밥을 가져오너라. 밤을 새우며 일하도록 해야 할가부다.》
조헌은 완기와 해동이, 삼녀를 데리고 집으로 가서 땀에 젖은 허드레옷과 머리수건을 벗어놓고 의관을 갖추었다. 완기와 해동이도 옷을 갈아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