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8 회)
하편
의병장 조헌
제 4 장
임진년 4월
6
구만석은 군적에 올라있는 백성들을 찾아내라고 관속들을 내몰았는데 한사람도 끌어오지 못한지라 군률을 쓰겠다고 고아대기를 불소나기 퍼붓듯해서 재차 내몰았다. 그리고 자기도 뒤따라 관내를 돌아보기로 하였다. 만약에 백성들이 다 숨어버리고 피난하여 가가호호가 비였다면 자기도 슬그머니 도망하리라고 생각하였다. 이미 계획하였던대로 군량미를 싣고 감영으로 가는척하다가 어느 깊은 산속으로 잦아들면 그만인것이다.
그는 때가 때니만큼 전복을 입고 칼을 차고 군사 두셋을 데리고나섰다. 마을들을 지나 얼마쯤 가니 한사람도 찾아내지 못했다던 그 백성들이 어느 집 담벽앞에 하얗게 모여서서 무엇인가 들여다보고있는것이 아닌가. 아직 거리가 멀어서 무엇을 보고있는지는 몰랐지만 사람들인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이 괘씸한놈들이 나를 속였고나, 저건 백성들이 아니고 뭐냐?》
구만석은 달고온 군사들에게 백성들을 가리켜보이며 꽥 소리를 질렀다.
군사들도 웬일인가 해서 걸음을 멈추고 하얀 무리들을 바라보았다.
어이쿠, 이게 어디서 나타난 사람들인가. 사또님을 본의아니게 속인 죄에 걸려들게 되였구나 하듯이 목을 움츠리면서 《글쎄올시다.》 하고 죄송해하였다.
《어서 가자. 저놈들을 모조리 관가에 끌어가야 하겠다.》
구만석이 군사들을 독촉하여 려염집들을 지나고 골목길을 에돌아 급히 가니 그 많던 사람들이 성글어졌다. 그러나 아직 열대여섯이 남아 무엇인가 열심히 들여다보고있는데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치기 위한 격문》이였다.
구만석은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였지만 그보다도 부아통이 먼저 끓어올랐다.
조헌이 벌써 의병을 뭇는 격문을 내서 고을을 지키겠다는것은 반가운 일이라 하겠지만 그렇다고 관장과 의논없이 격문을 고을 한복판에 내다붙이는것은 고을의 주인을 무시하는 행위가 아닐수 없는것이였다. 그것도 그렇지만 조헌이 의병에 백성들을 다 끌어들이면 하루빨리 징모해야 할 군사들이 없게 되는것이니 이것이 또 큰 불만을 자아내였다. 이대로 내쳐두면 윤선각이 또 노발대발할것이였다. 고을원이라는게 눈을 뻔히 뜨고 조헌이한테 군사로 써야 할 백성들을 다 떼웠으니 고을원재목이 되느냐고 고아댈것이다.
그는 분이 끓어올라 아직도 격문을 보고있는 사람들에게 다가들었다.
《너희놈들은 군사에 들지 않고 아직도 여기서 꾸물거리고있느냐?》
사람들이 와뜰 놀라 뒤를 돌아보니 높은 관리인지라 허리를 굽석굽석 꺾으며 절을 하였다.
《우리는 경상도에서 오는 피난민들인데 격문이 하도 눈길을 끌기에 발길을 떼지 못하고있소이다. 저 황송하오나 조헌이란분을 어디에 가면 뵈올수 있소이까?》
피난민들의 행두와 같이 보이는 중늙은이가 미안스러운듯 공손히 물었다.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썩 사라지지 못할가.》
구만석이 이렇게 불호령을 내렸다가 이 어중이떠중이들이라도 군사로 몰아갈 생각이 들어서 그들을 멈춰세웠다.
《가만, 게 섰거라. 너희들은 의병에 들고싶으냐?》
《그렇소이다. 의병에 들어서 왜놈과 싸우고싶소이다. 격문을 보니 힘이 절로 솟나이다. 허허.》
《그래?! 그렇다면 의병보다 관군이 더 좋지. 자, 나와 함께 관가로 가자.》
《싫소이다. 우린 의병에 들겠소이다. 관군은 왜적이 온다는 소리만 들어도 삼십륙계오이다.》
《무엇이 어찌고 어째? 여봐라. 저놈을 묶어라.》
구만석이 꽥 소리를 치는 사이 피난민들은 엿먹어라 하듯이 우르르 제 갈 곳으로 헤쳐들갔다.
구만석은 그들을 어쩔수 없었다. 그들은 열대여섯인데 자기네는 겨우 셋밖에 없다. 서뿔리 다쳤다가는 오히려 주먹맛을 볼수 있는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민심이 뒤숭숭한 때가 아닌가. 닭쫓던 개 지붕을 쳐다보는격으로 멀어져가는 피난민들을 바라보고섰던 구만석은 하도 눈길이 끌려서 발걸음을 떼지 못하게 한다는 격문앞으로 다가섰다.
격문은 흰 명주천 두폭을 이어 대문짝같은 큰 바탕에 씌워져있었다. 첫눈에도 명필, 명문장이였다. 조헌의 글씨가 틀림없었다. 글줄마다 애국충정의 열기가 뿜어나오고 나라를 지켜낼 방략이 뚜렷하여 조헌이 나라를 버티고 일어서는 동량지재임을 스스로 느껴져옴을 어쩔수 없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잠간사이에 사라지고 격문의 다음구절에 가서는 조헌이가 두려워지고 원쑤처럼 미워졌다.
《…왜적을 치지 않고 도망치는자가 있을 때에는 적을 도와주는자로 지목하는 동시에 전란이 끝나는 날에 그들의 죄행을 성토하여 극형에 처하리라. …》라는 글발이 그의 가슴에 칼날같이 박혀들었던것이다.
방금까지도 도망칠 기회를 찾고있었는데 어쩌면 그리도 자기의 속내를 말끔히 알고 썼는지 온몸에 소름이 끼치였다.
허지만 군사들이 보는 앞에서 자기의 당황한 꼴을 드러낼수는 없었다.
《여봐라. 이 격문이라는것을 당장 떼버려라.》
《사또님, 조헌나리님이 의병을 모아 우리 관군대신 피흘려 싸우겠다는데 이 아니 좋으리까. 그들은 죽고 우리는 살고… 히히히.》
군사 하나가 이렇게 지껄이자 구만석은 그 말도 그럼직하게 들려와서 잠간 입을 다물고있다가 《흥-》 하고 코방귀를 내불었다.
《그 잘난 베잠뱅이들을 모아놓고 무슨 일을 치겠느냐. 병쟁기가 온전한가 군량미가 있나. 조헌이 날더러 군량미를 달라고 하였지만 한톨도 낼수 없다.》
구만석은 이렇게 허세를 부렸지만 조헌이가 두려웠다. 도망하면 조헌의 격문에 있는것처럼 전란이 끝나는 날에 중형을 면치 못할것이고 왜놈과 싸우면 반드시 왜칼에 맞아죽을것이 아닌가.
그는 격문을 떼버리라고 호령하던것도 잊고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