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0 회)
하편
의병장 조헌
제 4 장
임진년 4월
7
(2)
어느덧 해가 옥수봉너머로 기울어졌다.
바로 이때였다. 파수병이 어떤 군사 하나가 의병장님을 찾아왔다고 하였다.
군사를 들여보내라는 전갈이 나오기 바쁘게 한 군사가 초막안으로 들어와 조헌이 앞에 엎어지듯 무릎을 꿇고 설음이 북받쳐 아뢰였다.
《나리님, 덕보가 왔… 소… 이… 다-》
《응?! 네가 어찌된 일이냐?》
조헌이 뜻밖에 놀라서 덕보의 손을 잡아일으키였다. 완기와 해동이도 눈을 휘둥그레 뜨고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네가 신각어른을 모시지 않구 웬일로 왔느냐?》
《신각부
덕보는 울음을 받아줄 곳이 없어서 참고참아오다가 비로소 다 쏟아내는것처럼 목놓아 통곡하였다.
뭐 신각부
이윽하여 덕보는 한성이 함락되고 임금이 그보다 먼저 떠나간 일 그리고 신각부
…선조왕이 왜적이 침략해왔다는 급보를 받은 날은 4월 17일이였다. 이렇게 늦게 받은것은 봉수체계가 혼란되여 역마로 전달하지 않으면 안되였기때문이다.
임금은 급히 비변사회의를 열고 리일을 순변사로 임명하여 가운데길로, 성응길을 좌방어사로 임명하여 동쪽길로, 조경을 우방어사로 임명하여 서쪽길로 파견하였다. 류극량과 변기동을 조방장으로 임명하여 죽령과 조령을 지키게 하였다. 조령과 그 북쪽에 있는 충주를 지키는가 못지키는가에 따라 한성을 지켜내는가 못지켜내는가가 결정되는것이다.
조정에서는 신립을 도순변사로 임명하여 충주에 급히 파견하였다. 이보다 앞서 파견된 순변사 리일은 먼저 각 고을군사들을 대구영으로 모이라는 전령을 내려보내고 령남으로 떠났다. 그러나 대구영에 모였던 군사들은 리일이 미처 오지 못하고 적들이 가까이 짓쳐오는지라 다 흩어져 달아났다. 이것은 제승방략제도가 낳은 후과였다.
제승방략제란 지휘관이 지휘부를 무어가지고 지정된 지방에 가서 군사를 접수하여 적과 싸우는 제도이다.
리일이 상주땅에 들어서니 벌써 대구를 함락한 왜적이 상주로 쳐들어온다고 피난민들이 길을 메우며 올라왔다. 상주목사는 산중으로 피신하고 판관만이 홀로 남아 텅빈 관청을 지키고있었다. 군사가 없는 리일은 할수없이 백성들을 그러모아 군사로 만들고 상주에 덤벼드는 왜적을 막았지만 여지없이 패하고 달아났다.
신립은 전 의주목사 김여물과 함께 충주에 급히 갔다. 김여물은 지략과 무술이 뛰여난 용장이다. 그가 죄를 짓고 한성감옥에 갇혀있을 때 조헌이 형조판서에게 편지를 내여 죄를 용서받고 나오도록 하였던 사람이다.
그들이 충주에 와보니 군사들과 백성들이 다 도망해버렸다.
죽령과 조령을 지키게 하였던 류극량과 변기동이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하여 도망쳤다.
신립과 김여물은 잔졸들과 백성들을 그러모아 8 000여명의 군사를 편성하였다. 그러나 신립은 조령의 험한 지형에 진을 치지 않고 새초와 풀판이 펼쳐진 충주 탄금대앞뒤 고개사이에 강을 뒤에 두고 배수진을 쳤다. 탄금대란 신라때 우륵이 가야금을 탄 곳이라 하여 붙인 이름이다.
김여물은 신립에게 곡진히 제의하였다.
《여기에 진을 치는것은 대단히 불리하오이다. 우리 군사는 마치 독안에 든 쥐와 같아서 왜적에게 패하여 다 죽으리다.》
그러나 신립은 자기의 주장을 거두어들이려 하지 않았다.
《우리 군사는 적을뿐만 아니라 싸움에 익지 않아서 적이 쳐오면 겁을 먹고 도망칠것이니 그럴바하고는 여기가 바로 제 죽을 땅이라는것을 알게 하고 마지막끝까지 싸우게 하자는것이요. 그래야 왜놈을 이기지 그렇지 않으면 패하오. 다시 건의하면 군률을 써서 목을 베이리라.》
이리하여 그들은 배수진을 쳤다. 적들을 기다렸다. 한데 뜻밖에도 상주에서 패한 리일이 무졸
우리 군사들은 비록 병쟁기에 익지 않았지만 영용하게 싸웠다.
왜놈들의 시체와 우리 군사들의 주검이 탄금대앞벌 새초밭에 한벌 덮이다싶이 되였다.
마침내 우리 군사들과 신립, 김여물은 강가에 몰리게 되였다.
신립과 김여물은 마지막끝까지 왜놈들을 수없이 목베이고 강에 빠져 최후를 마치였다. 리일은 힘이 자라는껏 싸우다가 도망하였다.
충주는 피의 교훈을 남기고 왜놈의 손에 무너졌다.
4월 28(정사)일에 충주에서 패전하였다는 소식이 날아들자 선조왕은 수도를 버리고 피난할 뜻을 대신들에게 말하였다. 여러 대신들은 돌연 가슴이 무너지고 발밑이 허물어져내리는것같아서 임금앞에 나아가 엎드리였다.
《그렇게 하면 안되오이다. 한성을 굳건히 지키면서 성밖에 있는 군사들의 응원을 받아 싸워야 하오이다.》 하고 울면서 건의하였다.
《천하가 한번 성밖에 나가면 민심은 걷잡을수 없을것이고 임금의 련을 메고나가던 사람들조차 어느 길모퉁이에 내버리고 달아날지도 모르옵니다.》
그러나 령의정 리산해와 좌의정 류성룡은 마치 저희들만이 임금을 위하는듯이 《옛날에도 임금이 피난한 일이 있사오니 청컨대 전하께서는 평안도로 행차하옵소서.》 하고 선조왕을 위안하였다.
드디여 선조왕은 한성을 떠나면서 우의정 리양원을 수성대장으로 정하고 수도를 지키게 하였다. 또 김명원을 도
4월 그믐날(기미일) 새벽에 임금이 수도를 떠나려고 인정전에 나왔다. 관리들과 궁녀들, 련들과 가마들이 대궐뜰안을 꽉 메웠다.
이날 온종일 큰비가 쏟아졌다. 임금과 왕비는 지붕있는 가마를 탔다. 숙의이하는 비가 너무 세차게 내려서 가마를 버리고 말을 탔다.
선조왕이 돈의문으로 나갔다. 백성들이 길을 메우고 구름처럼 모여와 임금의 련을 붙들고 통곡하였다.
《상감마마아- 상감마- 마- 아- 전하는 백성들을 버리고 궁궐을 떠나시와 어디로 가시나이까-》
백성들은 누구나 눈물을 비오듯 흘리며 대성통곡하였다. 그 곡성이 진동하여 궁담이 무너질듯하였지만 임금의 련은 그 백성들을 남겨두고 지나갔다. 련안에 앉아가는 선조왕도 울었다. 그는 문득 조헌의 상소가 생각났다.
(왜놈들을 방비하자던 그의 제의를 받아들이였다면 이런 일이 어이 있었을고.)
임금은 후회가 막심하여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조헌이야말로 임금의 태평잠을 흔들어 깨우노라고 제 머리를 대궐주추돌에 짓쪼아 피를 뿌렸었는데 과인은 그의 충의지조를 왜 알려고 하지 않았던고-
선조왕은 이같이 통탄하였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