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7 회)
하편
의병장 조헌
제 5 장
청주성 해방
3
(1)
며칠이 지나 해동이네들이 날마다 청주성으로 들어가는 왜적을 알아가지고 돌아왔다.
조헌의병장의 군막에 비장 덕보, 종사관, 선봉장 완기를 비롯한 좌, 우군장들이 모여앉아 해동의 이야기를 들었다.
…해동이네들이 청주성으로 가는 지름길을 타서 100여리를 줄이고 청주성이 멀리 바라보이는 청룡산기슭에 닿았을 때에는 새벽이 푸름푸름 밝아올 때였다. 그들은 숲속으로 조금 들어가 쉬면서 가지고온 꽁보리줴기밥을 게눈 감추듯하고 일어서는데 갑자기 산굽이쪽에서 똥본 오리들처럼 알수 없는 소리로 지껄이는 왜말소리가 들려왔다. 해동이네들은 숲속에 몸을 감추고 내다보았다.
말을 탄 두놈이 산기슭을 돌아나오고 그 뒤로 왜놈들의 무리가 껴묻어나왔다. 하더니 행길에 나서서 청주성쪽으로 가는것이였다.
해동이네들은 놈들이 가는것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300여놈이였다.
날이 활짝 밝아왔다. 해동이는 놈들이 어디서 어느 길로 왔는지 알아보려고 왜놈들이 돌아나오던 산기슭을 에돌아나가니 산골짜기가 나졌다. 수풀이 왜놈들의 발길에 짓이겨진것이 보였다. 그들은 그 흔적을 따라서 골짜기로 깊이 들어갔다. 이내 밤나무와 참나무들이 드문드문 서있는 자그마한 풀판이 나타났다. 풀판은 짓이겨져있었다.
그우엔 내버린 음식찌꺼기들이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무엇을 끓여먹었는지 불에 그슬린 돌가마자리도 보였다. 어느 바위옆에서는 나무가지들을 덮어서 감추어놓은 가마까지 나졌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설익은 돼지대가리가 들어있었다. 가마는 아직 온기가 있었다.
왜놈들이 여기 있다가 성안으로 들어간것이 분명해졌다. 그리고 여기로 다시 오려고 가마를 감추어놓은것이 확실하였다.
해동이네들은 왜놈들의 가마를 바위곁에 그대로 놓아두고 이 풀판이 잘 내려다보이는 산등성이에 올라가 나무숲속에 몸을 감추었다. 그들은 교대로 하나씩 풀판을 감시하도록 하고 한잠씩 푹 잤다.
어느덧 하루해가 지고 사위가 어두워왔다. 어느 나무에선가 소쩍새가 《소쩍, 소쩍…》 피를 뱉듯이 처량하게 울었다. 저 두견이 왜놈들의 손에 불탄 마을과 죽은 사람들을 조상하느라고 저리도 슬피 우는게 아닌가싶어 해동이는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하늘중천에 떠올랐던 쪼각달이 서쪽으로 기울어지고 밥주걱같은 북두칠성의 꼬리도 서쪽하늘가로 돌아앉은 때에 청주성으로 통하는 행길에서 인기척이 있었다.
해동이네들은 점점 가까이 들려오는 인마의 발자국소리를 들으면서 앞을 내다보았다. 이윽하여 말을 탄 두놈의 형체가 뚜렷이 보여오고 그 뒤로 거밋거밋한 무리가 따라오는것이 헨둥히 알리였다. 왜놈들이였다. 이놈들은 행길에서 새초밭으로 꺾어들어서 산골짜기로 접어들었다. 잠시후엔 펑퍼짐한 풀밭에 올라왔다.
날이 훤히 밝아왔다. 해동이네들은 숨을 죽이고 놈들을 살피였다.
왜놈의 대장인듯한 놈이 무엇이라고 꽥꽥 소리치자 왜졸들이 헤쳐져서 자리를 골라앉기도 하고 드러눕기도 하고 또 숲가에 돌아서서 괴춤을 들추고 소피를 보는 놈들도 있었다. 어떤 놈들은 삭정이를 주어다가 돌가마에 불을 지피고 숨겨놓았던 돼지대가리를 넣은 가마를 올려놓았다.
풀판의 여기저기에서 불이 타올랐다. 아마도 돌가마에 밥을 지어먹으려는것같았다. …
어느덧 날이 밝아오고 조금 지나 청룡산마루에 아침노을이 비껴왔다.
문득 왜놈들이 줄을 지어 산골짜기를 빠져나가더니 어제처럼 새초밭을 가로질러 행길에 나섰다. 그리고 곧바로 렬을 지어 청주성으로 갔다. 말을 탄 두놈도 어제 보았던 놈들이고 왜졸무리도 그 무리였다.
해동이네들은 왜놈들이 하도 이상하여 풀판으로 내려가보았다.
바위곁에 가마가 어제처럼 숨겨져있었다. 가마안의 돼지대가리는 없어졌다. 아마도 백성들의 집에서 략탈해온 닭들을 잡아먹은것인지 돌가마가 걸리였던 여기저기마다에는 닭털도 너저분하였다. 그 주변을 살펴보니 교묘히 숨겨둔 가마들이 몇개 더 나타났다. 왜놈들이 래일 새벽에 여기로 또 올 잡도리였다.
해동이네들은 왜적이 왜 이런 놀음을 하고있는가를 깊이 생각해보았다. 왜놈이라면 성밖에 나와 주변민가를 략탈하기 마련인데 이렇게 매일 어두운 밤에 성밖을 나와 10리나 되는 산속에 박혔다가 날이 밝고 해가 떠오르면 고스란히 성안으로 되돌아가는 까닭이 무엇인가. 교활한 왜것들이 리득이 전혀 없는 이런 어리석은 일을 벌려놓을수는 없는것이다.
해동이네들은 왜놈들이 남이 보지 않는 때에 성밖을 나왔다가 남이 보는 때에 성안으로 들어가는것은 자기들의 군사가 날을 따라 자꾸만 늘어난다는것을 보여주려는 의도밖에 없다고 매듭을 지었다. …
해동의 이야기를 다 듣고난 조헌의병장과 비장, 종사관, 각 위장들이 폭소를 터뜨리였다.
《하하하…》
《아, 하하하!》
《왜놈들이 궁하기는 궁했네그려, 하하하.》
《차령에서 제놈들이 녹아났으니 무서웠던게야!》
이윽하여 조헌의병장은 이 가소로운 왜놈들을 잡아치울 계책을 의논하고 이틀후에는 전체 의병대가 청룡산골짜기를 에워싸고 왜놈들을 기다리기로 락착지었다.
이틀이 지난 저녁무렵에 의병대는 청룡산골짜기 좌우산발을 소리없이 차지하였다.
불그스레한 아름드리로송들의 푸른 잎새우에, 고깔모자를 쓰고있는듯한 도토리열매들을 무수히 이고선 가지많은 참나무우듬지에, 밤나무며 오리나무며 갖가지 나무들의 소소리높은 상수리우에 저녁노을이 붉게 비껴왔다. 그것은 마치 멀고먼 길을 쉬지 않고 달려온 의병들의 뜨거운 숨결이 타오르는것같았다.
이틀동안 한잠도 자지 못하고 사정없이 온몸을 노그라지게 찾아드는 졸음도 이겨내며 목을 태우는 갈증도 참아내고 배고픔도 잊고 비오듯 흐르는 땀과 헉헉 숨막히는 무더위도 아랑곳 않고 달려온 그 열기, 그 열망이 저 하늘에 노을로 타번지는것같아서 의병들모두가 가슴을 설레였다.
조헌의병장은 지휘처로 정한 산비탈바위아래서 각 위장들을 데리고 해동이의 설명을 들으며 골짜기의 풀판과 그 주변의 지형을 익혔다. 그리고 각 위장들에게 각각 싸움위치를 정해주고 의병들에게 밥도 먹이고 왜놈들이 골짜기로 찾아드는 새벽까지 교대로 잠도 재우며 싸움준비를 든든히 갖추도록 지시하였다.
의병들은 이번 싸움준비를 앞두고 하나같이 신심에 넘쳐있었다.
그들은 얼마전에 있은 차령싸움에서 왜놈들을 족쳐본 힘과 지혜가 솟구쳐오르는데다가 조헌의병장과 위장들이 짜놓은 싸움준비안이 마음에 들었던것이다.
드디여 새벽이 훤히 밝아오자 아무런 기미도 눈치채지 못한 왜놈들이 아직 어둠이 어스크레 남아있는 산골짜기로 기여들었다.
조헌은 지휘처를 정한 바위뒤에서 나무가지사이로 거밋거밋 보여오는 왜적의 무리를 긴장하게 살피였다.
말을 탄 왜놈이 풀판어귀에서 제놈들의 무리를 멈춰세우더니 먼저 대여섯놈들을 풀판으로 올려보냈다. 하루낮, 하루밤사이에 제놈들이 왔다가군하던 풀판에 어떤 이상한 일이 없었는가를 알아보려고 척후놈들을 보낸것이였다.
척후놈들은 밝아오는 하늘을 이고선 좌우산발을 휘둘러보고 또 제놈들이 어제 아침에 감추어놓았던 가마가 그대로 있는가를 찾아보다가 그것이 고스란히 있음을 확인하고는 제놈들의 무리를 향해 소리쳤다.
《이죠-나시.(이상없음.)》
그러자 말을 탄 놈이 제놈들의 무리를 이끌고 나무들이 듬성듬성 서있는 풀판으로 올라왔다.
풀판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의 산발이 우중충 흘러내린 풀숲에 몸을 숨기고있는 의병들은 사무친 원한과 백배천배로 솟구치는 복수심과 온몸에 소용돌이치는 의기를 그러안고 의병장의 북소리를 이제나저제나 기다리였다.
숲속에 깃들었던 어둠이 슬그머니 사라지자 조총과 활로 능히 겨누어 쏠수 있게 왜놈들의 형체가 완전히 드러났다.
이때였다. 동쪽산릉선에서 난데없는 농부가의 건드러진 노래소리가 울려왔다. 왜놈들은 급작스럽게 벌떡벌떡 일어나 노래소리가 들려오는 동쪽산릉선을 황급히 바라보았다. 이놈들은 밤잠도 못자고 여기까지 먼길을 걸어오는데 지쳐서 앉거나 드러누워서 쉬고있었던것이였다. 그러나 놈들은 언제나 경각성이란 주머니를 몇개씩이나 차고있는지라 때아닌 때에 들려오는 노래가 불길한 징조로 느껴졌다. 그래서 사냥개처럼 귀를 곤두세우고 동쪽을 바라보는데 서쪽의 산발에서 별안간 날벼락을 치는것같은 조총들의 일제사격소리가 터져나왔다.
왜놈들은 서쪽으로 돌아설 사이도 없이 무리로 꺼꾸러졌다. 왜놈들이 동쪽으로 쏠리면 동쪽산발에서 화살이 비발치듯 날아오고 남쪽으로 쏠리면 남쪽에서 무수한 화살이 쏟아져나왔다. 살아남은 왜놈들은 독안에 든 쥐새끼처럼 갈팡질팡 어쩔줄 몰랐다.
조헌의병장은 이때라 산이 통채로 무너지는것같은 북소리를 세차게 울리면서 《왜적을 한놈도 남겨두지 말라!》 하고 웨치며 장검을 비껴잡고 산발을 줄달음쳐내렸다.
그러자 전체 의병들은 《와야-》 하고 산사태처럼 쏟아져나와 무서운 회오리질풍처럼 왜놈들을 휘몰아쳤다. 의병들의 창과 칼이 가로세로 번개치고 왜놈들의 비명소리는 골안에 가득찼다.
피맺힌 원한과 치솟는 복수의 불길이 이글거리는 의병들의 눈망울들, 뿜어치는 거센 숨결소리, 무자비하게 창으로 찌르고 칼로 내리치며 《이놈 받아라.》, 《내 칼을 받아라.》라고 《악-》, 《악-》 부르짖는 웨침소리, 의병들 하나하나가 다 영웅호걸의 기상을 떨치였다.
이 통쾌하고 가슴후련한 싸움은 아침노을이 비껴올 때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