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0 회)

하편

의병장 조헌

제 5 장

청주성 해방

5

(1)

 

윤선각은 조헌의 병장과 령규승병장의 인장이 나란히 찍힌 련명권유문을 와락 구겨쥐고 아무 구석에나 뿌려던졌다.

너희들이 감히 이 관찰사를 이래라 저래라 해. 그동안에 왜놈들을 좀 쳤기로서니 무엇이 그리 장하다고 코김을 내부는것이냐. 청주성을 치겠으니 북문으로 쫓겨나오는 적을 치라고?

그는 커다란 모욕감과 수치감이 하나로 엇돌며 부글부글 끓어오름을 어쩔수 없었다. 불안과 초조감은 천만근처럼 가슴을 짓눌렀다.

조헌의 의병대가 보은차령에서 왜적 300을 격살시키고 시체를 거두러 온 왜적 50놈도 감쪽같이 잡아치웠을뿐만 아니라 청룡산에서 재차 왜적 300을 쳐부셨다는 소식이 그를 깜짝 놀래웠다. 그것은 수만의 군사를 거느리고있으면서 너는 무엇을 하였느냐 하고 규탄하는것과 같은 소식이였던것이다.

그는 그것이 너무도 믿어지지 않아서 비장 하교남에게 물었다.

《조헌이 차령에서 왜적 300여놈을 쳤다는게 사실이냐?》

《예, 그렇소이다. 하관이 군사 열댓을 파해서 그게 사실이라면 죽은 왜놈의 수급을 따다가 증명해보이라고 했더니 정말로 군사들이 그렇게 하였소이다. 그런데 일이 좀 창피스럽게 되였소이다.》 하고 하교남은 군사들이 왜놈들의 수급을 따다가 의병들에게 들켜나던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나중엔 의병들과 함께 시체를 불태우러 온 왜놈들을 족쳤다는 말까지 다하였다.

《그만해라, 듣기 싫다. 웬 놈의 잔사설이 그리 많으냐.》

윤선각이 이렇게 하교남의 말을 막아치운게 며칠전인데 이제는 청주성북문에서 왜적의 수급을 따가라는 조헌과 령규의 련명으로 권유문을 보낸것이다. 이런 괘씸한놈들이 어디에 있느냐. 이 관찰사를 무얼로 보느냐. 그는 이같이 불끈거리는 분기를 안고 호랑이가죽을 씌운 걸상에서 벌떡 일어나 넓고도 으리으리하게 호화스런 방안을 이리저리 오갔다.

새까만 옻칠이 반들반들해서 얼굴이 들여다보일것만 같은 관찰사의 서탁앞에 엉거주춤 서있던 하교남이 윤선각이 쥐여버린 종이장을 집어들고 보았다.

그는 지난달에 조헌의 상주문을 가지고 임금께 가는 조헌의 비장 리우, 종사관 김경백이를 단속하다가 오히려 제몸에서 금붙이들이 나와서 도적으로 몰리우고 귀쌈을 얻어맞고 왼쪽귀청이 잘못되여 한쪽귀가 절벽이 되였었다. 그런데다가 리우의 견마군한테 몸더듬질을 당하던중에 사타구니의 중치를 세괃게 비틀리워 중치의 밤알이 터져나갔는지 지금까지도 뜨끔뜨끔 아팠다.

그러나 그의 교활하고 간사스런 성미는 여전하여 윤선각의 비위를 잘 긁어서 다스렸다. 조헌과 령규의 련명권유문을 읽어본 하교남은 윤선각에게 깨고소하게 웃어보였다.

《관찰사님, 이 권유문이야말로 우리에게 복을 주는것이오이다.》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를 조롱한것밖에 무엇이 있느냐?》

《아니, 그렇게만 생각할 일이 아니오이다. 저희들끼리 왜적을 실컷 치라고 하옵시오. 수많은 왜놈들이 죽고 또 의병들과 승병들도 기진맥진할 때 우리 군사들이 청주성을 덮치면 종당에는 우리 관군이 청주성을 빼앗은셈이 되옵니다. 하- 이것은 꿩먹고 알먹고 둥지털어 불땐다는 속담과 같이 일거삼득이오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가만히 앉아있는것은 개구리가 앉는 뜻이 멀리 뛰자는데 있는것처럼 큰 승리를 얻기 위한데 있다고 하면 리유가 분명해지오이다. 참새, 제비들이 봉황의 뜻을 어이 알고- 하고 수염을 내리쓸어도 되오이다.》

윤선각은 하교남의 꾀바른소리에 귀가 번쩍 열리였다.

그는 지금까지 내포땅에 은거하고있으면서 왜적과 싸우지 않은것이 선전관 안세희의 눈에 직접 드러나서 몹시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있었다. 헌데 이 불안을 가시고 임금의 눈에 잘 보일 천재일우의 기회가 생긴것이다.

지금도 그는 안세희에게서 질책을 받던것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치였다.

… 안세희는 조헌의 의병대가 왜적을 치려고 공주성을 떠나 보은차령으로 향하는것을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래주고 곧장 공주에서 서쪽으로 200리 떨어져있는 내포땅으로 갔다. 어찌나 말을 세차게 때려몰았던지 말의 입귀에 허연 거품이 일고 말목덜미에 땀이 번지르르하였다. 그와 함께 온 군사 셋이 모두 말과 함께 땀으로 미역을 감으며 뒤따랐다.

그들이 밤을 새우며 쉬임없이 내달려 내포땅에 닿았을 때에는 아침해가 하늘가를 빨갛게 물들이고있었다.

윤선각의 비장 하교남은 어느 사이 선전관의 태도를 알았던지 영문앞에 나와서 깍듯이 인사례절을 차리였다.

《선전관님이 사생을 무릅쓰고 전방까지 나오시느라고 얼마나 로독이 크시오이까. 관찰사님은 지난밤 늦게까지 정사를 보시다가 새벽녘에 누우셨는데 소신이 곧 깨우겠소이다. 관찰사님의 방에 먼저 들어가시오이다.》

관찰사 윤선각의 방은 호화롭고도 사치스러웠다. 갖가지 기물들이 아침해살을 받아 번쩍거리였다. 란시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마치 태평세월의 고관대작의 방과 같았다.

여기서는 란시의 정사가 아니라 부귀영화의 정사가 있을것이였다.

이윽하여 융복에 붉은 주립을 갖추고 윤선각이 뚱뚱한 몸집에 배를 내밀고 들어오면서 호걸스럽게 껄껄 웃었다.

《선전관이 래림하셨군. 반갑소, 반가와-》

안세희는 두손을 합장하고 고개를 숙여 인사례절을 차리였다.

이 두사람의 벼슬품계는 엄청난 차이를 가졌다. 선전관(종3품-종9품) 안세희는 종3품이지만 감사에 관찰사를 겸하고있는 윤선각의 품계는 종2품이다. 그러나 선전관은 임금이 직접 파견한 관리여서 윤선각은 그의 눈에 잘 보이려고 애썼다.

《허, 공의 신색을 보아하니 피로가 산같이 쌓였소그려. 밤새껏 달려왔을라니 그럴거요. 뭐니뭐니해도 먹고 좀 자야 하겠소. 소관도 식사전이니 함께 합시다.》

선화당안방에는 진수성찬이 가득 차려있었다. 문가에 꽃무늬비단치마저고리를 곱게 차려입은 관기 둘이 서서 한 계집은 윤선각을, 다른 계집은 안세희를 방그레 반기며 비단방석으로 이끌었다.

안세희와 함께 온 군관 셋은 다른 방으로 안내되여서 윤선각과 안세희 두사람이 마주앉았다. 윤선각의 웃음이 불깃불깃한 얼굴에 둥실둥실 떠올랐다. 주립을 벗어놓고 계집들에게 뜻있게 눈짓하였다.

《자, 선전관님이 피로를 쭉 푸시게 술을 부어올려라.》

《예, 알았소이다.》

안세희의 왼쪽에 앉아서 분부를 기다리고있던 계집이 은방울을 굴리는듯한 목소리로 대답하면서 은주발에 백화주를 부었다.

《이 방에선 술을 마음껏 드시옵고 침방에선 잠을 마음껏 주무시옵시오. 소녀가 모시겠사오이다.》 하고 꽃같이 고운 얼굴을 숙이고 꽃잎같이 고운 손으로 술잔을 받들어올린다.

(윤선각이 미인계를 써서 주색으로 나를 녹여보자는 놀음을 벌렸구나.)

안세희는 분격을 참을수 없었으나 내색치 않고 점잖게 한마디 하였다.

《오냐, 네가 고맙구나. 하지만 내가 여기로 오면서 보리꼬장떡 두개를 말과 함께 하나씩 나누어먹고 시내물도 말과 함께 마시고오느라니 배가 거북스러워 술도 음식도 꽃같은 너도 구미가 영 동하지 않는고나. 허허허.》

안세희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계집의 얼굴이 금시 구운 가재처럼 새빨갛게 피고 윤선각은 깜짝 놀라 안세희를 따라나왔다.

《아니, 이럴 법이 어디 있소. 이러면 내 체면이 뭐가 되겠소. 응, 선전관-》

안세희는 못들은척 하고 관찰사방으로 들어갔다. 윤선각은 주립도 찾아쓰지 못하고 맨 망건바람으로 안세희를 쫓아들어왔다. 눈치 역은 하교남이 얼른 윤선각의 주립을 가지고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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