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2 회)
하편
의병장 조헌
제 6 장
윤선각관찰사의 군령
1
청주성이 왜놈들의 총칼밑에서 해방되자 피난갔던 백성들이 찾아 들기 시작하였다. 련일 기쁨과 감격이 끓어번지였다.
어느 나이많은 할머니는 손자를 데리고 자기가 살던 집터를 찾아갔다. 집은 이미 왜놈들이 불태워버리고 며느리는 왜놈의 손에 죽고 거처할 곳도 갈 곳도 없는 처지여서 죽어도 불탄 자기 집자리에서 죽으리라 하였었다. 혹시 의병에 들었던 아들이 살아있다면 집으로 찾아올수도 있을것같았다.
그런데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게 아들이 돌아와 의병들과 함께 새집을 짓고있었다.
《어머니-》
아들이 소리치며 달려나와 할머니를 와락 끌어안았다.
《이게 누구냐? 아이구나, 갑돌이 애비구나. 갑돌이 애비야- 네가 살아있었구나! 으흑… 으흑…》
《아버지-》
《갑돌아-》
할머니도 울고 갑돌이도 울고 갑돌 아버지도 그들을 한품에 안고 울었다.
《어머니, 우리 의병장님이 불탄 집터에 새 집을 지으라고 의병들을 붙여주었소이다. 집을 짓느라면 어머니도 돌아오고 갑돌이도 돌아온다고 하였소이다. 어머니, 우리 함께 가서 고마운 인사를 드립시다.》
《오냐, 오냐. 어서 가자.》
그들이 의병장이 있는 향교로 갔다. 그러나 갑돌이네는 조헌의병장을 직접 만나 인사를 할수 없었다. 벌써 성안의 백성들이 수없이 찾아와 의병장의 두리에 담을 쌓고있었다.
《여러분, 어서 돌아가 해야 할 일들이 많으니 헤쳐들 가시오이다. 집들도 손질할것은 하구 하루빨리 생활에 안착해서 생업에 힘을 써야 하리다. 왜놈들이 여기서 쫓겨갔지만 또 어느때 달려들지 모르오니 우리모두가 힘을 합쳐 왜놈들을 족쳐야 하오이다. 이제부터는 피난할 생각을 하지 말구 왜놈을 칠 생각만 해야 하리다. 그러면 왜놈들을 때려눕힐수 있소이다.
여러분, 돌아가실 때 관가에 들렸다 가시오이다. 거기서 왜놈들한테서 빼앗은 량곡을 나누어주고있소이다.》
백성들은 조헌의병장의 말을 듣고서 너무나 고마와 어쩔줄을 몰라하였다.
조헌의병장은 이날 밤이 깊도록 임금께 청주성을 수복한 소식을 알리는 장계문을 썼다.
《북방 압록강쪽을 바라보면서 소리없는 피눈물을 머금고 네번 절하며 전하께 삼가 이 글을 올리나이다.
생각컨대 나라의 운수가 불행하여 극악한 왜적의 침입으로 종묘와 사직이 불타고 궁궐은 빈터만 남았는데 임금의 행차가 압록강으로 피난하였으니 무릇 피끓는 사람치고 통분해하지 않는 사람이 없나이다.
어리석은 신은 일찌기 당하관의 낮은 벼슬에서 부질없이 나라걱정을 하다가 엄중한 죄를 범한 사람입니다.
기축(1589)년 이후로 꼭 죽는줄로 알았는데 전하의 은덕을 입어 살아나 오늘은 란을 당하여 의병도 무을수 있었으며 왜적을 치고 청주성도 수복하여 전하의 은덕에 조그마나마 보답하게 되였사옵니다.
소신이 왜적이 쳐들어와서 의병을 일으켰지만 관찰사 윤선각이 군적에 올라있는 백성들이 의병에 들었다고 해산시켜서 이미 모여들었던 의병들은 다 흩어져버리였소이다. 신이 다시 의병을 일으키는 격문을 각처에 보내여 의병대를 재차 모집하여가지고 이번 8월 초하루날 청주서남쪽에 진군하여 승병장령규와 함께 왜놈들과 종일토록 싸웠소이다.
왜놈들도 수없이 죽고 의병들도 적탄에 맞아 많이 부상당하였습니다. 왜놈들은 이날 캄캄한 밤에 제놈들의 시체를 불태워버리고 살아남은 무리들을 모아가지고 도망쳤습니다.》
조헌은 여기서 붓을 멈추었다. 어떻게 적의 화약고를 터뜨려서 왜적을 무력화시키고 청주성을 빼앗아냈다는것은 쓰지 않았다. 또 이보다 앞서 옥천과 그 일대를 먹어보려고 남하하는 충주의 왜적을 보은차령고개에서 크게 친 군공과 제놈들의 군세가 날마다 늘어나는것처럼 보이려고 밤에 청주성을 나왔다가 낮에 들어가군 하던 놈들을 청룡산에서 무리로 족쳐 없애버린 사실도 쓰지 않았다. 그것은 임금께 제 자랑을 늘어놓아 그 어떤 대가를 바랄 마음이 없었던것이다.
이 장계문을 쓰는 목적은 피난중에 나라걱정으로 심뇌하는 임금에게 청주성을 수복하였다는 소식으로 한점의 그늘이라도 가셔주려는 진심에 있었으며 더우기는 평시에 이어 이번 란시에도 나라일을 그르치고있는 간신무리들, 관군을 거느리고있는 비겁무능한 장수들을 반드시 제거하여야 왜놈을 이길수 있다는것을 임금께 제의하려는데 있었던것이다.
《이번 청주성싸움에 관찰사 윤선각과 방어사 리옥은 북문으로 도망쳐나오는 왜적을 족쳐대기로 약속하고도 그렇게 하지 않아 적이 살아나가게 하였사오니 어찌 용서할수 있겠습니까.
령남에서는 김수(경상도감사)가 적이 오자 선참으로 꽁무니를 빼고 서례원은 김해부사로서 평시에 용맹한 장수인체 하더니 정작 왜놈들이 쳐들어오자 화살 한대도 날려보내지 못하고 도망하여 한도가 함락되게 만들었습니다. 서례원은 자기의 죄를 어떻게 하나 모면해보려고 남이 죽인 왜놈의 수급을 잘라가기도 하고 왜놈의 귀를 베인것을 사들여 자기 공로로 만들어서 세상사람들을 속이고 총애를 받아 높은 벼슬자리에 그대로 앉아있을수 있었습니다.
리광(전라도관찰사)은 임금의 근심을 앞세워 생각할 대신에 호남의 군사를 데리고 먼저 퇴각하여 전위에 눌러앉아 시일을 지연시킴으로써 남쪽 세 도의 군사가 뿔뿔이 흩어져 영영 수습할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이 세 사람으로 말하면 간신무리들이 보배처럼 여기던자들이옵니다. 이같이 큰 죄악을 저지른자들이 아직도 목을 보존하고있건만 임금을 위해 잘
싸운 신각은 처단당하였습니다. 한강을 지키던 도
이 간신무리들은 백성에게 앙화를 끼쳤을뿐만아니라 나라를 위험에 빠뜨리고 수도까지 잃어버리게 하였사온즉 그들에 대한 전하의 사사은총은 비록 깊다 하지만 종묘사직의 치욕으로 말하면 이만저만하지 않습니다.
신은 하늘을 우러러 전하를 바라보면서 못내 북받쳐오르는 가슴을 진정할수 없습니다.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이 글을 올리나이다.》
그는 붓을 놓았다. 하지만 이 한장의 장계문에 자기의 의분을 다 담을수 없었다. 그는 다시 붓을 들고 장계문의 별지를 썼다. 그의 붓끝아래 일어서는 글발이 격랑과도 같이 파도쳐 내달리였다.
《…전라도의병장 고경명은 시간을 질질 끌면서 신하답게 행동하지 못하는 전라도관찰사 리광의 꼴을 보고 너무도 격분하여 격문가운데 그의 죄상을 하나하나 꼽았으며 의병을 모집할 때에 관군도 많이 참가시켰사옵나이다.
리광은 이에 불만을 품고 고경명이 금산의 적을 공격할 때 싸움에 협력하지 않았으며 방어사 곽영은 고경명이 이틀동안이나 힘겹게 싸우는것을 앉아서 보기만 하고 자기의 군사를 출동시켜 구원하지 않았기때문에 고경명은 고립무원한 상태에서 실패하고 최후를 마치게 되였습니다. … 이것은 군사권을 쥔 관리들이 실지 고경명을 죽였은즉 신은 이에 대하여 매우 통분하게 생각되옵니다.
신이 충청도관찰사와 방어사 리옥에게 청주의 적을 치자고 약속하였지만 그들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승병장 령규가 아니였다면 신도 고경명과 같은 죽음을 면치 못하였을것입니다.
… 전하가 만약 호남과 호서를 보전하여 나라의 쌀독으로 만들려면 신에게 싸움을 독려할 권한을 준다는 칭호를 빌려주어 관찰사의 령에 구애됨이 없이 자체의 결심과 힘으로 부대를 지휘할수 있게 승인하여주기를 바라옵나이다.》
조헌은 붓을 놓았다. 가슴이 시원히 열리는것같았다. 그렇다. 윤선각의 밑에서는 싸움을 승리에로 이끌수 없을뿐만아니라 고경명과 같은 죽음을 면치 못할것이였다.
윤선각과 리옥에 대한 조헌의병장의 불만을 더욱 가슴저리도록 자아내게 한것은 다음날에 있었다.
이날 관찰사 윤선각과 방어사 리옥은 의병들이 청주성을 해방하고 로획한 수만석의 쌀을 왜적에게 다시 빼앗길수 있다고 하면서 모조리 불태워버린것이다.
그게 어떤 쌀인가. 우리 백성들의 피땀이 어린 쌀이고 왜놈들에게 략탈당했던 쌀이다. 지금 당장에 굶주리는 백성들을 먹여살려야 할 쌀이고 의병들과 관군들의 귀중한 군량이다. 군량미가 없어서 의병들과 관군이 원쑤들을 치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진적은 얼마나 많았던가.
한강을 건너오려는 왜놈들이 무서워 싸우려하지 않고 도망칠 생각을 앞세우면서 한강변에 쌓아두었던 군량미를 수만섬이나 불질러버렸다는 김명원이처럼 여기 청주성의 쌀을 불태워버린 윤선각, 리옥이들을 어찌 용서할수 있겠는가.
조헌의병장이 뒤늦게 알고 달려갔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수만섬의 쌀더미는 불덩어리가 되여 범접할수 없었다.
의병들과 백성들은 땅을 치고 가슴을 치면서 울부짖었다.
《이제는 무엇을 먹고 왜놈들과 싸울 힘을 돋구겠는가?》
《왜놈들이 오기 전에 다 굶겨죽이려느냐? 이놈들아-》
《의병들이 쌀을 나누어준다고 해서 왔더니 이게 웬일이요.》
불에 타는 쌀더미를 바라보며 《어느 놈이 불을 놓았느냐, 죽일 놈들.》하고 저주를 퍼붓는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조헌의병장의 가슴을 아프게 물어뜯었다.
윤선각과 리옥이 청주성의 쌀을 불태운것은 왜적이 청주성을 치려고 달려온다면 미리 도망칠 작정을 해두고있었다는것을 말해주었다.
아, 이런 역신들과 함께 어찌 왜적을 칠수 있겠는가. 조헌의병장의 두눈에선 번개불이 일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