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3 회)
하편
의병장 조헌
제 6 장
윤선각관찰사의 군령
2
참혹한 왜란이 이 땅을 휩쓸고있지만 아는듯 모르는듯 해는 무심히 뜨고지고 날과 날도 예전그대로 변함없이 흘러서 어언 8월추석이 가까이 다가오고있었다.
선조왕은 이해에는 종묘사직에 향도 사르지 못하게 되여 선대임금들앞에 죄를 저지르게 된 큰 시름을 안고 압록강 버드나무아래를 서성거리고있었다. 200년의 왕업을 그르치고 나라와 백성을 왜적에게 내맡긴 망국왕의 운명을 면치 못하게 되였다.
그의 모습은 소탈하게 옷을 입고있는 선비와도 같았다. 보통갓에 굵다란 모시직령을 입은 그는 허리에 두른 붉은 술띠만 아니라면 유생행색이나 다름없었다.
(길흉화복은 문이 따로 없다. 열린 문으로 들어온다. 적선하여 복을 부르면 복이 들어오고 적악해서 화를 부르면 화가 온다. 그래 옳지, 정해놓은 리치지.) 하고 그는 경서의 한구절을 마음속으로 긍정하면서 장마비에 불어난 압록강의 흐름을 바라보았다.
압록강도 그 리치를 깨우쳐주는듯이 늠실늠실 기슭을 치며 흘러가고있었다. 구름이 끼여 비를 부르면 큰물이 나고 불볕이 내리여 가물을 부르면 왕가물이 드는것처럼 임금의 정사도 그와 다를바 없는것이다.
(과인이 백성들에게 적선해서 복을 불러주지 못했고나. 과인이 백성들에게 적악해서 화를 불렀구나.)
며칠전에 있었던 일을 상기하였다. 그때 선조왕은 경상도와 전라도의 백성들중에 더러 왜놈의 옷을 입고 왜놈의 군사가 되였다는 말을 듣고 크게 놀랐었다.
《어찌 이런 일이 생겼느냐? 그게 왜놈들이 민심을 소란시키려고 꾸며낸 소리가 아니냐?》
《아뢰옵기 황송하옵니다. 백성들이 과중한 조세와 공납으로 살기가 어렵고 형벌이 너무 가혹하여 민심은 돌아앉고 흩어진지가 오래되였사옵니다. 원망은 하늘에 사무쳤는데 교활한 왜놈들은 일본에는 조세도 부역도 없고 가혹한 형벌도 없다고 꾀이는 한편 항복하면 살고 싸우면 반드시 죽는다고 하니 몇몇 어리석은 백성들이 그 말을 곧이 듣고 왜놈의 군사가 되였사오이다.》
호종신하가 이렇게 있는대로 아뢰이였다.
선조왕은 아무런 말도 할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임금이 백성들에게 적악해서 화를 불러들인것이다고 생각되였기때문이다.
선전관 안세희는 임금이
《아뢰옵기는 황송하오나 지금까지도 적들의 발길이 미치지 않는 각지 고을에서는 왜란이 터지기 전이나 다름없이 백성들에게 가혹한 조세와 군포를 받아들이려고 무서운 형벌을 쓰고있사옵니다. 이제라도 전하께서 너그럽게 돌봐주는 지시를 내여 조세와 부역을 가볍게 지우고 형벌을 늦추고 공납을 덜어주면서 백성들에게 해가 되는것을 없애야 할것이오이다. 이렇게 한다면 백성들이 감동되여 기뻐할것이옵니다. 백성들의 마음이 일단 고마운데로 돌아앉게 되면 하늘도 돌려세울수 있을것이니 왜놈들이 아무리 날뛴다 해도 망할 날이 멀지 않을것이옵나이다.》
선조왕은 머리를 끄덕이며 어설픈 웃음을 지었다. 이 말은 임금이 적선해서 나라의 복을 불러들인다는 그것이였다. 조헌이 이전의 상소문에 늘 제의하던 말이 오늘에 와서 그 뜻이 더욱 새롭게 안겨들었다.
압록강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왔다. 선조왕은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지는것을 느끼며 좌우를 돌아보았다. 그전같으면 임금을 따라다니는 문무신하들이 많았을것이지만 지금은 내시 하나에 말구종 하나, 승지와 선전관이 곁에 있을뿐이였다.
선조왕은 안세희에게 눈길을 보냈다.
《그대는 충청도에 갔다가 돌아와 윤선각이 적과 싸우지 않고 내포땅에 있는것을 직접 보았다고 하였소. 반면에 조헌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려고 보은차령으로 가는것을 보았다고 하였소. 의병들은 조헌을 자기의 부모처럼 여기면서 따른다고 했는데 그 이야기를 다시한번 하오.》
《황송하옵나이다. 조헌은 지난날 전라도도사로 있을 때나 통진현감과 보은원을 지낼 때나 백성들을 자식처럼 돌봐주어서 인심을 얻었사오이다. 그가 이번 왜란을 당하여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을 내자 일호백낙(한사람이 소리치면 백사람이 호응한다는것.)이 되여 사람들이 그를 찾아와 의병에 들었사옵니다. 그러나 윤선각이 의병을 해체하고 관군으로 끌어갔사옵니다. 조헌이 재차 격문을 띄워 호소하오니 사람들이 또 모여들어 근 2천여명의 큰 의병대를 뭇게 되였사오이다. 조헌은 이 사람들을 데리고 왜적을 치고있사옵니다.》
《조헌은 왜란이 터지기 전에 벌써 왜적이 우리 나라 8도에 나누어 침략할 왜장괴수들을 임명하고 란을 일으킬 준비를 몰래 하고있다는것을 알았다고 하였는데 왜 미리 과인에게 상주하지 않았던고?》
선조왕은 충청도에 갔다가 온 안세희가 그 사실을 아뢰였었는데 그때까지만 하여도 마음이 어수선하여 그 이야기를 새겨들을 여유가 없었던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나라의 각 도, 각 고을들에서 의병들이 들고일어나 왜적을 치고 리순신이 남해에서 왜적의 수군을 휩쓸어버리는 까닭에 왜적이 평양에 못박혀있고 오히려 우리가 평양성을 탈환하는 공격전을 한창 벌리고있는것이다. 선조왕은 마음이 어느 정도 가라앉고 지금에 와서는 안세희의 이야기를 자상히 듣고싶은 여유가 생긴것이다.
《충청도를 침략하는 분담을 받은 적괴수는 조헌을 미리 없애치울 흉계를 세우고 전쟁전 지난해에 자객을 파했었는데 오히려 그 자객이 조헌의 손에 붙잡혔사오이다. 자객의 토설에서 조선8도에 보낼 왜장 들이 임명되였다고 하였사오이다.
조헌은 이 중대한 비밀자료를 감영에 보냈었는데 윤선각이 그것을 깔아두고 조정에 올려보내지 않았소이다.》
《무엇이라고? 신하된자가 무슨 흑심이 있어 해괴한짓을 하는고? 윤선각이 이리도 무엄하니 그대로 두고 볼수 없다.》
선조왕은 팔소매를 떨치고 행궁으로 돌아가 비변사 당상관들을 불러들이였다.
《경들은 충청도관찰사 윤선각이 군사 2만 3천을 거느리고있으면서도 왜적과 싸우려고 하지 않고 과인을 호위하려고 오지도 않고있다는것을 알고있다. 이런 반식대신(하는 일없이 밥만 축내는 무능한 대신)들을 어떻게 하였으면 좋겠느냐?》
비변사 당상관들은 백계무책인 윤선각이를 파면시키고 일반군졸로 떨구어버려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비변사에서는 그 어지를 즉시 작성하여 내려보내되 누구를 시켜 어지를 실수없이 집행하도록 하겠느냐?》
누구도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의주에서 충청도까지는 천여리 먼 곳이고 왜놈들을 피해가야 하는 위험한 길이다.
안세희선전관이 임금앞에 나섰다.
《소신이 충청도에 다녀왔사오니 가는 길도 잘 알고 윤선각이 있는 내포땅도 잘 아오이다. 소신이 다시 갔다오겠소이다.》
《그렇겠다. 경의 수고로움을 내 알고있다. 경은 이 일이 중대한것만큼 각별히 몸조심하여 다녀오되 윤선각이 하졸군사로 따라다니는것을 직접 보고오도록 하오.》
《알겠사옵니다. 지금 당장 떠나겠사옵니다.》
안세희가 기꺼이 대답을 올리는 순간에 승지 하나가 환한 얼굴색을 짓고 들어와 임금께 고하였다.
《상감마마, 충청도의병장 조헌의 장계가 올라왔소이다. 청주성을 해방하였다는 첩보이옵나이다!》
《조헌이가? 청주를?! 어디 보자!》
선조왕은 어좌에서 몸을 건듯 일으켰다. 문무재상들도 큰 경사가 난듯 일시에 기쁨을 내비치면서 술렁이였다.
선조왕은 장계문을 읽어내려가면서 자주 고개를 끄덕이였다. 희색이 만면하여 청주성을 탈환하였다는 대목에 가서는 신하들이 다 듣도록 소리내여 읽었다.
《〈…신이 재차 의병을 모집하여 이달 8월 초하루 청주성 서남쪽에 진군하여 승병들과 함께 왜놈들과 종일토록 싸웠소이다. 왜놈들이 수없이 죽고 우리 의병들도 적탄에 맞아 많이 상하였사옵니다. 이날밤중에 왜적은 제놈들의 시체를 불태우고 살아남은 무리를 모아 북문으로 도망쳤사옵니다. …〉
하하하, 과시 조헌이 장하고나!》
선조왕은 장계문을 흔들어보이면서 문무대신들을 둘러보았다. 대신들도 임금과 기쁨을 나누며 벙글벙글 웃었다.
선조왕은 다시 장계문을 읽어가다가 문득 웃음을 거두고 신중해졌다. 그 대목부터는 북문을 담당했다는 윤선각의 관군이 북문으로 도망쳐나가는 왜놈을 치지 않은 사실과 아울러 나라가 오늘과 같은 참상을 당하게 된것은 윤선각과 같은 사람들이 전장에도 있고 조정에도 있기때문이라고 규탄한것이다.
선조왕은 장계의 별지까지 다 본 다음 어두운 얼굴로 류성룡에게 넘겨주었다. 류성룡은 장계문을 보고 낯색이 하얗게 질리였다.
거기에는 조정에 틀고앉아 왜놈들과 화친을 부르짖는자들과 외척을 등대고 전횡을 일삼는자들, 왜놈들과 싸우지 않고 비겁하게 도망치거나 능히 이길수 있는 싸움도 패하게 만든자들을 엄벌에 처해야 한다는 글귀들이 칼날처럼 번쩍이고있었다.
장계문을 돌려가면서 읽은 문무대신들은 고개를 숙이고 침묵을 지키고있었다.
선조왕은 탄식해 마지않았다. 그는 지난해 조헌이 앓는 안해의 침상앞에서 쓴 상소문을 상기하였다. 왜나라에 갔던 김성일이 왜놈들은 침략해오지 않을것이라고 한 말을 믿고 그에게 금띠까지 준 일을 얼마나 날카롭게 규탄하였던가. 그때 조헌이 경고한대로 왜적이 침략하여왔고 그가 예고한대로 간신무리들이 도망하였고 그가 충고한대로 나라가 하루아침에 참혹한 변을 당하였다.
《모두 과인이 박덕한탓이요. 어찌 제신들의 잘못만을 문책하겠는가. 이제부터라도 지나간 일에서 교훈을 찾고 왜놈들을 쳐야 할 때요. 조헌은 윤선각의 지휘를 받지 않고 싸울수 있도록 청해왔는데 승인한다는 어지를 내려보내오. 윤선각이 파면되면 저절로 그의 손탁에서 벗어나겠지만 어지는 어지대로 내려보내오.》
이리하여 안세희는 윤선각을 충청도관찰사의 벼슬에서 파직한다는 어지와 조헌이 관군의 지시에 구애되지 않고 의병을 이끌라는 지시를 안고 충청도로 떠났다.
그는 하루, 한시각이라도 빨리 가야 했다. 청주성을 해방한 조헌과 령규승병장을 만나서 열렬한 축하를 해주고 임금이 매우 만족해한 사실을 알려주어야 하였다. 또 한시각이라도 빨리 윤선각의 파면을 선포하고 하졸로 소속시켜야 하였다. 하루라도 늦어지면 그동안에 윤선각이 관권, 군권으로 조헌의병들에게 어떤 해를 끼칠지 모르기때문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