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회)

하편

의병장 조헌

제 7 장

대지에 피로 쓴 상소문

5

(4)

 

안세희는 조헌이 정신을 차린것이 반가와 눈물을 씻으며 웃었다.

《윤선각이 파직되였네. 그놈을 하말군졸로 소속시켰네. 그 역적놈을 참형에 처하도록 임금께 상주문을 올리겠네.》

조헌의병장의 다박수염이 알릴듯말듯 오르내리고 부르튼 입술사이에서 실오리같이 가느다란 말이 새여나왔다.

《윤선각이… 종당에… 제 갈…길을… 갔구만… 우리 나라가 참혹한 재난을 당하게 된것은… 윤선…각과… 같은 …자들이… 많은… 탓이요… 민심을 등진자… 일신의… 부…귀…영달만…을 탐내는자들이… 갈 길은… 윤선각이… 가는 길뿐이지…》

조헌의병장의 숨결이 꺼질듯말듯 들숨날숨이 고르롭지 못하였다. 그는 힘겨운듯 잠시 쉬였다가 생명의 마지막불꽃을 다 모아 눈을 크게 떴다.

《소신이… 죽지 않고… 살아나면… 임금께… 상소를 다시… 올리겠소… 아뢰고싶은 말이 많아서… 눈…을… 감지 못…하겠소.》하고는 의식을 잃었다.

안세희, 정암수가 조헌의병장을 꽉 그러안고 《중봉, 중봉선생-》하고 안타까이 소리쳐부르고 또 불렀지만 그는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하였다.

송익필형제도 조헌의병장의 머리맡에 엎드려 으흑으흑 흐느껴울었다.

《나리님, 저의 형제들과 하신 약속은 어디에 두시고 떠나시려하오이까. 가지 마옵시오, 가지 마옵시오. 나리님께서 떠나시면 우리 형제는 누구를 믿고 왜놈과 싸우리까, 으흑으흑…》

그 약속이란 《너희들은 왜적과의 싸움에서 큰공을 세워라. 그러면 임금께 아뢰여 너희들을 노비신분에서 해방시켜주마.》한것을 말하는것이다.

조헌의병장은 그들형제의 호곡소리를 듣지 못하고 마지막숨을 쉬고있었다.

그의 넋은 몸을 떠나 훨훨 날아가고있었다. 강을 넘고 산야를 지나 멀고먼 북쪽하늘가 압록강기슭 임금이 있는 의주로 날아갔다.

드디여 그의 넋, 그의 혼령은 임금앞에 부복하여 금산싸움의 승리를 아뢰였다. 선조왕은 대단히 기뻐하며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켜주었다.

《공이야말로 나라의 충신이로다!》

《충신은 백성이옵니다. 평시에 헐벗고 굶주리던 우리 백성들이 나라를 위해 한목숨 다 바쳐 이 나라의 진토가 되였사옵니다. 짐승처럼 취급당하던 노비로서 더는 그대로 살수 없어 도망갔던 송익필형제와 같은 사람들도 제몸을 돌보지 않고 왜적과 싸웠으니 어찌 백성들을 잘 돌봐주지 않으리까. 그들의 노예멍에를 벗겨주… 온 나라 백성들을 사랑해주시옵소서.

물은 터놓고 이끌어주는데로 흐르고 민심은 인덕을 따라 흐르나이다. 상감마마께서 인덕을 베푸시면 그 인덕은 백성들을 키우고 백성들은 군사를 낳고 땅을 낳고 땅이 재물을 낳고 재물이 백성들에게 부귀영화를 주는데 어찌 백성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왜적을 치지 않으리까. 인덕나라 군사는 하나가 적 열을 당하고 천을 깨쳐서 무적이오이다. 이것이 곧 <인자무적>이옵니다. 상감마마이시여, 인덕왕이 되시옵소서, 무적강국임금이 되시옵소서. 도요또미 히데요시 따위가 다 무엇이오리까. 왜오랑캐들이 다 무엇이오리까!》

조헌이 생전에 하고싶던 말을 그의 넋이, 그의 혼령이 임금께 곡진히 아뢰여드리였다. 하지만 그 간절한 소원, 그가 그토록 바라던 《인자무적》의 리상은 당대 봉건사회에서는 천년이 가도 실현될수 없다는것을 그는 알수 없었다.

그렇다.

더우기 덕인지재용이라는 다섯가지의 글자로 함축되는 옛 동방철학의 이 리치는 참으로 오묘하며 현대생활에서도 참고할 가치가 있는것이지만 당시에는 꿈속의 채색무지개와 같은것이였다.

조헌의병장은 고요히 누워있었다. 그의 얼굴은 온갖 시름을 다 가신듯 밝게 빛났다. 안세희가, 정암수가, 송익필형제가 그를 피타게 부르고 불렀건만 그의 몸에서 떠나간 넋은, 그 혼은 돌아올줄 몰랐다.

그는 영원히 눈을 감았다.

그의 입귀로 한줄기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다박수염을 타고 한방울한방울 소리없이 떨어져내리는 피방울은 대지를 적시였다. 그것은 마치 그의 넋이 임금께 아뢰인것을 땅에 새기는것과 같이, 죽지 않고 살아난다면 임금께 올리고싶다던 상소문을 대지에 수놓는것과 같이 생각되여 안세희와 정암수는 또다시 뜨거운 눈물을 삼키였다.

대궐주추돌을 피로 물들이던 그때처럼, 그때처럼!

 

력사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씌여져 후세에 전해온다.

《… 금산전투에서 적들은 막대한 유생력량을 잃었다. 놈들은 시체만도 3일동안이나 실어날랐다. 의병들의 맹렬한 공격앞에 겁을 먹은 적들은 금산에서 도망쳤다. 무주와 옥천의 적도 꽁무니를 뺐다.》

력사기록에는 또 다음과 같은 글이 기록되여있다.

《비변사에서 제의하였다. <봉상시 참정 조헌은 힘껏 싸우다가 희생되였습니다. 중출신의병장 령규도 적과 싸우다가 죽었습니다. 다 표창으로 벼슬을 더 줄것입니다.>

임금이 그 의견을 따랐다.

조헌에게는 가선대부 리조참판(종2품)겸 경연 동지(종2품), 의금부 동지(종2품), 춘추관 동지의 벼슬을 추중하고 중출신 령규에게는 중추부 동지벼슬을 주었다.》

후날(1602년) 충청도와 전라도 선비들은 조헌이 전사한 곳에 비를 세워 그를 영원히 잊지 않게 하였으며 조헌의 제자들은 700의사들의 합장묘를 쌓아올리고 《700의총》(700명의 의로운 사람들의 무덤)이라고 이름지어 후세에 전해지도록 하였다. 봉건정부에서는 《700의총》의 이름을 따서 그곳을 의총리라 고쳐 제정하였다. 오늘도 금산군에는 의총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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