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 회)

제 1 장

첫 상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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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밖이 훤해지기 시작하자 신형일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활짝 열었다.

공장에 온 그날부터 그는 현장에서 떠나지 않고 계획했던 건설을 다그쳤고 밤은 또 밤대로 공장의 연혁사를 연구했다.

아직 차학선을 만나지 못한것이 가슴에 걸렸다.

지배인한테서 차학선에 대한 말을 듣고서도 며칠을 지체하니 그앞에 죄를 짓는것같았다. 오늘은 어떻게든 그를 만나야 했다.

신형일은 예견했던대로 당위원회 부비서와 근로단체를 책임진 일군들을 만나 작업장의 분위기를 돋구기 위한 사업들을 포치했다. 현장에 전개할 속보판을 더 확대하는 문제를 강조하고 방송선전차운영에서 제기되는 문제에 대한 조직사업을 하고나니 어느새 아홉시가 가까와왔다. 신형일은 지배인과 만나 저녁에 있을 협의회시간을 약속하고는 사택마을로 향했다.

사택마을은 공장정문을 나서자부터 인차 시작되였다. 차학선이 지금 무엇을 하고있을가 하는 궁금증을 안고 발걸음을 빨리하던 신형일은 눈에 걸려드는 살림집들이 보이자 점차 걸음이 떠졌다. 담장도 없는 집에서 중년의 어떤 녀인이 마당에 걸어놓은 돌가마에서 무엇인가 끓이고있었다. 다른 집에 얹혀있다나니 마당에서 때식을 끓이는 모양이였다.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몰라 두리번거리던 신형일은 그앞으로 다가가 차로인의 집을 물었다.

《저쪽길로 들어가면 되지요. 아니, 그런데 그 령감이 지금 집에 있을리 없겠는데요.》

《없다구? 그럼?!》

《오늘은 일요일이니 동네아이들과 강에 나갔겠지요.》

《맞아, 오빠도 따라갔는걸 뭐.》 곁에 있던 머리꽁진 소녀애가 강쪽으로 손짓하며 종알거렸다.

그렇겠지, 그에게 무슨 할 일이 있으랴. 령감들이 집에 들어오면 제일먼저 마련하는것이 낚시대라는데 코앞에 있는 강에서 그 재미도 안보면 허구많은 날 무엇을 하랴 하는 생각을 하며 강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봄을 맞아 파릇파릇 내돋친 새파란 잔디를 얹은 강뚝이 어서 오라 손짓하는듯했다. 숲속의 새무리가 다 몰려온듯 재깔거리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와지자 신형일의 마음은 자연히 흥떴다.

늙은이와 애들은 한마음이라는데 차로인이 동네애들속에서 왕노릇이라도 하는가싶은 생각이 들자 벌써부터 가슴속의 웃음주머니가 흔들렸다.

반달음으로 동뚝우에 올라서던 신형일은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다.

강기슭에 바싹 갖다댄 쪽배가 기우뚱거리고있는데 강마른 로인이 그 쪽배우에서 영차영차 조무래기들을 통솔하고있는게 아닌가. 그들의 힘을 깡그리 뽑아내는건 쪽배에서 거의다 나온 그물구럭이다.

신형일은 전후사연을 알아볼 사이도 없이 주루루 동뚝을 내려갔다. 그물을 움켜잡고보니 비린내가 물컥 나는 물풀이였다.

신형일의 힘이 합해지니 그물구럭은 어렵지 않게 동뚝우까지 끌리워졌다. 로인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자 아이들은 만세라도 부를듯 환성을 올렸다.

《아이구나, 고맙수다. 저런, 옷에 물방울이 다 튕겼군.》

미안해하며 혀를 차는 로인은 70은 훨씬 넘은것같은데도 얼굴엔 강기가 있어보였다.

《이건 뭘하자구요, 짐승먹이인가요?》 신형일은 로인곁에 앉으며 허물없이 물었다. 혹시 이 로인이 차학선동지가 아닌지.

《먹이긴 먹이래도 보통먹이가 아니지요. 공장에 다니는 우리 아들이 연구하는 혼합먹이로 될거지요. 우리 아들이 발효제먹이를 연구하거던요.》

자랑기가 다분한 말속에 섞인 기술용어를 듣는 순간 신형일은 자기의 추측이 맞다는 생각을 하며 넌지시 물었다.

《혹시 차학선동지가 아닌가요?》

대뜸 로인의 눈이 둥그래졌다.

《내가 차학선이우다. 그런데 뉘시오?》

《반갑습니다. 제 여기 오리공장에 온 당비서입니다.》

신형일은 앉은걸음으로 다가갔다.

《원 이런, 당비서동지가 새로 오셨다더니…》

로인이 내뻗쳤던 다리를 오무리며 면구하게 중얼거리였다.

《말씀을 낮추십시오. 자, 한대 태우십시오.》 신형일은 담배 한대를 꺼내 그에게 권하고는 불도 붙여주었다.

《집에 들어오신지 몇년이 됩니까?》

차학선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올해가 11년째입니다.》

차로인이 담배연기를 날리면서 침울한 눈길을 강물에 던졌다.

《지금 건강상태는 어떻습니까?》

신형일은 관심을 가지고 또 물었다.

《건강이요?》

차로인이 고개를 젖히며 허 하고 김빠진 소리를 냈다.

《집에 들어온 늙은이가 건강하면 어떻고 앓으면 어떻겠소. 이젠 다산 인생인데. 나한테서 건강이라는 말은 수렁창의 새 신처럼 전혀 어울리지 않지요.》

당장이라도 눈물을 보일것같이 목메인 소리를 터치는 로인을 보니 아버지가 당부하던 인사말은 목안으로 삼켜지고말았다.

그렇다고 자기마저 실망할수는 없었다.

《왜 그러십니까. 건강만 허락된다면 아직 얼마든지 일할수 있지요. 공장은 지금 현대화를 하면서 새로운 일을 얼마나 많이 하고있습니까. 그전날 로인님이 하던 일은 다 우리에게 귀중한 경험으로 되고있습니다. 지금 공장에 있는 두단종도 로인님의 창조품이 아닙니까. 처음 이름이 붙기 전에는 기사장오리라고 했다면서요?》

신형일은 입가에 미소를 피워올리며 차로인을 다정히 바라보았다.

《예?!》

로인이 담배를 피운다는것도 잊은듯 멍청히 마주 바라보았다. 살폭이 빠진 창백한 얼굴이 점차 달아오르더니 이어 눈자위가 푸들푸들 떨려났다.

《허허, 이 고목에 젊음을 되살려주는구려.》

핑 눈물이 어리는 눈굽을 닦으며 그가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로인님의 아들문제 말입니다. 좀더 구체적인 사연을 알고싶어서 이렇게 왔습니다.》

《예, 우리 아들 말이지요? 그 일은 나와 <두단령감>  둘사이에 있은 일이여서 다른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차로인은 담배연기를 푸 하고 내불면서 다시 이야기에 줄을 달았다.

《<두단령감>은 한해두해 나이가 먹으면서도 늘 공장에서 살았지요. 80이 되는 때에도 여전히 공장으로 나왔지요. 그해 어버이수령님께서 보내주신 80돐 생일상을 받아안은 지배인동지는 내 손을 잡고 이런 말을 하더군요.

이제는 내가 지배인을 하던 때와는 다르다, 오리를 한마리 길러도 과학적으로 길러내고 부단히 새것을 연구하고 탐구해야 하는 때다, 나야말로 그저 열성 하나뿐이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 기사장같은 자식이 한명이라도 있다면 착실한 주인이 되도록 이끌어주고싶은데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전연에서 군복을 입고 총을 잡지 않았는가, 난 손자녀석에게라도 내 일을 물려주고싶은 마음이다, 마침 우리 아들한테 자식이 둘 있는데 둘째녀석에게 마음이 더 간다면서 우리 둘이 힘을 합쳐서 그녀석을 키워보자고 하더구만요. 지배인은 이런 말을 전연의 아들에게도 전했답니다. 그런데 이태도 안되여 지배인동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지요. 엎치고덮치는 격으로 하나밖에 없던 아들이 군사복무중에 전사했다우. 그러니 지배인동지가 한 그 모든 말이 내 혼자의 어깨에 지워지지 않았겠소. 나는 더 지체하지 않고 그 지배인의 며느리를 만나러 떠났지요.》

갑자기 차로인은 입을 다물고 시선을 떨구더니 묵은 잔디풀속에 눌리운 새싹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갈구리같은 손으로 조심조심 검불을 헤쳐주었다. 신기하게도 묵은 검불속에서 잎끝이 꼬부라진 연두색싹이 뾰조름히 솟아났다. 봄기운을 받으면 싱싱하게 자랄 새싹이였다. 쪼프린 로인의 눈가에 하많은 회억이 실린듯 바르르 떨렸다.

반백이 넘은 머리칼이 강바람에 하늘하늘 춤을 추었다.

이윽고 차로인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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