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 회)

제 1 장

첫 상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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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두 아이의 어머니라지만 아직은 처녀처럼 아릿다운 녀인앞에 서니 학선의 입은 갑자기 얼어붙은것같았다. 무슨 말이든 해야겠는데 도무지 입이 열려지지 않았다. 학선은 잠자는 애의 머리맡에 앉아서 이윽토록 내려다보기만 했다. 쌕쌕거리며 단잠에 든 아이의 모습은 꼭 천사처럼 여겨졌다. 새말간 얼굴에 꼭꼭 박힌 입이며 코가 어찌나 예쁜지 꼭 잡아주고싶었다. 학선은 이미 두 딸을 키워보았지만 이렇게 애틋한 정을 느껴본적이 없었다. 갑자기 애가 눈을 반짝 떴다. 새별같은 눈동자를 보니 환성이 나갈 정도였다. 새까맣게 익은 머루알에 비길수 있을는지. 처음 보는 학선인데도 애는 무랍없이 덥석덥석 안겼고 잘 따랐다. 그것을 보며 아기엄마가 소리없이 눈물을 찍어냈다.

이미 시아버지와 남편의 뜻대로 둘째를 두단땅에 보낼 결심을 한 녀인이였지만 떠날 시각이 되자 마음을 진정하지 못했다. 끝내 애를 보낼 준비를 다 해놓고는 편지 한장을 남기고 그앞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편지는 간단했다.

《서슴없이 우리 천호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우리 천호도 최천호가 아니라 차천호입니다. 그러나 그애는 여전히 어버이수령님께서 아시는 <두단령감>의 친혈육입니다. 두단땅의 진정한 후손으로, 주인으로 자라리라 믿습니다. 행복을 축복합니다.》

편지는 겉으로 보기엔 천연스러운것같았다. 하지만 한쪽끝에 찍힌 무슨 흔적을 본 학선은 가슴이 뜨끔했다. 그것은 분명 눈물자욱이였다. 그는 편지를 든채 밖으로 뛰쳐나와 둘러보았다. 그러나 그 어느곳에도 녀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목청껏 천호 엄마를 불렀다.

자식 떼고 돌아서는 어머니 발자국마다 피가 고인다고 정말로 자기의 가슴에서 뚝뚝 피가 흘러내리는것같아서 도무지 진정할수가 없었다. 내 가슴이 이럴진대 친엄마심정이야 오죽하랴. 이제까지 동행해준 부대의 정치위원의 권고가 없었다면 학선은 아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을것이였다.

그 녀인이 벌써 남편의 뒤를 이어 군복을 입고 군무중에 있다는 말을 들으며 학선은 강심을 먹고 아이를 안았다. 눈물을 머금고 결심을 다졌다. 믿으시오. 내 이 애를 보란듯이 키우겠소.

두단땅 단층집에 들어선 날부터 아이는 무탈하게 자랐다.

녀석이 제법이였다. 무엇보다 뛰여나게 공부를 잘했다. 그렇게 소학교와 중학교(당시)를 마치고 군사복무까지 하고 돌아왔을 때는 어깨가 버그러지고 름름한 청년틀이 잡혀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공장에서 일을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은 때부터 그애에게 눈에 든 처녀가 생겼다오. 가슴이 흐뭇해서 내앞으로 처녀를 데려올 때만 기다렸지요. 그런데 글쎄 처녀쪽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점점 그애의 기색이 좋지 않더군요. 내 귀에도 처녀가 도리를 젓는다느니 그쪽 부모들이 뭐라고 한다느니 하는 소리까지 들려왔지요. 알고보니 이 고장이 시외라고 타발하는 모양입디다.

사실 그 문제는 우리 천호가 처녀를 잘 설복하기만 하면 풀릴 일인데도 아마 싫으면 그만두라고 돌아선 모양입디다. 시내에 나갔던 그날 집에도 안들어오고 공장에도 없어서 난 속이 새까맣게 탔지요.》

신형일은 눈길을 떨구었다. 공장으로 오던 첫날에 목격한 그 청년이 바로 이 로인의 아들이였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갑자기 신형일은 갈증만난 사람처럼 속이 타들어왔다. 다른 원인이 아니라 청년이 사는 곳이 시외여서 처녀의 마음이 돌아섰다니 그것이 무엇보다 가슴이 아팠다. 게다가 공장에서 일하는건 마음에 있으면서도 걸어다니는것이 힘들어 그만두겠다는 소리를 서슴없이 내뱉던 통일거리 녀인들의 불평까지 겹쳐들며 신형일의 가슴을 사정없이 허벼냈다. 차로인의 말은 흘러가는 물처럼 그칠줄 모르고 이어졌다.

《아무렴 할아버지 유언을 알려주고 자기가 자란 이야기를 한다면 그 처녀가 마다하겠소. 그래서 내가 친아버지가 아니란걸 말해주기로 결심했다우. 가슴이 아프지만 그애가 알 때도 되였고 또 그애의 행복을 위한 일인데 무엇을 마다하겠소. 그날 저녁에 호동에 나갈 차비를 하는 아들을 불러앉혔지요. 그리고는 더 바재이지도 않고 사실 난 너의 친아버지가 아니다 하고 말을 꺼내질 않았겠소. 그랬더니 그녀석이 허… 아버지, 전 이미 그 사실을 알고있습니다 하질 않겠습니까. 허참.》

차로인은 어이가 없는지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그러면서 제 어머니말을 합디다. 군사복무를 할 때 어머니가 부대에 찾아왔댔다면서요. 그때 그애 친어머니가 할아버지며 친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했지만 아마도 그 애를 맡아서 키운 내 얘기를 제일 많이 했던가 보우다. 그날 아들은 자기에게 기울인 그 모든 정을 잊지 못한다면서 오히려 나를 위로하려들더군요. 여기가 시외라고 타발하는 그런 처녀는 필요없다구요. 그러나 난 마음이 불안하다우. 이 처녀는 그런 타발을 했지만 다른 처녀는 이 아비의 흠을 밝히려들지 않겠는가 하고 말이우다. 이렇게 이 처녀, 저 처녀하다가 다 놓치지 않을가 하는 걱정이 늘어만갔지요. 지금도 괜히 앞자락을 넓히며 맡아 안아 똑똑한 애의 앞길을 가로막는것같아 걱정입니다.》

차로인이 앉은 자리가 물러앉게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수그리였다. 정수리에서 몇오리의 흰머리카락이 검불처럼 내불리였다.

《그렇게 됐구만요.》

침울한 눈길로 강가에 시선을 준 차로인에게 다른 말이 나가지 않았다.

박순배지배인이 들려준 해임된 말까지 생각해보니 차로인의 일은 간단하게 풀릴 일이 아니였다.

그러나 물러앉기에는 너무나 마음을 끌어잡는 한 인간의 운명문제였다. 신형일은 나약해지려는 자신에게 힘을 주듯 로인에게도 힘을 주었다.

《로인님, 너무 맥을 놓지 마십시오. 아들문제도 그렇고, 오리를 들여온 문제도 얼마나 좋습니까. 정말 감동적인걸요. 시작이 좋은건 결말이 좋은 법이랍니다. 자, 이젠 이걸 날라가야지요. 갑시다.》

신형일은 차로인이 펄쩍 뛰며 만류했지만 그물구럭을 닁큼 들어 손달구지에 올려놓았다. 어른들이 이야기를 하는 사이 동뚝우의 잔디밭에서 뒹굴던 애들이 우르르 모여와서 손달구지를 승벽으로 밀고당기고 하며 동뚝아래로 내려왔다.

로인의 집은 동뚝아래에 있는 다른 집과 별반 차이나지 않는 사택이였다. 크지 않은 마당 한옆엔 비닐박막을 덮어놓은 짐들이 쌓여있었는데 집을 건설하고있는 옆집의 짐이라고 했다. 그러니 차로인네 집은 개건대상에 들어있지 않은 모양이였다. 그 짐들때문에 마당엔 아이들이 들어설 자리도 없었다.

《여기서 손을 씻고 들어가십시다. 어서…》

차로인이 마당 한가운데 있는 수도를 가리켰다.

대충 손을 씻고난 신형일은 집구경이라도 할셈으로 문을 열고 집안을 기웃했다. 방안 웃목에도 둥글둥글한 마대짐들이 웅기중기한데 그것 역시 다른 집의 짐이라고 했다. 방안에는 누구도 없는데 어디선가에서 바스락바스락소리가 나고있었다.

신형일은 의아해서 두리번거렸다.

《여기서 나는 소립니다. 》 차로인이 가릴것도 없다는듯 웃방을 가리켰다.

《여기에 오리들이 있습니다.》

《오리라구요?》

《내 이제 우리 아들을 뭘로 돕겠나요. 그전에 다 결속하지 못한걸 아들이 할수 있게 받침해줄 생각으로… 허.》

차로인이 어줍게 웃으며 문을 열어보였다.

신형일은 일시에 새끼오리들이 까만 눈알을 반짝거리며 걀걀거리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얼추 보아도 그 수는 수십마리를 헤아리는것같았다.

분명 살림방이 분명한데 다른 가구란 없고 벽엔 선반들이 주런했다.

선반우에는 상자속에 갇힌 중오리가 있었는데 목마다에 무슨 패쪽들이 있었다.

《아니, 저 오리들이 다 연구사업을 위해서 기르는거란 말씀인가요?》

차로인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그러나 신형일은 웃지 못했다. 가슴속엔 뜨거운 불뭉치가 자꾸만 솟구쳐올라왔다.

《이걸 기사장동무가 알고있는가요?》

《기사장이요?》 무슨 소리냐는듯 로인의 눈이 덩실해지더니 이어 손사래를 쳤다.

《기사장이 무슨 집에 들어온 늙은 령감이 하는걸 알려고 하겠나요. 그렇지 않아도 할 일이 많은 사람이…》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것같은데도 그 목소리엔 뼈가 있는듯 했다.

누구의 말이든 무심하지 않는 신형일의 머리속에 차로인의 이 말이 스쳐지나가지 않았다.

문득 첫날 기사장에게 이 로인에 대해서 물었을 때 성쌓고 남은 돌처럼 여기던 그의 말이 생각히웠다. 차로인의 일을 두고 자기 일처럼 안타까와하던 지배인과는 판이한 대답이였다.

한가득 들어찬 오리들을 넋없이 바라보는 신형일의 가슴엔 눈물이 고여올랐다.

《살림방을 오리들이 차지했으니 비좁지 않습니까?》

《수의방역규정을 지키자니 함부로 내놓지도 못하겠고 또 안할수도 없어서, 허…》

대수롭지 않게 하는 로인의 말이였지만 신형일의 가슴을 여지없이 울려주었다.

해임되여 들어온 로인인지라 가슴속엔 재만 깔려있는줄 알았는데 로인은 확고한 목표를 가지고있다. 소일거리삼아 강가에 나가 시간을 보내는줄 알았는데 로인은 계획성있게 연구사업을 하고있었다.

신형일은 뿌잇해지는 눈을 돌리고 마당에 쌓인 짐을 이윽토록 바라보았다. 그는 이 순간 공장에 온 첫날 지배인과 살림집건설장을 돌아보면서 느꼈던 감정을 다시금 체험했다. 살림집건설은 단 하루도 중단하지 말고 추진해야 한다는 생각이였다. 바로 이런 사람한테 새 집이 차례지지 않는 현대화라면 그 현대화가 무슨 의의가 있으랴.

관찰일지에 무엇인가를 적고있는 로인을 보니 점점 더 가슴이 뜨거워났다. 이런 사람은 아직도 얼마든지 일을 할수 있을뿐 아니라 정열도 젊은이들 못지 않다. 정신적으로 왕성한 이런 사람을 찾아내기도 힘든데 찾아낸 사람이야 왜 관심하지 않겠는가. 어떻게든 이 로인의 문제를 풀어야 한다. 로인의 말을 들어보니 그렇게 엄중하게 취급되지 않아도 될 일인것같았다. 이 로인에게 맞춤한 일감을 주기 위해서도 또 아들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자고 해도 이 문제는 꼭 풀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신형일은 로인과 헤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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