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7 회)
제 3 장
25
(1)
오전내껏 열간압연직장쪽으로 뻗어들어온 은백색가스관을 따라 검사작업을 하던 김형규는 박사원생들에게 내려가 허리를 펴라고 지시하였다. 휴식을 목마르게 기다렸는지 벽돌색갈의 유압식기중기차가 늘인 바구니를 어느새 타고내려가 풀밭으로 달려가는 박사원생들이다.
형규는 뻣뻣해진 경추를 두드리며 신정에게 말하였다.
《이만하면 가열로가스류입체계에서는 다른게 없을것같습니다. 탄복할 정도로 설비관리를 잘했습니다.》
《고난의 행군때 끼니는 번지여도 설비관리만은 놓치지 않은 김철로동계급이랍니다.》
신정이 따라주는 단물을 한모금 마시고 하던 일을 마저 하려는데 2강철직장쪽에서 부기사장차가 불쑥 나타나는것이 눈에 들어왔다. 큰 도로에 올라선 승용차는 그들쪽으로 달려오다가 웬일인지 급정거를 하며 멎어서는것이였다. 차앞으로는 손수레채를 잡은 채호명이 마주오고있었다. 그들은 우에 사람들이 있다는것을 알수 없었고 대신 김형규네들은 아래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거북한대로 목격하게 되였다.
우람한 몸을 궁싯거리며 정구철이 차에서 내리였는데 채호명이를 보는 눈길이 그닥 곰살궂어보이지 않는다.
《어딜 가는 길이요?》
채호명이 달구지바퀴를 달아 큼직하게 만든 손수레를 들여세운다. 손수레에는 벌건 녹이 쓴 롤강그가 실려있었다.
《가열로를 다 쌓게 되였는데 롤강그가 안심찮구만. 이게 수명을 다한건데 애를 먹일게 분명하거던. 한데 무슨 돈이 있어 사오고 어느 하가에 련관단위에서 만들어주길 기다리겠소. 그래 내 재생해쓰면 안될가 해서 공무직장에 가는 길이요.》
호명을 흘깃 치떠보며 인상을 찌프리는 정구철이였다. 그는 바투 다가와 채를 내려 손수레에 실린것을 훑어보더니 본래대로 세워놓는다.
《롤강그를 재생한다- 음- 좋은 궁리를 했구만. 그런데 채아바이, 이런 일은 보고나 토론없이 내키는대루 해두 일없소?》
《거야 결과를 봐야 하지 않우. 그렇지 않아도 내 되는가 안되는가 한번 교정을 해보구 결과가 좋으면 절차대루 하자구 생각했댔소. 가열로를 쌓은 다음에야 련동시험이나 하고 생산에 제창 들어가야겠는데 강편을 쭉쭉 뽑아내자문 뒤공정걱정을 미리 하는게 좋지.》
정구철이 코방귀를 뀌였다. 그 소리가 어찌나 요란했던지 형규네들에게까지 들려올 정도였다.
《가마두 채 만들지 못했는데 밥을 벌써 퍼먹을 잡도리군. 채아바이, 그게 가당치 않은 상상이 아니요?》
《상상은 무슨. 리치를 믿고 리치를 만드는게 기술자인데 그만한 믿음이 없이 내 고온공기연소기술도입에 왜 몸을 잠그었겠소.》
《하, 이 아바이 봐라. 정말 큰일나겠군. 이 정구철이 그럼 보수주의자란 말이요?》
《이마에 써붙여야 그런 사람인가? 부기사장 지금 일하는거 보문 보수주의자가 아니라 그보다 더한 사람이라고 해두 지나친 표현이 아니지.》
《채아바이, 내 하나 물어두 되겠소?》
어지간히 침묵이 흐른 뒤에 입을 여는 정구철이다.
《그럽소.》
《아바인 대체 어데 사람이요?》
《?》
《언제부터 직분을 뛰여넘어 넓은 안목을 가지게 되였소?》
채호명이 말뜻을 짐작하고 입을 열려는데 구철이 손으로 허공을 내리그으며 밀막는다.
《가만있소. 내 모두 설명하지요. 내 동생이 구형축열체를 개발하고나서 고온공기연소기술을 주제로 짬짬이 학위론문을 쓰다가 사망했소. 그게 맘에 내려가지 않아 이번 기회에 좀 어째볼가 했댔는데 다들 반대하길래 그러면 론문이야 쓸수 있지 않는가 하고 생각했댔소. 근데 얼마전 어떤 기회에 형규강좌장이 구형체에 의한 기술개발력사를 듣고싶다길래 내 다 말해주었수다.
다음날아침에 형규강좌장이 말합데. 구형축열체는 현장도입경험이 있기때문에 필경 우점이 있을테니까 론의에 붙여보자구 말이요. 정철이네들의 이야기까지 듣고나니까 더하더라오.
채아바이, 새 기술도입을 총책임진 형규강좌장이 다 이렇게 감심해서 구형체를 관심하는데 아바인 어째 그러오?
채아바이 정말 김철사람 옳소? 우리 정철이 생각해서라도 아니, 우리 아버지와의 우정을 봐서라도 이런 일에야 발벗고나서는게 아바이립장이 아닌가요? 죽은 사람과의 정은 하루에두 천리씩 떨어진다는게 이런게요? 섭섭하오, 호명아바이.》
채호명이 웃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려다가 원주필이 떨어지는 바람에 허리를 구부린다. 원주필을 주어들고 꽂아넣으려는데 손이 계속 떨려 몇번만에야 바른 손질을 한다.
《할 말 다했소?》
《또 있수다.》
《마자 합소.》
정구철의 우둘투둘한 얼굴에 울기가 떠오른다.
《채아바인 요새 돌아가는 소문을 알고있소? 형규강좌장네 일에 상당히 극성이다, 그들의 주장이라면 덮어놓고 지지하고본다, 공기식에 늦바람이 들어 공명심을 부린다, 현장지휘부를 진짜로 움직이는 사람은 형규강좌장이 아니라 채호명아바이다, 이런 소문 말이요.
내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했더니 구형체를 놓구 취하는 태도를 보구 모두 깨달았소. 형규동무네들이 내려온 담부터 오늘까지 전 과정을 돌이켜보고 알게 되였소. 현장지휘부의 분위기가 자주 흐려지구 형규강좌장네가 아닌밤중에 뿔빠진 주장을 내놓으며 복잡성을 조성하는데 원인이 있단 말이요.》
《…》
《내 원래 우리 아버지와 채아바이 우정을 생각해서 여태껏 이런저런 고약한 소리를 듣거나 눈에 거슬리는 일이 있어두 못본체, 못들은체하며 아바이뒤를 알게 모르게 봐주었는데 난 이젠 그런 일에 일일이 신경쓸내기 맥이 빠졌소.
이런 말을 꺼내기가 참 힘드오만 채아바이, 몸두 불편하구 년세두 높은데 새 기술도입이나 끝내놓고 그만 집에 들어가 쉬는게 어떻소. 고문대우는 해줄테니까요. 들어가 쉬다가 심심하문 나와서 기업소바람일랑 쐬면서 일손 거들어주면 되지 않소.》
《…》
《내 말대로 해줍소. 다 호명아바일 위해서 하는 소리요.》
정구철이 손수레에 대고 장지손가락을 뻗친다.
《그럭하구 저 롤강그는 직장에 도로 가져다놓소. 아바이가 이런 걱정 안해도 되니까.》
승용차가 자리를 뜨자 채호명이 연석우에 벙어리장갑을 깔고 엉치를 붙인다.
담배 한대를 태우고 일어서는데 보위대원들이 나타난다. 부기사장이 채아바이가 힘들어하므로 가서 손수레를 인계받아 열간압연직장에 끌어다놓으라고 지시했다는것이였다.
《놔두지 못할가.》
채호명이 다짜고짜 손수레채를 잡으려는 보위대원들을 엄하게 다불린다.
《내겐 공무까지 갈 힘이 아직 있다구 가서 말하라구.》
입을 벌린채 벙해 서있는 그들에게서 수레채를 앗아든 호명은 걸음을 떼며 이런 외마디를 내뱉는다.
《에이, 이 덜된.》
채호명이 손수레를 끌고 자리를 뜨자 둘은 약속이나 한듯이 일에 손을 붙이였다.
김형규는 검사작업을 마무리하고 내려와 기중기차를 보내고나서 손목시계를 얼핏 들여다보았다. 12시가 지났으므로 처녀는 식사하러 합숙에 들어가야 했다.
《얘기하고싶은것이 있어 그러는데 잠간 시간을 낼수 있겠습니까?》
신정은 형규의 심중한 기색을 여겨보더니 자전거를 바로세워 고정시키였다.
김형규는 선뜻 터놓기가 저어되여 숙소로 가는 박사원생들을 물끄러미 지켜보기만 하였다. 보다못해 신정이 한마디 하여 그의 말문을 당기였다.
《부기사장동지가 형규선생이름을 거드는것이 불쾌하였던 모양이지요?》
《아니지요. 난 충분히 리해합니다. 호명아바이가 좀 안되긴 했지만. 구철부기사장이야 얼마든지 불만스러울수 있지요. 실은 내 신정선생의 속을 몰라 이러질 않습니까. 처음에 나는 신정선생이 자기네의 설계도면을 설명할 때 벌써 구형체가 벌집형보다 못하다는것을 간파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왜 구형체론의를 하자고 결심했는가.》
드디여 열린 문으로 신정이 듣고싶었던 말들이 거침없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리유를 설명하고난 형규는 그답지 않게 흥분하여 빠른 말씨로 계속하였다.
《한데 신정선생은 참대 한가지지요. 신정선생은 오래동안 구형체를 연구해왔으니 조금이라도 그 우점에 대해 알지 않겠습니까. 난 참 리해하기가 힘들군요.》
《좋습니다.》
신정은 자전거손잡이에 얹었던 한손을 내려 가슴노리의 단추를 가볍게 그러쥐였다. 처녀의 대답은 조리있고 침착하였다.
《소화기가 나쁜 사람에게 위산조제기능을 높여준다고 하면서 벽을 파렬시킬수 있는 소화약을 만들어 먹이면 위가 위험합니다. 마찬가지로 구형체는 가열시간이 굼뜬것이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이걸 퇴치하기 위하여 로온도를 배로 올렸기때문에 로가 폭발하였습니다. 난 이걸 과학적으로 증명할수 있습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부디 설명하지 않은것은 우리것보다 우월한 선생네 기술이 등장했기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엔…》
신정은 불현듯 말끝을 흐리더니 아예 입을 봉해버리였다.
《놀랍습니다.》
김형규는 유감스러운 기색을 지으며 처녀를 칭원하였다.
《난 선생이 구형체론의에 쌍수는 들지 않아도 반대는 하지 않을거라고 확신하고있었습니다. 한데 생각외로 선생은 구형체에 정이 전혀 없는것같구만요. 신정선생, 론리와 공식, 수자와 계산이 과학자의 전모가 아니지요. 열공학을 전문하는 우리들이야 이런것에 앞서 우선 인간이 되여야 강편을 달굴수 있지 않습니까.
선생의 증명은 완전한것이 못됩니다. 금속연구소기술의 주창자는 정철실장입니다. 때문에 나는 구형체론의를 다시 해봐야겠습니다.》
순간 신정의 눈에 이상한 불이 켜졌다가 사그라지였다. 처녀는 눈 한번 깜박하지 않고 태연히 앞만 주시하고있었다. 언젠가 밤길을 함께 걸었을 때 받았던 따뜻한 인상은 그때뿐이라고 단정하였다. 하여 형규는 속으로 거듭 뇌이였다. 찬 녀자, 얼음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