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2 회)
제 1 장
첫 상면
8
(2)
현숙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 청년에게 다가갔다.
《저, 말 좀 물읍시다.》
청년은 고개를 기웃하고 다가오는 현숙을 바라보았다.
《강남군 읍에 가려면 아직 멀었는가요?》
《강남군이요? 나도 거기 가는 길인데 같이 갑시다.》 하더니 현숙의 손에 들린 커다란 트렁크를 보고는 《이건 내가 들지요.》하고 제잡담 잡아들었다. 인정이 있는 청년이였다.
현숙은 사양없이 트렁크를 넘겨주고는 얼굴에 흩어진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다시 물었다.
《저 여긴 뭘하는 곳이예요?》
《오리공장입니다, 두연오리공장.》
《오리공장이요?》
자기의 예상이 벗어나는 바람에 현숙은 입을 딱 벌렸다. 저렇게 깨끗한 건물안에서 오리가 자란단 말인가.
《이 두연오리공장은
《어마나, 그런 곳이였군요.》
현숙은 공장의 건물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정말 일하는 보람이 남다르겠구만요.》
현숙은 진정 부러움을 금할수 없어 자주 걸음을 멈추군 했다.
《참, 평양8경에 대해서야 알겠지요?》
《아이참, 그거야 상식이 아닌가요. <을밀상춘>, 이건 을밀대의 봄맞이라는 뜻이고, <부벽완월>, 이건 부벽루에서의 달맞이고, <보통송객>, 이건 보통문에서 손님바래우기…》
현숙이가 거침없이 줄줄 꼽아나가자 고수머리청년이 중간에서 자르며 불쑥 이렇게 물었다.
《그럼 화촌10경이란 말은 들어보셨는가요?》
청년의 눈이 능청스럽게 웃고있었다.
《화촌10경이요? 그건 무슨 뜻인가요?》
현숙은 눈이 동그래졌다.
《화촌이란 저 만경대와 그 주변지역을 일러오는 말입니다. 우리 고장의 자랑으로 일러오는 화촌10경은 만경봉에 올라 부감할수 있는 주변의 아름다운 열가지 경치를 말하는데 이 화촌10경속에 바로 우리 이 두단도도 들어있지요.》
《그래요? 그 열가지 경치를 좀 꼽아보세요.》
고수머리청년은 잠시 생각을 더듬는듯하더니 하나하나 꼽아나갔다.
《1경 만경상춘, 말하자면 만경대의 봄경치란 뜻입니다. 2경 삼도범월, 이 말은 세 섬의 달풍경이란 뜻인데 그 세 섬이란 우리 두단도, 저기 두루도, 여기서 좀더 가면 있는 문발도 이렇게 꼽힙니다. 3경 봉포타어, 4경 원암적벽, 5경 광포취연…》
그가 열가지 경치를 다 꼽는 동안 현숙은 마치 넋을 뺏긴듯한 황홀경에 잠겨 그의 설명을 들었다.
청년의 말이 다 끝났는데도 한동안 아무말도 안하고 마주보이는 만경봉을 바라보았다. 만경봉에서 바라보이는 경치, 그 경치야말로 평양8경에도 견주지 못할 천하절경으로 생각되였다. 그런데 그 절경속에 여기 두단도도 속한다니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좋을가. 그러고보니 마주선 청년도 무심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저, 언제부터 여기서 일하시는가요?》
현숙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수의축산대학을 졸업하고 여기에 배치된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청년은 얼굴을 붉히며 나직이 대답했다.
《수의축산대학을 졸업하면 여기에 배치되는군요.》
이 순간엔 자기도 대학졸업생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고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부러웠고 수의축산대학이 제일 높아보였다.
《저… 집이 강남에 있는가요?》
현숙은 공장앞 사택마을을 바라보며 또다시 물었다.
《아니, 집은 문덕군인데 강남에 잠간 들릴 일이 있어서요.》
청년의 얼굴이 또다시 붉어졌으나 현숙의 눈에는 그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지도 않았다. 현숙은 살며시 청년을 바라보았다. 굽실하게 넘어간 새까만 반고수머리칼이 훤칠한 이마우에서 반들거리였다.
게다가 대학을 졸업한 수의축산기사. 그는 무거운 트렁크도 부담스레 여기지 않고 성큼성큼 잘도 걸었다. 마음도 무던해보이는 청년이였다.
강남엔 왜 갈가? 혹시 우리 오빠를 알지 않을가?
현숙은 발깃하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숙이며 속삭이듯 물었다.
《저 강남군인민병원 외과과장선생을 모르시나요?》
《조현호과장선생 말인가요?》
청년이 흠칫 놀래며 바라보았다.
《아니, 우리 오빠를 아세요?》
현숙의 목소리가 어방없이 커졌다. 그 순간 현숙은 터질듯한 심장에 두손을 얹고 눈을 반짝이였다.
《아, 동생이구만요. 저, 대학을 졸업했다는…》
눈이 커다래진 청년이 이렇게 말을 맺지 못하자 (우리 오빠를 아누나. 혹시 오빠가 이 청년을 점찍은게 아닐가?)하는 생각이 들자 현숙의 가슴은 소리없이 설레였다.
이윽고 읍에 도착한 그들은 서로 헤여졌다. 아직은 총각, 처녀이기에 누구도 먼저 자기들의 말을 꺼내지 못한다고 생각한 현숙은 읍상점으로 가는 청년에게 깍듯이 인사를 했다. 오빠의 소개가 있어야 서로 통성을 할수 있는 사이니 빨리 오빠를 만나야 했었다.
청년은 들고오던 트렁크를 넘겨주며 다시 만나자고 인사를 했다.
병원에 도착한 현숙은 의사협의회를 하는 오빠를 기다렸다. 마당에는 방금 피기 시작하는 꽃송이우로 나비들이 분주히 날아예고있었다. 현숙은 흰나비 한마리를 지궂게 쫓고있었다. 그 나비가 어느 꽃에 앉을가.
얼마후 의사협의회를 마치고 오빠가 나왔다.
반가운 오누이의 상면후에 오빠가 아쉬운듯 중얼거리였다.
《참, 일두. 사실은 오리공장에 있는 총각인데 그 총각이 지금 없다고 하질 않겠니. 며칠간 자리를 뜬다누나.》
그 말에 현숙은 방실방실 웃기만 했다. 하지만 이런 말은 숨기지 않았다.
《난 꼭 오리공장에 와서 일하겠어요.》
《그래? 네가 벌써 이 고장이 마음에 든게구나. 오리공장엔 총각들이 많다. 그를 만나보고 마음에 안들어도 일없다. 여기서 일하느라면 다른 사람이 또 나타나겠지.》
오빠가 다시 급한 환자가 있다면서 수술장으로 들어갔을 때 현숙은 자기 혼자 읍상점으로 갔다. 한쪽에서는 소금을 사는 녀인들만 흥성거릴뿐 상점에는 남자손님이란 없었다. 상점에 들렸던 청년은 벌써 간 모양이였다. 섭섭은 했으나 마음은 여전히 즐거웠고 입가에는 웃음이 남실거렸다.
어디 갔댔는지 쌍태머리 처녀판매원이 땀을 훔치며 들어섰다.
《순옥이, 보냈니?》
소금을 팔던 녀인이 그에게 눈웃음을 짓는데 그는 대답은 않고 얼른 매대앞에 섰다. 현숙은 그앞에 다가섰다.
《저기 있는 남자넥타이를 보자요.》
쌍태머리처녀가 걸려있는 남자넥타이 몇개를 현숙이 앞에 펼쳐놓았다.
현숙은 이것저것 만져보며 아까 만났던 그 청년을 그려보았다.
《애인에게 줄 기념품을 고르는가보군요.》
처녀의 그 말에 현숙은 반색했다.
《하나 골라주세요.》
그의 눈길은 자색바탕에 흰점이 박힌 넥타이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인지는 몰라도 나같으면 이걸 택하겠어요.》하며 방금전까지 눈길을 주던 넥타이를 짚는것이였다.
어쩌면, 현숙은 자기의 마음을 알아주는 처녀가 고마와 따뜻한 눈인사를 보냈다. 살결이 맑은 처녀는 량볼이 발가우리 달아오른채 앞으로 넘어온 머리태를 매만졌다.
며칠 오빠네집에 있는 동안 현숙은 만경봉에 올랐다. 정말 만경대에서 바라보이는 두단도는 유별났다. 푸르른 강물건너 둥실 떠있는 섬을 보니 오래전부터 살던 고장처럼 친근하게 생각되였다. 현숙은 그 청년이 대준 화촌10경을 다시 외워보며 이 고장에 뿌리내릴 공상속에 잠겼다.
한달후 이 고장으로 이사해오는 어머니와 함께 오빠에게 온 현숙은 혼자 공장에 가서 그 청년을 찾았다. 무턱대고 합숙으로 찾아갔던 현숙은 그만 굳어졌다. 그 고수머리기사는 새 집을 받고 합숙에서 나갔다는게 아닌가. 바로 결혼때문에 애인을 만나러 강남에 갔던 길이라는것을 알게 된 현숙은 어이가 없어 입을 다물수가 없었다.
…
《호호…》
그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보면 지배인동지와 인연이 깊구만요.》
춘영의 그 말에 현숙은 생각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연구사들 숙소꾸리기를 멋있게 했다지요? 계속 본때를 보이라요.》
현숙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 온 당비서나 지배인이 무슨 생각으로 자기에게 책임자의 임무를 맡겼는지는 몰라도 실지 겪고보니
지배인이 새로 온 당비서에게 책임을 지우자고 제기했을가?
아니, 당비서가 직접 추천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자전거를 타고오는 그를 공장으로 오는 지원자로 여겼던 첫 상면때를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는 속에서도 생각이 깊어졌다.
그가 오자 공장의 현대화사업이 눈에 띄게 나타났다. 계획했던 건설이 제 날자에 제껴지는가 하면 새롭게 시작되는 일도 있었다. 그것은 손님칸을 꾸리던 식당건설이 종업원들을 위한 큰 식당으로 꾸려지고있는 일이였다. 살림집에 력량을 동원한것도 그랬다. 남의 집 웃방에서 불편하게 살던 많은 사람들이 얼마 있지 않아 새 집에서 살수 있게 된다. 각 직장들에서는 사기가 나서 살림집을 꾸리는 속에서도 오리사건설에 힘을 넣었다. 이제 멀지 않아 오리들을 들여놓을수 있었다. 이럴 때 기슭에서만 맴돌수 없었다.
《자, 난 빨리 나가야겠다. 이젠 약속대로 안정해야 돼.》
말끄러미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춘영을 보며 조현숙은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