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9 회)
제 2 장
원인없는 우연이란 있을수 없다
9
천호는 은근히 긴장되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번에 품들여 꾸린 기사장방은 기술자들이 모여 협의회를 할수 있게 널직했다. 오늘 기술총화는 천호가 야심을 가지고 참가하는 기술자들의 모임이다. 정상적으로 하는 주간의 기술모임이지만 오늘은 록화물에 대한 견해가 발표될것이다. 이들중에는 대학의 상급생들과 수의축산대학졸업생들이 많았다. 그들을 보니 자기가 준비하고 나선것이 어쩐지 중뿔난것같아 주저되는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윽고 모임이 시작되였다. 한주일간의 기술총화가 구두식으로 간단히 렬거되였다. 부기사장이 렬거하는 동안 기사장은 무엇인가 열심히 보고 쓰군 했다. 차천호는 기사장에게 자꾸 눈길이 가는것을 어쩔수가 없었다. 천호는 아직까지 기사장과 흉금을 털어놓은적이 없었다. 무엇때문인지 기사장은 자기와 말도 잘하려고 하지 않는것같았다. 대상도 안된다는걸가?! 그럴지도 모르지.
책임기사로 일할 때 기사장은 그때 벌써 두각을 나타냈다고 했다. 그런 말을 들은 다음부터는 그앞에 서면 괜히 주눅이 들기도 해서 자기가 준비한 자료를 다시 펼쳐보기도 했다.
어느사이 주간의 기술적인 문제가 다 렬거되자 기사장이 기다리고있은듯 고개를 들었다. 그는 직장별로 기술부원들을 호명하여 지난주에 준 과업을 따지였다. 대개가 하지 못한 과업이여서 일어선 사람들이 어물거리군 했다.
천호는 기사장을 바라보며 은근히 위압감을 느꼈다.
몸집도 우람하니 넓은 안락의자가 모자랄 정도였다. 종업원들중에 기사장이라고 하는것보다 《대틀》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더 많았으나 오늘은 꼭 굳어져있는 불상을 보는것같았다. 그는 다시한번 마른침을 꼴깍 넘기며 일어서서 체조를 당하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는중에 내가 지명당하면 무슨 말을 할가 하고 생각하는 순간 머리속에서 혼란이 일어났다. 직장의 기술문제라기보다 록화물을 보고 제나름의 생각을 종합한것밖에 없는데 이제라도 일궈세우면 망신할것같아 부지런히 사업수첩을 뒤적였다.
그동안에도 사람들은 기사장의 호출을 받고 일어섰다. 기사장이 어지간히 신경질이 나서 줄줄이 일궈세우는데 갑자기 문이 조심히 열리고 웬 쪽지가 들어왔다. 문곁에 앉았던 사람이 얼른 받아들었다. 쪽지는 사람들의 손을 거쳐 기사장에게로 갔다. 쪽지를 펼쳐본 기사장의 고개가 버쩍 들리워졌다.
그는 큰소리로 《부기사장동무, 마저 총화를 하오, 한명도 빼놓지 말고. 내 좀 제기된게 있어서.》 하고는 이제까지 책상우에 펼쳐놓았던 종이장들을 대충 간추려서 가방에 쓸어넣고는 나가는것이였다.
순간에 탕개가 풀려졌다. 천호는 기사장이 나간 문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그다음부터는 부기사장의 목소리가 하나도 들려오지 않았다. 모든 일이 무의미해졌다. 밤새 준비한 록화물에 대한 자료며 의견이 적힌 종이묶음을 내려다보며 아쉬움을 참을수가 없어 곁에 앉아있는 한원걸에게 물었다.
《기사장동지가 인차 들어올가?》
원걸은 느닷없이 피씩 웃고는 중얼거렸다.
《못올겁니다. 얼마나 바쁜 기사장이게요. 공장전반을 보니까요.》
삽시간에 온몸에서 맥이 쭉 빠지고말았다.
그러는 사이 총화모임은 끝나고말았다.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나갔다.
싱겁기 그지없었다. 천호는 나갈 생각도 않고 그자리에 한동안 있었다.
제일먼저 당비서앞에서 서뿔리 발설한 일이 생각히웠다. 그렇다고 기사장단계를 벗어나 당비서에게 직접 갈수는 없었다. 이러나저러나 며칠째 준비한 록화물에 대한 토론을 못했다고 생각하자 그지없이 아쉬워났다. 집힐가봐 조마조마하던 가슴이 이젠 누가 불러주기만 기다리는듯 자꾸만 두리번거리게 되였다. 기사장은 도대체 어디 갔는가.
천호는 텅 빈 사무실에 그냥 있기도 어색해서 열어놓은 문곁에서 서성거리였다. 갑자기 전화종소리가 자지러지게 울렸다.
전화종소리는 천호가 사색을 집중할수 없게 찌르릉거렸다. 정말 기사장은 자기같은 사람과는 대비도 할수 없게 바쁜 사람이다. 오죽하면 중요한 모임에도 마지막까지 못참가할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보다 더 안타까운것은 록화물을 본 자기의 견해를 꼭 말하고싶은 충동을 참을수가 없는것이다.
기쁜 내색을 숨기지 않던 당비서의 모습이 생각나자 천호는 어떻게든 기사장을 만나야겠다고 결심했다. 시간이 흘렀다. 복도에서 어정거리는것이 어색해서 마당을 한번 돌기도 하고 괜히 직장에 가서 외출복을 작업복으로 갈아입고나와 기사장의 방을 열어보기도 했다. 여전히 기사장의 방은 비여있었다. 차천호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점심시간이 다되여가는지 구내엔 오가는 사람이 한명도 없었다. 할수 없다고 생각하고 돌아서는 찰나 창고쪽에서 승용차 한대가 지나쳐갔다. 맥없이 돌아서는데 앞에서 누군가가 반갑게 소리치는 사람이 있었다. 중학시절의 동창생인 랭동창고장이였다.
《여기서 뭘하고있나?》 그가 물었다.
《기사장을 기다리네.》
《기사장? 이제 방금 지나간 차안에 있는걸 못보았나?》
《차안에?》
천호는 어안이 벙벙해서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높아졌다.
《아까 랭동창고에 있었는데… 아, 마침 저기 오누만.》
정말 기사장이 활개짓을 하며 정문으로 들어서고있었다.
이랬든저랬든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천호는 먼저 기사장방문앞에 가서 그를 기다리였다. 그러던 천호는 눈이 덩둘해졌다. 복도로 들어온 기사장이 자기 방쪽은 상관도 않고 반대켠에 있는 생산과 사무실로 쑥 들어가는게 아닌가.
천호는 너무나 예상외의 일이라 입만 항 벌리고 그자리에 굳어졌다. 또다시 기다리기 시작했다. 5분, 10분… 한참 있다가 시간을 보니 20분이 지나가고있었다. 아무리 누긋한 성미래도 이렇게 서성거리니 짜증이 날 정도였다. 하지만 참고 또 10분을 기다렸다. 드디여 기사장이 나왔다.
안도의 숨이 새여나왔다. 그러나 그것은 한순간이였다. 기사장이 자기의 방을 지나쳐 앞으로 나갔기때문이였다.
천호는 더 참지 못하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
《기사장동지를 만나려고 아까부터 기다렸습니다.》
《왜? 바쁜 문제요?》
기사장의 덩둘해진 눈이 뚫어지게 지켜보았다. 그 순간에도 그의 얼굴엔 웃음이 피여있었다.
《저, 제가 생각했던걸 좀… 요전날 본걸, 그걸…》
천호는 당황해지여 무슨 말이 나가는지도 몰랐다.
기사장의 대답은 천연했다.
《시간이 없구만. 가만, 서동무…》
손목시계를 보던 기사장이 갑자기 지나가는 계획과의 책임부원을 불러세웠다.
《내가 준 과업이 어떻게 됐소?》
《무슨 과업 말입니까? 아, 이적기 설치하는것 말입니까? 그거야 그전날 보시지 않았습니까.》
《아니, 내가 의견을 주었던것 말이요. 그걸 보기요.》
《거 뭐 더 진척시킨건 없는데…》
서동무가 서류철을 펼치고 번지기 시작했다. 기사장은 천호를 감감 잊은듯 그 문건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 시간이면 얼마든지 자기 말을 들어줄수 있으련만. 아니, 서동무에게서 문건을 쥐면 무슨 말이든 할것이다.
드디여 문건철이 나왔다. 《이것 말입니까?》 서동무가 얄팍한 종이장을 내보였다.
기사장이 대충 훑어보더니 돌아섰다. 그러다가 아직도 서있는 천호를 그제야 알아본듯 《이제 회의를 해야 하오. 후에 봅시다.》하고는 복도를 걸어갔다. 서동무도 자기 사무실로 향하고.
차천호는 그자리에 뿌리가 내린듯 꼼짝하지 않고 서있었다. 자기가 끝없이 어리석었다는 생각에 얼굴이 뜨끈뜨끈하게 달아올랐다.
(참, 갑자기 반벙어리라도 된것처럼 록화물이라는 말을 왜 하지 못했담.)
당비서앞에서처럼 록화물이라는 말만 했어도 기사장은 그냥 지나치지 않았을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얼마나 인상이 좋았던가. 기회를 놓친 아쉬운 생각에 우두커니 서있는 그의 옆으로 사람들이 지나갔다.
회의에 가는 초급일군들이였다. 반달음으로 천호의 옆을 지나가던 조현숙이가 왜 여기 있는가고 친절히 물었다. 어물거리면서 대답을 못하는 찰나 새로 두연원책임자가 된 황춘영이가 다가오자 조현숙은 그와 함께 지나갔다. 한사람 또 한사람… 그들은 회의생각밖에 없었다. 그러니 공장의 전반사업을 놓고 뛰여다니는 기사장이 자기와 언제 만나랴. 불현듯 기사장이 언제한번 성근하게 자기의 말을 들어본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보면 무시하는것같기도 하고 시끄러워하는것같기도 하는 기사장의 태도였다.
누구와 말을 하는 때면 반드시 중간에 끼여들어 그와 한동안 제 말을 하군 했다. 불시에 아버지의 공장출입에 대해서 까끈까끈했다는 말이 상기되자 천호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전에없이 기사장에 대한 불쾌감이 모락모락 피여올랐다.
이때 우르르 사람들이 앞으로 지나쳤다. 분주히 지나가던 초급일군들이였다. 벌써 회의가 끝났는가 하는 의혹과 기대가 섞인 마음을 안고 앞으로 나갔다.
방금전에 회의시간이 늦었다고 반달음으로 가던 직장장이 스적스적 걸어오고있었다.
《직장장동지, 회의를 안합니까?》
《오, 천호. 동문 왜 여기 있나?》
오히려 직장장이 물었다.
《기사장동지를 만나려댔는데 회의간다고 하길래…》
《회의는 하지 않아. 준비를 다시 하라고 해서…》
직장장이 맥풀린 걸음으로 지나가고 다른 사람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나오는 길로 각기 자기 사무실로 들어가버린것이다. 몇사람만의 모습이 구내에서 보일뿐이였다.
아직 결심을 못하고 서성거리는데 누군가 바쁜 걸음으로 나오고있었다. 지배인이였다.
《지배인동지.》
지배인은 무슨 바쁜 일이 제기되였는지 걸어가면서 왜 그러는가고 물었다.
《저, 지배인동지, 록화물을 본걸 토론하려댔는데 기술총화에서 발표도 못했습니다.》
천호는 차라리 지배인이 봐주었으면 하는 생각으로 손에 쥔 자료를 만지작거렸다.
《그래? 그럼 이제 당비서동지한테 보이라구. 내가 봤으면 좋겠는데 그럴 형편이 못되는구만.》
《당비서동지한테 말입니까?》
《그래, 가보라구. 이 준비가 안돼서 휴회를 했으니 동무가 가면 좋아할거요. 참, 아버지가 여전히 건강하시지?》
지배인이 돌아서다말고 이렇게 물었다.
천호는 선자리에서 화제가 달라지는 바람에 얼떨떨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아버지에 대해선 왜 물으실가? 무슨 일이 있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