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3 회)

제 2 장

원인없는 우연이란 있을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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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수려의 뒤에 다가온 어머니가 자상히 설명했다.

《이웃들에서 가져다주더구나, 여기선 모두 오리들을 기른다면서. 태인선생이 개우리를 만들어주면 강아지를 사올 생각이다.》

《태인선생이라구요? 아니, 그 선생이 어떻게 알고…》

수려는 놀라와 입을 딱 벌렸다.

《공장현대화때문에 여기에 나왔다더라. 이사온 첫날부터 부뚜막손질을 해준다, 오리우리를 만든다 하며 돌아갔단다. 이게 다 그가 만든것들이다.》

어머니가 하나하나 가리켰다.

《그랬군요. 정말…》

석태인은 자기도 잘 안다. 그가 여기에 나와있다니 등산길에 지팽이가 생긴것같은 심정이였다.

《당비서동지도 오셨댔단다. 보수대가 와서 문도 새로 달아주게 하고 책도 한아름 안고오질 않나, 집꾸리는걸 돌봐주질 않나, 우리 집 사진첩도 다 보아주고… 여간 다심하지 않더라.》

《어마나, 당비서동지가요?》

수려는 눈이 둥그래서 토방에 서있는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웬일인지 아버지는 아무말없이 방안으로 쑥 들어갔다.

《아버지가 왜 저러세요?》

수려는 얼른 어머니의 귀가에 대고 소곤거렸다.

《너의 아버진 여기에 온 다음부터 말이 더 없어졌단다. 공장에서 간부들이 와도, 동네에서 누가 와도 그저 한본새지. 뚝뚝해서 입을 봉하신다. 하긴 무슨 기분이 나겠니.》

어머니가 가늘게 한숨을 내쉬였다.

《그런데 사람들 마음은 후한것같아요. 이제 오다가 너무 진창길이여서 망설이는데 한사람이 타고가던 자전거로 태워주고 자기는 걸어가지 않겠어요.》

《여기 인심이 그렇게 무던한것같더라. 이 오리새끼들도 바로 옆집에서 가져온거란다.》

어머니가 토방우에 있는 상자를 가리켰다. 어디서 갈갈대는 소리가 난다 했더니 그안에 새끼오리들이 오골오골했다.

수려는 새끼오리 한마리를 꺼냈다. 노란 털이 보르르한 새끼오리를 쥐니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는 집안의 식솔이 늘어난것같은 기분으로 줌안에 차는 새끼오리를 살며시 볼에 댔다. 포시시하면서도 폭신한 오리털이 볼을 간지럽혔다. 이윽고 수려는 물을 퍼내면서 흙탕물이 튕겨난 비옷이며 몸을 씻고는 집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은 두칸짜리였는데 아버지와 어머니가 생활하기엔 넉넉했다. 집안에 세면장이 있고 부엌도 널직했다. 남향받이창가로 뒤뜰안 터밭이 내다보였다.

사택마을엔 살림집을 꾸리느라 태반이 동거를 들이거나 짐들을 들여놓고 불편하게 살고있는데도 우리 집엔 들이지 않았다고 어머니가 고마와했다.

옷을 갈아입은 수려는 가방속에서 가지고온 물건들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마지막엔 맨밑에 넣었던 자그마한 단지를 꺼냈다.

《언니가 이걸 보냈어요. 꿀에 재운 약이래요, 보약.》

《내가 뭐 어떻다구. 나야 여전히 그렇지.》

무뚝뚝한 아버지의 그 말에 수려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였다. 괜한 자존심이다. 여기 공장에 내려와서도 아버지는 그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있는것이다. 이젠 시의 일군이 아니고 엄연히 공장의 로동자인데도 아버지는 그전대로 생각하려는것이다. 기가 꺾이지 않고있는것을 보면 비관하지 않는것같지만 사실 그것은 하나의 모지름에 지나지 않았다.

현장에 내려왔으면 그 생활에 습관되기 위해 노력하고 자신을 반성해야 하지 않을가? 그러나 수려는 아버지의 가슴에 덧상처가 생기는게 두려웠다. 오히려 지금처럼 아버지의 기가 죽지 않은게 더 나을지도 몰랐다.

수려는 애써 마음을 진정하고 방안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한켠구석에 박혀있는 어항에 물을 채워놓고 원탁우에 올려놓았다. 다음번에 올땐 금붕어를 사가지고 와서 여기에 넣어야지. 한참 닥달질을 했더니 멀끔해졌다. 아버지의 책상엔 책이 많았다.

책장을 번지니 신형일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아버지, 신형일이라는 이 사람은 누구예요?》

아버지는 책에 시선을 박은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사실 아버지의 제일가는 취미는 독서였다. 늘 시간에 딸려있던 아버지는 책볼 짬도 내지 못하댔는데 이젠 그 봉창을 할수 있게 되였다.

《아버지, 여기 공장당비서동지와는 이미 아는 사이라고 했지요?》 이번에는 화제를 돌려 이렇게 물었다.

여전히 아버지는 대답을 피했다.

《얘, 수려야.》

어머니가 눈을 끔쩍해보이고는 《뭘하고있니? 이젠 내려오려무나.》 하고 말했다.

아래방에는 벌써 점심상이 다 챙겨져있었다.

언니가 보낸 구운 만두가 상에 올라 푸짐한데다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통오리찜이 김을 문문 올리고있었다.

세 식구가 오래간만에 둘러앉아 언니가 빚은 군만두에 최대의 평을 매기며 맛을 보았고 오리고기를 뜯었다.

놀라운것은 아버지의 식성이였다. 여기 와서 밥맛이 돌아선게 제일 기쁜 일이라고 어머니가 곱씹었다. 어머니는 그게 바로 땅탓이라고도 했고 오리곰이라고도 했지만 어쨌든 아버지가 입맛을 돌린것이 오리인것이 틀림없었다.

식사후에 어머니는 수려가 가지고온 당과류들을 꾸려들고 옆집으로 건너갔다. 수려는 가방에서 도툼하게 싼 보자기를 꺼냈다.

그것은 아버지가 입을 작업복이였다. 이제껏 아버지에게는 따로 작업복이 없었다. 혹간 작업을 하거나 금요로동을 나갈 때면 낡은 옷을 입군 했다. 이젠 공장일에 맞는 수수한 작업복이 필요했다.

《그건 뭔데?》

아버지가 눈길을 돌리며 물었다.

《아버지 작업복이예요. 이게 필요하지 않을가 해서…》

수려는 보자기를 끌렀다. 진한 회색옷이 나왔다.

《작업복?》

아버지의 목소리가 엄청나게 크게 들려왔다. 어쩐지 공허하게 들리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수려는 흠칫 몸을 떨었다.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진 아버지는 창밖 그 어딘가를 바라보고있었다. 수려는 무슨 못할짓이라도 한것같아 얼른 작업복을 보자기로 덮었다.

회색옷은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런데도 그것이 남긴 여운은 너무나 진했다. 터진 상처는 피를 닦아냈어도 동통은 바로 그후에 오는것이다.

아버지는 여전히 그 자세로 굳어져있었다.

《아버지.》

수려는 조심스레 화제를 돌리였다. 슬며시 보자기는 뒤로 끌어당기면서 .

《아버지와 토론할게 있어요.》

그제야 아버지가 고개를 돌리였다. 평온해진 얼굴에서 묻는듯한 눈길이 수려의 얼굴을 더듬었다.

《우리 연구소 연구사들이 전국각지에 파견되였어요. 현장에 직접 내려가서 연구사업을 하는건 당의 요구예요. 여기 오리공장에도 연구사들이 많이 왔어요. 파견성원들을 뽑을 때 내 의향을 물었지만 아직 대답을 못했어요. 집에 가서 아버지랑 토론해보겠다고만 했어요.》

왜서인지 마음이 급해나며 말이 길어졌다.

《…》

아버지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아버지, 이젠 집도 공장곁이고 또 제 전공이 생물공학이여서 오리공장에 적합할것같기도 해요.》

이번에는 유리성을 덧붙였다.

《아버지, 어떻게 할가요?》

수려는 아버지의 눈치를 보았다.

아버지는 여전히 침묵이였다.

이제까지 수려는 제기되는 모든 문제를 아버지에게서 도움받는걸 응당하게 생각하군 했다. 어렸을 때부터 사소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물어봐서 막히는것이 없었던 아버지였다. 같은 값이면 먼데로 갈것없이 집이 있고 생물계통인 여기 공장에 파견되겠다고 찍어 말하고싶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창문너머로 던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방안엔 침묵이 흘렀다. 한초 또 한초…

수려는 가슴이 떨려나고 입안이 말라들어 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결코 몰라서 대답을 못하는것이 아니였다. 해임되여 공장에 내려온 아버지의 처지에서 딸까지 곁에 오는것을 바라지 않는 심정을 뒤늦게야 깨달은 수려는 얼른 일어났다. 손에 든 보자기는 보이지 않는 곳에 쑤셔박고 부엌으로 내려가 손세 빠르게 설겆이를 끝내고 마당으로 나왔다.

수려는 한켠에 세워놓은 자전거부터 꼼꼼히 닦아내기 시작했다. 생각해보아도 자기의 자전거를 선뜻 주고 진창길을 걸어간 그 청년이 고마와 어떻게 인사를 했으면 좋을지 알수 없었다. 처음보는 사람에게 자기의 애용물을 넘겨주는 사람이 있을것같지 않았다. 그것도 이 동네 일반인심일가, 아니면 그 청년의 됨됨일가?

저녁무렵 수려는 깨끗이 닦아낸 자전거를 끌어냈다. 그 청년이 말한대로 공장의 자전거보관소로 내갈 생각이였다.

질척거리던 동네길에 탄재가 뿌려져 걷기가 한결 편해졌다.

수려는 집집의 마당에서 재를 뿌리는 녀인들과 애들의 호기심어린 눈길을 받으며 동네를 벗어났다. 저앞에 공장정문이 바라보였다.

정문옆에는 정말 회의실만한 크기의 보관소가 있었는데 그안에는 이미 숱한 자전거들이 세워져있었다.

《어떻게 천호자전거를 동무가 가지고 오나?》

보관소아바이가 자전거번호판을 보더니 의아해서 물었다.

(천호? 아니, 그럼?)

대뜸 짚여지는 생각이 있어 수려는 얼른 물었다.

《천호라구요? 무슨 천호인가요?》

《무슨 천호라니, 차천호지. 그런데 처년 누군데 천호자전거를 가지고 오나?》

아바이가 또다시 물었다.

(차천호라면 혹시 그 동무가 아닐가?)

수려는 아바이의 물음엔 대답할 생각을 잊고 자기 생각에 빠졌다. 정면으로 마주섰던 청년의 얼굴이 또다시 떠올랐다. 꼭 어디서 본것같던 생각이 이름과 맞아떨어진 바람에 오히려 수려는 떨떨해졌다.

자전거주인인 차천호는 몇년전에 대학생학과경연에 같이 나갔을 때 알게 된 사람이였다. 꼭 어디서 본 얼굴이라고 생각되면서도 알아보지 못한건 그사이 5년이라는 세월이 흐른탓이였다. 지금도 그때의 천호인지는 알수 없었다. 이름이 같은 사람이 많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수려는 그가 부디 그때의 차천호이기를 바랐다.

수려는 공장정문옆에 달린 접수실로 들어갔다. 이길로 공장안에 들어가 석태인을 만나 인사도 하고 차천호에 대해서도 알아볼 생각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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