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8 회)
제 4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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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김중건은 애들의 눈치를 보며 웃방으로 올라갔다. 아래방의 3분의 1가량 되는 크기의 방안에는 아래방처럼 바닥에 무져놓은 책외에는 기물이 보이지 않았다.
중건은 책무지에서 책을 한권 들어 얼추 들춰보다가 홀연 드는 이상한 느낌에 아래방이며 웃방을 세세히 훑어보았다. 이불장, 옷장, 화분대, 옷걸이, 서재, 의자를 비롯하여 신통히 나무로 만든 기물이란 보이지 않았기때문이였다. 그 기물들은 림산사업소 작업반장을 하는 가시아버지가 미래가 촉망되는 인재라는데 반해 사위에게 마음먹고 준비해준 결혼식기념품이라며 아들이 장가가면 물려주겠다고 강철의기사가 늘 념불처럼 외우지 않았댔는가.
아래방으로 내려간 김중건은 맏딸에게 조심스레 비쳐보았다.
《저- 이불장이랑 서재랑 그리고 의자들은 왜 없니?》
맏딸대신 막내가 챙챙하고 빠른 말씨로 자랑스럽게 알은체를 한다.
《아버지랑 엄마랑 해탄로 죽는다구 다 내갔대.》
순간 심장이 뚝 멎는듯한감이 들어 김중건은 입을 벌린채 망연히 서있었다.
(그랬댔구나.)
그는 눈을 감고 주먹을 꽈악 틀어쥐였다. 가구란 단 한점도 없는 강철의기사네 집안의 썰렁한 풍경에서 지나간 황철의 피어린 력사가 한순간에
떠오르는것이였다. 그뒤를 이은것은 이런 사람들이 피땀으로 일궈세운 주체철용광로를 구워먹은 죄스러움, 아까운 사람들을 사고로 생명을 잃게
만들어놓은
철호라고 부르는 기사네 아들이 들어선것은 저녁무렵이였다. 아버지처럼 하관이 빠르고 눈빛이 칼칼한 아들은 몇년전에 어머니를 잃은데다가 아버지의 불상사까지 당해 그런지 얼굴이 밝지 못하였다.
김중건은 아들의 손목을 잡아 앞에 끌어앉히고 그저 애의 앙상한 어깨를 쓸기만 하였다. 뭐라고 말해주랴. 하지만 이애들에게 이런 말이라도 하고싶었다. 중건은 손을 어깨에서 떼며 숫밤송이같은 머리를 숙이고있는 아들에게 용서를 구했다.
《다 나때문이다. 날 욕하렴.》
《…》
《난 뒤늦게나마 너희들에게 사죄를 하구 사는 형편이랑 앞으로의 일을 토론해보자구 왔다.》
아들은 대번에 눈물을 떨구며 고개를 틀었다.
기사네 아들애와 한 10분가량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문득 손전화기의 호출음이 울리여 중건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강기사네집에 와있습니다. 》
《이번사고로 잘못된 그 강철의라는 기사동무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시말서는 다 썼습니까?》
《쓰고있는중입니다.》
《흠- 그러니까 아직도 못썼구만요.》
얼마동안 침묵이 흘렀다.
《여보시오, 지배인동무.》
법일군의 목소리가 조금 올라갔다. 그러나 처음 만나 담화할 때의 점잖고 침착한 언행은 그냥 유지하고있었다.
《동문 현재 권리정지처분을 받고있습니다. 시말서를 써내게 된 날자가 오늘이란 말입니다. 툭 터놓고말해서 우린 동무가 권리정지처분을 받은 이후에도 사사모사로 기업소일에 삐치는걸 보구 처음엔 지배인을 하던 타성에서 그러리라고 리해하였습니다. 그런데…》
법일군은 말끝을 흐렸다가 마디마디에 그루를 박으며 엄하게 지적하였다.
《동무행동은 유가족들에 대한 모욕으로 됩니다. 혹시 지배인동문 그런 일을 하게 되면 자기가 지게 될 엄중한 책임이 다소라도 덜어지리라 생각하지 않습니까. 만일 그렇게 생각하는 점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사고폭의 엄중성을 다시한번 랭철하게 돌이켜봐야 합니다.》
말투가 갑자기 차고 딱딱하게 변하였다.
《두말할것없이 오늘중으로 무조건 시말서를 써내시오. 그리고 오늘부턴 무조건 보고하고 움직이되 될수 있는한 방에 대기하고있어야 하겠습니다.》
전화가 끝났으나 김중건은 얼굴이 컴컴해가지고 집에서 나왔다. 중건의 모습이 어찌나 처량했던지 랭기를 풍기며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던 맏딸이 얼굴에 동정의 빛을 한가득 올리며 그쪽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저, 지배인큰아버지!》
맏아들의 부름에 마당으로 나오던 김중건은 돌아섰다. 괴로운중에도 큰아버지라는 호칭으로 불리우니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왜 그러니?》
《앞으로 어떻게 되나요?》
《어떻게 되긴.》
《우리 아버진… 주체철이 나오길 그렇게 바랐는데 꼭 성공시키지요?》
《그래, 그렇지 않구.》
그는 눈물이 솟구치는것을 애써 참으며 그 대견한 아들을 마치 옛지기를 대하듯 힘껏 포옹하였다. 강철의기사의 맏아들의 위로를 들으니 이 며칠사이 유가족들 집을 방문하면서 외려 그들에게서 들은 말이 생각나는것이였다.
그들은 앞서 방문한 기업소의 당일군들이며 주영호에게 한것처럼 간 사람이야 어쩌겠는가, 그렇다고 주저앉으면 안된다, 먼저 간 사람들 생각을 해서라도 독심을 먹고 일어나 기어이 주체철을 뽑아내야 한다고 김중건의 손을 꼭 잡고 부탁하였다.
김중건은 모두에게 그러마 하고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사실은 앞으로의 일이 가늠이 안가 막연하기만 하였다.
화나 불행이라는것은 지진현상과 비슷해서 한번 들이닥치면 크고작은 여진이 계속 뒤따르는 법이다. 강철의기사네집을 나선지 얼마 안되여 사고소식을 듣고 정신을 잃었던 안해가 끝내 의식을 차리지 못한채 병원에 실려갔다는 옆집아주머니의 전화가 왔던것이다. 가뜩이나 심적고충에 시달리던 중건에게 있어서 이것은 또 하나의 정신적타격으로 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