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4 회)
제 2 장
원인없는 우연이란 있을수 없다
12
(1)
먹이공급기의 자동화, 콤퓨터화는 하루가 다르게 진척되여갔다.
석태인은 부지런히 먹이공급기제작을 마무리하고있었다. 콘베아단계를 다 끝내고 공급기전기장치결속을 오늘중으로 다 끝낼 생각이였다.
그때였다.
《저, 한가지 물어봅시다.》 하는 조심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사를 조이면서 건성 대답을 하는데 살며시 들어서는 발자국소리가 났다. 누군가 하고 고개를 돌리던 태인은 깜짝 놀랐다.
《아니, 이게 누구야? 수려!》
태인은 튀여나듯 일어났다.
《태인선생님!》
수려가 반색을 하며 호동으로 날아오듯 들어섰다.
그 모습은 새봄을 맞아 무수하게 내돋친 파란 잎들을 거느리고 휘친거리는 하나의 버들가지를 방불케 했다. 수려가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이며 인사말을 했다.
《고맙습니다. 집꾸리기를 도와주셨더군요.》
《내가 한게 뭐 있나. 자, 어서 여기 좀 앉으라구.》
태인은 옆에서 개인용의자를 끌어다 앞에 놓아주며 권했다. 이번에도 수려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그대로 서있었다. 그의 행동과 말 한마디한마디에서는 세련미가 은근히 내풍겼다.
《어떻게 갑자기, 아, 집에 온 모양이군.》
《공장에 태인선생님처럼 우리 대학에서도 연구사들이 많이 나오지 않았어요. 나야말로 적임자지요 뭐. 그래서 연구조와 토론두 할겸 집에 왔어요. 태인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렇지, 수려도 여기서 한몫 해야지.》
《그런데 아버지가 승인 안하셔요.》
수려가 나직이 말하며 눈길을 떨구었다.
《아버지가 반대하시오?》
태인의 눈이 커졌다.
《일체 아무 말씀이 없으세요.》
그 말을 듣자 태인은 알만하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이 많으실거요. 그럼 수려는 어쩔 생각이요?》
수려가 말없이 시선을 돌리였다. 일순 그의 눈가에 고뇌의 흔적이 어리는것을 포착한 태인은 말없이 수려를 훑었다.
태인은 수려를 어릴적부터 잘 알고있었다. 그 시절엔 새침해서 좀해선 꼭 다문 입술이 열리지 않던 수려였다. 명절때 만나도 깍듯이 인사를 했지만 마주앉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한살두살 나이를 먹으면서 그의 온몸에서 쌀쌀하게 내풍기던 새침데기허물은 벗어졌지만 여전히 말은 적었다.
일반처녀들과 달리 차림새나 맵시에 대한 신경보다 책방에 들리는것을 더 좋아하는것이 수려의 취미라는것을 포착한 태인은 수려와 새책을 본 소감을 나누는것으로 교제의 문을 열었었다.
《수려가 이럴 때도 다 있나?》
착잡하게 얽혀있던 번거로움에서 벗어난듯 수려가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었다.
《태인선생님두, 일없습니다. 저도 합숙에 자리를 잡았고 집에 와보니 안정이 되여있어요. 단지 아버지가… 참, 당비서동지의 이름이 무엇인가요?》
《신형일이라고 하는데…》
《예.》
수려가 나직이 고개를 끄덕이였다.
《아직은 다 모르지만 한마디로 괜찮은 사람이야. 말은 없는데 일을 하는데서는 소문을 내지. 두달남짓한 사이에 살림집건설을 끝내고 이사를 다 시켰거던, 오리사는 오리사대로 내밀면서도 말이요. 공장에선 그를 보고 김 안나는 숭늉이라는 말을 하더군. 정말 그 말이 맞소.》
태인은 언제인가 기사장에게서 들은 말이 생각나 이렇게 옮기며 히죽이 웃었다.
《예.》 무슨 말인가 할듯할듯 하면서도 조용히 눈길을 떨구는 수려를 보자 태인은 안달이 나서 그의 기분을 더 띄울 이 생각, 저 생각을 굴리였다.
(참, 그렇지. 이럴 때 외국어로 대화를 나누는게 어떨가.)
이미전부터 수려와는 외국어로 통할 때가 많았다. 그는 놀랄정도로 회화에 능했다. 금방 입을 열려던 태인은 《참, 태인선생님, 차천호라고 아세요?》하고 수려가 생각지 않게 다른 이름을 묻는 바람에 의아해졌다.
《차천호? 알지, 왜?》
《저, 혹시 농업대학 가금과를 나오지 않았는가요?》
《나왔지. 그런데 그걸 왜 물어?》
《그러니 맞군요. 그를 만났어요, 우연히.》
곱게 휘여간 눈섭이 찌그러지게 미간을 찌프린 수려가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을 터놓으며 그를 알게 된 대학시절을 그려보았다.
《아하! 참 멋있는 인연이구만. 5년전엔 경쟁을 다투면서 경연대회에 같이 나가고 오늘은 제 자전거를 선뜻 내주고. 멋있어, 이건 우연이 아니요.》
태인은 별로 의미있는 생각이 들어 웃어댔다.
《아이참, 우연이 아니긴요. 그런데 뭐라고 인사를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하고 대답을 바라듯 태인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아까 천호가 통근차가 나가기를 기다리댔군. 시내에 나가겠다면서도 떠날 생각을 않고 우물거리더니, 자전거가 없었던 사연이 그렇게 된거군.》
태인은 작은 눈이 감기게 새물거리였다. 벌써부터 그들의 상봉이 마치 재미난 극을 볼 때처럼 상상되였다.
이때였다. 방향을 헛갈린 참새가 날아들듯 은희가 호동안으로 뛰여들었다. 그러더니 수려를 보고는 그 자리에 오똑 멈춰섰다. 동그란 은희의 얼굴에서 귀여운 두눈이 연신 깜빡거렸다.
《아 은희,
태인이가 수려를 가리켰다.
《연구사요?!》
순간에 그의 눈이 경탄의 빛으로 가득찼다.
그러더니 뒤를 보며 다급히 손을 흔들어댔다. 이번엔 키가 훌썩 뽑아진듯한 원걸이가 스적스적 호동안으로 들어왔다.
《원걸동무, 빨리. 연구사래요.》
은희가 속살거리자 원걸이가 고개를 굽석해보이며 싱긋 웃었다.
발가우리 달아오른 은희의 얼굴은 오늘도 잘 익어가는 동실한 사과알 한가지였다.
《이 동무는 공장의 약전기술자 한원걸 그리고 이쪽은 계량실의 바구니.》 석태인이가 그들을 바라보며 소개를 했다.
《아니, 박-은-희예요.》
은희가 가만있지 않고 또박또박 뇌였다.
《여기 오리공장 기사장동지의 조카요.》
태인이가 수려를 돌아보며 보충했다.
《난 강수려라고 해요.》
수려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소개를 했다.
(강수려?!) 속살거리는 은희의 얼굴은 여전히 경탄으로 빛나있었다.
《참, 은희, 통근차가 들어왔는지 모르겠소?》
태인은 수려가 하던 말이 생각나서 불쑥 물었다.
《아직 안들어왔어요.》
《그래? 차동무가 빨리 와야겠는데.》
《천호동지요? 내가 찾아오겠어요. 통근차가 들어오면 여기 호동으로 제꺽 가게 말이예요. 원걸동무, 빨리.》
은희가 원걸이를 바라보며 독촉하자 이번에도 원걸은 은희를 따라나섰다.
은희가 돌아보며 《천호동지를 인차 보낼게요. 잠간만 기다리세요.》 하고는 호동밖으로 사라졌다.
《귀여운 처녀네.》
《저들의 사이가 정말 재미있소. 어항속의 금붕어들같이 언제나 함께 돌아가지.》
그러며 태인은 수려에게 호동을 구경시켰다.
《여긴 앞으로 무인화호동으로 꾸릴 호동인데 거의 완성되여가고있소.》
태인은 수려에게 자기네가 한 일을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직 절반도 돌아보지 않았는데 천호가 인차 호동으로 들어섰다.
《태인선생, 왜 찾았습니까?》
《천호동무, 여길 좀 보라구. 누군지 알겠소?》
태인이가 소리쳤다.
천호가 어리둥절해서 앞을 보더니 입술이 벙긋 열렸다.
《아니, 강수려! 맞지요?》
《예, 수려예요.》
수려가 앞으로 나서며 반갑게 대답했다.
《아까는 자전거를 주어서 고마웠어요.》
《자전거? 동무였소? 하, 아까는 왜 몰라봤을가?》
《쳐다보기나 했댔어요?》 수려의 공격이였다.
《허…》
천호가 어색하게 머리칼을 빗어올렸다. 훤칠한 이마가 드러나자 그의 멀끔하면서도 해사해보이는 얼굴이 완연히 알렸다.
《마주서서도 몰라보다니. 천호동무, 이 수려가 바로 요전에 말했던 그 강부장동지네 딸이야.》
《그렇습니까?!》
천호가 눈가를 좁히며 수려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동무넨 같이 대학생경연에 나가서 1, 2등을 했다면서? 그런데 1등은 수려한테 뺏겼다면서?》
태인이가 이죽거리며 천호를 놀리려들었다.
《어마, 태인선생님, 1, 2등 점수차이는 0. 3밖에 되지 않았어요. 그건 정말 우연이예요.》
수려가 별스레 바빠나서 변명하려들자 천호는 히죽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만 1등은 못했지요.》
잠시후에 천호와 수려가 나란히 호동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