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7 회)

제 2 장

원인없는 우연이란 있을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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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형일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강시연에게는 그것이 은근히 마음에 걸려들었다. 아까와 달리 무슨 말이래도 했으면 하는 심정이였다.

이때 눈매가 가는 청년이 열린 온실문앞에 나타났다.

《저, 여기에 당비서동지가 계신다기에…》

청년이 소심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당비서입니다.》

신형일이가 일어서며 대답했다.

《저, 어머니의… 저의 어머니는 그전에 대성산목장에서…》

《아, 동무가 용권동무요? 반갑소, 래일 아침쯤 만날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댔는데…》

《비서동지에게서 련락이 있었다는 말을 들으니 잠이 올것같지 않아 왔습니다. 미안합니다. 제 생각만 해서.》

《아니, 한시간이라도 앞당겨 만나면 좋은 일이지. 자, 그럼.》

신형일이가 강시연에게 인사를 하고는 온실밖으로 나갔다. 마당에서 하는 그들의 말이 강시연에게 똑똑히 들려왔다.

《용권동무, 동무네 가정은 어버이수령님을 직접 뵈온 영광을 지닌 집안이요. 공장연혁사에는 동무의 어머니와 운수반장을 한 동무의 아버지가 다 올라있소. 그런 가정의 자식이 다르게 살수야 없지. 그런데 동무가 다른 공장으로 가고싶어한다는 말을 듣고 좀 만나고싶었던거요.》

《제가 생각을 잘못했던것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했다면 반가운 일이요. 이제부터 공장에서는 생산문제가 절박하게 제기될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당장 오리먹이가 걸리게 되오. 난 이 문제를 놓고 동무를 생각했소. 동문 경제문제에 취미가 있다는데 우리 같이 공장경영을 풀어나가기요. 보다는 당장 오리먹이를 풀기 위한 큰 사업을 맡길 생각인데 어떻소, 해볼 생각이 없소?》

《당의 신임이라고 생각하고 한번 해보겠습니다.》

대답이 선선했다.

《좋소, 앞으로 공장에서는 공급소를 더 확장하고 력량을 보강할 생각인데 거기서 기둥이 되여보오. 가만, 구체적인건 방에 가서 토론을 더 하면 좋겠는데 이제 회의를 하니 어떡한다?》

《그럼 회의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기다리겠다? 하긴 오래 걸리는 회의는 아니요. 그럼 회의가 끝난 다음에 부지배인동물 만나오. 자, 갑시다.》

발자국소리와 함께 그들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강시연은 스적스적 밖으로 나갔다. 밖은 어둠속에 잠겨있었다.

이미 신형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소리없이 밤은 깊어가는데 신형일은 여전히 일감속에 묻혀 돌아가고있었다. 여기에 왔던것도 우연한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무거워났다. 수려의 현실체험지에 대해 대답을 하지 못한것이 내려가지 않았는데 방금 또 신형일이에게서 들으니 더 상처가 난듯한 심정이였다.

사실 그것은 한마디로 대답할수 있는 문제였다. 로친은 수려의 현실체험지를 두고 당장 딸이 곁에 오기라도 하는것처럼 주름진 얼굴에 웃음을 실었었다. 먼데 갈것없이 이곳 오리공장에 체험지를 정하면 되는 일이 아닌가고. 이렇게 생각이 단순하다구야.

강시연은 혀를 찼다. 아버지가 공장에 왔는데 딸까지 온다면 그야말로 세상에 내놓을 웃음거리가 아닌가. 그래서 수려앞에 대답을 못했는데 신형일은 자기에게 그 말을 하자고 바로 들린것이다.

다행히 신형일은 대답을 받는걸 서두르지 않았다. 가만 보니 신형일은 자기가 알고있는 그전날의 그가 아니였다. 아니, 그전날에 지도소조의 마지막성원으로 속해있을 때도 록록치 않았다. 제일 젊은 사람이라고 만만하게 보았던 농장의 책임일군이 땀을 빼며 사과하던 일은 그후에 지도소조의 여담으로 오래동안 남아있었다. 오늘 보니 확실히 그전날과 또 달랐다. 성근하게 자기 사업에서의 결함과 부족점을 시인하면서도 자기에 대한 의견도 다른 말을 하는척 하며 보기좋게 꼴을 먹인 일은 아직도 땀을 솟게 했다. 자연스레 기사장을 다스리는건 또 어떻고 방금전의 그 젊은이도 탈선하지 않고 제자리에 들어서는것같았다. 사회생활이, 오늘의 당비서라는 위치가 그의 성장변화에 송풍기가 되여준 모양이였다.

자기를 크게 아연하게 했던 여기 전 기사장건도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신형일의 탓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비서라면 공장의 중책을 지녔던 한 일군의 정치생활에 대한 관심은 응당하다고 보아야 할것이였다. 단지 그것을 취급했던 사람이 이 강시연이라는것을 몰랐을뿐이였다. 만일 알았다면 어떻게 했을가. 모름지기 알았다고 해도 신형일의 마음이 달라지지 않았을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강시연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였다. 확실히 그에게는 범접하기 어려운 그 무엇이 있었다.

겉표정만 봐서는 잔잔히 흐르는 시내물 같은데 그의 가슴속은 결코 잔잔하지도, 랭정하지도 않았다. 강시연은 처음 공장에 왔을 때 신형일을 보고 김 안나는 숭늉이라고 한다는 말을 듣고 속으로 랭소를 머금었었다. 항용 김 안나는 숭늉이 더 뜨겁다는 말은 아는것이 많고 무슨 일이나 잘하는 사람이지만 자신을 내세울줄 모르는 점잖은 사람을 표현하는것이라고 강시연은 알고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어쩔수없이, 스스럼없이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갑자기 어둠속에서 자박자박 발자국소리가 들려왔다. 꽤 조심스러운 발자국소리였다. 강시연은 눈을 크게 뜨며 소리쳤다.

《누구요?》

《어마나! 아버지, 나예요.》

전지불이 훌쩍훌쩍 움직이더니 수려가 앞에 다가왔다.

《네가 웬일이냐?》

강시연은 그의 출현이 놀랍기도하고 반갑기도 해서 저도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버지가 어떤데서 일하시는가 보러왔어요.》

딸은 스스럼없이 강시연의 팔목을 잡아당겼다. 그들은 온실안으로 들어왔다. 의자겸, 침상겸으로 된 나무침대를 내려다보던 수려는 조심조심 바닥을 만져보았다.

《푹신한 요를 하나 더 내오자요.》

《일없다. 호강하려고 온건 아니니까.》

수려는 나무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아무말없이 안고온 보자기를 풀어헤쳤다.

《그건 뭐냐?》

《작업복이예요, 어서 갈아입자요.》

《?!》

완전히 달라진 수려였다. 하루전만 해도 몹시도 바재이면서 주저하던 작업복을 오늘은 어서 입자고 했다. 강시연은 아연해서 반대할념도 못하고 딸을 바라보았다.

《아버지, 여기서는 모든 사람들이 다 공장에 다니고있어요, 아버지도 어머니도 자식들이 다. 우리도 이젠 공장사람들이니 달리 살아서야 안되지요. 아버지, 그렇지요?》

강시연은 고개를 돌렸다. 아니, 너만은 공장사람이 되여서는 안된다는 말을 하고싶어서였다. 고이고이 키우고 대학을 졸업해서 연구사가 된 딸이 여기 공장사람이 되여서는 안된다. 그러나 현지실습까지 반대할 리유는 없다. 방금전에 작업복을 입고 편안히 앉았던 신형일을 보았던지라 생각되는게 있었다.

그는 순순히 작업복으로 갈아입었다. 몸에 맞는 옷을 입고 앉으니 몸도 마음도 편안했다.

《보기 좋아요. 아버지, 나 여기 공장에서 연구사업을 하겠어요. 오리공장은 나의 연구사업에 절실히 필요할뿐만 아니라 공장에서도 내가 필요해요. 필요한 사람이 되는게 제일 좋은 일이 아니겠어요.》

《?!》

이번에도 강시연은 아무 말을 할수가 없었다. 이 애가 하루사이 이렇게 변할수가 있나.

《반대없지요?》

딸은 대답을 들을념도 않고 가볍게 일어났다. 그는 들고온 보자기에서 비자루, 쓰레박, 걸레 등 자질구레한것들을 꺼냈다.

《제가 청소를 좀 하겠어요.》

강시연은 딸에게 떠밀리워 밖으로 나왔다. 한줄기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며 답답하던 가슴을 시원하게 틔워주었다. 그는 뒤짐을 진채 몸을 돌렸다. 저 멀리 시내가 보였다. 자기네 집이 있던 통일거리다. 그건 그전일이고 이젠 여기에 집과 일터가 있다. 딸이 공장에 현지를 정하면 온 가족이 다 공장에 있게 된다. 그런데 나는 물우에 뜬 기름방울처럼 떠서 살려고 했지. 공장에 왔으면 공장사람이 되여야지.

순간 그의 가슴은 커다란 바위앞에나 부닥친듯 숨이 콱 막혀왔다.

어느때건 부닥치게 될 전 기사장이 생각나서이다. 그 사람의 자손들이 있을건 뻔했다. 그렇다면 우리 수려와 부닥치지 않는다고 어떻게 장담하랴. 가만 계산해보니 수려또래는 없을것같았다. 자기가 선뜻 결론하지 않은건 이것때문이였다. 제발 우리 수려에게만은 그 무슨 일이라도 미치지 말아주렴, 우연이라도.

방금전에 딸이 하던 말이 생각났다. 필요한 사람. 그렇지, 나도 공장에 필요한 사람이 되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간 여기서 밀려나가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 아니, 여기서까지 밀려나오면 안될 일이다. 흥얼거리는 노래소리가 났다. 딸이 부르는 노래가락이다.

강시연은 천천히 걸었다. 그는 자기가 그 노래가락에 몸도 발도 맞춘다는것도 느끼지 못하고 온실 앞마당을 돌고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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