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5 회)
제 3 장
사랑의 감정은 어디서부터 흐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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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천호는 잠시 숨을 돌린 다음 인차 운동장을 돌기 시작했다. 또다시 수려의 머리수건이 천호의 얼굴을 슬치며 흩날렸다.
신바람이 난 천호는 힘을 준 손아귀를 점차 풀면서 냅다달렸다. 허나 너무 일렀다. 손을 놓자마자 자전거가 삐닥거리며 넘어지려는것을 천호가 날래게 휘여잡았다. 그리고는 다시 손아귀에 힘을 주고 운동장을 돌았다. 한바퀴 또 한바퀴…
자기가 보기에도 점점 숙련이 되여간다는것이 알렸다. 처음치고는 괜찮은 수준이여서 안심하고 손아귀의 힘을 풀며 전진시키는 찰나 삐뚤거리던 자전거는 그만 옆으로 기울어지고말았다. 둘다 나동그라졌다.
하마트면 기울어진 자전거가 수려를 덮칠번했다.
《다치지 않았습니까?》
천호는 넘어진채로 소리쳤다.
《난 일없어요, 천호동문?》
어느새 일어난 수려가 미안해서 자전거앞에 섰다.
《나야 일없지요, 자.》
천호는 수려앞에서 껑충껑충 뛰여보이기까지 하며 그를 위안했다. 수려는 또 자전거에 올랐다.
나긋나긋한 버들가지같은 연약한 겉모습과는 달리 여간 이악하지 않았다. 아직은 몸의 균형을 바로잡지 못하고 위태롭게 삐뚤거리지만 그것만 해도 대단했다. 시작이 절반이라고 일단 자전거에 붙은바엔 혼자서 한m라도 가야 했다. 한바퀴 두바퀴…
끝내 수려가 혼자서 자전거를 몰아갔다. 삐뚤삐뚤… 겨우 전진했다.
이윽고 그들은 학습터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수려가 꾸레미를 헤치더니 병을 꺼냈다.
《아이, 수고했어요. 탄산단물이예요.》
천호는 사양치 않았다.
천호가 꿀꺽꿀꺽 마시자 수려도 다른 병을 꺼내서 조심히 마셨다.
타던 목이 시원히 열리며 기분이 좋았다. 자전거배우기는 천호의 사기를 올려주었다. 수려는 지낼수록 더 긴밀하게 사귀고싶은 처녀인데 자전거배우기가 그 생각을 만족시켜주었다.
《하루이틀만 련습하면 얼마든지 혼자서 탈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혼자서도 시내길을 달릴수 있겠지요? 남의 자전거로 타는 련습을 한다고 했더니 아버지도 자전거를 하나 사야겠다고 하셨어요.》
무엇인가를 결심하는듯한 수려의 그 말에 천호는 어지간히 놀랐다.
《공장에서 현대화기간이 끝나면야 뭐 자전거가 크게 필요합니까?》
말은 흔연히 나오는것같지만 실은 천호에게 있어서 이것은 제일 우려되는 일이였다. 현대화만 끝나면 수려는 대학의 연구소로 돌아갈게 아닌가.
《끝난 다음에요?》 수려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것 같더니 《그래도 집이야 여기 있지 않나요.》하고 나직이 대답했다. 그 목소리는 어쩐지 눈물에 젖은듯했다.
천호는 울적해졌다. 처녀는 여기에 자기 집이 있다는걸 놓고 생각하는것이 자기와 달랐다. 수려와 같이 있기를 바란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 그러나 속단하고싶지 않았다. 손안에 쥔 희망의 새를 잃고싶지 않아 성급히 물었다.
《이제 현대화가 끝나면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론문을 써야 해요. 그러나 여기에 현지를 정하고나니 생각되는게 있어요. 꼭 론문을 써야 할가 하고요.》
《왜 말입니까?》
천호는 의아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전에 난 대학공부를 잘하고 박사원에서 계속 공부를 하는걸 대단한것으로 생각했답니다. 그러나 공장에 와서 보니 제 생각이 얼마나 단순한것인가를 생각하게 돼요. 아직은 다는 모르겠지만 현실에 나왔으면 현실적인 사고를 하는게 정상이 아니겠어요. 현실에서는 생산에서 제기되는것을 해결할걸 절박하게 요구하는데 난 아직 발을 못붙인것 같아요. 현실에 맞지 않는걸 연구한다면 그 지식이 무슨 필요가 있겠어요.》
그 순간 천호는 하마트면 불쑥 일어날번했다. 수려의 지향은 바로 자기와 같은것이다. 목표를 높이 세우고 항상 현실에서 제기되는 문제를 해결하는 기술자가 되는것, 이것은 늘 천호가 생각하고있는것이였다. 결국 우리는 하나의 지향을 가지고 전진하고있는것이다!
《천호동무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수려가 돌아보았다.
《내 생각도 바로 그겁니다. 현장에서 더 많은 리론을 재인식하자, 현실에 필요한 지식으로 생산에서 은이 나게 하는 그런 지식인이 되자, 우리의 현실은 더 높이, 더 빨리 첨단세계로 달려야 한다. 내가 그 선구자가 되자 하고 말입니다.》
《그래요?! 그러니 우린 결국 같은 리상과 지향을 안고있었군요.》
수려의 말이 별로 의미있게 들렸다. 같은 리상과 목표, 하나의 지향.
곧게 뻗은 로선에서 나란히 달리는것만 같은 희열감에 싸인 그들은 잠시 할말을 잊었다.
결코 오래 사귀였다고 해서 한마음이 되는것이 아니다. 꼭같이 품은 하나의 지향이 아무러한 설명도 없이 그들을 한길에 나란히 세워주었다.
천호는 그 순간 그지없는 행복을 느꼈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공부를 많이 한 처녀인데도 그는 여전히 높은 목표를 세우고있었다. 끝없이 이야기를 나누고싶었다. 이밤이 지새도록 계속된다 해도 성차지 않을것같았다.
《연구소에 두고온 자료들이 더러 있다고 했지요? 그땐 자전거를 타고 갔다오십시오.》
《혼자서요?!》 수려가 고개를 갸웃하고 방그레 웃더니 살레살레 머리를 저었다.
《아니, 첫날은 혼자서는 안될것같아요. 동행해주지요?》
《내가 말입니까?》 천호는 어정쩡해서 반문했다.
《그래요. 자전거배우기에서 선생이였으니까 합격되였는가 하고 검열 받아야지요.》
그러니 시내길을 함께 달리자는 말이다. 나란히 달리게 될 그날, 그날은 언제인가.
둥근달이 공중에서 은은한 빛을 뿌리고있었다. 갑자기 음악소리가 났다.
천호는 어리둥절해졌다.
《방금 음악을 틀었어요.》
수려가 가방속에서 소형증폭기를 꺼냈다.
《아하! 달빛이 비치는 이런 밤에 음악이 울리니 마음이 별스럽군요.》
천호는 음악소리를 처음 듣기나 한듯 희한한 생각이 들었다.
《음악을 좋아하는가요?》 수려가 관심을 가지고 물었다.
《악기를 잘 타는것도 별반 없고 노래도 잘못하지만 듣기는 좋아합니다. 우리 아버지가 오리생태연구에 음악을 리용한 다음부터는 더 흥미를 가지게 됐습니다.》
《오리생태연구에 음악을요?》 수려가 호기심이 나서 되물었다.
《아버지는 오리의 생태적특성에서 음악이 노는 역할에 대해서 몇년째 연구하고있습니다. 이젠 날더러 그걸 완성하라고 하면서 부지런히 자료를 축적하신답니다.》
《좋은 생각이예요. 오리생태적특성에서 음악의 리용 말이지요. 이미 보건분야와 농업분야에서 이런 연구시도와 함께 성과들이 나타나고있지
않는가요. 참, 요전날 보니
수려의 진정어린 감탄을 들으니 천호는 가슴이 추연해졌다.
《우리 아버지는 정말이지 잠도 휴식도 잊고 한생을 줄달음쳐 살았지요. 지금도 날보고 잠이 많으면 안된다고 늘 잔소리를 하십니다.》
《호호, 재미있군요.》 수려가 천진한 소녀처럼 밝게 웃었다.
《우리 아버지앞에선 난 언제나 소학생입니다. 매일같이 훈시를 듣지요. 사람은 꾸준해야 한다. 잠이 많으면 성공하지 못한다. 사람의 일생이 고작해야 70인데 그중에서 일할 나이는 소년시절, 로인시절을 다 빼고나면 겨우 50년밖에 더 되느냐, 그런데 하루에 여덟시간, 열시간씩 자고나면 일생중 거의 절반을 잠으로 흘려보낸다는건데 그래선 안되느니라, 더우기 젊은 시절은 인생의 금시절인데 잠으로 랑비하다니 될말이냐 하고 잔소리를 한답니다.》
《맞아요. 어느 책에선가 잠은 인생의 절반을 훔쳐가는 도적이라고 했던데요.》
《거참, 우리 아버지의 잔소리를 정리한것같군요.》 천호는 마음이 기꺼워나서 제꺽 응수했다.
《참,
생각에 잠겨드는 수려를 보자 천호는 한숨이 나왔다.
《우리 아버지는 오리밖에 모릅니다. 그저 오리오리, 너무 오리에 빠진 덕에 말년도 망쳤지요. 제때에 년로보장으로 들어왔으면 그런 일도 없고 얼마나 빛이 날 인생길이였겠습니까.》
《태인선생한테서 다 들었어요.
수려의 말을 들으니 대번에 마음이 훈훈해왔다. 지향과 목표가 같을뿐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견해에서도 공통점을 찾게 되자 천호는 수려가 더없이 가깝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건 자기 혼자 생각이였다. 그는 어떤 남동무를 좋아하는지.
《수려동문 박사원까지 졸업한 연구사이니 가까운 남동무가 있겠지요?》
《남동무요?》 혼자말처럼 되뇌인 수려가 살래살래 머리를 저었다.
《없어요. 멋쟁이를 찾고있는중이예요.》 수려가 방그레 웃었다.
멋쟁이라구? 그가 바라는 멋쟁이란 어떤 사람인가. 인물이 잘난 사람? 체격? 옷차림? 알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물어보기도 뭣했다. 언뜻 동뚝을 지나가는 차불빛이 운동장에까지 비쳐서야 천호는 얼른 시계를 보았다. 달빛탓도 있지만 야광침이 환한 시계여서 시간이 쨋쨋하게 나타났다. 벌써 열시가 넘어가고있었다.
워낙 즐거움은 시간을 줄이는 법이다.
《자, 또 합시다. 시내로 달리는 날을 앞당기기 위해서!》
《호호, 명령이군요. 천호동문 꼭 군대식이예요. 말도 행동도 걸음걸이까지도.》
처녀는 방실거렸지만 천호는 얼굴이 붉어졌다.
《군대에서 습관됐는데 고치기 힘듭니다.》
나의 이런 점을 수려가 좋아하지 않는게 아닐가. 하지만 그것은 공연한것이였다.
《나도 좋아요. 시내로 달리는 날을 앞당기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