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6 회)
제 3 장
사랑의 감정은 어디서부터 흐르는가
12
그 시각 수려도 첫눈이 내리는것을 알고있었다. 단지 맞는것이 아니라 창가에 서서 내다보고있을뿐이였다.
첫눈이란 얼마나 좋은것인가. 흔히 민간에선 눈이 오면 제일 좋아하는건 아이들과 강아지라고들 하지만 그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하얀 눈을 보면 그만큼 마음이 정갈해지고 동심이 살아나기때문이다. 누구나 눈싸움을 하거나 눈사람을 만들 때의 어린시절을 생각하게 되리라. 지금 첫눈은 꽃보라처럼 하늘거리며 땅으로 떨어지고있었다. 땅에 떨어진 눈송이는 춤추듯 흩날렸다. 그속에 끼여 첫눈을 맞고싶은 생각은 간절하지만 꽃보라를 받을 일이 없다는 쓸쓸한 마음으로 내다보기만 했다.
하늘하늘 떨어지던 눈은 점점 송이가 굵어졌다. 마당에 있는 측백나무에, 잔디우에 하얗게 씌워졌다. 불시에 소복하게 쌓인 정갈한 저 숫눈에 자기의 발자국을 찍고싶은 생각이 났다.
그러면 발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정갈함이 온몸에 퍼져나가는 쾌감을 느낄수 있을것같았다. 저도 모르게 불쑥 몸을 돌리던 수려는 주춤했다.
아서라, 내 무슨 생각을. 눈물이 핑 돌았다. 그 정갈한 숫눈우에 감히 올라설 자격을 잃었다는 생각이 들었던것이다.
공장에서 돌아온 후 수려는 곧장 대학연구소에 들어섰다.
나이가 지긋한 연구소소장이 수려의 이야기를 다 듣더니 시외에 있는 어느한 시험목장이야기를 했다. 게사니가 기본이였지만 오리도 많다는것이다. 한때 거기서 연구사로 일한 소장은 자기가 교섭해줄테니 거기서 연구사업을 계속하지 않겠는가고 물었다. 마침이였다. 수려는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그때부터 수려는 마음을 다잡고 시험목장에서 연구사업에만 전심했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시험사업이 잘되지 않았다. 이렇게 반응결과를 기다리는 사이도 놓치지 않고 열심히 책을 읽고 대조해보면서 사색을 무르익혀야겠는데 도무지 글줄이 들어오지 않고 오리공장 생각만 불쑥불쑥 나군 했다.
공장에 있은지는 몇달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어렸을 때부터 살아온 수도의 거리며 대학의 연구소보다 두단땅과 공장이 더 생각나니 이상한 일이였다. 그의 사색을 방해하는 사람은 한사람, 천호였다.
수려가 들어있는 연구실앞에는 한그루의 은행나무가 있었다. 수나무였다. 몇년생이나 되였는지 모르지만 수려가 왔을 때는 새노란 잎을 떨쳐입은 때였다. 지금 그 나무는 그 화려하던 잎들을 다 날려보내고 맨가지바람으로 홀로 서있었다. 그런데도 그때와 다름없이 수세가 좋았다. 푸른 잎, 노란 잎으로 단장했을 때보다 자기를 말짱 드러내놓은 은행나무는 름름한 사나이처럼 보기좋게 뻗어나간 가지를 흔들며 마치 누구를 기다리는듯 비바람도 눈보라도 혼자 이겨내며 어제도 오늘도 끄떡없이 서있었다. 하염없이 그 나무를 보느라면 때없이 천호의 모습이 얼른거리군 했다. 아무리 머리를 흔들어도 그의 모습을 털어버릴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그가 바로 내가 찾는 그런 멋쟁이란 말인가.
언제인가 대학시절 김장동원에 나간적이 있었다. 무우뽑기였다.
무우뽑기는 생각보다 훨씬 쉬웠다. 쉴참에 뽑아놓은 무우를 먹어보았는데 참배에 못지 않게 시원하고 달아서 거의 하나를 다 먹었다. 무우를 맛나게 먹는 처녀들을 보고 중년의 녀인들이 시까슬렀다. 어디 한번 맛있는 무우를 골라보라고, 무우를 잘 고르면 신랑을 잘 고른다나. 그말에 손길이 무춤해졌다. 어째서인지 거짓말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숱한 사람들앞에서 잘 골랐다는 칭찬을 듣는것도 어색하고 또 못골랐다는 비난을 받기도 싫어 뭇시선을 피해서 보기도 좋고 맛도 좋아보이는 길둥그런 무우를 골라서 맛을 보았다. 좀 매울사 했지만 즙이 많고 맛이 괜찮았다. 그렇다면 내가 잘 골랐다는걸가?! 신랑감도 잘 고를게고.
그러던 수려는 얼굴을 붉혔다. 저도 모르게 녀인들의 말에 끌려들어가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한게 아닌가. 로동현장에서의 괜한 익살과 즐거움이라고 웃으며 넘기려 했지만 왜서인지 무우무지앞에 서면 바재이던 그때의 마음처럼 아무거나 선뜻 짚지 못했다.
이번엔 천호와 나란히 자전거를 타고 만경봉으로 올랐던 일도 생각났다.
수려는 밤이 지새도록 천호와 오래오래 있고싶었던 그날의 감정에 잠겨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그와 함께라면 현대화의 중요고리인 미생물발효제생산의 공업화도 그리 어렵지 않을것같았다. 보다는 그가 말하던 오리의 생리적특징과 음악효과에 대한 연구가 흥미를 끌었다. 같은 리상과 목표를 지닌 지성인들이기에 그들은 누구의 소개도 없이 인차 통할수 있었다.
대학생때처럼 다시한번 경쟁할가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으나 그보다 둘이 마음과 힘을 합쳐 세계첨단을 향해나가자는 약속이 더 마음에 들었다. 그랬다. 발은 여기 두단땅에 든든히 붙이고 고개는 세계를 향해 버쩍 들자. 하나의 공통된 지향은 순결하고도 창공을 치달아오르는 정열로 가슴속깊은 곳에서 사랑의 싹으로 파랗게 움터났다.
언제부터인가 수려는 자기와 같이 늘 사색하고 창조하는 인생의 길동무를 그려보군 했었다. 어떤 사람이여야 할가, 같이 걸어도 서로 짝지지 않고 지나치면서도 뒤를 한번 돌아보고싶어지게 생긴 사람, 겉모습만 아니라 안팎으로 갖추어진 그런 멋쟁이가 있을가? 설혹 겉모습은 좀 못하다 해도 지적으로 보충만 된다면 기꺼이 멋쟁이라고 부를수 있을것같았다. 가슴속에 간직된 그 자리로 누군가 점점 다가오는 대상이 있었다. 조용히 입속으로 그 이름을 뇌여보면 그 무엇에도 견줄수 없게 가슴이 설레이군 했다. 그는 천호였다. 그러면서도 그앞에서는 천연스레 아직 멋쟁이를 고르지 못했다고 했었지. 연연한 싹이 어느새 자라 아름다운 꽃을 피울 차비를 서두르는 때 뜻밖에 불어온 광풍에 피여나지도 못한채 꽃망울은 떨어지고말았다.
수려는 그날에 조용히 울리던 그 증폭기를 꺼냈다. 이걸 천호에게 남겨놓지 못한게 후회되였다. 아니,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몰랐다.
이제는 모든것을 단념해야 했다. 두번다시 천호 생각을 하지 말자. 이윽고 수려는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오후엔 계획한대로 대학의 연구소로 가서 자기가 분석한것을 알아보아야 했던것이다. 그사이에도 눈은 계속 내리고있었다. 그저 발이 좀 가늘어졌을뿐이였다. 그러나 수려가 연구소에서 일을 다 보고 다시 시험목장으로 가려고 나왔을 때는 거리가 온통 물천지였다. 그사이 날이 푸근해져서 쌓였던 눈은 다 녹아버리고 언제 눈이 내렸더냐싶게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고있었다. 엷은 수건만 두른 코트차림인데 이대로 걸었다간 인차 물자루가 될것같았다.
수려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성거리며 안타까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