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0 회)

제 4 장

꽃은 꽃밭에서만 피는것이 아니다

3

 

어느새 추운 겨울이 지나갔는지 벌써부터 훈훈한 바람결이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쓸었다. 립춘을 넘기자 주근주근 비가 자주 내리여 땅을 녹였다. 우수가 되기 전에 얼음이 다 풀린 대동강이 처절썩거리며 기슭을 치는 소리가 오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부풀게 했다.

궤도전차에서 내리자바람으로 동뚝길에 올라선 수려는 강안을 내려다보며 걸어갔다. 늦가을에 흩날리는 락엽을 밟으며 이 길을 걸어갈 때 얼마나 쓸쓸했던가. 그때도 바람이 불어치며 물갈기를 날렸었다. 물론 아주 간다고 생각하면서 떠났던것은 아니였다. 그러나 이렇게 빨리 오게 될줄은 몰랐다. 그날 목장에 찾아왔던 신형일당비서가 아니라면 이런 결심을 내릴수 있었을가. 감회도 새로운 눈으로 저 강물을 내려다볼수 있을가. 수려는 나직이 단숨을 내쉬며 생각에 잠겼다.

그날은 점심때가 퍽 기울어진 때였다. 마지막실험을 끝낸 후 식당에 갈 생각으로 반응결과수치를 적는데 조용히 기척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아마 분석공처녀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수려는 자기가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라면 자기가 왜 돌아볼념도 못하고 부지런히 적는지 알것이니까.

드디여 반응수자를 다 적은 수려는 이마에 드리워진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순간 깜짝 놀라서 튀여나는 공마냥 일어났다.

문가에 뿌리라도 내린듯 신형일당비서가 서있는게 아닌가.

《어마나!》

《방해한게 아니요?》

《아닙니다. 다 끝났습니다. 어서.》

어떻게나 당황했던지 하마트면 의자를 들고 문가로 갈번했다.

당비서는 우선우선한 표정으로 권하는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두리번거리며 실험실 겸 침실을 살펴보았다.

수려는 부끄러웠다. 반듯하게 정돈되지 못한 침대보, 그옆에 접은채로 있는 책들, 책상우엔 또 무엇이 저렇게 쌓였담. 이제 와서 치운다는게 어색해서 실험대옆에 그냥 서있었다.

《공장에서 하던 연구사업을 여기서 계속한다기에 너무 반가워서 찾아왔소. 글쎄 어디 가서든 자기가 계획했던 연구사업을 계속하겠지 아무렴 허술하게 집어던지겠소?》하며 가지고온 네모지게 싼것을 내놓았다.

《이건 우리 공장에 깃들어있는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사적자료요. 아마 도움이 될거요.》

사적자료를 안으며 수려는 눈을 내리깔았다. 무슨 말이든 해야겠는데 입이 열려지지 않았다. 눈이 온 날 아니, 비가 오는 날이라고 해야 더 정확했다. 그날 천호는 차안에서 당비서가 기다린다고 했었다. 얼마나 욕을 했을가. 얼마나 실망했을가. 미안하다고 해야 하겠지만 입이 열려지지 않았다.

수려는 일이 다 튀여나간 다음에야 구구히 설명하는것을 질색했다.

그는 이렇게 저렇게 자기를 변명하려드는것을 수치로 여기는터였다. 오늘 자기에게 이렇게 사적자료까지 안겨주는 당비서에게 그저 《고맙습니다.》하고 인사말을 하며 고개를 더 푹 숙였다.

당비서는 공장의 현대화정형과 천호네 연구조의 소식을 알려주었다. 그리 류창하지 않는 한마디 한마디였지만 연구조가 겪는 실태와 고심을 헤아리기에는 충분했다. 한마디로 연구조와 현장기술의 불일치에서 오는 난점들이였다.

수려의 고개는 점점 떨어졌다. 바로 기술협의회때 자기가 제기한 말이 생각나서였다. 자기는 반드시 연구사업을 위한 연구사업이 아니고 공장의 현대화실현을 위한 사업이기에 대학연구사들과 공장의 현장기술자들과의 련계를 긴밀히 해야 한다고 제기했었다. 모두의 찬동속에 자기도 망라된 연구조가 조직되였고 크나큰 희열속에 첫 연구사업을 시작했었다. 그런데 연구사업이 한창 고조에 오를 때 자기는 여기 목장으로 도피했고 그것으로 시험사업은 전진을 못한다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렇다고 아버지의 문제를 알고서야 어떻게 공장에 그냥 있을수 있으며 천호앞에서 머리를 들수 있는가.

그러나 지금 연구조 연구사업이 여느때보다 더 절박하다는것, 더우기 공장에 다시 오지 못할 리유가 천호앞에 서지 못할 일이라면 그를 다른 사업에 조동시키는 문제까지도 론의할 생각이라고 하는 당비서의 말을 듣자 더 견디지 못했다.

《아니, 그래서는 안됩니다. 천호동무를 다른데로 보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가겠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갈피를 잡을수가 없게 자기 모순에 빠졌다는것을 알고 고개를 드니 당비서의 눈가에 미소가 어려있었다. 수려는 화끈 얼굴이 달아올랐다.

또다시 고개가 숙어졌다.

의자소리가 나서야 수려는 당비서가 일어났음을 깨달았다.

그때에야 점심식사생각이 나서 한마디 비쳤으나 그는 가볍게 사양했다. 더 권했다간 차를 타고가서 같이 식사하자고 할수 있었다. 수려는 그저 허둥대는 몸을 다잡으며 인사를 할수밖에 없었다. 당비서는 수려를 보며 이런 말을 했다.

《연구사선생, 오리들은 자기 무리에서 떨어지면 죽는것으로 안다오.》

《예?!》 놀라며 고개를 드니 이미 당비서는 돌아서고있었다.

당비서가 남기고간 그 말은 오래동안 수려의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날 밤 수려는 당비서가 주고간 사적자료를 탐독했다.

해방전부터 흘러온 우리 나라 축산에서 오리는 거의 없었다. 오리가금업의 새 력사는 전쟁시기부터 시작되였다. 전쟁이 한창인 때 군용비행기로 오리알을 실어오게 하신 어버이수령님의 조치를 읽어나갈 땐 한참이나 눈물을 닦아내군 했다.

준엄한 전쟁시기에 시작된 오리사육은 조건도 불비했지만 불비속에서 싹튼 새싹에 불과한 오리업을 짓뭉개기 위해 날뛰던 계급적원쑤들과의 싸움도 치렬했다.

우리 인민들에게 고기를 먹이시려는 어버이수령님의 사랑속에서 처음으로 무어진 오리작업반으로부터 오리목장, 두연오리공장으로 발전해온 공장의 력사는 수려를 크게 감동시켰다.

더우기 세간난 자식들의 살림살이를 보아주시는 부모의 심정으로 공장을 찾아주신 수령님께서 공장살림을 하나하나 보살펴주신 자료들을 읽어나가는 사이 수려는 몇번이나 눈굽을 닦았다. 제일 감동된것은 점심시간이 지나도록 공장의 운영을 알아보신 수령님께서 《두단령감》이 올리는 오리알을 쾌히 받아주신 사연이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우리 인민들이 오리고기와 알을 잘 가공할줄 모른다는것을 아시고 친히 그 수범을 보이시려고 생각하신것이다.

저택에 도착하신 수령님께서는 부관에게 사기단지를 가져오라고 하시고는 웃옷을 벗으시고 오리알을 절구시였다. 수령님께서 절군 오리알을 처음으로 맛보신것은 왕청유격근거지에 계실 때였다. 근거지녀성들이 수령님께 그날 절군 오리알을 드리였는데 몇십년이 흘러간 후에도 그 맛을 잊을수 없다시며 손수 담그신것을 단지채로 공장에 보내주셨다는것이다.

우리 인민들에게 고기를 먹이시려고 그렇게도 마음을 써오시고 문명한 식탁을 마련해주시려고 일일이 가르쳐주신 그 사랑을 과연 무슨 말로 다 전할수 있겠는가.

수려는 그 자리에 더 앉아있을수가 없었다. 가슴 한가득 차오르는 격정을 그대로 새기기 힘들었다. 이제껏 시험목장에 와서도 연구사업을 계속하고있다고 위안했던 생각이 물거품마냥 잦아들었다. 괴롭지만 인정해야 할건 여기서의 연구사업은 엄연히 도피인것이였다.

수령님의 사랑속에 태여나고 성장해온 두연오리공장은 장군님의 뜻을 받들어 현대적인 본보기단위로 일어나고있는데 너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있느냐.

수려는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아직 털단백시험을 완성하지 못한건 현장과의 밀접한 련계, 현장기술자들과의 공동연구가 진행되지 못한데 원인이 있었다. 이젠 우물쭈물할새가 없었다. 다하지 못한 시험은 공장의 기술자들과 합심하여 완성하고 다량생산을 위한 공업화를 실현해야 한다. 언뜻 천호의 치뜬 눈길이 떠올랐지만 수려는 도리를 저었다.

그를 잊어야 한다는 결심에서는 변함이 없지만 연구사업의 성공을 위해서는 공장에 가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지금 공장으로 돌아오고있는 길이다. 어깨에 멘 가방속에는 당비서가 준 사적자료가 들어있었다. 묵직하게 어깨를 누르는건 자료의 무게만이 아니였다. 눈앞에 신형일당비서의 얼굴이 선명히 떠올랐다. 긴 설명이 없이도 허둥대는 자기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준 고마운 사람, 천호를 조동시키면 어떤가고 물으며 미소를 피워올리던 그 얼굴, 그것은 분명 자기를 떠보는 물음이였지만 그것이 싫지 않고 오히려 마음이 따뜻해지는건 무엇때문일가. 그는 분명 사람들의 가슴에 불을 지필줄 아는 사람이였다. 무슨 말로 인사를 해야 할가. 이길로 찾아가야 할가?! 아니, 전심전력해서 공장에 걸린 문제를 푸는것만이 그에 대한 인사이고 보답이다. 수려는 어깨에 멘 가방을 추스르며 걸음을 재촉했다. 저 멀리 공장이 보이자 그의 걸음은 더 빨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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