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2 회)

제 4 장

꽃은 꽃밭에서만 피는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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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동뚝아래로 유유히 흐르는 강물도 모두 자기를 위해주고 자기 마음을 알아주고 손저어주는듯했다. 어서빨리 집에 가고싶었다. 우리 천호가 얼마나 좋아하랴. 로친은 아마 울지 모른다. 하긴 나도 울지 않았던가.

문득 수려라는 처녀의 얼굴이 눈앞으로 떠올랐다.

순결한 꽃을 보는듯하면서도 어딘가 진지한데가 엿보이는 처녀였다. 곱살한 얼굴인데도 요염해보이지 않았고 행동거지가 참했다. 이 소식을 들으면 처녀가 얼마나 기뻐할가. 그 처녀앞에 떳떳해진 자기를 그려보니 가슴이 불쑥 나왔다.

아무렴, 우리 천호곁에 좋은 처녀가 서기마련이지.

학선은 흥떡이는 가슴을 안고 걸었다.

어디서 그런 기운이 나오는지, 하긴 당비서가 날보고 10년은 젊었다고 했었지. 정말 고마운 사람이다.

저 멀리 공장마을이 보였다. 그는 마치 이 땅을 처음 밟아보는 사람처럼 두리번거리며 걸었다. 실은 아는 사람을 만났으면 하는 심정이였다.

그렇게 또 한참 걸었다. 멀지 않은곳에 있는 버드나무가 보였다. 사연많은 저 버드나무, 오늘도 저 버드나무는 나의 모습을 보아주누나. 축축해지는 눈가를 비비던 학선은 눈이 커졌다. 낯익은 사람이 사택마을에서 나와 동뚝으로 오르고있었다. 장대한 키와 고개를 곧추 들고 천천히 걷는 거만한 자세, 그는 틀림없이 강시연이였다. 그가 공장에 왔다는 소문을 듣고 만나기를 꺼려했는데 다행히도 이제껏 한번도 만나지 않았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차라리 잘됐다. 오늘같은 날 그앞에 떳떳이 나선다는건 얼마나 좋은 일인가.

학선은 그 누가 우정 이런 기회를 만들어준것같은 쾌감을 느끼며 그앞으로 다가갔다.

《나를 아시겠소?》

학선은 키가 큰 강시연을 올려다보았다.

강시연은 좀 늙은듯했지만 그전보다는 오히려 몸이 부해진듯했다.

귀밑에 희슥한 흰머리카락이 몇오리 나불리였지만 여전히 꿋꿋한 자세였다.

강시연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실수하지 않나 하고 내려다보는듯한 표정이였다.

《학선이우다.》

그런데도 강시연은 여전히 무표정이였다. 표상도 기억도 없는 모양이였다.

《하긴 그렇지. 이름을 인차 기억하지 못하겠지. 내가 바로 당신의 취급을 받은 여기 공장의 전 기사장이우다.》

마지막에는 목소리가 어지간히 퉁명스레 나갔지만 한껏 기분이 좋은 때인지라 학선은 또박또박 자기를 밝혔다.

《그럼 차학선?》

강시연이가 입을 딱 벌렸다.

《맞소, 내가 바로 그 차학선이요.》

학선은 그러며 허리를 폈다.

《내 그전에 공장에 내려왔다는 말은 들었지만 오늘에야 만나게 되는구만. 고생이 많겠소.》

《오히려 나를 위안하는군. 이렇게 세월이 흐른 다음에 생각해보니 이모저모로 사죄할 일이 많이 생기요.》

강시연이가 고개를 약간 숙여보였다.

《참, 세월이 흘렀수다. 쇠소리가 짱짱 나던 강부장이 이젠 한풀 죽은걸 보니, 허허.》

학선은 빙긋거리며 강시연을 올려다보았다. 만약 오늘의 기쁨이 없었더라면 이렇게 흥그러이 그를 바라보며 웃음발을 날릴수 있을가?

《내가 지금 어디 갔다오는줄 아시우?》

《?!》

강시연은 묻는듯한 눈길로 바라보기만 했다.

《어디 좀 앉읍시다. 아, 저기가 좋겠군.》

학선은 버드나무가 서있는 동뚝우의 펑퍼짐한 자리를 가리키고는 제먼저 성큼성큼 앞서 걸었다. 파릿파릿 돋아난 햇풀이 나풀거리는것을 보자 학선은 그옆의 묵은 잔디우에 그대로 퍼더버리고 앉았다. 한잔 들이킨 기분에 자기를 보여줄 상대까지 만난김이라 학선은 구름이라도 휘여잡은 기세였다. 검불이 묻은들 무슨 대수랴. 유유히 흘러가는 대동강을 마주하니 마음이 한껏 넓어졌다.

학선은 아직도 자리를 잡지 못하고 엉거주춤하는 강시연을 올려다보며 을러메듯 입을 열었다.

《이 버드나무는 내 인생의 목격자나 같다우. 오늘 가슴터질듯한 희열을 안은 내 모습도 고스란히 지켜보는구려.》 이렇게 달아오르는 가슴을 터치고는 《내 지금 시당에 갔다오는 길이요.》하고 강시연을 바라보았다.

《예?》

강시연은 훌쩍 몸을 솟구는듯하더니 털썩 마주앉았다.

《말하자면 새로 태여났지. 공장의 기술고문으로 임명해주었다우. 년로보장으로 들어갔던 내가 말이요.》

《축하합니다. 정말 기쁘겠습니다.》

강시연의 말에는 진심이 어려있었다.

《내 오늘 누구를 만났는지 아시우?》하며 강시연을 넌지시 바라보고는 《아마 내 말을 들으면 깜짝 놀랄거우다. 그렇다고 까무라치지는 마시우.》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시당정문을 척 나서니 누구에게라도 이 소식을 터치고싶어 걸음을 옮길수가 있어야지요. 글쎄 시내에 사는 딸네가 있지만 지금이야 집에 없을게고 전화로 간단히 소식이나 전해서는 성이 찰것같지 않더란 말이우다.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일념을 못하는데 당비서동지가 집으로 가자고 하는것이였소. 차는 통일거리에 있는 당비서동지의 아빠트앞에서 섰는데 나더러 입원했던 아버지가 퇴원했을거라며 올라가보라는게 아니겠소. 영문도 모르고 올라갔지요.》

학선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한대 붙여물고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학선이가 당비서의 집문을 두드리니 얌전해보이는 녀인이 문을 열었다. 당비서의 처였다. 공장의 전 기사장이라고 했더니 녀인이 반갑게 맞으며 어서 들어오라고 했다.

《당비서동지가 아버지가 퇴원했을거라며 올라가보라고 해서…》

아버님은 퇴원했습니다.》

《그래요? 그래 좀 어떻습니까?》

《퍽 좋아지셨습니다.》

학선은 녀인을 따라 조심스레 방안으로 들어갔다.

해빛이 따스하게 비치는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있던 로인이 웃몸을 일으켰다. 창백한 낯에 발가우리 홍조가 비끼는 그의 얼굴을 보니 당비서가 신통히 아버지를 닮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어쩐 일인지 이전부터 잘 알고있은듯한 생각이 들었다. 아마 늘 당비서를 보았댔으니 그런 생각이 드는게지.

《공장의 전 기사장입니다. 입원했댔다고 하던데 건강이 어떻습니까?》

웬일인지 로인이 대답을 않고 자세히 바라보기만 했다. 갑자기 미소가 어린 눈가가 푸들거리더니 그가 당장이라도 일어날듯 두팔을 쩍 벌렸다.

《그전날 모습이 아직 있구만. 학선이, 나를 모르겠나?》

《?!》 학선은 어리둥절해졌다.

《이런, 동갑이도 모르다니?》

《동갑이라니? 그럼 그전날 대성산…》

《그럼, 그럼.》

학선은 어떻게 그를 덮치듯 그러안았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다가는 다시 보고 그러다간 다시 그러안고.

수십년의 세월이 애어린 청년이던 그들의 모습을 주름살투성이로인으로 변모시켰지만 그들은 한순간에 저 멀리로 사라졌던 정회를 가슴에 한가득 안았다.

잠시후에 그들은 며느리가 차린 상앞에 마주앉았다.

《자, 편안히 앉으라구. 자네를 오래전부터 만나고싶었는데 오늘이야 만나는구만.》

《그러니 나에 대해서 이미 다 알고있었다는건가?》

《그럼. 우리 애가 임명되였을 때부터 내가 당부했었지, 내 인사를 전하라구. 언제인가 편지에 두단에서 기사장을 한다구 하지 않았댔나. 아마 외국출장을 떠날 때인가보네.》

학선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따금 부대에 편지를 하군 했었지.

《자, 어서 나와 맞잔을 찧으세. 내 몸이 허락치 않아 많이는 못해도 동무는 해줄수 있소. 차동무를 축하하오.》

《허, 그런데 수술을 했다던데 어디 아파서 입원생활을…》

《전쟁시기에 박힌 탄알이 말썽을 부리는구만. 그것때문에 군복을 벗긴 했는데…》

《…》

갑자기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전날엔 막역한 동갑이친구였지만 지금은 공로있는 로병이라는 생각이 그제야 머리를 때렸다. 더우기 공장당비서의 아버지라는 생각이 온몸을 감아올렸다.

《왜 갑자기 굳어지나. 우리야말로 한해에 태여난 동갑이들인데. 이보우 차동무, 실은 동무가 범한 과오란 일을 잘하자고 애를 박박 쓰는 과정에 생긴 과오라누만. 얼마든지 관대하게 처리될수 있는 일이였는데 그만 그 일을 맡은 사람들의 관점과 작풍으로 하여 그렇게 됐던거라누만. 얼마나 가슴아프오. 또 기사장이 현장에서 많은 시험자료들을 보내왔기때문에 다 수습된것도 고려되여야 했었는데… 오히려 해임까지 됐으니 얼마나 괴로웠겠소. 우리 일군들이 오리만 보았지 인간을 보지 못했기때문이요, 인간을. 참 가슴아픈 일이 아닐수 없소.》

로인이 피곤한듯 침대모서리에 웃몸을 기댔다.

《아니, 아니. 힘들게 가져온 귀한 오리들이 그렇게 많이 죽은건 순전히 내 책임이라니.》

차학선은 급해나서 황황히 팔을 흔들었다.

《그만하오. 내 다 들었소. 동무의 문제를 취급한 그 사람, 그 강시연의 입당보증인이 바로 나요. 입당보증인으로서 내가 그의 생활을 끝까지 책임지지 못했소.》 …

《뭐라구요?!》

앞에 앉아 학선의 말을 듣고있던 강시연이가 벌떡 일어난것은 이때였다. 한순간에 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졌다.

《그러니 신호준동지를 만났댔단 말이요? 아니, 호준동지가 당비서의 아버지라구?》

학선은 오히려 강시연을 놀랍게 바라보았다.

《그러니 정말이였구만.》

학선은 한숨을 내쉬며 눈길을 떨구었다. 도무지 강시연의 일이 남의 일같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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