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3 회)

제 7 장

우리는 젊은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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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는 오늘에야말로 진정으로 그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옆에 앉았다. 옳은것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모든것, 사고와 행동은 물론 지어는 의지까지도 복종시킬줄 아는 담대한 기질과 그것을 위해 서슴없이 내닫는 열정, 그러면서도 꾸민것이 아니라 저절로 넘쳐나는듯한 발랄한 생기, 더우기 이 모든 자기의 우점을 의식조차 하지 않는데서 나타나는 그의 정신적인 매력.

그러나 자기를 두려워하는듯 웃몸을 겉옷으로 꼼꼼히 싸며 땅바닥만 내려다보고있는 정아를 보느라니 그런 충동보다 자기가 이렇게 혼자 있는 처녀를 찾아온것이 좋은 일인가 어떤가 하는 의문이 먼저 머리속에 떠오르는것이였다.

(도대체 우물쭈물할게 뭐란 말인가!)

자기가 심중한 기색을 지을 때마다 그런것처럼 혹시 이번에도 정아가 대수롭지 않은 롱이라는듯이 처신하지 않으려나 해서 진호는 그를 흘끔 바라보았다.

아니나다를가 이번에도 정아는 자기에게서 어떤 심각한 표정을 눈치채고는 얼굴표정뿐 아니라 정신상태까지 일변시켰다. 그의 얼굴에는 별안간 본의아닌 웃음이, 그것도 여느때와 같은 티없는 웃음이 아니라 일부러 짓는듯한 그런 웃음이 퍼졌고 눈길 역시 어딘가 안정성이 없어보였다.

《참! 아까 태수동무가 무슨 얘기를 했어요? 모두들 정신없이 그의 얘길 듣더군요.》

자신에 대한 얘기였소. 은심동무를 어떻게 사랑하게 됐는가 하는 얘기.》

《그래요? 그럼 같이 들을걸. 저도 언젠가 그들에 대한 얘길 듣긴 했어요.》

화제가 다른데로 번져진것을 다행으로 여긴 정아는 얼른 발앞에 있는 납작한 자갈 하나를 집어들었다.

《전 그들의 사랑이야말로 세상사람들, 특히 우리 세대모두의 열렬한 행복의 축복속에 만발해야 할 그런 사랑이라고 봐요. 그렇지 않아요?》

《옳소,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오. 난 그의 얘기를 들으면서 우선 태수와 같은 친구를 동무로 가지고있는 자신에 대한 긍지를 새삼스레 느끼지 않을수 없었소. 그리고 다른 하나는 사랑이란 확실히 참다운 리해를 통해서만 꽃피고 열매맺는다는걸 더욱 절실히 깨달았소. 서로에 대한 진정한 리해가 없다는것은 그야말로 과일나무에 야생목을 접하는것과 같이 어렵고 어이없는 일이란걸 말이요. 난 이렇게 말하고싶소. 진정한 사랑이란 두사람이 주고받는 애정의 량이 서로 같을 때라야 제대로 꽃필수 있다고 말이요.》

《같을 때라구요?》

《그렇소, 같을 때!》

정아는 진호가 무엇을 념두에 두고 하는 말이라는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니까 아직도 용서할수 없다는건가요?》

《물론 이젠 용서야 할수 있겠지요. 그러나 용서와 사랑은 서로 다른게 아니겠소.》

《그렇다면 그건 용서가 아니지요.》

정아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용서를 하려면 깨끗이 해야지요. 진정한 용서란 외면하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손을 내밀어주고 진정으로 리해해주는게 아니겠어요. 태수동무가 은심동무를 대한것처럼 말이예요. 말하자면 사랑이지요.》

손에 들었던 돌을 던지는 그의 행동에는 진심으로 뭔가 못마땅해하는것이 있었다.

아닌게아니라 정아는 지금 자기가 평시에 진호에게 품고있던 불만을 더는 감춰서는 안된다는 생각과 함께 특히는 그것을 드러내보임으로써 어떤 온당치 못한 감정에 휘말려드는듯한 자신을 더는 방임해서는 안된다는 결심이 솟구쳤던것이다. 고개를 든 그는 꼿꼿한 눈으로 진호를 마주보았다.

《동무의 태도를 보면 어쨌든 자기를 믿고있는 한 처녀앞에 지닌 남자의 의무에 대한 저의 생각과는 달라요.》

《?!》

《동문 자기 요구에 맞는 대상을 고르는것을 응당한 일로, 그런 사람을 찾는것을 행복으로 여기지요. 그러나 그게 사랑일가요? 진실한 사랑이고 행복일가요? 전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봐요. 사랑이라고 해도 아무 가치도 없는 사랑이라고요.》

진호는 어리둥절해지지 않을수 없었다.

아직 저로서는 한번도 생각해본적이 없는것을 사랑에 대한 아무런 체험도 없는 처녀가 확신에 넘쳐 말하기때문이였다. 그러나 세상에 일생의 동반자로 삼을 대상에게서 자기의 요구와 지향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 누구며 또 그걸 바란다고 해서 나쁠게 뭐란 말인가 하는 생각만은 머리에서 지워지질 않았다.

《가끔 전 이런 생각을 해요. 진호동무가 자기 사업, 연구사업에서처럼 사랑에도 그렇게 주의를 집중한다면 틀림없이 남다른 행복을 누릴수 있을거라구요. 하지만 진호동문 과학은 창조할줄 알아도 사랑은 창조할줄 모르거던요. 아니, 하려고 하지 않지요. 사랑도 과학과 마찬가지로 창조하는것이라고 여기지부터 않으니까요.》

(사랑도 창조해야 한다?)

진호는 또 한번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정아의 두눈은 점점 열기를 띠고 반짝였다.

《그래요, 사랑도 창조해야 하구말구요. 만약 사랑을 동무처럼 생각한다면 꽃들이 만발한 화원이나 열매들이 주렁진 과원에서 제 마음에 드는 꽃을 꺾거나 입에 맞는 열매를 따는거나 다를게 뭐예요?

그래 그걸 사랑이라고 할수 있어요? 전 진실한 사랑이라면 그런 꽃과 열매를 따기 전에 자신의 힘으로 그렇게 아름답고 탐스럽게 가꿔야 한다고 봐요. 태수동무처럼 말이예요. 전 그래서 태수동무를 존경해요.

사람은 누구나 사소한 부족점들은 다 가지고있는 법이예요. 서로의 부족점을 서로가 도와주어 고쳐가는 과정이 곧 진정한 사랑이 아닐가요? 그래서 바로 행복이 창조과정에 있다는 진리가 생겨난게 아닐가요?》

《?!》

어떤 호된 타격을 받기라도 한것처럼 얼떨떨하기만 했다.

(서로의 부족점을 고쳐가는 과정이 참된 사랑이라구? 그래서 행복이 창조과정에 있다구?)

너무도 아름찬 의미가 내포돼있어서 단번에 소화하기는 도저히 어려웠다.

《이런 말 한다고 욕하지 마세요.》

갑자기 고개를 아래로 떨군 정아는 가는 목소리로, 마치 잘못을 비는 사람의 가냘픈 어조로 말했다.

《사실 제가 이런 말 하는건…》

그의 목소리는 더욱 잦아들었다.

《진호동무에 대해서라기보다 제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해요. 저 역시… 저 역시 사랑하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그렇게 대하지 못하고있으니까요.》

진호는 대번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혹시 자기가 잘못 듣지 않았나 싶었다.

(설마?)

그러나 모든걸 눈여겨 살피는 일이 덜한 사람이라면, 진정 정아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에게서 각별한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테지만 진호는 그 어떤 새로운것을, 오직 사랑을 두고 고민하는 처녀에게서만 나타나는 그런 표정을 정아의 얼굴에서 발견하지 않을수 없었다. 탐스런 볼과 꼭 다문 입술의 아름다운 륜곽 그리고 두눈에 비낀 고민은 확실히 우수에 젖어있었고 그것은 어쩐지 마음을 아프게 하는것이 있었다.

《…》

진호는 뭐라고 해야 할지 할말을 찾을수가 없었다.

이때 《오빠―》하는 웨침과 함께 이쪽으로 달려오는 발자국소리가 들리였다.

《아이, 난 또 오빠 혼자 있는줄 알았네.》

못내 송구한 표정을 지은 진희였으나 그것은 순간에 불과했다.

《빨리 오래요. 주패놀이를 하자구요. 짝이 맞지 않는가봐요.》

고개를 숙인채 잠자코 있던 진호는 한참만에야 자리에서 일어나 동무들이 있는 곳을 향해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저쯤 멀어진 오빠의 뒤모습을 지켜보고나서야 진희는 정아옆에 쪼그리고 앉으며 나직한 소리로 속삭였다.

《미안해요, 언니.》

《안야, 일없어! 일없어!》

진희의 팔목을 잡아 옆에 앉힌 정아는 저도 모르게 그를 꼭 그러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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