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 회)
제 1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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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느덧 날이 저물었다. 저녁하늘에는 아직 빛이 여물지 못한 풋별들이 떴다. 김윤화는 온몸이 땅속으로 잦아드는것만 같았다. 자기가 몹시도 지쳤다는것을 깨달았다. 쉬고싶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남편 김승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느한 기업소의 당비서로 일하는 남편은 김윤화와 마찬가지로 몹시도 바빴다. 그들은 서로가 꼭같이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그래서 그들은 꼭 만나고싶을 때에는 서로에게 전화를 걸었다. 딸 정혜는 그런 전화를 두고 《약속전화》라고 했다. 보고싶은 경우보다는 마음이 번거로와 위안을 받고싶거나 조언을 받고싶은 일이 생길 때마다 부부는 그런 전화를 걸군 했다. 그런 전화를 받으면 부부는 아무리 바빠도 집으로 오군했다. 오늘도 남편은 단마디로 알았노라고 대답했다.
전화를 놓고나서 김윤화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였다. 오늘 자기가 남편에게 할 이야기가 많다는것을 깨달았다. 공장일이 잘되지 않는 이즈음에는 남편보다 자기가 《약속전화》가 더 많다는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으며 천천히 사무실을 나서 집으로 향했다.
집에는 고급중학교 졸업반에 올라간 딸 정혜가 먼저 와있었다. 그 애는 부엌에서 밥을 짓고있다가 나는듯이 달려와 어머니에게 매여달렸다. 전실에 딸애가 붙여놓은 여러가지 그림들이 눈에 띄였다. 김윤화는 그 그림들을 볼 때마다 매번 마음이 야릇해지군 한다. 딸애는 몇년전에 초급중학교를 졸업하며 미술대학 예비교육학부에 입학하려 했지만 입학하지 못하였다. 딸애가 입학시험을 치던 날도 김윤화는 너무나 바빠 가보지 못했다. 결국 딸애는 입학하지 못했다. 김윤화는 미안해졌고 또 한편으로는 노여워졌다. 그는 딸애가 자기 실력으로 입학하리라고 믿었던것이였다. 김윤화는 딸애에게 그동안 그림 련습을 한것을 보자고 했다. 그런데 딸이 내놓는것은 온통 어떤 둥근 원통을 소묘한 한가지 그림뿐이였다. 김윤화는 아연해졌다.
《1년가까이 미술소조를 다녔는데 고작 이 원통 하나 그린게 다란 말이냐? 기가 막히는구나! 그러니 입학하지 못했지.》
순간 어머니의 얼굴을 낯선듯 바라보는 딸애의 눈에는 반짝거리는 눈물방울이 맺혔다. 딸애는 울먹울먹하며 소리쳤다.
《엄만 내 그림을 오늘 처음 봐주니까 그래요. 이 원통 하나를 난 반년동안이나 그렸어요. 여기에 얼마만한 노력과 시간이 들어갔는지 엄만 몰라! 다른 엄마들은 소조실까지 와서 그림그리는걸 봐주는데… 엄만 나빠!》
김윤화는 그만 당황해져버렸다. 자기가 일에 파묻혀 딸애에게 너무도 무관심했다는것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 일이 있은 다음부터 딸애는 자기의 그림들을 전실이나 방안에 붙여놓군 했다. 자기에게 관심을 돌려줄것을 바라는 딸애의 애모쁜 호소인것이다. 그 호소앞에 김윤화는 매번 미안해지고 당황해지는 심정이였다. 오늘도 그는 잘 그렸는지 못그렸는지 자기로서는 잘 알수가 없는 딸애의 그림들을 다소 당황해서 살펴보았다. 딸은 어머니가 몹시 지쳤다는것을 인차 알아차린 듯했다. 딸애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머니, 어디 아프나요?》
김윤화는 힘없이 웃어보였다.
《어머닌 좀 힘들구나.》
딸애는 눈이 둥그래서 어머니의 이마를 짚어보더니 방으로 떠밀었다.
《어서 들어가 좀 쉬세요. 참, <약속전화> 를 했나요?》
딸애의 앞이지만 면구한 생각이 들어 김윤화는 머리를 가로저어보였다.
《내가 전화하겠어요. 어머니가 앓는다고 하겠어요.》
김윤화는 그저 웃어보이고말았다. 딸은 어머니를 방으로 떠밀었다.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여며주고는 방을 나갔다. 그리고도 걱정스러운지 방문을 다시 열고 조심스럽게 들여다본다. 그러더니 전실에서 아버지에게 전화를 거는것같았다. 김윤화는 침대에 누운채 소리없이 웃었다. 온몸이 어느덧 아늑하고 따스한 기운에 칭칭 감겨드는것같았다.
김윤화는 자기가 벌써 반쯤 잠에 취한듯한 느낌을 받아안았다.
아, 가정이란 얼마나 좋은것인가?
문득 어제날의 화폭이 눈앞을 흘러간다. 밥잦는 냄새가 집안팎을 구수히 흘러가는 저녁녘, 남편은 자기 책상을 뒤적이며 소리친다.
《여보, 내 영어사전을 못봤소? 이게 어디 들어가박혔을가?》
하지만 부엌에서 저녁준비에 바쁜 김윤화는 대답할사이조차 없었다.
조급해난 남편은 사정조로 웨친다.
《제발 내 사전을 좀 찾아주오.》
《야, 밥이 타요, 밥이! 당신은 참! 그저 잊어먹구는 날보구만…》
옹알거리는 목소리다. 하지만 그 소리마저 마치 노래가락처럼 곱고도 맑다. 그 순간에 아이가 운다. 오래동안 아이가 없던 그들에게 늦게야 태여난 딸애이다. 순간 남편도 안해도 침대로 달려간다. 딸애는 손에 닿아있던 놀이감이 떨어졌다고 우는것이였다. 그 신비한 소리를 내는 놀이감을 다시 손에 쥐여주자 딸애는 울음을 그친다. 남편과 안해는 나란히 서서 딸애를 들여다본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난듯 남편이 《여보, 내 사전을 좀 찾아주오!》하고 안해를 돌아본다. 김윤화도 역시 그제야 생각난듯 《어마나, 밥이 타요!》하고는 부엌으로 달려나간다.
몽롱한 기운에 사로잡혀 돌이켜보는 그 생활이 마치도 좋은 꿈인듯이 느껴진다. 그렇게 아름답고 즐거운 꿈을 꾸는듯한감을 느끼며 김윤화는 어느 순간에 잠이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아버지!》하고 반기는 딸의 목소리에 김윤화는 잠에서 깨여났다.
남편이 들어왔다는것을 알았다. 침대에서 일어나앉았다. 그러나 남편은 인차 방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전실에 서서 딸애와 이야기를 나누는듯했다. 딸애가 과장기가 어린 목소리로 어머니의 상태를 전해주는것같았다. 남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희 어머니가 공장일때문에 지친것같구나. 의학술어로 말한다면 스트레스지. 하지만 그걸 해소하는 비방을 아버지는 알고있단다. 자, 내 가방에 뭐가 있나 좀 보자. 닭이다!》
갑자기 부엌이 닭울음소리로 소란해졌다.
《어머니한테 닭고기보신탕을 해주자!》
《야, 좋다! 아버지가 제일이야!》
딸이 소리치고 닭이 큰일이라는듯 야단법석을 한다. 김윤화는 방안에서 그 모든것을 들으며 저도 모르게 웃고말았다. 그다음 전실에서 남편과 딸이 걱정스럽게 수군거리는 소리.
《그런데 잡기는 누가 잡나요? 난 잡는것만은 보지두, 돕지두 못하겠어요.》
《정혜야, 아버지두 역시 아직까지 무얼 죽여본 경험이 없구나. 어쩐다?》
《옆집 아버지에게 가져가서 잡아달라고 할가요?》
남편은 난처한듯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가 다시금 수군거린다.
《정혜야, 너 닭의 유언이라는 말을 들어봤니?》
《닭의 유언이요?》
《그래!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닭을 잡을 때에는 꼭 살아있는 닭들이 보는데서 잡아야 한다누나. 그래야 알낳이률이 부쩍 올라간다나.》
《그건 왜요? 잡혀죽느라고 고아대는 자기 동무를 보면 놀라서 알낳이률이 더 떨어지지 않고요?》
《알 잘 낳는 닭은 절대로 잡지 않는 법이란다. 닭은 마음이 고와서 자기가 알을 못낳으니 죽는줄을 다 알구 꼬꼬댁거리면서 유언을 한다누나. 여보게들, 알을 많이 낳아서 나처럼 되지 말라구. 알을 많이 낳으면서 오래오래 살라구.》
남편은 제법 슬픔에 잠긴 목소리를 흉내낸다.
《그래서 그 닭의 유언을 듣구 다른 닭들은 알을 더 잘 낳는다는거야.》
《정말일가요?》
《글쎄 이 닭한테 물어보자꾸나.》
또다시 부엌이 닭울음소리로 소란해지고 남편과 딸은 소리내여 웃었다.
《유언을 두번 하는 법은 없다만 이놈이 이 부엌에서 어머니를 위해서 유언을 한번 더 하도록 하자꾸나. 쓰러지면 다시 못일어나구 못일어나면 이 닭처럼 되는수밖에 없다구.》
《좋아요! 그럼 어머니를 위해서 이 닭이 다시한번 유언을 하게 하자요. 아버지, 우리 이 닭을 잡자요! 내가 날개죽지와 발을 꽉 잡을테니 목은 아버지가 따요.》
딸애의 목소리는 결사전에라도 나가는것처럼 결연하고 비장하기까지 하다. 남편은 소리내여 웃었다.
《하하… 우리 정혜가 제법이구나.》
남편과 딸은 서툰 솜씨때문에 온 부엌을 법석하게 만들며 닭을 잡는듯했다. 끝내 김윤화는 견디지 못하고 일어서서 부엌으로 나가고말았다. 딸애가 환성을 질렀다.
《야, 어머니가 닭의 유언을 듣구 일어섰구나!》
모두가 소리내여 웃었다. 결국 세식구가 부엌에 나와 서서 함께 음식을 만들며 웃고떠들었다. 저녁식사는 즐겁게 끝났다. 어느덧 밤도 이슥해 부부는 단둘이 마주앉았다. 남편 김승진이 안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여보, 힘든 모양이구만?》
《힘들어요!》
김윤화는 한숨처럼 속삭였다. 림봉숙이 공장을 찾아왔던 이야기와 기사장이야기 그리고 기사장이 염화비닐탄성체문제를 물어와서 옛날로 다시 돌아가는감이 들긴 했지만 별수없이 보통염화비닐로 후퇴하기로 한 일을 이야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