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 회)
제 1 장
5
(2)
김승진은 말없이 앉아있었다. 새삼스러운 눈길로 안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어깨를 잡은 손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여보, 힘을 내오! 당신이야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 일을 끝까지 해내는 녀인이 아니요.》
《아니, 난 녀자예요. 약해요!》
《그래도 내가 늘 바라보면서 힘을 얻는 녀성은 오직 당신뿐이요.》
《거짓말이예요! 당신 나 듣기 좋게 말하느라고 그러지요?》
《정말이요!》
빙그레 웃는 그 얼굴에서 온몸을 어루쓰는듯한 기운이 풍겨온다. 저도 모르게 남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부부는 그렇게 한몸이 된채 오래도록 움직이지 않았다. 이윽고 김윤화가 조용히 말했다.
《정혜 아버지, 난 봉숙이에게 경철이를 우리 공장에 보내달라고 했어요. 봉숙이도 그러겠다고 했어요.》
그 순간 김윤화는 기대였던 자기의 몸이 넘어질듯이 휘친하는것을 느꼈다. 남편이 놀라 몸을 빼며 김윤화를 바라보았던것이였다.
놀라움과 의혹이 비낀 남편의 눈은 별안간 낯설어보였다. 절박하고도 절절해진 그 눈빛앞에 김윤화도 당황해졌다. 남편은 안해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채 겁이라도 내듯 더듬거리며 물었다.
《정말 그랬다는거요?》
김윤화는 남편에게 림봉숙에게 했던 이야기를 다시 해주었다. 남편은 고개를 수굿한채 말없이 앉아있었다. 방금전까지 남편의 온몸에 차넘치던 사려깊고 여유작작하던 기운은 사라져버렸다. 김윤화의 눈앞에는 마음속고뇌가 비쳐진 늙고 낯설어진 모습이 앉아있었다. 남편의 조용한 목소리가 먼데서 울려오는것처럼 들려왔다.
《괜한 일을 한게 아니요? 봉숙동무 스스로가 맡긴게 아니고 당신이 제기했다는게… 봉숙동무가 어떻게 생각하고있을지 걱정되는구만.》
김윤화는 무거운 마음을 안고 일어서 창가로 다가갔다. 창가림을 제끼고 아무것도 보지 못하면서도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보았다. 이윽고 저도 모르게 창유리에 손가락으로 《림봉숙》하고 써보았다. 그러자 이제는 아득하게 멀어져간 인생의 첫기슭에서 그 이름을 써넣던 하얀 종이장과 두눈이 새별같던 한 처녀애가 우렷이 떠오르는것이였다.
…
학교적으로 한명만 추천받을수 있는
《윤화야, 넌 그 애가 왜
《몰라요. 그애는 아마 자기 큰아버지가 인민
어머니는 서늘한 눈매로 딸을 바라보았다.
《넌 마음이 너무 좁구나, 좁아! 좁은 마음으로는 큰일을 못한다. 윤화야, 잘 들어둬라. 그애의 아버지는 영예군인이다.
김윤화는 흠칫해서 굳어지고말았다.
《윤화야, 넌 중학교를 졸업했는데 아직 제일 큰걸 못배웠구나. 네가 봉숙이한테 양보를 해라.》
김윤화는 고개를 돌리고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애와 그 애 아버지의 심정이 리해되기는 했지만 희망을 꺾고 쉽게 양보하고싶지는 않았다. 고집스럽게 대답을 하지 않는 딸애를 바라보던 어머니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였다. 그런데 양보는 뜻밖에도 림봉숙이 했다. 큰아버지가 그 애를 설복했다는것이였다.
《네가 양보해다오. 나두 너나 너희 아버지를 생각하면 너를 보내고싶다. 하지만 그러면 사람들은 내가 구역인민위원회
결국은 큰아버지가 인민
《윤화야, 봉숙이 아버지와 큰아버지는 이 어머니가 평범한 로동자라고 너에게 양보를 해주었다. 얼마나 큰 사람들이냐? 살아보니 마음의 힘이 큰 사람이 훌륭한 선택을 하구 그런 선택을 하는 사람이 사람들앞에 돋보이게 살더구나. 윤화야, 난 네가 그런 큰 힘을 가진 훌륭한 사람이 되길 바란다.》
어머니는 딸애를 이윽토록 바라보았다. 한장의 하얀 종이장을 꺼내놓았다. 잠시 생각하다가 거기에 김윤화의 이름과 림봉숙의 이름을 나란히 썼다.
《이걸 보면서 잘 생각해봐라. 누가 가는것이 옳겠는지, 누구를 선택할것인지 네스스로 정해보아라.》
김윤화는 그 종이장을 들여다보다가 그만 저도 모르게 자기 이름과 림봉숙의 이름을 다시 써보았다. 이어 그 이름들을 자꾸 써보며 안타깝고도 괴로운 생각에 모대겼다. 종이장우에는 크고 작고 진하고 가느다란 두 이름이 자꾸만 새겨졌다.
어머니가 해주던 말이 귀전에 그냥 울려오는것만 같았다. 자기를 지켜보고있는 어머니와 림봉숙 그리고 그의 아버지와 큰아버지의 얼굴이 자꾸만 눈앞에 얼른거렸다. 그러자 자기의 이름을 쓰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서슴어졌다. 종이장우에 차츰 림봉숙의 이름만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마감에 림봉숙의 이름은 마치 붓으로 써놓은것처럼 굵고 진해졌다. 김윤화는 오래도록 그 이름을 들여다보았다. 저도 모를 충동으로 입속으로 중얼거려보았다.
(너를 선택한다!)
그러자 불쑥 애달프면서도 가슴후련한 성숙감이 갈마들었다. 한순간 자기가 커다랗게 자라오르는듯했다. 김윤화는 어리둥절하고도 놀라운 마음으로 다시금 되뇌였다.
(너를 선택한다!)
…
《용타, 윤화야!》
김윤화는 림봉숙이 선택했던 돌격대로 나가기로 했다. 결국 그는 림봉숙과 인생을 바꾸어가진셈이였다. 하지만 대학입학시험장과 돌격대로 떠나며 그들은 알지 못할 미안함과 자격지심때문에 눈을 내려깐채 짤막한 인사말만을 나누고 헤여졌다. 그후 대학에 입학한 림봉숙은 다른 구역으로 이사를 갔고 김윤화는 돌격대와 함께 멀리 북변으로 떠나게 되였다. 그후 그들은 오래도록 다시 만나지 못했다.
김윤화는 림봉숙이 대학을 졸업했고 어느 중앙기관에 배치를 받았으며 시집을 갔다는 정도의 소식만을 귀결에 듣군 했다. 그러한 림봉숙을 김윤화는 한윤걸이 희생된 자리에서 그의 안해로 다시 만났다.
그 시각으로부터 그는 림봉숙의 운명을 다시금 자기의것으로 받아들였던것이였다.
김윤화는 또다시 버릇처럼 창유리에 림봉숙의 이름을 새겨썼다. 그러자 자기
《정혜 아버지, 마음을 놔요. 난 정말 진심이예요. 난 경철이를 한윤걸동지의 아들로 훌륭하게 키울거예요.》
남편은 윤화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이 괴롭지 않겠소?》
김윤화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때 문득 전화종소리가 울렸다. 두사람은 다같이 흠칫 놀랐다. 김윤화는 자기를 다잡자고 모지름 쓰며 천천히 전화를 들었다.
《전화받습니다.》
《지배인동무, 밤늦게 전화를 걸어 미안합니다!》
그것은 공장당비서 정명남이 걸어오는 전화였다. 수화기에서 정명남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지배인동무, 소식을 들었습니까?》
《무슨 소식말입니까?》
《이번에
김윤화는 한순간 자기 귀를 의심하며 굳어져버렸다. 원쑤들의 핵잠수함이 우리 나라 바다에 기여들고 하늘에서는 원쑤들의 전략핵폭격기들이 핵폭탄투하연습을 하는 이 엄혹한 시기에, 그리하여 온 나라 천만군민이 최후결전의 명령을 기다리는 이 시각에 경공업대회라니?
《지배인동무, 축하합니다!》
《비서동무!》
목이 메여오는감을 느끼며 김윤화는 말을 더듬었다.
《우리
《지배인동무,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우리 인민들이 다시는 허리띠를 조이지 않고 사회주의만복을 마음껏 누리게 하시려는것이 우리
지배인동무! 우린 벌써 이긴 싸움을 하고있습니다. 》
《비서동무!》
가슴이 화끈 달아오르는듯한 크낙한 감격속에 김윤화는 몸을 떨었다. 송수화기를 선뜻 내려놓지 못한채 그는 오래도록 굳어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