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 회)

제 2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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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잇!》

새벽도 기울무렵 공장합숙에서 한경철에게 콤퓨터를 배우던 강철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몹시도 졸리고 배가 고팠던것이였다.

사람들은 멋부리기 좋아하고 덤비기 잘하는 이 단순해보이는 청년이 실은 자기 지식을 늘이기 위해 하루에 두세시간밖에 자지 않는 무서운 정열가라는것은 모르고있다. 자기가 재미를 느끼는 분야이거나 꼭 알아야 할 분야에 대해서는 외국어든 콤퓨터든 소설책이든 기계든 눈에 피발이 지도록 파고드는것이 바로 그였다. 지금도 그는 지배인에게 장담한 진동진단체계를 개발하기 위해 한경철에게서 밤을 패며 콤퓨터를 배우고있었다.

고장난 대형로루기를 한번 돌려서 그 진동상태를 수감부에 인식시켜야 한다고 늙수그레한 준비직장장에게 어거지떼를 쓰고있는데 공장을 돌아보던 한경철이 그를 지켜보다가 빙그레 웃으며 말을 걸었다.

《이봐, 친구! 바다물을 다 먹어봐야 짠줄 알겠나?》

강철민은 낯선 청년의 아래우를 훑어보았다. 한경철은 강철민이 펴놓고있는 휴대용콤퓨터며 수감부들이며 어설픈 장치들을 살펴보고나서 다시한번 빙그레 웃었다. 깊은 지식과 리해력을 가진 청년들이 흔히 그러하듯 태연함과 자신만만함을 흘리며 조용히 말했다.

《진동진단체계란 사람이 손바닥으로 이마의 열을 알아내는것이나 같은 원리야. 이상한 열에 습관되여서가 아니라 정상체온에 습관되여서 이상열을 알아내는것과 같은 리치지.》

그 한마디 말에 강철민은 대뜸 이 청년이 콤퓨터와 기계에 박식한 청년이라는것을 알아차렸다. 범은 세살먹은 아이가 봐도 범인줄 안다.

그리하여 강철민은 한경철의 도움을 받아 자기의 콤퓨터실력을 더 높이기로 하였다. 하지만 한경철을 자기 집으로 청할수가 없었다.

이즈음 아버지와 그의 사이는 서먹하고 야릇해졌다. 아버지는 오래전에 어머니를 잃었다. 옆사람들이 새 가정을 꾸리라고 권고했으나 아버지는 못들은척 했다. 하지만 늘 혼자살림을 할수가 없는것인지 아버지는 날이 갈수록 자주 멍해지며 한숨을 쉬군 했다. 그러더니 얼마전부터 한 녀인이 문득문득 강철민의 집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철민은 야릇한 불안과 호기심을 안은채 아버지와 그 녀인을 주시했다.

며칠전 일요일이였다. 베란다에 서있던 철민은 별로 훤하게 차려입고 집을 나섰던 아버지가 낯익은 그 녀인과 함께 오는것을 보았다. 처음보는 모습은 아니건만 철민은 숨을 삼키고 굳어져버렸다. 아버지와 녀인의 온몸에서 풍겨오는 례사롭지 않은 기운을 분명히 느꼈던것이였다. 철민은 자기가 근심하고 불안해했던 그리고 어쩌면 각오하기까지 했던 그 일이 현실로 다가왔다는것을 깨달았다.

이윽고 집에 들어선 아버지와 녀인은 자기 방앞에서 망설이는듯하더니 아버지의 방으로 들어가는것같았다. 그 순간부터 온 집안에는 무엇인가에 바재이고 서두르며 기다리는듯한 이상한 기운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 알지 못할 압박감앞에 철민은 어쩔바를 몰라 쩔쩔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왜서인지 자기 책상우에 놓여있던 어머니의 사진을 슬그머니 서랍속에 넣게 되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이런 때에는 어머니의 사진이 어울리지 않으며 지어는 방해가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쓸쓸해지는 마음을 금할길 없었다.

이제 나는 아버지와 함께 온 저 녀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가?

내가 저 녀인을 어머니라고 부를수 있을가?

어떤 사람이 어머니와 안해가 함께 강물에 빠져 떠내려오면 누구부터 구원하겠는가 하는 질문에 잠시 침묵하다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그럼 달아나지요!》

강철민이 바로 그런 형이라고 해야 할가? 어쩔바를 몰라 전전긍긍하던 그는 손을 홱 내리그었다.

《에잇!》

그는 도망치듯 집을 나와버렸다. 아빠트마당에 세워두었던 오토바이에 발동을 걸려 했으나 왜서인지 발동이 잘 걸리지 않았다. 힘껏 발걸개를 잡아채며 모지름을 썼으나 오토바이는 맥빠진 소리만을 토해낼뿐이였다. 소심해지고 주눅이 든 그가 발동걸기를 포기하려던 순간 발동이 부르릉 걸렸다. 그 순간 그는 왜서인지 울고싶은 심정이였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인채 오토바이에 올라 달려갔다.

그날 저녁 그가 다시 집으로 들어갔을 때 아버지는 아들의 방 책상앞에 그린듯이 앉아있었다. 녀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철민은 자기가 책상서랍안에 넣어두었던 어머니의 사진이 다시 제 자리에 놓여있는것을 보았다. 아버지가 꺼내놓은것같았다.

아버지는 굳어진듯 앉아 그 사진을 점도록 들여다보고있었다. 온몸에서 말 못할 고뇌와 수심 그리고 모든것을 체념한듯한 허탈감마저 느껴졌다. 순간 철민은 뻐근한 련민과 후회를 느꼈다. 무엇인가 용서를 빌고싶었고 따뜻하고 다정한 말을 건네고싶었다. 하지만 아무말도 못한채 그저 목이 메인듯한 어조로 《아버지!》하고 불렀을뿐이였다. 아버지는 고개를 돌렸다.

《너 왔니? 어서 밥을 먹자.》

자기들사이에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것을 암시하려 애쓰는듯한 어조였다. 철민은 굳어진듯 서있었다. 그다음부터 그들은 다같이 어색한 심정으로 서로에 대한 뻐근한 압박감에 시달렸다. 강철민은 될수록이면 아버지와 함께 있는것을 피했다. 그래서 한경철도 집으로 데려갈수가 없는것이였다.

강철민은 확실히 생활이란 자기가 다 알수 없는 요지경같은 세계라고 저 혼자 생각했다. 사실 송옥림 문제만 해도 한방망이 얻어맞은것처럼 어리뻥뻥한 강철민이였다.

이번에 국제부녀절을 맞으며 저저마다 어머니에게 드릴 꽃다발이며 기념품을 마련하는 처녀애들과 동무들을 보고 부러움과 서글픔에 사로잡혀 손에 닿는대로 고무꽃을 만들었던 강철민이였다. 그러나 그 꽃을 만들고보니 기어코 누구에게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떠오르고 불쑥 송옥림의 얼굴이 떠올랐었다.

대학입학시험장에 들어간 자기를 기다려 밖에 서있다가 달려오던 그 순진하고 어른스럽던 얼굴, 가슴이 선뜩하게 소리치던 그 얼굴…

사실 그때 대학입학시험장에 들어갔던 강철민은 첫 문제부터 모를 문제에 부딪치고말았었다. 곰곰히 생각하면 떠오를 문제고 그뒤의 문제들은 다 알만한 문제건만 고집스럽고 조급스러운 충동에 빠져 그 문제를 외면하고 넘어가게 되지 않았다.

내가 요까짓 문제 하나 못푼단 말인가?

조급해져서인지 손바닥에 땀만 솟았다. 중학시절부터 함께 공부한 동무가 앞에 앉았는데 온몸으로 시험지를 가리운채 잘만 쓴다.

한번 슬쩍 귀뜀이라도 받았으면 아니, 그저 한귀퉁이를 슬쩍 보기만해도 눈앞이 열릴텐데…

조급해난 강철민은 그 동무의 잔등을 쿡쿡 찔렀다. 그런데 그 동무는 아예 기척을 안한다. 오히려 등을 털어 거부감을 표시한다. 알지 못할 분노마저 욱 솟구쳤다.

대학입학시험장에 들어오니 어제날 알던 정, 보던 정이 모두 경쟁심리로 변한단 말이지? 거기다가 교탁앞에 선 젊은 녀선생이 《동무, 왜 앞동무것을 넘겨다봐요? 시험규률을 지키세요!》라고 경고를 준다. 그 녀선생의 얼굴에 어린 비웃는것같기도 하고 동정하는것같기도 한 기운을 보니 부끄럽고 반발심도 솟구쳤다. 다시 시험지에 눈을 박았으나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알지 못할 자격지심이 욱 솟구쳤다.

《에잇!》

그는 시험지를 그대로 놓아둔채 시험장을 나오고말았다. 그러나 시험장문을 나서는 순간 무서운 후회가 갈마들었다. 하지만 다시 들어갈수도 없는 노릇이였다. 그는 어깨가 축 처진채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밖에는 옥림이가 기다리고 서있는것이 아닌가? 참혹한 부끄러움을 느끼며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날 무슨 남의 시험지나 보고 베끼는 사람처럼 생각하길래 …》

그때 옥림의 얼굴에 어리던 경멸의 표정과 날카롭게 쏘아붙이던 혹독한 말을 잊을것같지 못했다.

《오빤 그 에잇하는 버릇을 고치기 전에는 일생 아무것도 해낼수 없을거예요. 명심해줘요! 인생만은 절대로 에잇 해버릴수 없는거예요. 그런데 대학시험도 바로 못치는 오빠가… 난 그런 <수재> 하나두 부럽지 않아요!》

집에 오니 아버지도 펄펄 뛰였다.

《네 어머니가 살아있었으면 아마 네 뺨을 쳤을게다.》

아버지, 난 벌써 뺨을 맞았어요.

그런데 대학에 갈것같던 옥림이가 공장으로 들어왔다. 말을 들으니 현실체험을 하며 시를 쓰기 위해서라고 했다. 철부지의 들뜬 랑만이겠거니 하고 웃고말았다. 그렇게 날과 달이 흘러갔다. 그런데 얼마전 아버지가 《청년문학》잡지책을 가져다가 말없이 그에게 주었다. 어느 한페지를 접어놓기까지 했기에 펼쳐보니 《시련의 날에 더 사랑하리》라는 시였다. 제목옆에 씌여진 송옥림이라는 이름을 보았으나 설마 그 송옥림이랴 하는 생각으로 읽기 시작했다. 시는 강철민의 심금을 울려주었다.

 

조국이 아프면 나도 아프고

조국이 배고프면 나도 배고프고

조국이 험한 길을 걸으면 나도 그 길을 걸어야 하는

이것이 조국과 나

내가 없어도 조국은 있으나

조국이 없으면 나도 없는

이것이 조국과 나

 

강철민은 훌륭한 시라고 생각했다. 온몸이 눈이 된 심정으로 더 읽어내려갔다.

 

그대의 평범한것조차 수수한것조차

내 정어린 눈으로 다시 보게 되였나니

거기에 얼마나 강의하고 억센것이 있었더냐

얼마나 크고 아름다운 힘과 정신이 있었더냐

남들은 잃고서야 알게 된 그것을

우리는 시련을 이겨내며 알게 되지 않았더냐

 

좋은 날에 알던 그 귀중함에

어려운 날에 알게 된 귀중함을 더하여

내 갑절 그대를 사랑하게 되였거니

소중한 진리를 깨우쳐주기 위해선

우리에게 이 시련이 있어야 했던듯…

 

시를 다 읽고나서 강철민은 아버지에게로 갔다. 이게 누구의 시인가고 물었다.

《보구두 모르겠니? 옥림이 시지 누구 시겠니?》

강철민은 한방망이 얻어맞은듯한 심정으로 자기 방에 돌아와 멍하니 앉아있었다. 남의 시를 종알종알 외우던 그 아리잠직한 소녀로부터 피를 내뱉는듯한 진정의 시인으로 자라난 옥림을 보는듯한 느낌이였다. 왜서인지 자기가 부끄러워나고 그와 어제날과 같은 친밀한 사이로 되돌아가고 싶었다. 바로 그런 감정때문인지 자기가 만든 고무꽃을 옥림의 어머니에게 보내려고 했던 철민이였다. 하지만 그 꽃은 국제부녀절 다음날에 고스란히 되돌아오고말았다. 아직도 그때의 감정을 풀지 못한 옥림인가싶다. 그런데 그 꽃이 돌아오니 왜서인지 밤에 잠이 잘 오지 않고 기분이 울적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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