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회)
종 장
아름다워라 청춘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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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눈오는 날 자기에게 매달려 흐느끼는 그를 뿌리치던 일이며 병원에까지 찾아온 그가 자기 심정을 리해하지 못한다고 랭정하게 대하던 일, 이 모든 추억들이 어쩐지 새로운 의미로 부각되면서 마음을 괴롭혔다.
《걱정마오, 정아동무! 나같은 사람은 리해하지 못해도 책임기사동문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요. 절대로 그런 사람이 아니란 말이요.》
《사실 따져보면 저에게도 잘못이 없지 않아요.》
정아의 얼굴에는 죄스러운 립장에 있는
《제가 첨부터 좀더 대담했으면 그가 실책을 범하지도 않았을거고 저 역시 이런 처지에 빠지지는 않았을거예요. 그런데 전 그렇게 못했거던요. 말하자면 진정한 사랑으로 그를 대해주지 못했지요.》
정아의 말을 들을수록 진호는 정아가 하는 말마디에 담겨진 사랑에 대한 어떤 새로운 느낌에 휩싸이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그렇지만 일없어요.》
정아는 갑자기 방긋 웃었다. 그것은 흔히 생각을 달리할 때, 부질없는 생각에 매달려있는
《그런 고민을 하는것도 다 제가 나약하기때문인걸요. 전 믿어요. 사랑이 어때야 한다는걸 이젠 확고히 믿어요.》
정아의 두눈에는 어떤 기쁨과 확신의 빛이 력연했다.
《언젠가 동문 진실한 사랑은 서로가 상대를 위하는 마음이 같아야 한다고 했지요? 그래야 참된 행복이 있을수 있다고요. 그렇지만 전 이렇게 생각해요. 이제야 명백히 말할수 있을것같아요. 누구나 자기를 위한 감정과 상대를 위한 감정, 이 두 감정중에서 자기를 위한 감정보다 상대를 위한 감정이 크고 진실해야 한다고 말이예요. 바로 그 차이가 사랑의 크기라고요. 말하자면 상대를 위한 감정이 크고 진실할수록 그 사랑은 더욱 아름다와진다고 말이예요.》
《? !》
정아의 말은 너무도 심중한 의미를 담고있는것이여서 얼른 그 뜻을 파악할수가 없었다.
(자기를 위하는 감정보다 상대를 위하는 감정이 크고 진실해야 한다구? 그것이 사랑의 크기라구?)
쉽사리 리해하기는 어려웠으나 뭔가 새로운것을, 어떤 고상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말이였다. 문득 사랑에 대해 력설하던 자기의 말이 생각났다.
《사랑이란 처녀의 외적인 미와 내적인 지향의 합으로 이루어지는걸세.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지향이 우위라는것만은 명심해두게.》
그제야 그는 자기가 주장해오던 사랑의 관점이 정아에 비하면 얼마나 일면적이며 자기본위에 지나지 않았던것인가 하는것을 깨닫지 않을수 없었다. 그것이야말로 남들이 애써 가꾸어놓은 과원에 뛰여들어 자기 맘에 드는것을 마음대로 골라 따먹으라는것과 무엇이 다르랴! 아니, 그렇다고 해서 나쁠것이 없으며 바로 그런 사람이야말로 제일 행복자라는것을 공공연히 선포한것과 무엇이 다르랴!
하지만 정아는 오히려 자기의 노력으로 그런 열매를 가꾸어야 한다고 하지 않는가! 그 과정이 바로 진정한 사랑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래, 진실한 사랑이란 창조해야 하는것이 아니랴! 그래서 아름다운것이 아니랴! 인간의 본성이 창조성에 있다면 그중에서도 가장 숭고한 창조사업이 바로 사랑이 아니고 뭐랴! 그러고보면 난 너무도 자기의 요구만 내세웠고 그 요구에 상대가 따르기만 바랐었지…)
새삼스레 현옥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나 이번엔 있지도 않았던 기묘한 상념이 상기되는것이였다. 늘 구슬픈 눈길로 자기를 바라보군 하던 그였으나 이번에는 그런 모습과는 전혀 달리 저주가 담긴 야무진 눈길로 쏘아보며 이렇게 소리치는것이였다.
《동무를 원망해요. 아니, 이젠 증오해요. 세상에 동무같은 사람이 어데 있겠어요. 동무가 바라는 행복이 어떤건지 보고싶군요. 아니, 꼭 보고야말겠어요.》
그의 눈매에는 단지 쌀쌀한 빛만이 아니라 억울한 박해를 당하여 악에 북받친 사람의 분노가 번뜩이는것이였다.
(과연 그가 이제 와서 나를 어떻게 여길가? 나를 받아줄 여지가 있을가? 아무리 불러도 이젠 뒤돌아보지조차 않을것인가, 아니면 먼발치에서나마 기다려줄것인가?)
마침내 이들은 경쾌한 려객선이 가벼운 발동소리를 내며 정박해있는 부두가에 이르렀다.
벌써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배우에 올라있었다.
선창에는 누구를 바래우러 나왔는지 어린애를 품에 안은 젊은 녀인 한사람만이 서있었다. 자기 혼자 전송나온것이 창피했던지 그는 애기의 손목을 흔들며 모기만한 소리로 《아빠, 잘 갔다오세요.》 하고 중얼거리는데 보매 부끄러움을 억지로 참고있는 모습이였다.
자기가 그 녀인의 남편이라는것을 드러내기가 멋적었던지 승객들속에 흰 와이샤쯔를 입은 건장한 체격의 젊은 친구는 공장쪽을 보는척하면서도 줄곧 녀인쪽을 흘끔흘끔 곁눈질했는데 우스운것은 사람들이 헨둥하게 짐작하고있는데도 줄곧 그만은 아직도 시침을 따고 딴전을 피우는 꼴이였다.
《이제야 나타났군. 여기야, 여기!》
갑판우에 올라가있던 태수가 진호를 향해 소리쳤다.
《좀 일찍 나올노릇이지 이 배가 뭐 동무 전용선인줄 아나?》
배우로 올라선 진호는 곧 그의 팔을 잡고 심중한 어조로 말했다.
《정아동물 좀 도와주게. 듣고보니 우리가 생각했던것보다 훨씬 심각하단 말일세.》
태수는 다 짐작하고있다는듯이 고개를 끄덕이였다.
《여기 일은 걱정말게, 힘껏 해볼테니. 친구들을 만나면 안부나 전해주게. 그리고 이 편지를 현옥동무한테 부탁하네. 은심이가 보내는걸세, 동무로 사귀고싶다고 말이야.》
진호가 어쩔 사이도 없이 태수는 편지를 그의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때 배전으로 다가선 정아가 진호에게 손을 내밀었다.
《잘 갔다오세요. 좋은 소식 기다리겠어요.》
《고맙소.》
정아의 손을 잡은 진호는 믿음에 찬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동무 일도 잘되길 바라오. 아니, 꼭 잘되리라고 믿소.》
하얀 려객선은 마치 진호가 오르기를 기다리기라도 한듯 맑은 고동소리를 울리며 선체를 들리였다. 넓게 트인 강을 향해 미끄러지는 선미로는 흰 연기가 퐁퐁퐁 솟구쳐나왔다. 해빛에 반짝이는 하얀 선체는 파도를 가르며 웅기중기 산처럼 솟아있는 기선들옆을 지났다.
진호는 기슭을 향해 서있었다.
부두가에 서있는 태수와 정아의 모습, 점점 작아지는 그들의 모습을 그는 굳어진듯이 지켜보고있었다.
손을 흔드는 그들에게 같이 손을 흔들던 그는 불시에 뜨거운것이 가슴속에 차오르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감회가 가슴속에 넘쳐흘러들었다. 그 감회는 우수와 희열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였으며 삶에 대한 랑만과 긍지였다. 그리고 그것은 류달리 강렬한 생에 대한 기쁨이였고 앞으로 닥쳐올 일에 대한 흐뭇한 기대의 정이였다.
그는 자기의 두눈에, 맑은 눈물이 고여오르는 자기의 두눈에 무엇인가 타오르는것을, 이 세상의 모든 번민을 초월한 그 어떤 고결한 희열이 마음속깊이 잠긴 비애를 뚫고 용감히 솟구쳐오르고있다는것을 똑똑히 느낄수 있었다. 그는 생에 대한 이 새삼스러운 희열이 기뻤고 그 희열을 마음껏 음미할수 있게 된 자기가 행복했다.
(아― 얼마나 아름다운가, 우리의 생활은!)
그는 뜨거운것을 삼키며 다시금 부르짖었다.
(정녕 얼마나 아름다운가! 우리의 삶, 우리의 청춘은!)
바다처럼 넓은 수면우에는 려객선이 남기는 두줄기의 파문이 끝없이, 끝없이 펼쳐지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