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면보기 기사보기

통일신보

주체111(2022)년 9월 27일 《통일신보》

 

조선침략을 노린 《운양》호사건

 

《운양》호사건은 1875년 9월 일본침략자들의 군함 《운양》호가 강화도에 침입하여 무장도발을 감행한 사건이다.

19세기중엽 《명치유신》으로 알려진 부르죠아개혁을 실시하자마자 대조선침략정책인 《정한론》을 들고나온 일본침략자들은 1875년 9월 《운양》호사건을 일으켜 자기의 침략목적을 달성하려고 꾀하였다. 1875년 5월 침략선 《운양》호를 부산항에 불법침입시킨 일본침략자들은 그 무슨 《발포연습》을 한다고 위세를 돋구었다. 조선봉건정부가 저들의 힘앞에 위압되여 스스로 굴복할것이라고 타산하였던것이다. 하지만 일이 저들의 뜻대로 되지 않자 그해 9월 항로를 측량한다는 구실밑에 《운양》호를 강화도앞바다에 또다시 침입시켰다.

남의 령해에 들어가자면 해당 나라의 사전승인을 받는것이 국제법상요구이며 국제관례이다. 당시 조선봉건정부는 불법침입한 일본침략선이 즉시 물러갈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침략자들은 그에 응하지 않았다.

사전에 군사정탐임무와 강화도공격임무를 받고왔기때문이였다. 이에 대하여 일본륙군대장 야마가다는 《1875년 9월 〈운양〉호 함장 이노우에소좌는 조선연해안으로부터 청나라 우정에 이르는 해로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암암리에 조선에 대한 시위운동을 실시하라는 내적훈령을 해군성으로부터 받았다.》고 토설하였다.

일본침략자들은 물이 떨어졌다는 구실을 내대면서 당시 한성을 지키는 군사요충지였던 초지진포대근처에까지 기여들었다.

초지진의 조선수비병들은 일본침략무리들을 단호히 격퇴해버리였다. 그러나 《운양》호의 침략무리들은 방어가 약한 섬들을 습격하여 수많은 무고한 주민들을 살륙하였으며 야만적인 파괴략탈만행을 감행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침략자들은 도적이 매를 드는 격으로 《조선측이 일본에 대해 적대행위를 하였다.》는 생트집을 걸면서 1876년 1월 또다시 800여명의 군대를 태운 7척의 침략함대를 강화도에 침입시켜 불평등조약을 강요해나섰다.

일본침략자들은 무력행사의 방법으로 《조약》을 체결할 심산밑에 함포까지 쏘아대면서 《〈운양〉호에 끼친 손해배상을 내야겠다.》, 《이 손해배상대신으로 조약을 체결하자.》고 조선봉건정부를 로골적으로 위협공갈하였다. 지어 저들의 요구가 실현되지 않으면 부득불 전쟁을 하는수밖에 없다는 최후통첩까지 하였다.

이렇게 일본침략자들은 대포와 군함에 의한 로골적인 협박, 공갈로 1876년 2월 12개 조항으로 된 불법무효한 《강화도조약》을 강압적으로 조작해냈다.

《운양》호사건을 계기로 날강도적인 《강화도조약》을 조작하고 무력에 의한 조선침략의 서막을 열어놓은 일본은 그후 무력으로 조선을 완전히 비법강점하고 40여년동안에 걸쳐 전대미문의 식민지파쑈통치를 실시하면서 우리 민족에게 헤아릴수 없는 불행과 고통, 재난을 들씌웠다.

그때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러갔다. 하지만 일본은 오늘까지도 피로 얼룩진 과거죄악을 성근하게 반성하고 배상할 대신 력사외곡과 반공화국, 반총련소동, 군국주의부활과 재침책동에 광분하고있다.

우리 민족은 왜나라것들의 만고죄악을 잊지 않고있으며 그 죄악의 대가를 반드시 결산하고야말것이다.

 

리 송 건

되돌이
감 상 글 쓰 기

홈페지봉사에 관한 문의를 하려면 여기를 눌러주십시오
Copyright © 2003 - 2023 《조선륙일오편집사》 All Rights Reserved
辽ICP备15008236号-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