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회)

제1편 소망

1

 

해방된 그해 8월 그믐께.

해저문 저녁에 남부조선의 부산앞 영도섬 어항에서 선객들을 태운 발동선 한척이 조용히 닻을 올리고 포구를 떠나 부산해협쪽으로 나왔다. 잔잔한 바다는 어둠속에 묻혀있었고 아득히 먼 검푸른 하늘에서는 별들이 컴컴한 바다우에 수많은 가느다란 빛을 뿌리고있었다.

8월의 폭양에 한낮동안 달아오른 발동선의 선실안은 확확 열기를 내뿜어서 선객들은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갑판우에 모두가 나와있었다.

선실의 희미한 불빛이 갑판우의 각양각색의 선객들을 비쳤다. 농부, 어부, 장사군, 행상, 남자, 녀자, 로인, 소년… 신사복, 베잠뱅이, 령장없는 일본군복차림… 선객들은 시원한 밤바람을 쏘이며 이곳저곳에서 모여 웃거나 떠들썩 이야기판을 벌리고있었다. 선객들중에서 유독 색날은 일본군복차림에 일본군모를 이마깊숙이 아무렇게나 눌러쓴 한사람은 이야기에 끼여들지 않고 홀로 서서 입을 꾹 다물고 저 멀리 어딘가 어둠속을 바라보고있었다.

그는 가까이의 한 선객에게 단 한번 입을 열었는데 그것은 《제주도가 어디바루쯤 되오?》 하는 낮은 소리의 물음이였다.

배군차림의 곁의 사람이 《저쪽이요!-》 하고 어둠속을 가리켰다.

그러자 색날은 일본군복차림의 그 사람은 제주도가 있는쪽으로 머리를 돌리고 점도록 홀로 어둠 저편을 바라보았다. 줄곧 무엇인가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그의 모습에서는 얼핏 보기에도 파란만장을 겪은 사람에게 특유한 그런 결연한 기색과 가늠할수 없는 그 무엇이 있었다. 보매 그 사나이는 남모르는 깊은 고뇌속에 빠져있는 사람같기도 하고 그 무엇인가 가슴속에 말로는 다할수 없는 절절한 감회에 잠겨있는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하였다. 그는 찬찬히 여겨보면 온몸에 탄력이 넘치는 근육을 소유한 젊고 싱싱한 20대 중반기의 젊은이로 보였지만 얼핏 보면 지치고 피로한 중년남자로 보이기도 하였다. 심한 정신육체적고생과 인간으로서 극단의 처지에 맞다들렸었거나 겪은 사람만이 그런 흔적을 남기는것이다. …

제주도가 고향인 그 사나이는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학도병》에 강제징집되여 남방전선에 끌려나가 별별 죽을고비를 겪고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여 낯선 이국땅에 숨어있던중에 해방이 되여 고향으로 돌아오는 리덕구였다. 일본군의 색날은 군모를 이마깊숙이 쓴 그는 길동무도 없고 아무런 짐도 없었는데 좁쌀알같은 마마자욱이 있는 해빛에 탄 검실검실한 얼굴, 우아래가 그쯘한 중키의 그 체격은 탄탄했다. 선객들의 떠들썩함에는 아랑곳없이 줄곧 어둠속을 바라보는 그의 눈길에서는 지금 그가 그 무엇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있다는것을 느끼게 하였다. 기실 그의 뇌리에는 조금전에 부산에서 있었던 일이 원색그림처럼 떠오르고있었다. …부산의 자그마한 차집에서 그는 대학동창생들이며 일본군에 함께 있던 동료들인 송요찬, 함병선과 앞으로의 행동방향을 론의했었다. 그때 그들은 리덕구에게 서울로 가자고 이끌었다.

《리군, 서울로 가자구! 지금 해방된 서울은 건국열로 부글부글 끓고있다는 소문이네! … 우리 함께 가세. 배운 지식, 실전군사경험… 나래를 활짝 펴고 광명을 향하여 우리 포부를 실현할 서울로! … 거기는 우리의 활무대야!-》 하고 취기가 오르기 시작한 청좋은 송요찬이 노래라도 부르는듯 흥겹게 소리쳤다.

《한데… 자넨 왜 시무룩했나, 리군… 싫다는건 아니겠지?》

함병선이 술잔을 들어 기세좋게 들이키고나서 싱글거리면서 리덕구에게 트집을 걸듯 코맹맹이소리로 물었다.

《그렇네. 나는 고향 제주도로 가서 내가 아는 지식과 있는 정을 깡그리 쏟아부어 우리 글과 우리 민족의 력사를 모르고 자란 고향의 아이들을 가르치겠소. 외국인이 없는 내 고향 학교의 교원이 되는것… 이게 나의 소망이요! …》 하고 리덕구는 동료들을 마주보며 침착한 어조로 나직이 응답했다.

그 순간 《하하… 하! 으하! …》 하고 불시에 뿜어대는듯 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동료들인 송요찬과 함병선이 탁자를 두드리며 일시에 폭소를 터뜨렸던것이다.

《웃기지 말라구! … 자네 실성했나? … 지쳤나? 심히 지친 사람은 미친 사람처럼 허튼소리를 한다더니 과연 그렇구만! …》

송요찬은 탁자가 삐걱소리를 낼 지경으로 온몸을 기대고 줄곧 웃어대느라 숨이 막힌듯 킥킥거렸다.

《리군! 인생을 포기했나? … 인생허무인가? … 그 지식, 그 재능, 그 총명을 가진 리덕구의 포부가 고작 벽지의 촌훈장이라니? … 그것두 소망인가? … 해방된 오늘 우리앞에 활무대가 열렸는데두!》 하고 함병선이 곁따라 웃어대며 이죽거렸다.

그들은 동료인 리덕구가 소유한 지식과 재능에 비해서 소망이 너무나도 왜소하고 《유치》한데 놀라워하며 련속공격했다.

《리군, 자네가 정말 그 궁벽한 섬구석에서 한생을 촌훈장으로 속절없이 흘러보내겠다는건가? 그래, 그것도 인생인가? 그것은 유치한 섬놈식사고방식이야!》 하고 송요찬이 째는듯 한 목소리로 짐짓 성을 냈다.

《놔두라구 송군, 이제 제주도 섬구석에 얼마간 가있느라면 갑갑증에 온몸이 쑤셔 제발로 서울로 뛰쳐나올테니까. 지금은 전쟁통에 얼이 빠진 모양인데 포위된 남방전선에서 굶주린 식인야수로 변한 왜놈사병들에게 잡혀먹힐번 했다니 한절반 정신이 빠졌을거야.》

함병선이 취기에 불그레해진 세모눈을 번쩍이며 훈계하듯 말했다.

리덕구는 술잔을 앞에 놓고 잠잠히 앉아 일체 응수하지 않고있었다.

물론 서울로 가자는 동료들의 권고를 탓할것은 못된다. 그렇다고 그들의 주장이 별로 새로운, 남다른 방도라고도 할수 없었다. 해방이 되여 조국에 돌아온 조선인《학도병》들, 젊은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상식에 불과했던것이다. 그러나 리덕구는 지금 그런 상식을 따르지 않기로 결심하고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리덕구에게 해방된 현시점에서 청년지식인들이 나아갈 독자적인 독특한 리론이 있는것은 아니였다.

그는 송요찬과 함병선에게서 늘 보아온 직위욕과 공명심이 싫어서라기보다 어머니와 처자, 형들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고싶다는 강렬한 그리고 이상한 감정이 지배하고있어 그들의 권고를 마음속으로 거부하고있었던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의 가슴속에서는 (지금까지의 나의 생은 망국의 백성으로 일제의 통치하에서 인간이하의 천대속에서 흘러갔다. 이제는 그렇지 않을것이다!)라는 희망이 끓어번지고있었다.

《여 리군, 어서 술을 들자구. 우리가 그만큼 타격했으니 이제는 정신을 차렸을테지. 응, 아직도 촌훈장이 소망이라고 감히 말할텐가. 누구보다 도량이 넓고 결단성이 있으며 사물을 깊이 생각하는 자네가 뭐 촌훈장이라니 말도 되지 않는 소리야.》 하고 송요찬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이번에는 소리없이 웃었다. 송요찬의 웃는 얼굴은 인상이 나빴다. 웃을 때 아래입술이 이그러져 천해보였다.

뒤따라 함병선이 합세했다.

《리군, 시시한 꿈은 일찌기 깨는게 좋아. 더 좋기는 그런 꿈은 꾸지부터 않는것이고 우리들중에서 단연 뛰여난 재능과 지식을 소유한 리군이 그런 유치한 소망을 가지다니 될말인가? 일생을 궁벽한 섬구석에서 썩이다니 제잡담하고 우리 함께 서울로 가자구. 거기가 바로 우리의 희망을 꽃피울 활무대야!》

그러자 리덕구는 대범하게 소리없이 빙그레 웃었다. 웃고있는 리덕구의 얼굴은 티없이 맑았다. 그에게 직위욕, 명예욕, 공명심, 사심이 없는탓인지도 몰랐다.

 

    내 모르는바 아니노라

    그대들의 친절한 충고 진정임을

    허나 친절도 지나치면 때로는 역겨워지는 법

    마음속으로 이미 정한 내 갈길 내 가리니

    그대들은 그대들이 택한 길 갈지어다

    안녕히

 

리덕구는 롱조의 즉흥시로 응수하고는 걸상에서 일어섰다.

이렇게 그는 동료들과 헤여져 고향 제주도로 가는 발동선에 올랐던것이다.

배는 어느새 항만을 벗어나 부산해협에 들어서고있었다. 이제 들어서는 부산해협을 지나면 조선남해로 나가게 될것이고 거기서 다시 제주해협으로 들어서게 될것이다.

지금 바다의 어둠 저편을 응시하며 헤여진 동료들을 생각하는 리덕구는 그들이 해방된 조국의 그 어디에서든 새 나라 건설에 한몫 단단히 하는 필요한 인재로 희망을 꽃피울것을 바랬다.

(어느때나 건강한 몸으로 갈망하는 리상과 포부를 실천하고 빛나는 성공을 바라네!) 하고 리덕구는 마음속으로 주문처럼 외웠다.

배가 부산해협으로 나서자 밤바다의 파도는 차츰 높아지기 시작했다.

잠자는 거대한 바다의 코고는 소리인듯 웅글은 물결소리는 갈수록 높아지고 선체의 동요는 더욱 심해져갔다.

그러나 리덕구는 선실로 들어갈념도 않고 모자를 푹 내려쓰고 홀로 앉아서 고향 제주도가 있는 어둠 저편만을 바라보고있었다.

선원들이 그에게로 다가와 불상사가 날수 있으니 선실로 들어갈것을 권고했으나 그는 꿈쩍도 않고있었다.

《아니, 걱정마오. 난 안에 들어가면 배멀미가 더 심하오.》

부산해협을 벗어난 깊은 밤에 배가 조선남해에 나서자 파도는 더욱 높아졌다. 배는 전후좌우로 흔뎅거리고 큰 파도가 몰려와 무섭게 배전을 두드렸다.

선원들이 황급히 달려나와 왈칵 성을 내며 강경히 요구해서야 그는 할수없이 선실로 내려왔다.

선실안의 절반나마의 선객들은 이미 정신없이 잠들어있었고 배멀미에 시달리는 선객들은 잠들지 못하고 부시럭거리고있었다.

리덕구는 빈자리에 아무렇게나 끼워앉아 잠들어보려고 애썼으나 종시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속이 후리후리하고 토할듯 한 기분과 머리아픔… 이런 육체적고통은 그런대로 누르고 참아낼수 있었으나 3년전 《학도병》으로 끌려가 남방의 생소한 쟝글에서 겪은 그 지긋지긋한 체험, 가지가지 무시무시한 일들이 눈앞에 련속 악몽처럼 떠올라 좀처럼 잠들수가 없었던것이다.

(이제 다시 그런 일은 없을것이다. 나는 내가 나서자란 고향, 어머니가 계시고 처자와 형들, 친지들과 정을 나눈 이웃들이 있는 고향으로 간다! 그들은 감감 소식없었던 나를 아마 죽은 사람으로 여기고있을지도 모른다!) 하고 리덕구는 까딱않고 눈을 감은채 생각을 계속했다.

(어머니는? 안해와 아이들은? 형들은 어떻게 살고있는지?)

그는 짧고도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향의 늙으신 어머니와 가족들이 겪었을 수난에 찬 생활을 상상하였다.

자정이 훨씬 넘었을것이다. 날이 밝으려는지 희미한 달빛마저 스러지고 밖은 먹물을 풀어놓은듯 캄캄하였다. 바람소리와 파도소리도 잦아지고 선실창밖에는 날샐녘의 정적이 깃들어있었다.

드디여 동이 트고 아침노을에 배가 나아가는 저쪽앞의 파아란 물…

인츰 형형색색의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싼 땅이 나타났다. 제주도였다.

밖에 나와 서있던 리덕구는 어쩐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눈섭밑이 떨리고 눈굽이 뜨거워오는것을 느꼈다.

(내 고향 제주도다!-)

그에게는 마치 파아랗게 보이는 제주도가 두팔을 벌리고 자기를 향해 마주 달려오는것만 같았다. 그는 자기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있는것을 느끼지 못하고있었다.

리덕구는 신지항에 내렸다. 드디여 꿈속에서도 그리고그리던 고향으로 돌아온것이다.

그는 무릎을 꿇고 절을 하듯 엎드리여 떨리는 손을 땅으로 뻗치며 눈물을 머금고 마음속으로 뇌이였다.

(고향땅이여! 고향의 땅아!)

이윽고 그는 머리를 돌렸다. 고향의 하늘은 눈부시게 푸르고 땅우에는 8월의 신록이 풍만하게 무르익은 숲과 키높은 나무들이 설레이고있었다.

바다가 가까운 언덕들에는 감나무, 벗나무, 동백나무, 참대숲들이 언덕을 아름답게 수놓고있었으며 잇달아 귤밭들이 바다가가까이까지 펼쳐져있었다.

섬의 대기는 갓난애의 입술처럼 부드러운데 무엇인가 달콤한 향기가 풍기고있는듯 했다. 바람에 몰려 거품이 인것 같은 구름이 파아란 하늘의 심연속을 헤염치고 산과 들, 길가와 마을에 핀 꽃에서 꽃으로 다니며 꿀을 빨고 흔연해진 꿀벌들이 붕붕거리며 자기 둥지를 찾고있었다.

리덕구는 어인 일인지 순간에 배멀미도 사라지고 몸과 마음이 날아갈듯 상쾌해짐을 느꼈다.

(그 누가 말했던가. 고향의 공기가 명약이라고… 아마 고대 어느 유명한 의학자가 말한것 같다.)

그는 머리를 푹 숙이고 눈물을 머금고 오래동안 꼼짝않고 서있었다.

이곳 신지항에서 고향마을 신촌리까지는 거의 30리길이였다. 여기서 화물차를 잡아타거나 어느 아는 집으로 찾아들어가 분마를 얻어타고 달려갈수도 있었지만 어쩐지 걷고만싶은 고향길이다. 그리하여 리덕구는 장마당으로 통하는 비교적 복잡한 읍의 동문동거리를 벗어나자 동쪽으로 곧추 뻗어나간 외통길인 신작로로 나섰다. 제일먼저 안겨오는것은 한나산이였다. 높이 치솟은 한나산은 제주도 어느곳에서도 보인다. 산정은 머리가 있고 어깨가 있듯이 메산자모양그대로 생긴데다 볼수록 거창한데 동서로 길게 기복을 이루면서 면면히 뻗어나간 산줄기는 마치 수리개가 나래를 편것 같다. 그밑으로 종지를 엎어놓은듯 한 야산들이 드문드문 서있고 그사이로는 연무에 쌓인 마을의 초가집들이 보인다. 마을근처에 거무스름한 돌각담들로 구분된 밭에는 고개숙인 누런 조이삭들이 바람에 물결치고 조밭속에서 돌피를 솎는 농군들의 모습이 눈에 띄운다.

그들모두는 보리짚으로 엮은 농립모에 무명천에 감물을 들인 토색빛천으로 만든 바지저고리차림이였다. 이 옷은 잔치때나 명절때를 빼놓고 늘 입는 이곳 섬사람들의 평상복이다. 문득 들판과 그와 잇닿은 야산들에서는 황소의 영각소리가 들려왔다. 뒤따라 망아지를 찾는 배부른 말의 울음소리가 대기를 흔든다.

그런데 웬 일인지 리덕구는 고향의 풍경에서 무엇인가 아직도 기분과 활기가 없는것을 감촉했다. 지나가는 길손들이나 밭에서 일하는 농군들의 표정은 해방전이나 아무런 차이도 없이 침울했다. 사자봉앞의 콩크리트다리로는 일본군경을 실은 자동차가 행인들을 좌우로 밀어치우면서 뽀얗게 먼지를 날리며 지나가고 삼향리 경찰서앞에서는 검은 정복차림에 긴 칼을 찬 순사들이 드나드는 모습이 눈에 띄운다. 그래서 거리와 마을들은 아직도 왜정때처럼 무거운 공기속에 잠겨있는것인가.

이전과 좀 차이가 있다면 일본인들이 기가 죽어 어디로인지 황황히 다그쳐가는것이였고 또 그러는 그들을 의아스럽게 지켜보는 섬사람들의 영문 몰라하는 눈길이였다.

(사람들이 아직 해방이 되였다는걸 혹시 모르고있는가? 아니, 설마 그럴수가…)

록음이 짙은 원당봉기슭을 에돌아 일본군이 제주도 곳곳의 사람들을 끌어내여 비행장으로 닦다가 중도반단한 넓은 벌판길을 지나니 언뜻 그의 시야에는 바다가에 자리잡은 고향마을이 한눈에 안겨왔다. 한낮의 고향마을은 늦여름의 땡볕속에 조용히 묻혀있었다.

리덕구는 동구길에 멈춰서서 정겨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어린시절의 넋이 깃든 나서자란 고향마을…

고향마을 그 어디를 보아도 사랑과 정이 닿았고 엎드려 쓸어만지고싶은 심정으로 가슴이 울렁거렸다. 눈에 닿는것마다 그에게는 신성하고 소중한것처럼 생각되였다. 그에게는 고향마을의 모든것이 다 그지없이 소중하고 애정이 가는것들이였다.

(예가 내 나서자란 고향! 저기는 내 어린시절에 뛰놀던 풀판, 저기는 죽마고우들과 자맥질하던 바다가고 저기는 아침마다 어머님이 어린시절 나의 얼굴을 씻어주던 샘터…)

신작로에서부터 북쪽바다가까지 가리마처럼 곧추 뻗어나간 길의 좌우로 1 000여호의 낮게 엎드린 작은 초가들이 모여있다.

고향사람들은 오래전부터 그 길의 동쪽은 동가름이라고 부르고 서쪽은 서가름이라고 불러왔다. 서가름쪽으로는 언덕진 밭들을 얼마간 지나서야 집들이 있지만 동가름쪽에는 신작로곁에서부터 집들이 바투 붙어 나앉아있다. 바로 이 신작로에 바싹 붙어있는 동네가 상두거리라고 부르는 고향마을 신촌이다. 마른 새초로 지붕을 이은 집들, 좁고 오랜 골목길들, 여기저기 보이는 키높은 감나무들, 푸른 참대숲, 지붕우에 올라있는 호박이며 하얀 박들까지도 순식간에 제각기 한가닥씩의 추억을 불러온다.

저기 상두거리의 한복판에 보이는 잎이 검푸르게 짙은 귤나무밭은 또 얼마나 많은 어린시절의 잊을수 없는 일화들을 한꺼번에 떠올리는가. 뭍의 외지에서 이곳에 온 사람들은 누구나 이 귤밭앞에서 찬탄을 금치 못한다. 늦가을이나 초겨울에 푸른 잎이 다 떨어지고 싯누런 황금빛귤들만 가지에 데룽데룽 매달려있을 때의 그 경치는 참으로 볼만 하다. 동트는 아침해살이나 해저무는 석광을 받을 때에는 마치도 나무에 귤이 아니라 황금덩이들이 달려있는듯 한 황홀경을 펼쳐놓는것이다. 거기에 또 주변 멀리까지 풍기는 무르익은 귤향기는 사람들을 취하게 할 지경이다. 이런 매혹적인 독특한 풍경은 이곳 신촌마을만이 아니라 제주도의 모든 마을 어디서나 보게 된다.

그래서 제주도사람들은 이러한 풍경을 자기 고장의 자랑중의 하나라고 말한다. 기실 우리 나라 삼천리 방방곡곡 어디서든 찾아볼수 없는 독특하고 황홀한 경치임은 틀림없는것이다.

리덕구는 자기도 모르게 뛰는듯 한 걸음으로 걸어갔다. 앞으로 나갈수록 고향마을은 더욱 선명하게 안겨왔다.

불현듯 일찌기 세상떠난 아버지의 어렴풋한 얼굴이 떠오르기도 하고 천연두로 얼굴에 생긴 좁쌀알같은 마마자욱을 없애보려고 정성들여 날마다 새벽의 샘물에 씻어주던 다심한 어머니의 인자한 모습이 떠오르기도 하고 막내인 자기를 공부시켜주고 세심히 돌봐주던 형들과 형수들의 모습이 눈앞을 스치기도 하였다. 옛말을 들려달라고 조르며 따르던 조카들, 마을의 첫 대학생이라고 그리도 받들어주던 이웃들… 모두가 꿈속에서도 그리던 사람들이다.

동구밖 연자방아간앞의 언덕길로 올라서니 가까운 바다쪽에서 시원한 해풍이 맞받아 불어왔다.

그때 왼쪽골목에서 동갑나이쯤 되여보이는 사나이가 줄곧 유심히 쳐다보며 다가오고있었다.

리덕구는 마을의 아는 사람이 아닌가 하여 안경밑으로 시선을 집중하여 찬찬히 마주보는데 저쪽에서 먼저 알아보고 소리쳤다.

《덕구 아닌가? 옳구만!》

자세히 보니 어렸을 때 함께 놀던 귤밭집 아들 량기순이였다. 그는 희멀쑥하게 생긴 얼굴에 늘쌍 그렇듯이 꾸며낸듯 한 친절과 웃음을 지으며 성큼성큼 마주 걸어왔다.

리덕구는 오랜만에 만나는 고향친구인 그의 희고 퉁퉁한 손을 반갑게 잡았다.

《기순이, 잘 있었소? 오랜만이요!》

《야, 이거 정말 반갑네, 반가워… 여기 고향의 어릴적 친구들이 자네 이야기를 늘쌍 한다네. 모두가 자넬 못 잊어하면서… 전쟁에 나간 자네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랬지. 아무튼 자네는 이러나저러나 행운아야!-》 하고 말하는 그의 어조에서 무엇인가 과장기와 꾸민감이 느껴졌지만 반갑게 맞아주니 고마웠다.

《기순이, 그래 어떻게 지내나? 집안도 다 무고하겠지?》 하고 리덕구는 진정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 촌구석에서 사는 우리들이야 여전하지. 한데 <학도병>으로 징집되였던 자네는 그 전장에서 어떻게 돌아왔나? … 혹시 어디 부상이라도 입고…》

《아니, 왜놈이 망했으니 이렇게 돌아온거지!》

《뭐라구, 왜놈이 망했다구?! … 이 사람 덕구, 큰 변날 소리 말라구!》하고 량기순은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불시에 펄쩍 놀라며 겁질린 눈으로 엿듣는 사람이 없나 하고 주위를 살피며 눈을 껌뻑거렸다.

《기순이, 정말 깜깜이로구만. 왜왕놈이 벌써 보름전에 무조건항복한다고 방송으로 불어댔어!》

리덕구는 조용히 통쾌한 미소를 지었다.

《그게 사실인가? … 여기야 전기가 있나 방송이 있길 하나… 그러니 통 모를수밖에…》

그러면서도 량기순은 아직 잘 믿어지지 않는듯 기연가미연가하며 미심쩍어했다.

《기순이, 돌아오면서 부산에 들리니 거기선 해방이 되였다고 벌써 건국준비위원회를 내오고 벅적 들끓고있더란 말일세.》 하고 리덕구는 또다시 시원한 웃음소리를 냈다.

순간 량기순의 입에서 갑자기 환성이 터졌다.

《야, 이젠 살았구나! 내가 징병을 면하게 됐단 말이야!》

량기순은 웃음절반, 울음절반의 괴이한 환성을 련속 질러댔다. 이것은 과장기가 없는 진실한 목소리였다. 지금껏 징병을 피해 다니던 량기순은 너무 기뻐서 울고 웃었다.

《요새는 웬 일인지 마을에 신문도 안 온다 했더니… 왜놈들과 군청놈들이 저희놈들끼리 짜고서 알려주지 않은 모양이구나!》

량기순은 떠들썩했다. 그의 말이 옳은것 같았다.

전기도 방송도 없는 제주도, 이 섬에서 언론, 통신을 봉쇄하면 이곳 주민들은 세상소식을 모르고 지낼수밖에 없는것이다.

일본놈들은 자기들이 이곳에서 무사히 피신하는 동안만이라도 해방소식을 극력 비밀에 붙이려고 했을것이다. 만약 일찌기 알려지는 경우 전패국 국민으로 자기들의 신변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수 없었던것이다.

《허, 요즘 왜놈들과 순사들이 덜 돌아치기에 웬 일인가 했더니만 그놈들이 망한때문이였군. 덕구, 내 이제 이 소식을 사람들에게 알리겠어!-》 하고 신바람난 기색으로 어깨를 실룩거리며 돌아서 몇걸음 걷던 량기순은 무슨 생각에선지 되돌아왔다.

《참, 덕구. 자네 어머니와 형들은 다 무고하네!》

그런 다음 그는 례의 그 꾸민듯 한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보탰다.

《자네의 보름달같은 안해도, 아이들도 일일천추로 자네가 돌아오길 기다리고있어!-》

말은 이렇게 했으나 웃음속에는 가시가 있었다. 부자집아들인 량기순은 리덕구의 안해인 량후상이 처녀시절에 청혼했다가 퇴박을 맞았었다. 그런 량기순은 리덕구와 량후상이 결혼한 후에 늘쌍 《자네는 행운아야!-》 하며 쓰거운 미소를 짓군 했었다. 그것은 일종의 시샘이였다. 리덕구의 안해 량후상은 그가 시샘할만큼 얼굴곱고 지식많고 례절밝고 마음씨가 고운 녀자였다. 하지만 리덕구는 그런 녀자와 결혼은 하였으나 지금까지 오랜 기간 별로 살뜰한 정을 나누어보지 못하고 떨어져 살아왔다. 대학공부를 하느라고 3년을 떨어져 살았고 전쟁마당에 끌려나가 또 3년세월을 보냈다.

(그러니… 이제는 다섯살이 됐을 아들애가 아버지를 알아보기나 하겠는지…)

리덕구는 설레는 가슴을 지그시 누르며 집쪽으로 걸어갔다. …

 

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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