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회)

제1편 소망

6

 

리덕구부부가 어머니를 모시고있는 큰형네 집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활짝 열어놓은 방안에 일가의 대식솔이 둘러앉아 흥성거리고있었다.

삼형제가족의 어른, 아이모두가 모이니 20여명이 넘는것 같았다.

리덕구는 방안에 들어서자바람으로 형수들에게로 다가가 차례로 절을 하였다.

《형수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아이고, 돌아왔구만. 절은 무슨… 반갑네, 반가워. 그 사지판에서 고생인들 오죽했을라구.》

맏형수와 둘째형수는 눈굽을 찍으며 반가워 어쩔줄을 몰라했다. 뒤따라 조카애들이 새들처럼 달려와 리덕구에게 매달렸다.

《삼촌!》

상봉의 기쁨과 환희로 떠들썩하는 소리에 할머니의 품에 안겨 잠들었던 덕구의 아들 진우가 깨여났다. 나어린 진우는 두리번거리다가 제 어머니한테로 가려고 팔을 내밀며 달려가려고 하였다. 그럴 때 할머니 김삼봉이 손자 진우를 덕구에게로 떠밀었다.

《이녀석아, 뉘 아멍이다!》

어린 진우는 어리둥절하며 머밋머밋하는데 어머니 량후상이 웃으며 안아다가 리덕구에게 안겨주었다. 그러자 진우는 불시에 으앙 하고 울음을 터치며 낯설은 리덕구에게서 빠져나갔다. 이 광경을 본 할머니 김삼봉은 속이 좋지 않은듯 눈굽을 찍으며 괴롭게 탄식했다.

《하두 오래 떨어져있었으니 애가 제 아멍까지도 몰라보는군. 지나간 그 몹쓸놈의 세월탓이지.》

리덕구는 생각깊은 미소를 지으며 방안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좌구형이 보이지 않았다.

《둘째형님은 어디 가셨는가요?》 하고 리덕구는 큰형과 어머니쪽에 시선을 모으며 조용히 물었다.

《곧 올게다. 온종일 사람들을 만나려고 어디론가 분주히 다녔는데…》 하고 맏형이 기침을 하며 응답했다.

뒤따라 둘째형수가 뭐라고 말하려는데 마침 뜨락의 어둠속에서 힘차게 내짚는 발자국소리가 들리더니 해볕에 얼굴이 검실검실하게 탄 구척장신의 건장한 사나이가 열어놓은 방문안으로 들어섰다. 둘째형 좌구였다.

《형님!》

리덕구는 반갑게 소리치며 벌떡 일어나 건너뛰듯 그에게로 다가갔다.

《오, 덕구로구나! 좀전에 네가 무사히 귀향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대틀인 좌구형은 기쁨으로 눈을 빛내이며 웅심깊은 애정을 담아 동생을 앉혔다.

《형님, 그간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하고 리덕구는 청좋은 목소리로 말하며 형에게 례절바르게 머리숙여 절했다.

《고맙다. 제 집에서 살며 겪은 우리들 고생을 네가 겪은 고생에 비기겠니.》

좌구형은 몰라보게 수척한 동생을 여겨보며 덤덤히 응수하였다.

그러더니 맏형 호구에게로 머리를 기웃하고 무엇인가 낮은 소리로 뭐라고 말했다. 맏형 호구는 신중한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끄덕하였다.

《자, 이제는 온 집안이 다 모였으니… 어머니, 제가 몇마디 해도 되겠습니까?》

맏형 호구는 나란히 앉은 어머니에게 깍듯한 어조로 의향을 물었다.

《그래라.》

어머니 김삼봉은 정겨운 목소리로 짤막하게 뇌였다.

병색이 짙은 맏형 호구는 말을 하려다가 갑자기 쇠약한 몸을 앞뒤로 흔들며 쿨럭쿨럭 기침을 했다.

《오늘 모두 모이라고 한것은 첫째로…》 하고 서두를 뗀 호구형은 잠시 동안을 두었다가 말을 계속하였다.

《그렇게도 기승을 부리던 악독한 일제가 종시 패망하고 우리 나라와 민족은 해방되여 마침내 새시대를 맞게 되였다. 이런 때에 우리 가정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는것이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외래침략자들을 반대하는 싸움에서 선각자로 소문난 집안이다.》

호구맏형은 이어 아버지 리근훈이 일제를 반대하여 제주도에서 3. 1운동의 선두에 서서 투쟁하다가 놈들에게 끌려가 악형을 당하고 그 후과로 제명을 다 살지 못하고 일찍 돌아가게 된 경위를 이야기하였다.

《물론 우리 집안모두가 다 잘 아는 이 사실을 내가 왜 새삼스레 또 하는가 하면… 우리 나라와 민족이 해방된 오늘 여기 제주도땅에서 이제부터 새로운 보람차고 벅찬 큰일들이 많을것이기때문이다. 여기 앉아있는 좌구, 덕구는 잘 알것이다. 그런데…》

맏형 호구는 또 기침이 터져 숨가쁘게 몸을 흔들며 쿨럭쿨럭하였다.

곁에 있던 어머니 김삼봉이 인차 맏아들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형님, 지당한 말씀입니다!》 하고 좌구가 맏형의 말이 잠시 끊어진 사이에 몹시 흥분한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서울에서는 좌익진영이 지난 8월 15일 아베총독의 정권이양에 동의한 후 려운형선생 등이 조선건국준비위원회(략칭 건준)를 결성하고 재건파에 의하여 조선공산당재건위원회가 조직되였다고 합니다. 지금 서울과 각지에서는 좌익과 진보세력이 주동이 되여 각지에 인민위원회들을 조직할 준비를 활발히 하고있다고 합니다.》

맏형 호구는 동생 좌구의 웨치듯이 하는 말에 머리를 크게 끄덕이며 공감하였다.

그러는 두 형을 정색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리덕구는 경탄을 금치 못하고있었다.

놀라운 일이다. 륙지와 멀리 떨어진 이곳 섬에서 어떻게 그처럼 빨리 두 형들이 벌써 서울의 정세와 소문까지 꿰뚫고있는가… 일반백성들은 아직 해방된 소식조차 모르고있는데… 리덕구는 학생시절부터 자기의 형들이 각각 무엇인가 남모르게 반일비밀단체에 관여하고있음을 어렴풋이 감촉하고있었다. 큰형인 호구는 일본과 제주도를 분주히 왕래하면서 사람들과 자주 상종하였고 좌구형은 좌구형대로 항만과 공장의 로동자들이 조직한 모임들에 참가하군 하였다. 그러나 설사 두 형들이 지금까지 반일지하조직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왔다고 하여도 아직 대다수 제주도사람들이 해방이 되였는지도 모르고있는 상태에서 어떻게 그렇게도 서울과 각 지방 정세의 움직임까지도 알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소식도 소식이지만 공부도 많이 못하고 학식도 부족한 형들의 정세분석능력과 정계의 움직임에 대한 판단과 인식능력이 놀랍기도 하고 한편 그러한 형들이 돋보이고 자랑스럽기도 하였다.

《자, 그러니 이런 형편에서… 우리 집안모두가 이곳 제주도에서 새 조국건설을 위한 중요한 일에 앞장서야 하겠다는것을 말하자고 이렇게 모이라고 한것이다. 이제 또다시 외래침략자들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뼈아픈 일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모두가 부강한 새 조국을 건설하는데 그 무엇도 아끼지 말아야 한다. 한번 나라를 빼앗기면 그것을 되찾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우리모두가 체험할대로 체험했다. 우리모두는 언제 어디서나 이것을 잊지 말자! 자, 그럼 우선 둘째야, 너부터 말해보아라. 이제부터 너는 무엇을, 어떻게 하려니?》 하고 맏형 호구는 여느때 볼수 없었던 격양된 어조로 말하며 둘째인 좌구를 미더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좌구는 구척장신의 몸을 곧바로 세우고 앉아 눈을 번쩍이며 잠시 말이 없었다.

《형님, 제가 방금전에 조용히 말씀드렸지만… 저는 여기로 오기 전에 조직의 모임에 참가했었습니다. 우선 당장 제주도에 건국준비위원회를 내오고 동시에 섬의 각지에 인민위원회를 내오는 사업에 적극 참가하기로 약속하였습니다.》라고 좌구는 무게가 느껴지는 목소리로 당당하게 말했다.

맏형 호구는 의례히 그러리라고 믿고있은듯 이번에도 크게 머리를 끄덕이였다. 그런 다음 그는 역시 큰 기대와 믿음에 찬 시선으로 덕구를 바라보았다.

《진우 아멍은 어떻게, 무엇을 하려느냐?》

리덕구는 잠잠했다. 형제들중에서 학식과 지성이 제일 높은 그였지만 내심 그는 형들에게서 무엇인가 얼마간 위압감을 느끼고있었다.

《형님, 뭐 물을거나 있습니까. 나와 같이 우리 동무들속에서 큰일을 맡아하게 될텐데요.》 하고 좌구가 웃으며 대신 응답하였다.

《그래도 본인의 의사를 들어봐야지. … 혹시 무슨 남다른 계획이나 생각이 있을수도 있을테니까. … 가령 서울로 가서 무슨 큰일을 하려는지…》

맏형 호구의 의미심장한 말에 온 집안사람들의 시선이 일시에 침묵하고있는 리덕구에게 집중되였다.

문득 리덕구는 여유있는 미소를 지으며 침착하게 잘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고향학교의 교사가 되여 아이들에게 우리 나라의 력사와 지리를 가르치려고 합니다.》

그러자 큰형 호구와 둘째형 좌구는 일시에 꼭같이 락담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대틀인 좌구형이 먼저 조금도 주저없이 꾸짖듯이 직방 말하였다.

《그게 신중히 생각해보고 하는 말이냐? 네 생각이 틀렸다. 갓 해방된 제주도땅에 얼마나 할 일이 많고많으냐? 그리고 또 여기 제주도땅에 너만 한 수준의 학식과 재능을 가진 지식인이 도대체 몇이나 되느냐. 그런 네가 새 조국건설에 큰일을 맡아 한몫해야겠는데… 뭐 학교의 선생님이 되겠다구? 촌학교의 선생노릇 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어. 그러니 마음을 고쳐먹어라!》

리덕구는 입을 다물고 침묵하고있었다.

(일본놈들의 악랄한 식민지동화정책으로 오랜 세월 우리 말과 우리 글, 성과 이름마저 빼앗기고 조국의 력사와 지리를 배우지 못하고 자란 고향의 아이들에게 있는 정을 다 쏟아부으며 가르치는것이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형님들!)

리덕구는 형들에게 바로 어제 저녁 이맘때 부산에서 대학동창생들이며 《학도병》출신들인 송요찬과 함병선이 서울로 가자고 그렇게도 권고하고 강박하는것을 뿌리치고 고향에 돌아가 교사가 되겠다며 귀향한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해방된 서울로 올라가 할 일이 많고 대다수 《학도병》출신의 대학졸업생지식인들이 거기로 모여들고있다고 얼마나 중언부언했던가?)

생각에 잠겨있던 리덕구에게 큰형 호구가 격한 어조로 꾸짖듯이 말했다.

《그래, 둘째형의 백번 지당한 충고를 듣고도 아직 생각을 고쳐하지 않겠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큰형님. 저는 이번에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내가 나서자라고 선조들의 넋이 어린 제주도의 고향아이들에게 있는 정, 있는 지식을 다 쏟아부으며 교사로 일생을 보내리라 결심했습니다. 해방된 조국에서 고향학교의 교사가 되는것, 이것이 저의 소망입니다.》

리덕구는 잔잔한 어조로 격하지 않고 자기 의사를 명백히 표명하였다.

그는 일단 자기가 결심했던 일을 그 누구앞에서도 꺾는 법이 없었다. 더우기 옳다고 믿는 일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허, 모를 일이군. 그렇게도 명석하기로 소문난 덕구 네가 그래 아직도 깨닫지 못했단 말이냐? 그러니 끝내 너는 앞으로 거세차게 흘러갈 시대의 복판에 뛰여들지 않겠다는것이지?》

좌구형이 참다못해 큰소리로 불만을 터뜨렸다.

그러나 여전히 리덕구는 여유있게 미소를 짓고있었다.

《두 형님들이 앞장에서 큰일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저는 학교를 복구하고 교사생활을 하면서 이곳 고향에서 벌어지는 사회적인 사업에서도 형님들과 적극 협력하겠습니다.》

《허, 대들보감이 서까래로 되겠다니 야단이로군.》 하고 좌구형은 컴컴한 낯색으로 탄식했다.

그때 지금까지 말 한마디 없이 잠잠히 앉아있던 어머니 김삼봉이 조용히 뇌였다.

《어멍이 한마디 하련다. 내 생각에는 막내의 의향을 너무 탓할것만은 아닌것 같다. 어멍에겐 고향학교의 교사로 있으면서 형들이 하는 일을 정성으로 돕겠다는 막내의 말도 깊이 생각해보고 하는 소리로 들린다. 어멍이 틀린 말을 하느냐, 맏이야?》

모두 잠잠히 듣고있었다.

어머니 김삼봉은 까딱않고 곧은 자세로 앉아 나직하나 진정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그 모진 전쟁판에서 새파란 나이에 파란만장을 겪으며 고생하다가 돌아온 막내를 얼마동안 조용히 지내도록 내버려두는게 옳은 처사인것 같구나. 그리고 어멍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참다운 교육은 나라의 장래와 관계되는 중대한 일이라고 지금까지 들어왔다.》

어머니 김삼봉의 나직하면서도 인자한 말에는 전쟁판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막내아들에 대한 류다른 애정만이 아닌, 듣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그 무엇이 있었다. 역시 젊어서부터 자식들을 대바르고 정의감이 강한 사람으로 키워오며 자녀교양에 힘써온 인자하면서도 공명정대한 소문난 녀걸다운 말이였던것이다.

방안은 숙연한 기분에 잠겼다. 맏형 호구와 둘째형 좌구는 어머니의 말에 머리를 숙이고 침묵하고있었다.

이윽고 맏형 호구가 먼저 조용히 머리를 들고 말했다.

《어멍, 어멍말씀대로 그렇게 하도록… 저희들은 어멍말씀에 다른 의견이 없습니다.》 하고 효성이 지극한 호구는 어머니 김삼봉에게 정중히 아뢰고나서 말을 덧붙였다.

《그럼 내가 다 모이라고 한 두번째 취지를 말하겠다. 모두 명심해듣기 바란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제 오래 살것 같지 못하다. 그러니 좌구, 덕구… 너희들은 이제부터 나라를 위한 일에서도, 가정을 위해서도 내 몫까지 일을 많이 해달라는것을 부탁한다. 오늘 내가 하려던 말은 다했다.》

맏형의 말이 끝나자 불현듯 리덕구가 앞으로 나서며 울음섞인 목소리로 말하였다.

《큰형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그러시면 안됩니다.》

《아니다. 내 병은 내가 잘 안다. 하지만 너무 걱정들은 하지 말아라. 나도 살아있는 동안은 새 조국건설에 할수 있는껏 모든것을 후회없이 하련다. 이제부터 제수들은 남편들을 도와서 또 순우와 조카애들도 각자모두가…》 하고 호구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쿨럭쿨럭 가슴찢는듯 한 기침을 했다.

방안의 사람들은 병색이 짙은 호구를 말없이 눈물겹게 바라보고있었다.

《자, 그럼 이제는 오래간만에 우리 온 일가가 어멍을 모시고 다 모였으니 즐겁게 이야기하며 식사를 하자. 여보, 어서 있는것들을 다 들여오우.》 하고 호구는 유쾌하게 웃으며 안해에게 소리쳤다.

방안의 녀자들은 일시에 일어나 음식을 나르기도 하고 모기불을 피우기도 하였다.

해방된 제주도의 여름밤은 소리없이 깊어가고있었다. 어디선가 바다쪽에서 어둠을 흔들며 배고동소리가 들려오고있었다.

 

련재

독자감상글쓰기
Change the CAPTCHA codeSpeak the CAPTCHA code
 
홈페지봉사에 관한 문의를 하려면 여기를 눌러주십시오
Copyright © 2003 - 2019 《조선륙일오편집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