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 회)

제1편 소망

7

 

그해 11월 어느날 한낮때.

북제주군 조천면 경찰지서앞의 신작로에 미군용차 한대가 뽀얗게 갈색먼지를 일으키며 미친듯이 달려와 멎어섰다. 차안에는 카키색미군복을 입은 운전수와 기름을 뒤바른 반들반들한 머리칼을 매끈히 빗어넘기고 화려한 미국신사풍의 옷차림을 한 조선인신사가 앉아있었다.

이미 련락을 받고 경찰지서앞에 나와 서있던 면경찰지서장이 껑충껑충 뛰는 걸음으로 차앞으로 달려가 깍듯이 례를 표했다.

《오신다는 련락을 받았습니다. 저는 이곳 면경찰지서의 지서장입니다.》

《사꾸라》무늬의 구리단추를 단 해방전 경찰제복을 그대로 입은 지서장은 몸을 어떻게 가져야 할지 몰라 허둥거리며 코맹맹이소리로 말하면서 머리를 조아렸다.

중절모를 이마깊숙이 눌러쓴 차안의 신사는 외진 섬의 면경찰지서 지서장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듯 차안에서 내리지도 않고 도도하게 물었다.

《조천중학교가 어디 있는가?》

《넷… 조천중학교는… 바로 저 건물입니다.》

면경찰지서 지서장은 행길건너 멀지 않은 곳을 가리켜보이고는 그 이상 더 구부릴수 없을 정도로 허리를 구부렸다.

《저 중학교에 리덕구라는 선생이 있는가?》

미국신사풍의 조선인남자는 여전히 차안에서 거만한 어조로 다시 물었다.

《넷, 저기 조천중학교에 리덕구교사가 분명 있습니다. 제가… 먼저 가서 찾아보겠습니다.》

조천면 경찰지서장은 희한하게도 뛰는듯 한 빠른 걸음으로 행길건너 학교쪽으로 걸어갔다.

발동을 건채로 서있던 미군용차는 곧 방향을 꺾더니 꽁무니에 먼지바람을 달고 조천중학교 마당쪽으로 달려갔다.

차가 중학교건물의 현관앞에 바싹 다가가 멈춰서자 차안에서 껑충한 키에 중절모를 이마깊숙이 눌러쓴 미국신사풍의 옷차림을 한 사나이가 얄팍한 밤색가방을 들고 거드름스럽게 내려섰다. 그때 학교의 현관안에서 면경찰지서장이 먼저 나오고 뒤따라 중키의 점잖아보이는 중년남자가 나왔다.

미군용차에서 내린 미국신사풍의 사나이는 불시에 뜻모를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정중한 어조로 물었다.

《리덕구선생인가요?》

《아닙니다. 전 이 학교의 교장입니다. 리덕구선생은 잠간 자리를 뜨고 없는데요.》 하고 조천중학교의 교장은 역시 정중하게 응답하였다.

《아, 그렇소? 어디 먼곳에 갔는가요?》

미국신사풍의 사나이는 좀 실망한듯 한 표정을 지으며 손목시계를 보았다.

《아닙니다. 조금전까지 여기서 앞으로 개교와 관련된 일을 하고있었는데… 곧 돌아오겠는지…》 하고 교장은 어정쩡한 대답을 하였다.

《아, 시간이 급한데… 여보 교장선생, 어서 급히 찾아오도록 조처하시오. 나는…》

중절모를 쓴 조선인신사는 명령조로 말하며 불쑥 안주머니에서 증명서를 꺼내 교장에게 내밀었다.

교장이 받아본 그 증명서에는 이 신사풍의 껑충한 사나이가 서울 미군정의 중요부서에서 사업하고있음을 확인하고있었다.

온화하고 선량한 교육자인 교장은 점잖게 말없이 증명서를 본인에게 되돌려주고나서 개교를 앞두고 학교에 나와있던 학생들쪽을 향해 누군가를 불렀다. 이곳 제주도의 궁벽한 면에서는 드물게 보는 희귀한 군용차를 둘러싸고 웅성거리며 구경하던 학생들중의 한 아이가 찾는 소리를 듣고 달음박질로 교장선생에게로 달려왔다.

《교장선생님, 저를 불렀습니까?》 하고 머리를 빤빤히 깎은 학생아이가 굽석 허리를 굽혀 인사하며 물었다.

《창민학생, 조성철이란 학생의 집을 알지요?》

《예, 저의 동네에 있습니다.》

《조성철이네 집에 리덕구선생이 가있을거요. 거기 가서 리덕구선생님에게 급히 학교로 돌아오라고 하오. 서울에서 손님이 찾아오셨다고 전하시오.》

《알겠어요!》 하고 창민이라고 불리운 학생아이는 처음 보는 멋진 중절모에 신사차림의 서울에서 온 사람을 호기심어린 눈으로 흘끔흘끔 쳐다보며 머뭇거리고있는데 면경찰서의 지서장이 생색을 내듯 먼저 앞으로 나섰다.

《얘, 나와 함께 가자.》 하고 지서장은 서울에서 온 사람에게 굽신 허리를 굽히며 인사하면서 말을 보탰다.

《제가 함께 가서 곧 리덕구선생을 찾아서 이리로 보내겠습니다.》

조천면 경찰지서장은 무엇이 그리도 흥겨운지 어깨를 연해연방 실룩거리며 학생아이와 함께 아래마을쪽으로 신바람나서 달려갔다.

리덕구는 사춘기나이의 조성철과 함께 그의 집 뜨락에서 조금 떨어진 풀밭에 앉아있었다. 신설된 학교를 꾸리는 일과 교육기자재며 비품구입으로 그동안 정신없이 뛰여다닌 리덕구였다.

《성철이, 이미 말했지만 이제 얼마후면 조천중학교가 곧 개교하게 된다. 그런데 너는 공부하고싶지 않느냐? 아직 학교에 아무런 소식도 없이 지내고있으니 묻는거다.》

《아닙니다. 저도 벌써 개교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하고 불시에 울상이 된 조성철은 서글픈 목소리로 이렇게 말을 덧붙였다.

《제가 왜 공부하고싶지 않겠습니까? 밤에 잠자리에서 중학교에 다니는 꿈까지도 꾸는 지경인걸요. 하지만 가정사정이 하도 곤난해서 늙으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데 학교소리만 꺼내도 어머니는 안타까워서 울기만 해요.》

《그런 사정은 나도 아이들을 통해 들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공부는 해야 한다. 지식은 힘이다. 교육은 미래를 만드는 열쇠라고 한다. 성철이, 락심하지 말아라. 네가 가정형편의 어려움속에서도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나서면 중학공부는 하게 될거다.》

리덕구는 눈물을 머금고있는 성철을 측은히 바라보며 힘을 주듯 열기있게 말했다. 그가 여러 면에서 료해하고 몇번 직접 만나본바에 의하면 조성철은 사물에 민감하고 총명하였으며 정서가 풍부하고 노래, 체육도 남달리 잘하는 다재다능한 수재형의 아이였다. 소학교를 최우수성적으로 졸업하고 서당에까지 다닌 조성철의 재능이 너무도 아까워서 리덕구는 중학교개교일을 앞두고 아직까지 입학등록을 하지 못한 그를 만나자고 집으로 찾아왔던것이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저는 매일 밤 잠자리에 누워 생각하고 또 생각합니다. 무슨 일이든 뼈빠지게 일을 해서 가난한 집형편을 도우면서 중학교에 다니기로 말입니다. 그런데 당장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서…》 하고 조성철은 속이 타는듯 꺼지게 한숨쉬였다.

《성철이, 그런 결심이면 된다. 중학교 등록금걱정은 하지 말아라.》

리덕구는 진정이 느껴지는 온화한 목소리로 뇌였다. 그는 이미 중학교측에 자신의 돈으로 성철의 등록금을 내였고 앞으로도 그렇게 정성껏 도우려고 결심하고있었다. 그러나 리덕구는 일체 그런 말은 그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다.

《성철이, 학교에서도 힘껏 너를 돕겠다고 했다. 이제 너의 어머니를 만나 그런 이야기를 하겠다.》 하고 리덕구는 불시에 나직이 소리내여 웃으며 이렇게 물었다.

《참, 너 이런 글을 아니?》

《녜?》

《소년 역로 학난성》

《알고있습니다. 소년이 늙기는 쉬워도 글배우기는 힘들다. 이런 뜻이 아닙니까?》 하고 조성철은 총명해보이는 눈을 반짝거리며 거침없이 응답하였다.

《옳게 말했다. 그러니 지금 너의 집 가정형편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락심말고 배우자. 그럼 이제는 그 얘기는 그만하고… 참, 성철이 노래뿐아니라 씨름도 잘한다지?》

《녜? 씨름이요? 선생님, 갑자기 그건 왜 묻습니까?》 하고 성철이 의문스러워 되물었다.

리덕구는 소리없이 빙그레 웃었다.

《소문에 의하면 네가 조천면의 아이들속에서 씨름을 제일 잘한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어디 한번 나하고 겨루어볼가?》 하고 리덕구는 성철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롱조로 말했다.

《선생님, 전 그만두겠습니다.》

조성철은 불시에 명랑해져 새물새물 웃으며 펄쩍 물러나앉았다.

《왜? 겁이 나는 모양이지.》

《겁이라니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사실 제가 선생님을 넘어뜨리기도 거북하고 또 일부러 지기도 싫어서 그럽니다.》 하고 성철은 자신있게 말하였다.

리덕구는 그를 면바로 여겨보며 명랑한 어조로 소리쳤다.

《그건 변명의 소리다. 성철이, 알아두라. 경기에서는 부자간에도 이기는게 례절이야.》

그러자 촉기빠른 성철은 눈을 반짝이며 탄력있게 벌떡 일어섰다.

《그래요? 그렇다면 마음이 놓이는군요. 한데 샅바가 없어서 어떻게 합니까?》 하고 기분이 들뜬 성철은 리덕구를 바라보며 물었다.

리덕구는 용수철이 튕기듯 벌떡 풀판에서 일어났다.

《샅바는 해서 뭘 해. 그저 마주잡고 하면 되는거지.》

《좋아요. 선생님, 단판으로 할가요 아니면 3판 2승입니까?》 하고 조성철이 손바닥을 비비며 리덕구에게로 다가섰다.

《그건 네가 정해라.》

《3판 2승으로 하자요.》

《그러자.》

그들은 풀판 한가운데서 허리를 굽히고 서로 마주잡았다. 두다리를 뻗치고 마주잡는 순간 리덕구는 상대가 만만치 않음을 느꼈다. 조천면의 사춘기아이들속에서 단연 첫자리를 차지하는 강자라는것이 결코 헛소문이 아닌것 같았다. 17살 새파란 나이의 성철에게서는 근면한 로동과 체육으로 단련된 용수철같이 탕탕 튀는 탄력이 느껴졌던것이다.

리덕구는 성철이가 먼저 쓰기를 바랬다.

《자, 성철이 먼저 써라.》

리덕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야앗-》 하고 소리치는 소리와 함께 불시에 성철은 자기의 특기인 왼둥배지기로 덕구를 번쩍 들어올렸다.

그러나 리덕구는 들린채로 성철의 몸에 착 달라붙어 균형을 유지하고있었다.

성철은 온몸의 힘을 모아 들어올린 리덕구를 넘어뜨리려고 여러번 시도하였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하고말았다. 그가 놓으려는 순간 리덕구는 성철의 앞으로 내민 왼쪽다리를 걸어 밀면서 그의 몸균형을 허물었다.

중심을 잃은 성철은 넘어지지 않으려고 제힘을 역리용하여 밀어붙이는 리덕구의 수에 풀썩 풀밭에 넘어지고말았다.

《자, 봐라. 너의 흰소리가 이제는 빵짝났지?》 하고 리덕구는 명랑하게 웃어댔다.

《선생님, 아닙니다. 그건 유술이지 조선씨름이 아닙니다. 반칙입니다.》

조성철은 씨근거리며 항변하였다.

《성철이, 그건 얼토당토않은 생트집이야.》 하고 리덕구는 약을 올리며 반박했다.

《좋습니다. 선생님! 다시한번… 3판 2승이라고 했으니까요》

성철은 타고난 승벽으로 두주먹을 부르쥐고 달려들었다.

《좋아, 이번에 지면 인정하지?》

《그럼요.》 하고 조성철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들이 다시 마주잡고 풀밭을 돌아가는데 밭에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던 성철의 어머니가 다가오며 소리쳤다.

《성철아, 시키는 일은 안하고 여기서 씨름판을 벌려? 배포도 크구 기운도 좋다게.》

리덕구는 성철의 바지가랭이를 틀어잡았던 손을 놓고 그 녀인에게로 다가가려는데 조성철이 앞질러나가며 소리쳤다.

《어멍! 중학교 선생님이 집에 찾아왔다게.》

《아이고, 선생님이신걸 모르고…》 하고 성철의 어머니는 허리를 절반으로 꺾다싶이 굽히며 황황히 인사하였다.

리덕구는 소탈한 미소를 지으며 례를 표했다.

《성철이 어머니, 고생이 많으시겠습니다. … 저는 조천중학교 교사인데 성철이 중학교입학문제로 찾아왔습니다.》

《아이고, 고맙다게. … 한데 야단났수다게. 애를 학교에 보내기는 해야겠는데 당장 입학등록금도 마련 못했으니… 집안이 하도 구차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멍과 아들이 함께 속만 태우고있수다게…》 하고 성철의 어머니는 눈물겹게 뇌이며 긴 한숨을 내쉬였다.

《성철이 어머니, 입학등록금은 학교측에서 이미 냈습니다. 그리고…》

리덕구는 앞으로 학비문제는 학교측에서 힘껏 돕기로 했으니 성철이를 꼭 공부시키자고 각별한 정과 사랑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거듭 설유했다.

《아이고, 세상에 살다가… 이런 고마운 일도 생기는구만요! 선생님, 정말 고맙수다게. 그런데 무엇으로… 그 은혜를 보답하겠는지 막막하다게…》

조성철의 어머니는 감동에 젖은 목소리로 떠듬떠듬 뇌이며 흐느껴울었다.

《성철이 어머니, 그러지 마십시오. 이제 성철이가 학교에 다니면 아무래도 어머니가 혼자서 고생이 더 많겠는데… 고마운 인사는 오히려 제가 드려야 하겠습니다.》 하고 리덕구는 뜨겁게 말하면서 머리숙여 인사하였다.

《아이고, 선생님. 이러시면 안된다게. 그런 법이 어디 있수. 내 아들을 중학공부시키자고 그토록 나서서 마음써주시는것만도 고마운데…》

조성철의 어머니는 너무도 황송하고 고마워서 허리를 꺾다싶이 하며 연방 절을 하였다.

《어멍, 난 학교공부여가에 힘껏 어멍의 일을 돕겠어요. 밭일이랑 집안의 모든 일을 말이예요!》 하고 곁에 섰던 조성철이 울먹이며 큰소리로 어머니를 위로했다.

그때 문득 큰길쪽에서 누군가 《선생님!-》 하고 소리쳐 부르며 달려왔다.

(?! …)

리덕구는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자기를 부르며 달려오는 낯익은 아이의 뒤에는 아직은 한번도 상종한적 없는, 악질로 소문난 조천면 경찰지서의 지서장이 껑충거리는 걸음으로 따라오고있었던것이다.

《선생님, 웬 일일가요?》 하고 조성철은 까닭모를 불안을 느끼며 물었다.

《글쎄… 무슨 일인지 나도 모르겠구나.》

리덕구는 아무런 긴장감없이 보통어조로 나직이 뇌였다.

《리덕구선생님, 서울에서… 서울에서…》 하고 학생은 달려오느라 숨이 찬듯 리덕구앞에 다가와 떠듬거렸다.

리덕구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헤덤비는 학생을 조용히 타일렀다.

《창민학생, 무슨 급한 일인데 그렇게 덤비오? 무슨 일이든 항상 침착해서 조리있게 말해야 합니다.》

《리덕구선생님을 찾아 서울에서 손님이 왔다고 교장선생님이 곧 오시라고 분부했습니다.》 하고 심부름온 학생은 여전히 덤벼치며 서둘러 말했다.

그럴 때 가까이로 다가온 면경찰지서장이 영문모를 미묘한 미소를 띠고 리덕구를 쳐다보며 류달리 깍듯한 어조로 설명하였다.

《리덕구선생, 서울 미군정의 중요부서에서 막강한 권한을 가진 높은 급의 관직에 있는분이 친히 선생을 찾아오셨소. 지금 중학교에서 기다리고있는데 속히 가야 하겠습니다. … 그걸 정확히 알려주려고 내가 여기까지 따라왔소.》

《그런 사람이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는지 모르겠소? 찾아온 용건말이요.》 하고 리덕구는 정색해서 물었다.

《그것까지는 모르오. 하지만 막강한 권력을 가진 높은 급의 인물이 서울에서 여기 외진 섬에까지 찾아온것만 봐도 알수 있는것 아니겠소. … 아무튼 범상치 않는 용건으로 찾아오신것만은 분명하오. 그러니 여기서 더이상 지체말고 곧 가봐야겠소!》

면경찰지서 지서장은 별스레 중언부언하며 초조해하였다.

《성철이 어머니,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 리덕구는 머리숙여 인사를 하였다. 그런 다음 그는 서둘지 않는 걸음으로 천천히 행길로 나섰다. 그의 뒤를 따라 조성철과 심부름온 학생, 경찰지서 지서장이 걸어갔다.

신작로로 나서서 학교쪽으로 걷는 리덕구의 생각은 번거로웠다.

(서울 미군정의 인물이 무슨 용건으로 찾아왔는가? … 그런데 또 여기 경찰지서의 지서장은 왜 이렇게 《호의》를 보이며 뛰여다니는가? 지금 서울뿐아니라 각 지방의 정세는 복잡다단하다. 그런데…)

기실 리덕구가 알고있는 현재의 정세는 매우 착잡했다. 해방을 맞이한 전국은 해방의 기쁨을 맛보기는 하였으나 또 다른 시련에 부닥치고있었다. 국토는 량단되고 사상은 좌우로 분렬된채 서울의 정계는 수많은 각이한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란립을 이루고 칡덩굴처럼 엉켜있었다. 38°선이남에 조성된 이 모든것은 물론 정치적혼란기를 의미했다. 그러나 그런중에서도 공산당-좌익계렬이 단연 우세하였고 대중의 지지도 제일 높았다. 이곳 제주도에서도 서울과 마찬가지로 《한국독립당》, 《한국민주당》을 비롯한 우익계의 정당들과 각양각색의 사설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권력다툼의 란무장을 펼쳐놓았지만 《제주인민공화국》, 《제주콤뮨》이라고 불리울만큼 좌익력량의 활동이 단연 우세하였다. 적색좌익은 해방될 때까지 줄기찬 지하투쟁을 끊임없이 계속해왔으며 그 력량이 해방후 그대로 지하에서 나와 활동을 개시했던것이다. 때문에 제주도의 적색좌익세력은 서울과 남조선 각지에서와 마찬가지로 인민대중의 지지속에 건준을 결성하였고 인민위원회들을 조직할수 있었다.

제주도에서 좌익진보세력이 이처럼 강성할수 있었던것은 내부적인 막강한 력량과 함께 객관적인 정세가 어느 정도 그들에게 유리하기도 했다.

태평양 서남쪽 루쏜일대에서의 전투에서 지칠대로 지친 하지중장의 군단이 미국방성 합동참모부로부터 명령을 받고 조선을 향해 출발한것은 8월말경이였다.

하지중장의 군단은 항행도중 뜻밖에 일본패잔병부대들의 저항에 부딪쳐 한개 사단을 남태평양군도에 떼놓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 나머지 두개 사단이 인천항에 도착한것은 9월 8일이였다. 하지는 상륙하는 즉시 계획했던대로 한개 사단을 서울과 경기도지구에 배치하고 다른 한개 사단은 부산과 대구를 포함한 경상도일대에 배비했다. 6보병사단의 미도착으로 전라도와 제주도에는 이른바 치안유지의 공백이 생겼다. 만약 하지가 조선의 력사 특히는 전라도와 제주도의 연혁사에 대한 상식이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절대로 이 지대에 그런 공백을 남겨놓는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지 않았을것이다. 하지는 자기식으로 정치적범주에서 서울을 중시하고 군사전략상으로는 부산항이 있는 경상도를 먼저 생각했지만 전라도지역이야말로 전봉준의 갑오농민전쟁과 광주학생사건, 해녀폭동을 비롯한 반침략, 반정부투쟁의 진원지이며 돌풍지대라는것을 몰랐다.

그가 조선에 대해서 알고있는 쪼각지식이란 항행도중 한 정보장교가 제공한 고서적인 《조선지》를 뒤적거려본것이 전부였고 그의 머리에 새겨진것은 《무지》, 《락후성》이라는 개념만이 굳어져있었다.

그렇지만 서울에 틀고앉은 하지사령부는 제주도에 조성된 《치안유지》의 공백을 그냥 두지 않았다. 제주도에만도 관동군헌병대출신 조선인을 내세워 제주경찰서를 내오고 그아래 면들에 빠짐없이 경찰지서를 꾸렸다. 경찰서와 경찰지서들에는 일제때 헌병대와 경찰에 복무하던자들이 《사꾸라》무늬의 구리단추를 단 해방전 경찰제복을 다시 꺼내입고 뻐젓이 사람들앞에 나타났다.

제주도사람들을 아연실색케 한 이런 광대놀이를 연출하게 된것은 남조선강점 미군사령관 하지가 조선으로 떠나올 때 미국무성으로부터 조선에서 통치방식은 일제의 통치방식을 그대로 계승하며 일제의 군사, 경찰, 관료기구들을 그대로 인계받아 실시할데 대한 정책각본에 따른것이였다.

하여 제주도 경찰서장을 비롯하여 각지 서장들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일제군경에 복무하던자들이거나 아니면 타도에서 굴러들어온 건달군, 투전군, 무직자, 깡패따위들이였다.

해방된 그해 11월에는 미군 6사 20보병련대 59군정중대가 제주도에 상륙하였고 하지에 의해 《군정법령 55호》, 《정당등록법》, 《군정위반에 관한 처리법》, 《행렬과 집회에 관한 건》 등 폭압지령이 련이어 떨어졌다. 결국 이것은 좌익세력을 겨냥한 로골적인 탄압지령이였다. 그리하여 인민위원회들은 강제로 페쇄되고 이에 따라 좌익력량은 지하로 들어가 투쟁을 계속하고있었다. …

최근의 이러한 정세를 누구보다 잘 알고있는 리덕구는 자기를 찾아왔다는 서울손님에 대해 줄곧 착잡한 생각에 잠겨 행길을 걷고있었다. 그러나 초연한 눈빛이며 변함없는 표정이며 탄력있게 걷는 그의 침착한 자세에서는 이 세상 그 어떤 풍파에도 결코 꺾이거나 굽히지 않는 자기 존엄과 도고성이 엿보였다.

리덕구가 학교에 도착하니 안으로 들어가는 현관앞에는 미군용차 한대가 서있고 그 주위에는 학생아이들이 호기심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며 오락가락하고있었다. 좀 떨어진 곳에서는 교장과 낯모를 중절모를 쓴 신사가 무엇인가 이야기하고있었다.

문득 교장과 대화를 나누던 중절모의 신사가 먼저 리덕구에게로 빙그레 미소하며 마주 걸어왔다.

《리덕구씨지요?》 하고 서울에서 온 신사는 류창한 영어로 말했다.

리덕구는 불쾌한 생각이 들었으나 내색하지 않고 례절있게 영어로 대답하였다.

《그렇소.》

《훗샤중좌님과 송요찬씨를 아시지요?》 하고 서울에서 온 신사는 역시 이번에도 류창한 영어로 물었다.

리덕구는 련속 숙련된 영어로 지껄이는 중절모를 쓴 신사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별로 특징이라고는 없는 흔히 보는 미국풍에 젖은 신사였다.

《녜, 압니다. 송요찬씨는 대학동창이고 훗샤중좌는 이상한 인연으로 알게 된 사람입니다.》 하고 리덕구는 일부러 조선말로 응수했다.

그러나 서울에서 온 신사는 머리를 기우뚱거리며 의아해하였다.

《아니… 리덕구씨는 영어를 아주 잘하는것으로 알고있는데?》

그러거나말거나 리덕구는 침묵으로 대응했다.

《아, 그건 그렇고… 훗샤중좌님과 송요찬씨의 호의가 여간이 아니더군요. 리덕구씨에 대한 호의말입니다. 한데 그 두분은 저와도 각별한 사람들이지요. 그들은 이번에 내가 여기 제주도 미군정에 출장차로 떠나는 기회에 리덕구씨에게 보내는 서신 두통을 보내더군요.》

서울 미군정에서 온 신사는 무슨 희소식이라도 가져온듯 기분좋게 환히 웃으면서 가방을 열고 봉인한 편지 두통을 리덕구의 앞으로 내밀며 말을 덧붙였다.

《이제 래달초에 군사영어학교가 개교되오. 그 학교는 미군정뿐아니라 본토의 미국방성이 거대한 관심을 돌리며 중시하는 학교인데… 아마 거기로 부르는 편지일것이요. 개교일까지는 시일이 촉박하오. 그러니 래일 내가 돌아가는 배편에 떠나면 되오. 동의하면 곧 떠나야 하오.》

그런 다음 미국풍의 신사는 아주 거드름스럽게 동안을 두지 않고 돌연 영어로 말했다.

《리덕구씨! 한 인간의 한생에 한번 있을가말가 한 행운의 기회요. 놓치지 말고 꽉 잡으시오!》

순간 리덕구의 얼굴에 무엇인가 불쾌한 기색의 그림자가 얼핏 지나갔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자제하고 례절바르게 말했다.

《먼길에 이렇게 찾아주어 감사합니다. 좀 안으로 들어가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습니까?》 하고 리덕구는 못 들은체 하면서 영어로 대응하지 않고 정확한 모국어로 말하였다.

《아, 시간이 없는데… 하지만 어쨌든 두통의 편지를 읽어본 다음 결심을 들어야겠으니… 뭐 결심이야… 래일 떠날것은 명백하지만…》

서울 미군정에서 온 신사는 굉장한 양보와 선의라도 베푸는듯 한 자세였다.

리덕구와 미군정의 신사는 학교의 교원실로 들어갔다.

호기심에 차서 두사람의 주위를 빙빙 돌아치던 학생아이들은 그들이 사라진 교원실쪽을 홀린듯이 바라보고있었다. 그때 조성철이 되박이마의 아이에게 울상이 되여 물었다.

《여, 리덕구선생님이 정말 서울로 가게 될가?》

《거야 물론이지, 방금 여기서 우리 눈으로 보지 않았어. 오라고 하는 두통의 편지말이야!》 하고 되박이마의 아이는 챙챙한 목소리로 떠들썩했다. 그러자 한 학생이 되박이마의 아이에게 물었다.

《그런데… 편지를 가지고 온 사람은 서울에서두 아주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겠지?》

《야, 보구도 몰라. 여기 우리 면에서 제일 떡떡거리는 면경찰지서 지서장이 하인처럼 굽신거리는걸 못 봤어. 바보야!》 하고 되박이마아이가 면박을 주었다.

조성철은 안절부절 못했다.

《그러니 리덕구선생님은 여길 아주 뜨겠구나.》

《떠나구말구. 서울은 크구 좋다는데… 학식이 높고 재능있는것으로 소문난 리덕구선생님이 여기 섬구석에 그냥 박혀있겠어.》

《아주 좋은 선생님인데… 떠나가는구나.》 하고 울상이 된 조성철은 락심한 눈길로 교원실쪽을 바라보고있었다.

조천중학교 교사 리덕구가 곧 서울로 떠나간다는 소문은 학교의 아이들에 의해 마을에서 마을로 바람처럼 퍼져갔다.

 

련재

독자감상글쓰기
Change the CAPTCHA codeSpeak the CAPTCHA code
 
홈페지봉사에 관한 문의를 하려면 여기를 눌러주십시오
Copyright © 2003 - 2019 《조선륙일오편집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