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 회)

제2편 봉화

1

 

서울에는 며칠째 괴이한 날씨가 계속되고있었다. 3월 초순에 음울하게 흐린 하늘에서 때아닌 우박이 떨어지고 찬바람이 불면서 눈꽃이 휘날렸다.

물러갔던 겨울이 독을 쓰며 되돌아오는것 같았다. 그러던것이 3월 중순에 들어서면서 무겁게 드리운 하늘에서는 후려치는듯 한 채찍같은 굵은 비줄기가 쏟아져내렸다. 때이른 봄장마가 시작된것이다.

서울에 틀고앉은 미군사령부는 쏟아지는 폭우속에 묻혀있었다. 죤 하지사령관은 정오가 지나서 자기의 정보고문 노불을 방으로 불렀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그 누구를 찾거나 그 무엇을 명령하거나 지시하는 일도 없이 오만상을 짓고 방안에 홀로 앉아있던 하지사령관이였다. 어제온밤 이발이 지끈지끈 쑤시고 이몸이 온통 부어올라 자지 못했던것이다.

푹신한 가죽쏘파에 길다란 다리를 쭉 펴고 비스듬히 기댄채 앉아있던 하지사령관은 정보고문 노불이 방으로 들어서자 약간 몸을 일으켰다.

《미스터 노불!》 하고 하지사령관은 고통스럽게 얼굴을 찌프리며 성급히 말을 이었다.

《트루맨대통령 특사에게 제출할 보고서준비는 다됐소?》

《네, 완전무결하다고는 할수 없지만 기본적으로… 한데 사령관각하! 어디 몸이 몹시 불편하신가요?》

정보고문 노불은 가까이에 앉아 습관처럼 담배를 피워물었다.

《미스터 노불, 공교롭게도 대통령 특사가 래방할 때… 이발이 쏘는구만, 어제 온밤 꼬박 새웠소.》 하고 하지는 입을 벌리기 힘들어하며 찌프린 얼굴로 웅얼웅얼하였다.

《아, 거참 야단이군요. 치통은 3대동통의 하나인데…》

무슨 일에서나 아는체 하기 좋아하는 노불은 담배연기를 뿜어대며 쑤얼거렸다.

《사령관각하, 어떤 진통제를 복용했습니까?》

《어떤 진통제도 잘 듣지 않는구만. 잠시 즘즘했다가는 다시 동통이 몰려오군 하는데… 그건 그렇고, 여보, 미스터 노불, 래일 당장 대통령특사가 도착하겠는데… 어서 보고서준비정형을 구체적으로 보고하오!》 하고 하지는 성급히 독촉했다.

정보고문 노불은 서두르지 않고 여유있게 황갈색가방에서 영문으로 타자한 보고서를 꺼내 탁자우에 놓았다.

《사령관각하! 트루맨대통령 특사에게 보고할 <1945년-1948년간의 미군정과 현 남조선의 정치정세>에서는 우리 미군이 이곳에 상륙한 후 본국의 지령에 따라 시행한 군정실시의 주요목표와 지금까지 거둔 성과를 개괄하고 현 남조선의 정치정세상황을 요점만 간추려서 기술했습니다.

사령관각하! 보고서를 직접 보시면서 검토하겠습니까, 아니면 제가 읽을가요?》

노불은 담배를 한모금 깊숙이 들이키고나서 눈을 섬뻑거리며 물었다.

그런 다음 그는 언제인가 국무성의 특사가 왔을 때는 울뚝밸을 쓰며 불평을 터뜨리면서 거칠게 행동하던 하지사령관이 대통령 특사가 온다니 어쩔바를 몰라하는 모양을 내심 조소하며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지는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는듯 머리를 저었다.

《미스터 노불, 빈틈없이 준비했으리라고 믿소만… 알고있어야겠으니 간단히 보고서의 요점만 말해보오!》

정보고문 노불은 1945년 9월초 상륙이후, 이해 9월 11일 군정청실시, 20일에는 지방군정청설치, 11월에 《정당, 사회단체등록에 관한 법령》을 발포하여 정당, 사회단체를 지하에 몰아넣은것, 또한 10월에 남조선 각지에 수립되였던 인민위원회를 《빨갱이》딱지를 붙여 탄압해산을 시작하고 다음해 즉 1946년 1월 서울시인민위원회와 정당 및 그 발생소들을 소멸한것, 1946년 l월 이후 지방의 인민위원회들을 모조리 파괴한것, 특히 이해에 군정을 반대하여 일어난 남조선인민들의 대규모적인 9월파업과 10월인민항쟁을 저지탄압한것, 1947년에 미군정이 거둔 주요《실적》들을 추려서 렬거하였다.

《사령관각하! 때문에 우리 미국의 권위있는 출판물까지도 <우리들이 조선을 점령하여 얻은것에서 가장 중요한것의 하나는 우리가 여기서 혁명을 저지시켰다는것.>이라고 썼습니다. 이것은 탈선없이 군정을 우리가 실시하였다는 찬양으로 인식해도 좋을것입니다.》 하고 노불은 눈을 섬뻑거리며 신바람이 나서 자기가 작성한 보고서의 요점을 설명했다.

《여보, 미스터 노불! 그건 좋소. 그런데 지나친 자화자찬이 아닐가? 현재의 어수선한 이곳 정치정세와 뒤숭숭한 민심을 보고서에 전혀 언급하지 않을수야 없지 않소?》

하지는 안심치 않은듯 어깨를 실룩거렸다. 그러자 정보고문 노불은 배심좋게 빙그레 웃었다.

《사령관각하! 념려하실건 없습니다. 우리가 범한 실책도 숨김없이 기술했으니까요!》

《그런데…》 하고 말하던 하지는 문득 출입문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손기척소리에 이어 부관이 성급히 방으로 들어섰던것이다.

《사령관각하! 대통령 특사의 보좌관이 방금 도착했습니다.》 하고 성미급한 부관은 총알처럼 빠른 어조로 보고하였다.

《뭐요? 대통령각하의 특사는 래일 도착하는것으로 알고있는데…》

하지와 노불이 동시에 놀라는데 어느새 새파랗게 젊은 30대초의 껑충한 낯모를 사나이가 문가에 나타났다.

《대통령 특사의 보좌관 스미스요. 특사의 방문통보는 이미 받았으리라고 보오.》

새파랗게 젊은 보좌관은 아주 거드름스럽게 뇌이고는 거침없이 방안의 사람들에게로 다가왔다. 정보고문 노불은 벌떡 일어났으나 하지는 그냥 자리에 앉아있었다.

《정보고문 노불입니다. 원로에 고생이 많았겠습니다. … 이분은 이곳 남조선주둔 미군사령관 하지중장각하입니다.》 하고 노불이 가볍게 머리를 숙이며 젊은 보좌관에게 소개했다.

《아, 알고있소. 하지사령관, 안녕하시오?》

대통령 특사의 보좌관은 저으기 이죽거리듯 말을 길게 뽑으며 걸상에 앉았다.

《스미스보좌관! 우리는 대통령 특사각하가 래일아침에 도착하는것으로 알고있었소. 그런데…》 하고 하지사령관은 뿌루퉁한 얼굴로 무엇인가 못마땅한듯 한 어조로 뇌였다.

《아, 그 통보는 정확하오. 하지사령관, 대통령 특사각하는 예정대로 래일 도착하오. 그런데 이번 특사각하의 일정은 시간적으로 매우 촉박하오. 래일 여기를 방문하고는 즉시 유럽으로 날아가야 하오. 그래서 내가 하루 먼저 와서 이곳의 모든 상황을 사전료해하기로 하였소. 이제는 알만 하오? 하지사령관!》

젊은 보좌관은 파르스레한 날카로운 눈으로 하지사령관을 면바로 바라보았다.

깜박이지 않는 그 눈길은 꿋꿋하고 줄기찼다. 백악관의 고위급관리들과 늘 함께 붙어지내는 보좌관들이 대개 그러하듯 스미스보좌관 역시 이곳 미군정의 관리들따위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듯 한 거동이였다.

(꼭뒤에 아직 피도 마르지 않은 녀석이 터무니없이 건방지단 말야!)

하지는 혀끝까지 나왔던 욕설을 삼키고 음울하게 응수했다.

《알겠소… 보좌관!》

《자, 그럼 곧 사업에 착수해야 하겠소. … 대통령 특사에게 제출할 보고서는 이미 준비되였겠지요?》 하고 보좌관은 강한 요구성이 느껴지는 실무적인 어조로 물었다.

《네, 준비되여있습니다.》

노불이 제꺽 준비한 보고서를 보좌관에게 넘겨주었다.

특사의 보좌관은 노불이 넘겨준 보고서를 소리없이 빠르게 읽어나갔다. 희한할 정도의 강한 집중력으로 보고서를 소리없이 마지막글줄까지 읽고난 특사의 보좌관은 문득 머리를 들었으나 방금까지 읽은것들을 분석하고 음미하는듯 일체 말이 없었다. 까딱않고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보좌관은 불시에 불만을 터뜨렸다.

《이 보고서는 대통령 특사에게 정확한 인식과 표상을 주기에는 무엇인가 많은것이 부족하오. 내용이 없고 장황한 설명뿐인데 그나마도 이곳 미군정의 자화자찬뿐이란 말이요! 물론 빨갱이조직과 빨갱이들을 진압소멸한 사실은 찬양할만 한것이지만. … 이곳 정치정세에 대한 상세한 자료와 정확한 분석이 필요한데 그것이 너무도 빈약하오. 다시 수정보충하여 작성하시오. 잊지 말것은 5. 10단선을 앞두고 최근 이곳 정계의 움직임, 민심… 등에 중점을 두고 수정, 보충하시오. 즉시!》 하고 특사의 보좌관은 강경한 어조로 지시했다.

그 다음 그는 불만이 가득찬 컴컴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시간이 없소. 즉시 일에 착수하시오. 나는 이제 다른 경로를 통해서 이곳 정치정세를 구체적으로 알아보겠소.》

대통령 특사의 보좌관은 신랄한 경멸을 품은듯 한 표정으로 말없이 머리를 끄덕여보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싱겁구 주제넘은 녀석이군. … 제가 대통령 특사라도 되는가!》 하고 하지는 지금껏 간신히 참고참았던 욕설을 퍼부었다.

《사령관각하, 참아야 합니다. 유럽의 유명한 한 작가는 <신하의 조종을 받지 않는 왕이 없고 비서의 조종을 받지 않는 대신이 없다.>고 했습니다. 여기 조선에는 <감사보다 비장의 세도가 더 무섭다.>는 말이 있지요. 보좌관과 대통령 특사의 관계도 그런 범주인것이니까요.》

노불은 늘쌍 그렇듯이 아는체 하는 투로 말하였다.

《그따위 케케묵은 곰팡내나는 소리는 그만두시오!》 하고 하지는 역증을 냈다.

다음날 아침 도시의 대통로쪽에서 쏟아지는 비속을 달려온 미국제 최고급승용차 한대가 서울의 미군사령부가 틀고앉은 조선호텔근방에 이르러 차츰 속도를 늦추더니 미끄러지듯 서서히 다가왔다.

승용차는 완전무장한 미군이 두줄로 늘어선 조선호텔 정문앞에서 조용히 멎어섰다. 정문앞에는 근무중인 군인, 직원들을 제외하고 하지사령관이하 거의 전원이 비를 맞으며 나와 엄숙한 표정으로 정렬해있었다. 승용차가 멎어서자 소좌직급표식이 붙은 미군장교가 껑충껑충 뛰는 걸음으로 부리나케 다가가 차문을 열어주고는 부동자세로 꼿꼿이 서서 례를 표했다.

멎어선 차안에서 허우대가 크고 희멀쑥한 얼굴에 검은색굵은테안경을 낀 60대 초반기의 나이로 보이는 남자가 마지못해 내리듯 천천히 내렸다. 몇오리 남지 않은 머리칼로 묘하게 번대머리를 가리운 그의 성기고 희슥희슥한 머리칼이 비바람에 가볍게 흩날렸다.

하지사령관의 정보고문인 노불이 재빨리 그에게로 다가가 례를 표하고는 우산을 받쳐주었다.

승용차에서 내린 번대머리남자(그는 미국대통령 하리 트루맨의 특사였다.)는 급히 다가온 하지사령관의 정중한 인사에 건성 머리를 끄덕여보이고 서두르지 않는 걸음으로 말없이 미군사령부 현관문앞으로 다가갔다.

신사복차림의 그의 연회색옷과 넥타이에 몇방울의 비가 떨어져 몇군데 콩알같은 젖은 반점들이 찍혔다. 트루맨대통령 특사의 뒤에는 새파랗게 젊은 보좌관이 그림자처럼 바싹 붙어있었다.

날카로운 눈초리가 굵은테의 안경밑에서 번뜩이는 대통령 특사의 거동은 이 세상 그 누구에게도 머리를 숙이지 않는다는듯 한 오만과 도고성이 엿보였다. 그가 좌우를 살피는 일없이 현관으로 들어서자 하지사령관이 급히 몇걸음 앞으로 나가 안내하였다. 특사의 도착과 관련하여 일체 통행이 금지된 현관안의 복도는 정적속에 잠겨있었다.

트루맨대통령의 특사는 시종 말 한마디 없이 하지사령관의 안내에 따라 곧바로 그의 방으로 들어가 쏘파에 앉았다. 그의 뒤에 바싹 붙어 젊은 보좌관이 걸상에 앉았다. 뒤따라 들어온 하지사령관, 군정장관 띤, 정보고문 노불, 미군정 경찰고문 레스터 코페닝… 등은 그냥 꼿꼿이 서있었다.

대통령 특사는 역시 말없이 담배를 꺼내 피워물더니 모두에게 앉으라고 손짓했다. 그런 다음에도 그는 침묵한채 담배를 피우며 무엇인가 무거운 생각에 잠겨있었다.

《내가 하리 트루맨대통령각하의 특별위임을 받고 여기로 날아온 기본목적은… 한마디로 여기 극동의 조선반도 38도선이남에 우리 미국의 비위에 맞는 위성국가를 세우는 문제로 왔소. … 5월 10일로 예정된 여기서의 단선문제는 지금 트루맨대통령각하와 미국의 정계와 사회계의 거대한 관심사요. 내가 유럽보다 먼저 여기로 급급히 날아온 그자체가 바로 그것을 시사하는것이요!》

대통령 특사는 꾹 다물었던 두터운 입술사이로 명령문을 읽듯 군소리 한마디 없이 크지도 작지도 않는 목소리로 언명했다.

특사의 목소리는 용의주도하게 억제되여있어 방안의 사람들은 거기서 그의 그 어떤 감정이나 기분을 전혀 읽어낼수 없었다. 5. 10단선을 앞둔 현재의 남조선정세와 여기 현지 미군정의 조치들에 불만족하여 추궁하는것인지 도무지 종잡을수 없었다.

대통령 특사는 잠시 굳게 다물었던 두터운 입술을 다시 열었다.

《언제인가 죤 포스터 덜레스는 조선을 아시아의 <고기덩어리>를 잘라내는 <단검>으로 묘사한바 있소. 이것은 우리 미국의 관점에서 조선반도의 군사적의의를 비유해서 한 명언이요. 문제는 아시아대륙이라는 <고기덩어리>를 베여 먹기 위하여 조선이라는 <단검>을 손안에 틀어쥐여야 한다는 아주 명철한 안목의 현명한 판단이요. 바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오늘의 시점에서 우리 미국의 대조선정책의 본질과 극동정책방향을 아주 간략하여 핵심을 찌른 비유요!》

대통령 특사는 여전히 명령문을 읽듯 또박또박 끊으며 말하였다.

하지사령관이하 방안의 사람들은 모두가 대통령 특사의 극히 일반적인 중언부언에 무엇인가 알수 없는 불안을 느끼고있었다.

(대통령 특사는 무엇때문에 뻔드름한 문제를 중언부언하며 우리를 소학생다루듯 하는가? … 무엇이든 추궁하려면 직방 쏘아야지…) 하고 하지사령관은 그러지 않아도 지끈지끈 쏘기 시작하는 치통으로 찌프렸던 얼굴을 사람들의 눈에 띄게 더욱 찡그렸다.

그러나 대통령 특사는 그 누구의 기분이나 감정따위에는 아랑곳않고 역시 꼭같은 어조에 꼭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계속했다.

《맥아더원수는 일본이 <장래의 도약대>라면 조선은 <대륙에로의 건늠다리>라고 말했소. 특히 우리가 주목할것은 재작년초 여름에 여기 조선을 돌아본 대통령 특사 에드윈 포레이가 6월 22일 트루맨대통령에게 <조선정세에 관한 견해, 결론 및 권고>를 종합하여 비밀보고를 제출한바있는데 거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소.》

몇순간 얼핏 방안의 사람들을 휘둘러보고나서 특사는 말을 계속하였다.

《<솔직히 말해서… 조선은 아시아에 있어서 미국이 성공하는가 못하는가 하는것이 걸려있는 사상상의 싸움터이다. 다시말하여 민주주의(미국식민주주의)가 서나갈수 있겠는가 아니면 공산주의가 강하게 될것인가를 시험하는 장소로 된다고 생각한다.> …》

고요한 방안의 사람들은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날아온 대통령 특사의 일방적인 독백뒤에 여기 미군정의 어떤 오유나 실책을 트집잡으려는지 알수 없어 줄에 앉은 새처럼 조마조마한, 예측할수 없는 불안으로 숨소리조차 죽이고 앉아있었다.

《하지사령관, 어디 몸이 불편한게 아니요? … 아니면 혹시 나의 발언에 반발이라도 하려는게 아니요?》 하고 질책하듯 묻는 특사의 엄한 어조는 갑자기 비약하듯 높았다.

그러나 하지는 별로 당황해하는 기색이 없이 습관된 군인말투로 대답했다.

《특사각하, 며칠째 이발이 쏘아 신고중입니다.》

《치통! 쏘는 이발은 뽑아야 하오. … 하지중장, 어서 진통제를 먹으시오.》 하고 특사는 연설조로 말을 계속하였다.

《트루맨대통령의 배상문제특사 에드윈 포레이의 이 <권고>는 드디여 대통령각하에 의하여 미국의 대조선정책으로 접수되였으며… 트루맨대통령각하는 조선은 <아시아에서의 미국의 모든 성공이 달려있을지도 모르는 리념상의 싸움터>라고 규정하였소. … 모든 성공이 달려있을지도 모르는 리념상의 싸움터! 얼마나 의미심장한 규정이요?》

대통령 특사는 방안의 사람들을 엄한 눈초리로 여겨보며 훈시를 계속하였다.

《당신들은 이미 알고있는 문제를 내가 중언부언한다고 불평하지 마시오! … 솔직히 말하면 현정세하에서 이곳 조선문제가 안고있는 이 중대한 의미를 한순간도 망각하지 말아야 할 이것을 때로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망각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있다는 사정과 관련되오. 그래서는 안되오! … 우리 매 미국인은 각자가 책임적으로 사고하고 책임적으로 행동해야 하오!》

그때 특사의 뒤에 바싹 붙어 앉아있던 보좌관이 가방에서 영문으로 타자한 문서를 슬며시 넘겨주면서 뭐라고 나직이 말하였다. 특사는 상체와 어깨폭이 든든한 가슴우에 묵직한 팔을 엇걸은채 류달리 큰 머리를 끄덕이였다.

《여기 현지의 미군정이 몇년간 실시한 군정의 실상을 서술한 보고서를 난 이미 보았소. 물론 실책도 없지 않지만 내가 가장 좋게 평가하는것은 이곳의 빨갱이들을 제때에 무자비하게 타격진압한 바로 그것이요. … 자,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고… 지금 현재 이곳의 정치정세를 요약해서 보고하시오.》 하고 특사는 들을 준비가 되여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보고문 노불이 일어나서 5. 10단선을 눈앞에 둔 이곳 남조선의 어수선하고 매우 복잡다단한 정치정세를 언변좋게 구술했다.

《… 특사각하! 이처럼 5. 10단선을 앞둔 남조선정세는 좌익세력의 강한 반발, 우익중도세력이 그에 합세, 여기에 극우익으로 알려진 김구세력까지 반발해나서고있는 상황입니다. 물론 군중과 일반민심도 좋지 않습니다. … 우리가 밀어주고있는 리승만세력은 극도로 고립되여있는것이 현 실태입니다.》 하고 정보고문 노불은 컴컴한 얼굴로 한숨도 꺾어쉬면서 특사에게 보고하였다.

대통령 특사는 가슴우에 묵직한 팔을 엇걸은채 눈섭 하나 까딱않고 잠잠히 앉아 노불의 험악한 상황보고를 중도에서 꺾거나 묻는 일도 없이 심중히 듣고있었다. 노불의 말이 끝났을 때 특사는 팔무이를 풀고 눈을 감은채 깊은 생각에 잠긴듯 마디가 굵고 노란털이 부르르한 손가락으로 조용조용 탁자를 두드렸다.

《대체로는 알고있었지만… 이곳 남조선정치정세가 이렇게까지 험악할줄은 몰랐소!》

특사는 여전히 눈을 감은채 까딱않고 앉아 혼자소리처럼 뇌이더니 눈을 번쩍 떴다.

《아니, 그렇다고 우리는 그 어떤 양보나… 사태를 수수방관하지는 않을것이요. 절대로! 그렇소, 우리 미국은 이미 결심한대로 여기 남조선에 리승만을 두목으로 하는 미국의 위성국가를 예정대로 만들어낼것이요!》

눈매가 못되게 생긴 대통령 특사는 불시에 딴 사람이 된듯 사나워진 표정으로 방안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하지사령관, 당면한 미군정의 대책은 뭐요?》

나직하면서도 저력있게 말을 던지는 특사의 눈에서 번쩍- 섬광이 날아갔다.

하지는 긴장한 기색으로 일어나 조폭한 성미그대로 즉시 강경한 어조로 대답했다.

《특사각하! 각하가 방금 언명한대로 이곳 정세가 아무리 소란스러워도 우리는 예정계획대로 5. 10단선을 치르게 될것입니다. 만일… 우리 미국의 의사에 반대하는자들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무쇠주먹으로 무자비하게 짓부셔버릴것입니다! … 그런데 특사각하, 한가지 애매한 문제가 있는데… 이번 특사각하의 이곳 체류기간에 명백한 방안을 주기 바랍니다!》

대통령 특사는 하지의 얼굴을 면도칼로 베는듯 한 눈길로 바라보며 얼음쪼각을 내뱉듯 차거운 어조로 말했다.

《하지사령관! 당신의 군인다운 단호한 결심이 마음에 드오. 우리 미국에 엇서는자는 그가 누구든 파멸한다는것을 보여주시오! 그런데 애매한 문제란 뭐요?》

《특사각하! 반공극우익으로 유명하던 한독당의 김구가 5. 10단선을 극력 반대하면서 북조선이 호소한 남북협상에 응해나선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믿고있던 세력이였는데… 실상 지금에 와서 보아도 빨갱이세력은 아니고 또 그렇다고 우리에게 적극 협력하자는 자세도 아니고… 다루기가 여간 말째지 않습니다!》 하고 하지는 불만을 터뜨렸다.

문득 대통령 특사의 얼굴에 미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하지중장! … 거대한 우리 미국의 힘앞에서 김구따위는 한낱 거품에 불과하오. 쏘는 이발은 제때에 뽑아야 하듯 여기 미군정의 골치거리는 제때에 제거해야 하오. 그러나 서두르지는 말고 원거리조준으로… 무슨 말인지 알만 하오, 하지중장?》

《말씀의 뜻을 알겠습니다!》 하고 하지는 이발이 쏘는지 눈에 띄게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중장, 지나치게 우려할건 없소. 5. 10단선은 그 누가 반대해도 일단 우리 미국이 결심한 이상 단행되오. 렬차는 이미 달리기 시작했소. 그 어떤 힘도 그걸 멈춰세우지는 못하오!》

대통령 특사는 문득 등뒤의 보좌관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그러자 보좌관이 성급히 뭐라고 나직하니 귀띔했다. 특사는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런데 하지사령관! 제주도의 정세가 매우 심상치 않다던데? … 5. 10단선반대기운이 험악하다는 통보를 다른 경로를 통해 받았소. 불길한 징조요! 제주도는 일본 오끼나와와 같은 비중의 군사전략적의의를 가지고있기때문이요!》 하고 대통령 특사는 독살스럽게 말했다.

하지는 급급히 제주도의 최근 조성된 정세를 설명하기 시작했으나 대통령 특사는 중도에서 꺾었다.

《하지중장, 내가 다른 경로를 통해 입수한 자료에 의하면 일본의 패망후 그리고 미군의 남조선상륙후에도 얼마동안 그곳 제주도에 치안공백이 있었다던데? … 그건 미군정의 실책이였소! 그 실책이 바로 지금과 같은 제주도의 험악한 상황을 빚어냈단 말이요!》 하고 대통령 특사는 매몰차게 질책하였다.

《특사각하! 사실 우리 24군단이 루쏜일대에서 일본패잔병들과 싸우느라 한개 사단을 그 전투장에서 지체하는 바람에… 그러나 남조선의 군사상 가장 중요한 곳은 미군을 즉시 주둔시켰었습니다. 그리고 미군이 주둔하지 못한 전라도와 제주도에는 막강한 경찰무력을 증강배치했었습니다!》

하지는 뿌루퉁한 얼굴로 극력 변명하였다.

《하지중장, 지나간 실책을 인정할수 없다는거요?》 하고 특사는 엄하게 따져물었다.

《인정합니다.》

하지는 얼마간 풀이 죽은 기색으로 웅얼거렸다.

《좋소. 실책은 실책대로 인정해야 하오. 문제는 지나간 실책에서 교훈을 찾을줄 아는 능력이요! … 내가 료해한바에 의하면 동방의 이 나라에서 전라도와 제주도는 전통적으로 반외세, 반정부투쟁의 진원지, 근원지로서 크고작은 모든 반란은 이 지역에서 일어났다고 하오. 문제는 우리가 이곳의 전통과 력사연구가 부족했거나 지나치게 무시했던 결과요!-》

대통령 특사의 눈은 노기를 띠고 번들거렸다. 하지와 방안의 사람들은 말 한마디 못하고 잠잠히 앉아있었다.

《… <제주도는 전략적관계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곳이므로 오끼나와와 함께 반공기지로 보장할것이다. …> 이것은 우리 미국정부의 대변지 <뉴욕 져널 앤드 아메리칸>이 벌써 작년에 이미 시사했소. 그런데 당신들은 전략적안목으로 보지 못하고 근시안적으로 사고하고있단 말이요!》 하고 특사는 성난 어조로 말했다.

《특사각하! 그래서 수많은 경찰력과 서북청년단이라는 철저한 극우익테로단을 증강하여 떠나보내기로 수습대책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제주도 군정장관과 그곳 경찰고문을 불렀습니다. 지금 대기중에 있습니다!》

하지는 결단력있는 어조로 실태를 보고하였다.

《좋소. 그들이 이미 여기로 와서 대기중이라면 곧 부르시오.》 하고 대통령 특사는 명령조로 지시했다.

얼마후 제주도 군정장관 맨스필드와 제주도 미군정 경찰고문 팻트릿치가 들어와 대통령 특사에게 깍듯이 례를 표시하였다.

《어디 당신들이 그곳 실태를 말해보시오.》

특사의 엄한 요구에 현지에서 온 그들은 실태를 상세히 보고하였다.

그에 의하면 제주도의 정세는 5. 10단선을 앞두고 매우 험악하였다.

《하지중장! 산불은 번져지기 전에 제때에 꺼야 하오! … 난 당신에 대해서 지금껏 이런저런 흉흉한 소문을 들었소. 하지만 나는 오늘 당신이 결단력있는 군인이라는 좋은 인상을 받았소!》 하고 특사는 알쑹달쑹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자 지금껏 풀이 죽어 침울하던 하지의 눈이 기쁨으로 번쩍거리기 시작하였다.

《하지사령관, 조선지도를 가져오시오!》 하고 특사는 웨치듯이 큰소리로 말하였다.

그는 책상우에 지도가 펼쳐지자 흉기처럼 번쩍이는 독기서린 눈길로 제주도를 쏘아보았다.

《하지중장, 당신의 군인다운 결단력으로 모든 수단을 다하여 제주도를 짓눌러버리시오! … 우리의 의사에 고분고분 복종하는 안전지대로 만드시오.》

특사의 목소리는 듣는 사람들의 몸이 오싹할 정도로 지독한 증오가 느껴졌다.

살벌한 방안에는 창밖에서 쏴-쏴- 폭우가 쏟아지는 소리가 마치 밀려오는 파도소리처럼 소연하게 들려오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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