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회)

제1편 인천에서

4

 

3월의 해빛이 따뜻이 내리쬐는 모란봉기슭이였다.

고노골 공설운동장이 바라보이는 비탈진 잔디밭에 한 청년이 큰 대자로 드러누워있었다. 채정보였다.

그는 몹시 지쳐있었다.

《에익!》

그는 발치에 딩구는 뽈망태를 발바닥으로 툭 차버렸다.

잔등밑으로 축축히 젖어오는 봄기운이 느껴졌다. 정녕 봄이였다.

그러나 뭉게뭉게 피여나 둥둥 떠가는 저 흰구름도, 쪽빛봄하늘도 이전처럼 랑만에 차서 바라볼수가 없었다.

그토록 야심만만한 포부에 넘쳤던 고등학교시절은 학비를 내지 못하여 졸업이 아니라 퇴학이라는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자기의 학비를 대느라 손끝이 모지라지도록 고생하는 부모들에게 차마 말은 못하고 삯뽈을 차기 시작했는데 그나마도 오늘로 끝나고만것이였다.

점심녘에 오빠의것과 곁들어 밥을 싸가지고왔던 경상골에 사는 녀학생 안풍심이마저도 오빠가 없으니 몇마디 말끝에 치마바람을 일구며 훌 달아나버렸다.

젠장, 이젠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이제 경상골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자니 한숨만 나갔다. 아직까지 퇴학당한줄을 모르는 아버지, 어머니에게 이제 더는 그 사실을 숨길수가 없게 된것이였다.

그는 깍지낀 팔을 뒤통수에 받치고 누워 둥둥 떠가는 흰구름을 바라보았다.

저것들은 얼마나 좋을가, 바람따라 제 가고픈데로 가고.

강변쪽에서 갈매기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어릴 때부터 갈매기를 사랑하였다. 얼굴이며 어깨며 온몸이 새까맣게 탈 때까지 그는 대동강에 나가 살다싶이 하였다. 종일 물오리처럼 대동강물우에 떠있다가 련광정밑의 따뜻한 너럭바위에 귀를 대고 물을 뽑느라 누워있노라면 밀물을 따라 서해에서 올라온 희디흰 갈매기들이 머리우를 날아옌다. 자기도 흰 나래를 펴고 어디론가 훨훨 날아가고싶었다.

언제인가 넓은 세상구경을 해보려고 수리를 마친 배의 어창에 몰래 숨어들었다가 아버지한테 들장이 나 버들회초리로 매를 맞은 일도 있었다.

처량한 생각만 들었다. 돈이 없어 학교에서 쫓겨난데다 이전 이웃집처녀에게서 랭대까지 받은것 같은 느낌이였다.

그렇다고 집에 들어가 자식들때문에 속타하는 부모들앞에 그대로 터놓기도 싫었다. 그저 나 혼자 속썩이면 그만이지 하는 생각이 들자 집에 들어가고싶지도 않았다.

당장이라도 어디론가 훌 떠나고싶었다. 그런데 부모들은 아들이 경상골에 사는 안풍심과 잔치를 했으면 하고 은근히 바라는 눈치였다. 친구의 녀동생이라고 너나들이로 무랍없이 지내는건 사실이지만 그것을 두고 사랑이라고 생각해본적은 없었는데 이제 와선 정말 내가 그를 사랑하는게 아닐가 하고 반신반의하기도 하였다.

착잡한 생각에 잠겨있던 정보는 에라, 잠이나 자자 하고 저고리를 뒤집어썼다.

그러나 잠 절반, 공상 절반에 싱숭생숭 뒤척이였다.

아무리 생각을 굴려봐도 저 갈매기처럼 집을 떠나 어디론가 자유로이 훨훨 날아가고싶은 심정이였다.

정보가 열둬살나던 해였던가, 3. 1인민봉기에 참가했던 사촌형님이 왜놈순사들에게 수배를 당하게 되였다. 형님은 놈들의 눈을 피해 대성산 깊은 골짜기에 몸을 숨겼다. 그의 행처는 가족친척들밖에 몰랐다. 형이 먹고 입고 쓰는 물건은 사촌동생인 채정보가 날라다주게 되였다. 어린 그에게는 놈들의 감시가 덜 미치였던것이다. 매일이다싶이 다니는 그 길은 얼마나 아슬아슬하면서도 즐거웠던가. 어깨바람이 났다. 사촌형님의 이야기를 듣기도 재미났었다.

채정보는 어느날 사촌형님으로부터 임진조국전쟁때 남해에서 숱한 왜놈들의 해적선을 침몰시킨 리순신장군의 이야기를 듣고난 뒤 형의 무릎을 흔들며 어째서 왜놈들이 형을 잡으려 하는가고 물었다.

형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차근차근 말해주었다.

《그건 우리 나라를 빼앗은 제놈들을 반대해서 싸웠기때문이지. 너도 생각해보아라, 누가 가만있는 너에게 덤벼들면 어쩌겠니?》

《쳇, 내가 머저리라고 가만있겠나? 당장 코피나게 때려주고말지.》

채정보는 그런 놈이 눈앞에 있기라도 한것처럼 당장 달려들 태세로 을러댔다.

《그것 보렴, 너도 참지 못하지 않니? 형도 마찬가지다. 일본놈들이 우리 나라를 빼앗았는데 죽었수다 하고 가만히 앉아있을수야 없지. 조선사람이라면 누구나 일본놈하고 해봐야 한다. 알겠냐?》

《응, 알겠어.》

정보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형을 다시 보았다.

그는 짬만 있으면 형을 찾아 대성산으로 달려가군 하였다. 얼마나 바라다녔는지 어머니는 날라갈 밥을 꾸려주면서도 얼른 갔다가 집으로 곧장 와야 한다고 잔소리를 해댔다. 그 말을 귀등으로 흘려보내며 사촌형님을 찾아다니던 그때는 얼마나 좋았던가.

그의 생각은 어느결에 풍심에게로 돌아갔다.

(이름은 무던한 풍심인데 어디서 그따위 따벌이야.)

아까처럼 만날 때마다 엇서군 하는 풍심이였다. 눈길도 말마디도 맵짠 처녀였다. 안풍심은 언제나 오빠 안회심과 발맞춰 뽈을 차는 채정보의 몫까지 두명분의 밥을 싸들고 오군 했다. 그런 연고로 정보는 풍심이와도 자연히 알게 되였다. 싸전을 열고 돈푼이나 버는 집으로 알려진 풍심이네와 가난한 자기네 살림살이를 어떻게 견주랴만 어쩐지 정보는 풍심이가 맘에 들었다.

이목구비가 그쯘한데다 체육도 잘하는 채정보는 중학생들속에서 인기남아로 알려졌으나 안풍심이를 대하기 전까지는 학급의 녀학생들앞에서도 얼굴을 붉히는 숫된 총각이였다. 그는 달덩이같은 풍심이를 만날 때마다 가슴이 설레였다. 그것은 자기도 억제할수 없는 감정이였다.

하지만 처녀의 태도는 영 딴판이였다.

아까 점심때에도 내심 반가와 말을 붙여보려니 《누가 자기를 찾아왔담, 오빠 만나러 왔지.》 하고 내쏘는통에 메사해서 《좀전까지 같이 뽈을 찼는데…》 하고 애매한 소리를 했다.

그러자 처녀가 《제 짝패가 어델 갔는지도 모르나. 한쪽이 기울어진 배가 제대로 가는걸 봤어?》 하고 툭 내쏘는데 크고 억실억실한 눈과는 달리 말은 여간 맵짜지 않았다.

대답이 궁해진 정보는 무어라 허투루 말을 덧붙였다간 금시 달아날것 같은 처녀의 태도에 조바심을 감추지 못했다.

《글쎄, 어디 갔을가? 가면 간다고 늘 말하고 다니군 했는데.…》

정보가 모란봉쪽을 둘러보며 맥없이 웅얼거리는데 좀 누긋해진 처녀의 목소리가 울렸다.

《자, 점심받아요. 난 수업때문에 바빠요.》 하고는 언덕아래로 구을듯 달려내려간다.

《어, 정말 잘 먹겠어!》

늘 그랬던지라 그의 잔등에 대고 무랍없이 한 말인데 처녀의 새된 소리가 날아온다.

《흥, 누가 저보고 먹으랬담.》

그러거나말거나 채정보는 비죽이 웃고말았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밥은 두명분이였다.

안회심은 여적 나타나지 않았다. 기다리다못해 먼저 제몫을 먹어치운 그는 출학처분걱정에 식곤까지 겹친데다 이래저래 심사가 뒤틀어져 풀밭에 벌렁 누운것이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누군가가 발을 툭 건드리는통에 그는 벌떡 일어나앉았다. 앞에 안회심이 서있었다.

해는 아직 머리우에 떠있었다.

채정보는 안회심에게 말했다.

《풍심이가 밥을 가져왔더라. 그새 어디 갔댔니?》

《낮잠만 자고 꼴좋다.》

회심은 그에게 눈을 한번 흘기고는 이번엔 제가 두팔을 뒤통수에 받치며 잔디밭에 벌렁 누워버렸다.

그는 정보쪽으로 머리를 돌리며 물었다.

《그래, 이젠 어쩌겠어?》

《뭐 어쩔게 있어. 대동강가에 나가 아버지를 도와 배수리나 하련다.》

《이제 언제 목공기술을 배워 배수리를 하겠니? 그런 속에 없는 소릴랑 말아. 너야 늘 배를 타고 나가 넓은 세상을 구경하겠다고 하잖았니?》

《그게 어디 쉬운 일이가?》

심드렁한 채정보의 소리에 안회심이 몸을 일으켜 다가앉았다.

《한가지 좋은 수가 있긴 한데…》

《그게 뭔데?》

채정보는 눈이 커졌다.

안회심이 신이 나서 알려주었다.

《네 일자리때문에 내 좀 알아봤는데 이제 얼마 안 있어 서울에서 경평축구대회가 열린다누나. 평양팀에선 너라면 기꺼이 받겠대. 어쩔래? 내 그래서 자리를 떴던거야.》

귀가 버쩍 뜨이는 말이였다.

경평축구대회라면 제아무리 일제가 우리 나라를 타고앉아 주인행세를 하는 속에서도 민족의 단합과 기개를 떨치고 우의를 마련하자는 념원으로부터 체육인들이 평양과 서울을 번갈아오가며 년례적으로 진행하는 체육행사였다. 축구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경과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는 대회였다.

이런 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해 뛰여다닌 안회심이 고마왔다.

이젠 자기도 선수로 출전할수 있다는 자부심이 채정보의 젊은 피를 끓게 했다.

《너 이자 말한거 정말이지?》

《자식, 정말 아니문.》

하긴 어려서부터 대동강가에서 함께 자란 친구였다.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을 꼽는다면 첫자리에 그를 놓아야 할것이였다.

허나 기쁨우에 거품처럼 부그그 떠오른것은 걱정이였다.

로잔지 려빈지는 어떻게 마련한단 말인가, 부모님들께 말해봤자 속이나 상할것이고.…

(그러니 어떻게 하면 좋다?)

그는 다시 벌렁 누워버렸다.

《어쩔셈이냐?》

나란히 누운채로 회심이 발길질을 했다.

그가 독촉하는 바람에 채정보는 버럭 역증을 냈다.

《젠장, 나도 모르겠어. 아직 생각중이야!》

그제야 안회심은 자기가 친구의 아픈 마음을 다쳐놓았다는것을 알았던지 먼 하늘만 말없이 쳐다보았다.

침묵이 흘렀다.

모란봉에서 내리부는 솔바람이 그들의 얼굴을 어루쓸었다.

문득 안회심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야, 너무 걱정말아. 아무튼 무슨 수가 생기겠지.…》

그리고는 먼저 달려내려갔다.

혼자 남아 더욱 쓸쓸해진 채정보는 둥둥 떠가는 흰구름만 멀거니 바라보았다.

자기도 모르게 눈귀로 따가운것이 괴여올랐다. 아무리 용기가 있고 능력이 있어도 돈이 없으면 희망과 포부를 실현하는건 고사하고 인격마저도 유지할수 없다는 생각에 가슴이 쓰렸다.

그날 밤, 이래저래 번거로운 생각을 굴리며 잠자리에서 뒤척이던 그는 누가 찾는 소리에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뜻밖에도 회심이 마당에서 빨리 나오라고 손짓하는게 아닌가.

그는 얼결에 잠든 부모들을 돌아보았다. 온종일 고달픈 인생살이에 녹초가 된 아버지와 어머니는 숨가쁘게 코를 골며 잠을 자고있었다. 그는 아직 부모들에게는 자기가 학교에서 쫓겨났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슬그머니 옷을 주어입고 밖으로 나왔다.

달이 밝았다.

말없이 앞서 걷는 안회심의 뒤를 채정보는 묵묵히 따랐다. 그들의 걸음은 대동강가로 옮겨졌다.

참다못해 채정보가 물었다.

《어쩌자는거야?》

《가보면 알게 아니가.》

저 멀리 강변에 희읍스름한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가까이가보니 처녀인것 같았다. 분명 안풍심이였다.

(?! …)

정보의 의아스러운 눈길이 안회심에게로 향해졌다. 회심은 어서 가보라는듯 정보에게 턱짓을 해보이고는 몸을 돌려 어둠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채정보는 활랑거리는 가슴을 지그시 눅잦히며 처녀쪽으로 주밋주밋 다가갔다. 그도 그럴것이 여느때는 친구의 동생인것으로 하여 무랍없이 너나들이로 지냈어도 이렇게 정식으로 맞서보기는 처음이였다. 그것도 달빛이 비쳐드는 호젓한 강변에서.

안풍심은 옛사람들이 제나름대로 이름인지 문장인지 알지 못할 숱한 한자들을 정으로 쪼아박은 청류벽밑에 서있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그가 돌아섰다. 달빛에 환히 드러난 그의 둥실한 얼굴과 어글어글한 큰 눈이 시원스레 안겨들었다.

《여… 여긴 어떻게?…》

자신으로서도 화가 나리만큼 주눅이 들어버린 채정보는 엄습하는 속박감을 털어버리려고 번지르르 물기가 흐르는 벼랑을 쳐다보았다.

이런 호젓한 곳에 서있노라니 저 야멸차보이는 입에서 어떤 말이 튀여나올지 두려운 생각도 없지 않았다.

숨막히는 순간이 흘렀다.

채정보는 무료함을 달래려는지 아니면 자기의 마음을 감추려는지 알수 없는 심정에 싸여 뜻도 의미도 모를 바위에 새겨진 글들을 세세히 뜯어보았다. 어떤 글자들은 크고 또 어떤 글자들은 작았다. 그래도 이 세상에 자기도 살아봤다는것을 알리기 위해 경치좋은 대동강청류벽에 글을 새기느라 품을 들였을 량반들이나 풍류객들을 그려보느라니 저절로 웃음이 나갔다. 그렇다고 그네들이 이 거치른 세상에 기억할만 한 변화를 준게 뭐란 말인가.

처녀와 눈이 마주치기를 저어하며 벼랑에 새겨진 글을 보느라니 이런 허구픈 생각마저 들었다.

《저…》

드디여 풍심의 입이 열리였다. 그런데 뜻밖이였다. 총알처럼 내쏠 말마디에 대응하려고 몸을 도사리던 채정보는 어리둥절해졌다. 안풍심이 답지 않은 너무도 온화한 말투가 견고하게 쌓았던 총각의 방어진을 여지없이 허물어버리고말았던것이다.

《이걸 받아요.》

다른 때 같으면 야, 자로 나가던 뒤틀린 말투가 어찌된 일인지 경어로 바뀌였다.

갑자기 곰살궂어진 그의 태도에 당황해진 채정보는 고개 한번 변변히 들수 없었다. 한편 사내란게 처녀앞에서 공연히 땀을 빼다니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하는 자기에 대한 타매의 도수가 높아지자 어지간히 용기가 생겼다.

그는 처녀를 마주보았다. 늘 입고다니던 학생복차림과는 달리 곤색조선치마저고리를 입었다. 어째서 어두운 색조의 차림을 한 그의 모습이 달빛에 희읍스름히 보였을가. 역시 그의 훤하고 둥근 얼굴때문이였다는것을 새삼스레 느끼는 정보였다.

그는 처녀의 얼굴에서 눈길을 떼지 못한채 그가 내미는것을 받아들었다. 천에 정히 싼것이 감촉되였다. 어서 헤쳐보라고 고개를 끄덕여 힘을 준 처녀가 다른켠으로 몸을 돌이켰다.

차곡차곡 겹쳐싼 지전묶음이 달빛에 드러났다.

《아니?!…》

채정보의 입에서 외마디소리가 튀여나왔다.

《이건 어디서?…》

처녀가 방긋이 웃으며 강바람에 흘러내린 자분치를 손가락으로 멋스레 쓸어올렸다. 그는 눈이 화등잔만 하여 자기의 얼굴을 얼없이 쳐다보는 총각을 재미나게 바라보며 서있었다.

채정보는 어떻게 대했으면 좋을지 몰라 밭은 기침만 킁킁 깇었다. 너무도 예상밖에 당하는 일이라 어안이 벙벙해져 다른 말을 찾을수 없었던것이다.

처녀가 강물우에 눈길을 던진채 흔연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오빠의 이야기를 듣고 집에서 의논이 있었는데… 아무튼 품었던 꿈이야 실현해야지요.》

저로서도 갑자기 경어를 쓰게 되는것이 쑥스럽고 어색했던지 말끝을 잘 여물구지 못하였다.

채정보는 숨이 꺽 막혀왔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누가 먼저 떼였는지 그들의 걸음은 강변으로 나란히 옮겨졌다.

푸르께한 달빛은 흐느적이는 물결우에 실려 떠가고있었다. 이따금 밀물을 따라 올라온 대동강숭어들이 푸들쩍거리며 뛰노는 모양이 버들잎같은 물결우에 둥근 파문을 일으켰다.

그들은 물가에 뿌리박은 너럭바위우에 나란히 앉았다. 채정보는 이 자리가 서로 바라면서도 내색을 못한 속마음을 헤집어보이는 운명적인 자리로 될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채정보는 안풍심이쪽을 슬며시 돌아보았다. 동그란 무릎을 치마폭에 감싸안고 고개를 옆으로 틀었는데 곱게 비다듬은 머리칼이 달빛을 받아 유난스레 함치르르하게 보였다. 이때처럼 처녀가 자기에게 귀중한 존재로 여겨지기는 처음이였다. 채정보는 인생에 남을 어떤 중대한 말을 해야 한다는것을 느꼈지만 말은 다르게 나갔다.

《어디서 이 많은 돈을… 무얼 팔았길래…》

《그런 걱정은 말고 떠날 준비나 하라요.》

정보는 이전엔 처녀의 《해라》소리도 귀에 익으리만큼 자연스레 여겼었는데 오늘 밤 존중하는 태도로 깍듯이 대해주자 어지간히 당황해졌다.

《내 어떻게 해서든지 기대에 어긋나지 않겠어. 그리고…》

그는 숨이 가빠지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무어라고 격한 심정을 표현해야 할지 알수가 없었다.

채정보는 처녀가 오빠의 말을 듣고 부모들이 애써 마련해놓은 제 옷감들을 팔았을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풍심은 풍심이대로 치마로 감싸고 올려세운 무릎우에 턱을 고이고앉아 침묵을 지키고있었다.

굼니는 물결우에 부서지는 달빛을 바라보는 그의 가슴은 답답해났다. 자기 마음을 시원히 헤쳐보일수 없는 안타까움은 총각에게 원망어린 시선을 던지게 했다.

참으로 갓 이성에 눈튼 처녀, 총각들의 사랑의 감정은 이른봄 돋아나는 봄나물처럼 연연하고 형언할수 없이 감미로운것이였다. 첫사랑에 빠진 처녀의 심정이란 참 이상한것이였다. 그것은 사랑을 위해서라면 부모를 비롯한 주위사람들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먼 충동을 낳게 하는 모양이다.

오늘 일만 해도 그랬다. 오빠를 통하여 채정보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된 안풍심은 한동안 안타까운 눈길로 방바닥만 내려다보고있었다.

잠시후 그는 말없이 웃방으로 달려올라가 농짝문을 열어제꼈다. 그는 부모들이 자기 몫으로 끊어다가 차곡차곡 포개여얹은 공단이며 모시며 하는 갖가지 천필들을 보자기에 싸들었다.

《너 어쩌자고 그러니?》

너무도 돌발적인 그의 행동에 놀란 오빠가 다급히 물었다.

《뭐 어쩔게 있어요? 려비를 장만해야지요.》

《그렇다고 아버지, 어머니 허락도 없이?…》

《그렇게도 죽자살자하더니 어려운 때 모르쇠하는게 무슨 친구람. 이런게 없다고 아무렴 시집 못 갈가. 어머니한텐 후에 내가 말씀드릴테니 먼저 쓰고보자요.》

안회심은 허- 하고 허구픈 웃음만 내뱉았을뿐 말을 찾지 못했다. 녀동생의 결단에 기가 찼던것이다.

돈을 마련하여가지고 나타난 안풍심은 별스레 어색한 태도로 오빠에게 정보를 불러내라고 부탁했다.

물론 오빠는 선선히 동의해나섰다.

이날따라 안풍심은 소녀시절과 작별하는것 같은 심정이였다. 그는 학생복을 벗고 조선치마저고리를 갈아입고 나섰다.

하지만 눈치가 무디여서인지 총각의 입에서는 끝내 씨원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이참, 잘있으란 말 한마디 하면 못쓰나.)

한편 채정보 역시 언땅을 비집고 돋아나는 새싹처럼 사랑의 단즙을 그리워하고있었다.

안풍심은 《호-》 하고 가는 숨을 내쉬였다. 애오라지 자기의 마음을 그가 알아주면 그만이라는 생각뿐이였다.

며칠후 채정보를 태운 서울행 렬차가 평양역을 떠났다.

렬차는 기적을 울리며 남쪽으로 달리였다.

 

경기장관람석에 앉은 다무라이 히시소는 얼결에 옆을 돌아보았다. 이때까지 자기의 곁에서 맴돌던 서기녀석은 없고 빈자리만 댕그라니 남아있었다.

별스레 썰렁한감을 느낀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해반주그레한 서기란 녀석이 저쯤 떨어져있는 처녀곁에 앉아 무슨 달콤한 소리를 지껄이느라 여념이 없었다. 까만 모자에 류행을 따라 하안 장미꽃을 달고 진한 화장을 한게 일본녀자가 틀림없었다.

서기가 제멋대로 자기 상관의 곁을 뜬다는것이 비위에 거슬렸지만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청춘이니까!- 헌데 저녀석이 언제 저런 미인을 발견했는가?)

그는 너그러움을 보일양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경기장을 주시했다. 이쪽저쪽으로 총알처럼 날아다니는 공, 그 공을 다루며 넓은 경기장을 종횡무진으로 달리는 량팀 선수들

히시소는 여느 선수들보다도 평양에서 온 공격수 채정보와 경성(서울)팀의 방어수인 고진세의 활약에 정신이 팔렸다. 우선 두 선수의 육체적준비와 공다루는 동작에 아예 넋을 잃고말았다. 둘이 다 끼끗하고 듬직한 체구에 한 선수가 공몰기에 능하고 날렵하다면 다른 선수는 끈질긴 방어로 제가 맡은 구역을 끝까지 책임지고 지켜나가는것이였다.

두 팀의 경기는 맹렬하였다.

젊어서부터 나가사끼일판에서 체육광신자로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다가 서울에 와서 축구경기를 보니 경탄을 금할수가 없었다.

(세상에 참, 이런 멋진 경기도 있는가?!)

다음은 터져나오려는 탄성을 가까스로 눌렀다.

(저것이다. 저들이야말로 내가 바라고 찾던 정신육체적으로 완강한 진짜배기사나이들이 아닌가.)

그는 가문의 오랜 야망을 이룩할 시기가 바야흐로 도래했다는 느낌으로 온몸의 피가 서서히 끓어번졌다.

다무라이 히시소가문의 본적지는 혹가이도였다.

그 가문이 남쪽의 나가사끼에까지 굴러들어온데는 남다른 사연이 있었다.

그의 조상들은 대대로 자기들은 순수 야마도족의 혈통을 이어오고있다고 자처하였지만 파장형의 머리칼에 이마가 뒤로 제껴진것이 아무래도 아이누족의 피가 섞인것 같아 고민하던 끝에 에라, 이런 땐 36계 줄행랑이 제일이다 하고 야밤삼경에 이사를 단행하였다.

보짐을 풀어놓은 곳이 나가사끼였다. 여기서는 그들을 아이누족계통이라고 의심하지 않는것 같았다.

(기어이 다무라이가문을 일떠세우리라.)

《정한론》제창자들의 조선출병이 본격화되고 드디여 날강도적인 《을사5조약》이 체결되자 다무라이가문은 히시소를 가문의 돌격대로 조선에 건네보내였다.

현해탄을 건너온 그가 선참으로 발을 들여놓은 곳은 경상도 진해였다. 굼벵이도 지붕에서 떨어질 때엔 제 궁냥이 있다고 섬나라에서 대륙진출의 교두보로 일걷는 조선에 들어와 북으로 더 올라가지 않고 여기 남해기슭에 머무른것은 제딴에 타산이 있어서였다. 그의 눈에는 세면이 바다로 둘러싸이고 자원이 풍부한 조선이 기름진 고기덩이로 보였다.

(조상들이 실현하지 못한 꿈을 내 대에 와서 실현하게 되는가.)

파도의 허연 물멀기가 발부리를 치는 나가사끼의 너럭바위에 앉아 현해탄을 건너다보며 먹지 못하는 고기덩이를 두고 침만 흘려야 했던 히시소가문이였다.

하긴 일찌기 수세기전인 임진년에 부산에 기여들었던 몇대 조상인지 한 사나이가 조선청년의 짚신발에 채워 죽다살아났다는 이야기도 전해내려오고있었다.

그걸 보면 조선을 먹겠다는 관념이 대대로 내려오며 얼마나 골수에 맺혀있었는가를 가히 짐작할만 하다.

오죽했으면 다무라이 히시소가 부산에 발을 올려놓는 순간 끼쳐오는 훈훈한 바람과 땅내가 페부속깊이 스며들자 꿈이 이루어진것이 너무도 감개무량하여 눈물까지 흘렸겠는가.

그의 눈은 살기와 광기로 피가 졌고 이발을 사려물었다.

지금은 조선이라는 로획물을 잡아서 눕혀놓았어도 맛있게 먹자면 조리가 기본이다. 환갑나이에 이른 히시소의 광택이 사그라져가는 눈에서는 살기와 야심만만한 빛이 번쩍이였다.

아직 육체로 보나 지능에 있어서 동년배들에게 짝지지 않는다고 여기는 히시소였다. 아니, 조선에 와서는 도리여 갱소년한다고 자부하고있었다.

그는 저로서의 일가견이 있었다. 자기가 결코 칼을 빼들고 조선을 병탄한 이또 히로부미보다 못하지 않다고 여기는터였다.

국사를 론하는 사람이야 따로 있는거고 자기들은 이런 기회에 일확천금을 하면 되는거라고 생각했다. 국책수행에 자본을 대주면서 자본을 불구는것이 자기들의 생업이 아닌가.

여기서 히시소가 주장하는것은 돈으로 정치를 조종하려면 학교부터 세워야 한다는것이였다. 이 학교를 나오는자들은 모두 자기를 위해 복무하는 심복들이여야 했다.

그래, 이또가 조선을 먹을 때 학부대신 리완용이나 《일진회》의 송병준이와 같은 친일주구들을 끼지 않았단 말인가. 어벌이 커서 조선경내를 벗어나 만주, 나아가서는 짜리로씨야까지 넘보다가 조선의 애국청년 안중근의 총에 맞아 사살되였지만…

히시소 자기는 세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조선에서 이 바다만 틀어쥐면 그만이였다. 여기서 제2의 리완용이나 송병준이들을 키울것이다.

일본의 바다를 확고히 장악하며 해상으로 진출하여 로씨야를 압박할수도 있고 중국의 천진과 청도, 상해를 공격할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가지게 된다. 태평양과 인디아양은 장차 해양국인 일본의 활무대로 될것이고.

일본은 일찌기 해외팽창에 열을 올려 류뀨렬도를 저들의 오끼나와현으로 만들었고 청일전쟁후 《시모노세끼조약》을 체결하여 대만섬과 팽호렬도를 타고앉지 않았는가.

과연 이것이 배의 도움이 없이 이루어질수 있었더란 말인가.

재력과 치부 없이야 무슨 정치인이겠는가. 그것만 있으면 한다하는 정객들도 굽신거리며 국사를 론하는 정치무대로 어서 등단해주십사 하고 초청하지 않으리. 적어도 히시소의 타산은 이러한것이였다.

그래서 팔을 걷고 일떠세운것이 진해상선학교였다.

그런 야심이 오늘도 그를 경기장관람석에 앉게 했다.

승냥이가 먹이를 이발로 문 다음엔 절대로 놔주지 않는다. 그런 《먹이감》들이 지금 어떤 세모진 눈초리가 시퍼런 린광을 번뜩이며 자기들을 주시하는지도 모르고 넓은 축구장이 좁다하게 뛰여다니고있다.

마침내 히시소는 그들을 낚아내는데 성공하였다.

그의 귀맛좋은 소리는 넓디넓은 세상을 일주하고싶어하는 채정보나 고진세 같은 청년들에게 있어서 가물에 내리는 단비와 같았다.

《진해상선학교만 나오면 이 세상 어디에든 다 갈수 있다. 항해사자격증을 가진단 말이다. 참, 졸업시험이 뭔지 아는가? 범선이나 기선을 타고 5대양을 두번 항해하여 돌아오는거다.》

뾰족한 턱, 그 시절에는 보기 드문 까만 세루양복에 단장까지 짚은 히시소의 목소리는 체소한 몸에 어울리지 않게 우렁찼다. 허세에 가까운 장광설이였으나 젊은이들에게는 푸른 꿈을 가지게 하는데는 충분했다.

이러저러한 경로로 모집되여온 청년들은 대개 힘이 넘치고 끌끌해보였다. 그런가 하면 아버지의 주선으로 여기에 온 림종훈과 같이 좀 약해보이는 청년들도 더러 있었다.

《하숙비며 학비는 어디서 대줍니까?》

누군가가 물었다.

채정보는 온몸이 긴장으로 졸아드는것만 같았다. 이제 듣게 될 대답에 여기까지 흘러온 자기 운명이 결정되기때문이였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표정은 각이했지만 고진세나 림종훈이 같이 유족한 축들을 내놓고는 대부분 같은 처지여서인지 이제 나올 대답에 귀를 모으는것이 눈에 뜨이게 알렸다.

《당장 그런 걱정은 안해도 된다. 졸업후 직업을 잡고 5년동안에 원금과 리자까지 갚으면 된단 말이다. 그러니 재학기간 군들은 그저 학업에만 전념하라.》

히시소의 말에 마음을 놓는 큰 숨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나왔다. 개중에는 리자라는 소리에 뜨직해하는 청년들도 없지 않았지만 채정보로서는 다행한 일이였다.

까짓거, 쪽발이들이 노는 꼴이 좀 이상하지만 먹여주고 배워주는 값을 후에 직업을 가진 다음에 물어내도 된다니 자기같은 처지의 청년들도 배울수가 있지 않는가. 어쨌든 배우고보자. 범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는데.

채정보는 슬며시 고진세쪽을 돌아보았다.

평양팀의 공격수 채정보와 경성팀의 방어수 고진세는 경기장에서 맞서던 사이였다. 둘이 다 맹활약으로 눈에 띄우는 선수들인지라 그들의 모습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었다. 서로 부딪쳐넘어질 때면 손잡아 일으켜 등을 두드려주군 하였다. 그럴 때면 관중들은 아낌없는 찬사와 박수를 보내주었었다.

지금 채정보의 눈에 비친 속을 대중할수 없는 무표정한 고진세의 모습은 경기장에서와는 판판 달랐다. 가난한 채정보의 지체를 드디여 가늠한듯 깔볼사 하는 눈치였다.

이렇게 되여 안회심과 헤여진 채정보는 고진세, 림종훈과 더불어 기슭을 때리는 파도소리가 들려오는 남쪽 한끝 진해만의 하숙집에 려장을 풀어놓게 되였다.

그뒤로는 히시소의 아들인 다무라이 게이찌가 득의만면한 얼굴로 함께 생활하자며 찾아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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