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 회)

제2편 봉화

3

 

그해 3월 하순, 비내리는 어느날 깊은 밤에 북제주군 조천면 큰물동네(대수동)샘터근처집에서 주인로파의 처량한 곡성이 울리고있었다.

《아이고오… 이놈의 세상 모질어라! 이내 신세 모질어라! 어제는 생때같은 비바리가 죽더니… 오늘은 또 아망이 세상 떠났소! … 아이고오! …》

주인로파는 비내리는 마당에 나앉아서 땅을 치며 목놓아울었다.

《아이고오… 이 늙은 어멍만 남겨놓고 다 떠나가면 난 어떻게 살아간단 말이우. 하늘도 무심하지… 아이고오 꽝(뼈)이야! … 이놈들아! … 난 왜 심어가지(붙잡아가지) 않느냐! … 이 강일춘 같은 놈들아!-》

비물이 고인 땅을 철썩- 철썩- 내려치며 통곡하는 로파의 눈에서는 원한에 사무친 증오의 불빛이 철철 흐르고있었다.

이집저집에서 동네사람들이 모여와 눈물을 머금고 돌담장가녁에 둘러서있었다.

《심어간다는건 무슨 말이예요?》 하고 부산에서 나들이온 녀학생이 곁의 녀인에게 귀속말로 물었다.

《그건 붙잡아간다는 이 고장말이야. 강일춘 같은 놈이란 말은 이 고장에서 제일 심한 쌍욕인데… 조선봉건왕조통치때 제주관청에 백성들을 악독하게 탄압하고 못살게 굴던 심보고약한 강일춘이란 사령놈이 있었지… 그놈의 악명이 대대로 내려오면서 고약하고 악한 놈은 그놈의 이름으로 빗대부르고…》

《그런데… 저 집에 무슨 큰 불상사라도 생겼는가요?》 하고 나들이 온 녀학생이 다시 물었다.

《뭍에서 온 경찰놈들과 서북청년단놈들에게 이 집 처녀와 늙은 아버지가 매를 맞아 그만 죽었지.》

그때 동네녀인들이 우르르 마당으로 들어가 진창에 주저앉아 통곡하는 주인로파를 안아 일으켰다.

《형님! 그만 일어나우. … 몸을 돌보셔야지… 이러시다간 형님마저…》 하고 마음 무던한 동네녀인이 흐느끼면서 떠듬거렸다.

《몸을 돌봐선 뭘 하고… 살아선 뭘 한단 말이요! 세상에 살다가 이렇게도 악착하고 모진 세월이 있을줄이야. 생때같은 우리 집 비바리는 서북단인지 서북청년단인지 하는 망나니들의 희롱질에 항거했다고 빨갱이로 몰려 맞아죽고… 아망은 비바리의 원한갚으러 갔다가 또 모두매를 맞아 반죽음이 되여 실려왔다가… 방금전에 영영 세상을 떠났소. 아! 아이고오…》

주인로파는 땅을 치며 부르짖더니 끝내 기절한듯 의식을 잃고 비물이 고인 진창에 쓰러지고말았다.

《아이고… 이게 웬 일이요. 빨리 의원을… 의원을…》 하고 옆집의 로파가 허둥지둥 비속으로 사라졌다.

《허… 악몽같은 세월이로군. 이 제주땅에 이런 세월이 닥칠줄이야! 내 지금껏 80평생에 이런 악귀들이 뭍에서 몰려온적 없었는데… 다 미국양놈들탓이야.》 하고 마을의 좌상로인이 지팽이로 땅을 치며 장탄식했다. 그러자 곁에 서있던 한 로인이 그의 팔을 슬며시 찌르며 수군거렸다.

《형님, 말조심하시우. 저놈들이 들으면 빨갱이라고 또 지랄발광을 하며 심어가리다.》

《뭐, 80로인을 빨갱이라고 심어간다구? 허망한 세상이로군!》 하고 좌상로인은 비내리는 컴컴한 하늘을 바라보며 탄식했다.

《형님, 저놈들을 사람이려니 하고 생각지 마시우.》

《옳거니, 저 양놈들과 한짝인것들은 인두겁을 쓴 야수들이야!》 하고 마을의 좌상로인은 땅에 침을 뱉았다.

《자, 이 집의 장례를 동네가 맡아서 해야 할터인즉 임자가 아무래도 주관해야겠네.》

좌상로인이 정색해서 뇌이자 곁에 섰던 로인이 머리를 끄덕이며 동네로인들을 데리고 시신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는 사이에 옆집로파가 중년의 의원과 함께 마당으로 들어섰다. 뜨락의 사람들이 의원에게 길을 내주었다.

중년의 의원은 평상(제주도식침대)에 실신하여 누워있는 주인집로파의 인중과 손가락, 발가락에 침을 놓았다.

《박의원, 밤중에 불려다니느라 고생이 많으시겠소.》 하고 누군가 그에게 수고를 치사하였다.

《까짓 고생이야 뭐라겠소만 마음이 쓰려 어디 살겠소! 제주땅 사처에 이런 불상사니 미칠것 같소. 정말 악몽같은 세월이요.》

지친듯 한 의원의 얼굴에는 분개한 기색이 력력했다.

《이 집에서 당한 참사는 오면서 대체로는 들었습니다만 어떻게 된 사연입니까?》

중년의 박의원은 한숨을 련발하며 누구에게라 없이 물었다.

《비참하고 끔찍한, 방성대곡할 참사이지요.》 하고 한 로인이 대통에 담배를 피워물고 갈린 목소리로 참변을 의원에게 알려주었다.

… 주인집의 비바리(처녀)는 큰물동네(대수동)에서도 인물 잘나고 례절밝고 마음씨곱기로 첫손가락에 꼽히는 처녀였다. 그런데 바로 어제 가난한 살림에 보태려고 바다로 잠수질을 나갔었다. 그때 바다가에 나와 돌아치던 서북청년단깡패들이 그의 미모에 반하여 몇놈은 망을 보고 한놈이 먼저 완력으로 그 처녀를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가 옷을 벗기려고 하였다.

마음씨어진 처녀는 참다못해 무례하고 짐승같은 놈을 후려쳤다. 완강한 항거에 부닥친 놈들은 끝내 연약한 처녀를 두들겨패며 《빨갱이년》이라고 몰아댔다.

처녀는 종시 입과 코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죽었다. 경찰서놈들과 미군 두명이 가까이에서 이 광경을 보면서 히죽히죽 웃으며 휘파람을 불어대고있었다.

이 끔찍한 참사를 뒤늦게 알고 헐떡이며 달려온 처녀의 아버지가 울분을 터뜨리며 당장 딸을 살려내라고 울부짖었다.

《이 악귀같은 놈들아, 내 딸이 무슨 죄가 있다고… 달려들어 죽였느냐!-》 하고 처녀의 아버지인 로인은 후들거리는 손으로 한놈의 멱살을 잡았다.

《이놈아, 너 죽고 나 죽고 결판을 내자.》

《야, 이 빨갱이년애비가 행악질을 한다.》

서북청년단깡패놈들은 늙고 연약한 로인에게 모여들어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차며 무지막지하게 뭇매질을 했다. 처녀의 아버지인 로인은 끝내 반죽음이 되여 정신을 잃고 죽은 딸의 곁에 쓰러졌다.

큰물동네사람들이 현장에 달려갔을 때 이미 놈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아무도 없었다. 어디가서 누구에게 하소할 곳도 없었다. 동네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죽은 처녀와 반죽음이 된 로인을 마차에 실어 집으로 옮겨왔다. 그런데 하루 지난 오늘 밤중에 로인마저 끝내 한많은 세상을 떠난것이다. …

《어이없고… 허망한 세월이요! 제주땅이 인간생지옥으로 변했소!》 하고 이야기를 듣고난 박의원은 머리를 젖히고 허공을 쳐다보며 울부짖듯 탄식했다.

그럴 때 실신하여 평상에 누워있던 주인집로파가 의식을 차리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아이고오… 왜 나를 살려놨소! 누가… 누가 나를 살려놨는가 말이요. 아이고오, 죽여주오. 다시 죽게 해주오!-》 하고 주인집로파는 목놓아울었다.

순간 방안이 눈이 부시도록 섬광이 번쩍- 하더니 뒤미처 우르릉 꽝!- 우뢰가 울었다.

《아이고오… 이 원쑤를 어떻게 갚노. 하늘도 무심하오. 무심하오. … 저 악귀같은 야수놈들을… 아이고오. … 그래 여기 목관에는 (목관-주로 제주읍과 조천면일대를 가리키는 말)사람이 없소? 목관에는 사나이들이 없느냐 말이요!-》 하고 주인집로파는 피타는 목소리로 절규했다.

무시무시하리만큼 시꺼멓게 흐린 밖의 하늘에서는 또다시 우르릉 꽝!- 번개가 치고 우뢰가 울었다.

비쏟아지는 밖의 하늘은 낮추 무겁게 드리워있었다. 이따금 소리없는 번개가 번쩍- 밤하늘의 류황빛구름을 찢었다. …

바로 그 시각에 한나산 거문오름 옆골짜기숲속에서는 찬비 쏟아지는 속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그들은 천막도 치지 않은 야외, 울창한 나무숲속에서 열띤 론쟁을 벌리고있었다.

비내리는 이밤 이곳에서 망국적인 5. 10단선을 파탄시키기 위한 제주도 항쟁자들의 모임이 진행되고있는것이다.

이미 회의는 벌써 조천비밀아지트에서 며칠간 계속되였고 그 련속으로 이곳에서 일주일째 계속되고있었다.

조성된 험악한 현정세 즉 조국분렬을 막기 위한 투쟁방도와 전술을 확정짓기 위한 격렬한 론쟁이였다.

투쟁경력이 오랜 오대건과 안세훈을 비롯한 비교적 나이가 많고 온건한 사람들은 정치투쟁을, 강규찬을 필두로 한 젊고 군사경험이 있으며 교육수준이 높은 사람들은 무장투쟁을 위주로 하여 5.10단선을 철저히 파탄시켜야 한다고 극력 주장해나섰다.

원래 나이가 많고 년장자인 오대건을 비롯해서 정치투쟁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오랜 투쟁년조를 가진 로장파로서 사람들속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가지고있었다. 때문에 급진적인 청년파들의 주장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을뿐아니라 로장들대로의 당당한 론거를 가지고있었다.

그렇기는 했으나 혈기왕성하고 교육수준이 높은 젊은파들은 또 그들대로의 강한 론리와 예리하고 정확한 판단력을 가지고 주장해나섰기때문에 이들의 론쟁은 격렬했을뿐아니라 지금까지 합의를 보지 못했고 따라서 회의를 결속할수가 없었다. 하여 근 일주일간 장소를 옮겨가며 회의를 계속하고있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그것이 아무리 착잡하고 치렬하여도 시작이 있었던것만큼 결말이 있기마련이다.

기실 이 오래동안 끌어온 중대한 회의를 오늘중으로 무조건 결속하자는 젊은측의 기둥인 강규찬의 제의를 모두가 만장일치로 합의를 보았던것이다. 이렇게 되여 지금 비내리는 깊은 밤 숲속에서 회의가 계속되고있었다. 회의에서는 방금전에 강규찬의 최종적인 강경발언이 있었다. 그는 만약 이 회의에서 자기들의 주장 즉 무장투쟁위주로 궐기하자는 안이 채택되지 않는다면 자기는 탈퇴하겠다고 강경하게 언명하였다. 자기들의 주장이 채택되지 않으면, 즉 지금 앉아서 죽느냐 일어나 싸우다 죽느냐 하는 엄중한 시각에 갑론을박 론쟁이나 하고있는 무맥하고 생기없는 이 조직에 더는 있지 않겠다고 최후선언을 한것이다.

하여 그러지 않아도 열띤 회의장은 더욱 팽팽해졌다. 이때 오대건이 회의를 잠시 휴회하자고 제의하였다. 그리하여 회의는 잠시 휴회에 들어갔다.

회의참가자들은 그 자리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좀 떨어진 큰 나무밑으로 가서 젖은 옷을 벗어 짜기도 했다.

문득 누군가 어둠속에 대고 열기있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거기 누구 없소?》

회의장주변에서 후방사업을 하는 성원을 찾는 소리였다.

《여기 있소.》

잠시후 어둠속 저쪽에서 저벅저벅 누군가 마주 다가왔다.

《아, 난 또 누구라고… 덕구냐?》 하고 어둠속에서 나직하게 말하는 사람은 리덕구의 둘째형 리좌구였다. 그는 무장대원 몇명을 인솔하고 회의장주위를 감시하면서 동시에 회의참가자들의 후방사업을 책임지고 맡아볼 과업을 수행하고있었다.

《형님, 뭐 시원한것 좀 없어요?》 하고 말하는 리덕구의 목소리는 웬 일인지 속이 타서 열에 지친듯 했다.

《뭐라고? 이 찬비에 홀딱 뼈속까지 젖어서 모두 몸을 떠는데 석석한것을 찾다니! 왜 그러느냐? 몸이 어디 불편한게 아니냐?》

리좌구는 흠칫 놀라며 어둠속에서 동생의 안색을 살피려고 애쓰며 자신도 모르게 반문하였다. 제주도말로 석석한것이란 찬것을 의미하는데 찬비에 젖은 사람이 더운것이 아니라 찬것을 찾는다는것은 정상이 아니여서 웬만한 일에는 놀라는 법이 없는 리좌구도 약간 놀랐던것이다.

《몸이 불편해서가 아니라 마음이 아파서… 속이 막 타서 그러는데… 형님, 뭐 그런것 있으면 좀 가져다 주겠습니까?》 하고 리덕구는 괴로운 어조로 부탁하였다.

동생의 성미를 잘 알고있는 리좌구는 두말없이 어둠속의 바위쪽으로 가서 후방조의 한 성원에게 백록담의 녹지 않은 눈을 좀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량동무, 비맞아 녹지 않게 뚜껑을 꼭 씌워서 가져오라구.》 하고 리좌구는 신신당부하였다. 그런 다음 다시 동생 리덕구가 있는 곳으로 다가와 그를 사람들이 없는 조용한 곳으로 이끌었다.

《얘, 제발 성미를 부리지 말아. 지금까지 발언을 하지 않고 있은건 잘한 일이다. 오대건동지로 말하면 나를 이끌어준 사람이고 또 호구형님의 친구인데 함부로 무시하는 발언은 삼가하도록… 이랬든 저랬든 오대건동지는… 너는 물론이고 나의 선배가 아니냐.》

리좌구는 평시에 온순하고 사려깊다가도 일단 자신이 옳다고 확신할 때는 물불을 모르고 격렬해지군 하는 동생 리덕구에게 신중한 어조로 조용히 조언을 주었다.

《아니, 형님은 무슨 소리를 합니까? 지금 제주도인민들의 운명, 나라의 운명이… 나라와 민족이 위기에 처한 이런 때 그 어떤 사사로운 감정도 그건 죄악으로 됩니다.》

열기 띤 리덕구의 목소리는 높았다.

《얘, 목소리를 좀 낮춰라. 내가 말하자는건…》

《형님, 형님은 무장투쟁에 궐기하는걸 반대하는가요? 그래 형님은 어느쪽입니까?》

리덕구는 여전히 열띤 목소리로 웨치듯이 말하였다. 홧홧 달아오른 그의 얼굴에서 살눈섭이 초조하게 떨고있었다.

《목소리를 낮추라는데. 물론 나도 너의 주장에 이미 공감한 사람이 아니냐. 그렇기는 하지만 아무리 옳은 주장이라도 상대방에게 거칠게 모욕을 주면서 말하는건 인간품성에도, 륜리도덕에도 어긋나는것 아니냐… 이왕 지금까지 며칠간이나 네 성미에 용케 참았는데… 부탁이다, 마지막까지 침묵하고있어라. 너의 립장과 견해, 주장은 이미 모두가 잘 알고있으니까 말이다.》 하고 리좌구는 자기의 말의 의미뿐아니라 목소리자체로서도 동생을 진정시키려는듯 무게가 느껴지는 진중한 음성으로 뇌였다.

그랬으나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리덕구의 단호한 목소리가 울렸다.

《형님! 아니요. 난 더는 침묵하고 앉아있지 못하겠어요.》

그럴 때 《거기선 무슨 일이요? 회의장밖에서도 론쟁이요?》 하는 롱조의 말소리가 들리더니 어둠속에서 누군가 가까이로 다가왔다. 강규찬이였다. 그는 리덕구와 리좌구를 어둠속에서 알아보고는 불시에 껄껄 웃었다.

《이젠 론쟁을 끝낼 때가 된것 같소. 자, 덕구동무. 회의가 곧 시작되겠는데 어서 회의장으로 가자구.》 하고 말하는 강규찬의 목소리는 심한 격동으로 석쉼하였다.

《네, 곧 가겠습니다. 속이 너무 타서…석석한것을 좀 먹으려고 누구를 보냈는데…》

《그래… 하지만 여기에야 찬 비물보다 석석한것이 어디 있겠소. 백록담에 가면 눈이 있겠지만…》

강규찬은 흥분한 리덕구의 심정을 리해한듯 어둠속에서 의미있게 빙그레 웃었다.

《그래서 백록담에 사람을 떠나보냈습니다.》 하고 리좌구는 즉시에 조용히 대꾸하였다.

《그렇소? 잘했소. 자, 덕구동무. 갑시다. 좌구동무, 눈을 가져오면 회의장으로 즉시 보내오. 야외에서의 회의이니 비물을 마시나 눈을 먹으나 회의규률위반은 아닐테니까.》

강규찬을 따라 리덕구는 회의장소로 내려갔다. 그들이 회의장소에 들어서니 벌써 사람들이 다 모여있었다.

잠시후 《이제부터 회의를 계속하겠습니다.》 하고 오대건이 속회를 선언했다. 회의장은 수수수… 비내리는 소리만 울릴뿐 잠짓하였다.

《제가 먼저 발언해도 되겠습니까?》 하고 어둠속에서 리덕구가 집행부에 언권을 요청했다.

《리덕구동무, 토론하시오.》

집행부쪽에서 오대건의 무거운 목소리가 울렸다.

리덕구는 순간 자리에서 탄력있게 몸을 솟구었다. 사람들은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앉아있었다. 고요속에 비내리는 소리만이 들렸다.

리덕구는 몇순간 말을 골랐다. 주의깊이 골라야 했다. 정치투쟁만을 주장하는 로장파들을 설득시키는것과 동시에 자기자신도 진심으로 설득시켜야 하였다. 조천중학교 교사시절에 유모아와 명쾌한 롱담, 뜻깊은 말들로 학생들을 매혹시키고 인기를 독점했었으며 학교의 교가를 작사작곡했던 다정다감한 리덕구였다. 그러나 여기는 학교가 아니라 준엄한 실천투쟁의 장소였고 오랜 투쟁경력을 가진 선배들이 모여있는 장소였다. 바로 그들이 지금 발언을 요청한 리덕구를 지켜보고있었던것이다.

《동무들, 저는 이 책임적인 자리에서 본토론에 앞서 방금전에 한 강규찬동무의 발언에 대한 불만부터 먼저 피력하려고 합니다.》

그런 다음 그는 자기의 온몸을 걷잡을수 없이 휘감는 흥분을 누르느라 잠시 어둠속 자기앞을 응시했다.

《아니? 저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해? 자기 견해를 불시에 바꾸었단 말인가!》 하고 어둠속에서 성미급한 누군가가 불쑥 불만을 터뜨렸다.

《쉬!- 아직 속단하지 말라구. 마지막까지 들어보자구.》

가까이에서 누군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윽고 어둠속에서 사람들의 가슴을 치는듯 한 리덕구의 절절한 목소리가 울렸다.

《강규찬동무로 말하면 그 누구도 무시할수 없는, 오랜 투쟁경력을 가진 책임적인 위치에 있는 동지입니다. 그런데 자기들이 주장하는 의견이 채택되지 않으면 뭐 탈퇴하겠다구요? 생기를 잃은 이 조직에 더는 있지 않겠다구요? 물론 며칠을 두고 회의를 끌어왔으니 속이 타고 흥분할수 있다는것을 리해합니다. 저 역시 지금까지 속에서 불이 타는듯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그의 발언은 정당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몇사람의 진정한, 정확한 안목을 가진 동지만 있어도 그 조직은 생기를 띠고 종당에는 옳은 길로 나갈수 있는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어디 몇사람뿐입니까? 제가 보건대 지금 여기에는 그 어떤 파쟁군도 없습니다. 오직 현실적인 가장 정당하고 옳은 투쟁방도를 모색하면서 론쟁을 거듭하고있을뿐입니다. 강규찬동무! 우리는 제주도인민들의 운명이 결정되는 이 책임적인 자리에서 반드시 가장 정당한 무장투쟁에 총궐기하여 5. 10단선을 파탄시켜야 한다는 제안이 채택되도록 백방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물러서거나 양보는 죄악이고 죽음을 의미합니다.》

《옳소! 동무의 신랄한 호상비판을 쾌히 접수하겠소.》 하고 집행부쪽에서 강규찬의 대범하고 무게있는 목소리가 울렸다.

리덕구는 마치 하늘의 기관총처럼 자기에게 내려 퍼붓는 비속에 까딱 않고 서있었다.

《기본문제를 토론하겠습니다. 정치투쟁이냐, 무장투쟁에로의 궐기냐, 저는 이 책임적인 자리에서 인간의 량심과 의무를 걸고 말하건대 제주도에 조성된 현정세는 무장투쟁에로의 궐기를 요구한다고 웨치고 또 웨치고싶습니다. 동무들, 여기 모인 우리들모두는 일제식민지하에서 우리 말과 우리 글, 조상대대로 내려온 이름과 성마저 빼앗기고 망국노로 인간이하의 천대와 멸시를 받으며 살아왔던 사람들입니다. 그 시절에 나는 놈들의 총알받이인 <학도병>으로 끌려나가 남방전선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왔습니다. 해방후 나의 일생의 소망은 고향학교의 교사가 되는것이였습니다. 그래서 얼마전까지 나는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일생의 소망이 고향학교의 교사였던 내가 왜, 무엇때문에, 어떻게 되여 교단을 떠나 총잡고 싸움의 길에 나서게 되였는가!》

사람들은 여전히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그의 말을 주의깊이 듣고있었다.

《지금 포악한 미제는 악랄한 폭압속에 5. 10망국단선을 강행하여 조국을 영원히 둘로 갈라놓으려고 광분하고있습니다. 또한 미국도깨비들이 불어대는 피리에 춤추는 매국역적들은 극도로 발악하고있습니다. 동무들, 민족최대의 불행인 민족분렬을 막는것은 반분, 반초도 지체할수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놈들은 지금 여기 제주도에 달려들어 순결한 처녀들을 유린, 희롱하고 아이들과 로인들, 녀인들에게 총탄을 퍼부으며 별별 악랄한짓을 다하고있습니다. 제주도는 드디여 미제와 매국역적-악마들이 살판치는 인간생지옥으로 화했습니다.

동무들, 유린당하는 제주도처녀들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평화적시위에 따라나섰던 나어린 아이들이 놈들의 총탄에 맞아 쓰러지며 터치는 비명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수십만 제주도인민들은 지금 우리를 바라보며 구원을 바라고있습니다. 총과 대포를 쏘며 달려드는 적들과 정치투쟁만으로는 사람들을 구원할수 없고 망국적인 5. 10단선을 파탄시킬수 없습니다. 놈들과의 싸움은 침략자와 인민의 정의의 싸움일뿐아니라 인간과 야수와의 싸움입니다. 동무들, 나는 제2차 세계대전때 남방전선에서 패전한 일제야수들이 사람을 잡아먹는것을 보았습니다. 패전한 일본군대놈들에게는 식민지 조선사람이 그 잡아먹을 식인의 첫 대상이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또다시 미제의 식민지노예로 살아야 하겠습니까? 지금 우리 고향 제주도가, 온 조국의 운명이 칼도마우에 놓인 이 엄혹한 시각에 우리가 그래 줄곧 론쟁이나 하며 시간을 보내야 하겠습니까! …》

리덕구의 타는듯 한 목소리는 열기로 갈리였다. 그때 어둠속에서 누군가가 그에게 차디찬 눈덩이를 손에 쥐여주었다. 리덕구는 빠르게 입안에 밀어넣고 삼키고나서 말을 계속했다.

《동무들, 지금 이 시각에도 조국이 우리를 지켜보고있습니다. 온 제주도가 자기의 아들들을 지켜보고있습니다. 반외세, 반매국노투쟁의 오랜 전통을 가진 제주도의 넋과 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선조들의 넋이 어린 한나산이 우리를 지켜보고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지금 무장봉기에 궐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력사에 수치로, 만회할수 없는 오유로 기록될것입니다. 물론 시련도 희생도 각오해야 할것입니다. 그러나 동무들, 우리는 제주도의 아들들답게 총잡고 싸워 고향땅을 지켜야 합니다.

나는 본회의에서 내 목숨이 살아있는 한, 나의 피, 나의 힘, 용기, 애정, 나의 재능을 다 바쳐 추호의 동요도 없이 굳센 의지로 싸울것을 맹세하면서 토론을 끝내려 합니다.》

평소에 그 어떤 경우에나 조금도 자기 감정에 휘말려들지 않던 리덕구였다.

그러나 그는 지금 어쩔수없이 자기 감정에 휘말려들고있었다. 지금까지의 그의 일생에서 드문 일이였다. …

이날 밤 회의에서는 다수가결로 무장봉기에 궐기하기로 하는 결정을 채택하고 드디여 회의를 결속했다. 이 결정의 채택과 함께 조직개편이 있었다.

이날 새로 무어진 조직에서는 무장봉기날자를 4월 3일로 결정하였으며 무장부대의 총대호는 《제주도인민유격대》로 하고 전구에 따라 지대들을 편성하였다.

제주, 조천, 구좌면일대는 3.1지대로 하여 지대장으로는 리덕구, 애월, 한림, 대정일대는 지대장 김봉천의 2.7지대가, 서귀, 남원, 표선, 성산방면은 지대장 조몽구의 4. 3지대가 맡았다.

강규찬의 제의에 따라 제주도인민유격대의 총대장은 김달삼이 임명되였다. 강규찬은 정치위원의 직책을 맡아보게 되였다.

제주도인민유격대의 출판물은 《봉화》라는 표제로 발행하게 되였다.

그로부터 얼마후 발행된 출판물 《봉화》에는 리덕구의 토론을 《교사였던 나는 왜 총을 잡았는가?》의 제목을 달고 본인의 동의밑에 약간의 수정을 거쳐 그대로 실렸다.

 

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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