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 회)

제1편 인천에서

9

 

채정보는 인천항구를 장악하자마자 로획한 적들의 기뢰들을 부두창고에서 퍼그나 떨어진 곳에 있는 둔덕아래의 굴간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거기에 보관하는것이 퍽 안전하였다.

오래전부터 얼음창고로 쓰던 큰 동굴이였다. 아직도 썩은 벼겨가 발밑에 밟혀 바닥이 부근부근하였다.

해병들은 밤마다 화물차들과 달구지, 수레를 리용하여 은밀히 기뢰들을 날라갔다.

이것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한 작업이였다. 품도 많이 들었다. 그러나 적의 포격이나 폭격을 예상하여 꼭 해야 할 작업이였다.

그후에도 채정보는 텅 빈 이전 기뢰창고의 대문에 주먹같은 자물쇠를 걸어놓았으며 보초소도 철수하지 않았다.

시내에 남아있을수 있는 간첩이나 불순분자들의 있을수 있는 기습을 유인하기 위한것이였다.

얼마 안 있어 적의 폭격기편대가 바다쪽에서 날아들어 여기저기에 폭탄들을 떨구고 달아났다.

부두는 온통 불과 폭연으로 뒤덮였다.

매캐한 검은 연기가 가셔지기도 전에 채정보는 엄페부에서 뛰여나가 부두가를 돌아보며 피해정형을 알아보았다.

새로 옮긴 기뢰창고는 무사하였고 이전 기뢰창고주변에 폭탄이 떨어졌지만 건물에 별로 피해가 없었다. 의도적으로 기뢰창고를 겨냥하고 폭격한것 같지는 않았다.

얼마전에 여기서 들고뛴 괴뢰해군우두머리들이 아직도 혼란에 빠져 줄행랑을 놓느라고 인천부두형편에 대하여 미군에 제대로 통지를 못한것 같기도 하였다.

그러나 채정보대좌는 마음을 놓을수 없었다.

아직도 인천시내에서 나다니고있다는 고진세에 대한 소문이 어쩐지 헛소문같지 않았다.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나겠는가.

만일 그놈이 일당들을 규합해가지고 우리의 기뢰창고를 습격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텅 빈 이전의 기뢰창고로 고진세를 유인하려던 이전의 자기 계책은 너무도 단순하고 피동적인것이였다.

보다 적극적인 행동으로 고진세와 같은 숨은 적들을 색출해내야 한다. 그러되 묘술을 찾아보자.…

채정보는 생각끝에 이곳 사람들과 인천시에 갓 조직된 인민정권기관에 의거하기로 결심하였다.

며칠전에 인천시인민위원회에서는 인천항에 주둔하고있는 인민군해군부대를 통솔하는 대좌인 채정보에게 한번 시간을 내여 군중강연에 출연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의뢰해온적이 있었다.

그때 채정보는 그럴 시간이 없다고 사절하였다.

여유시간도 없거니와 자기는 정치공작대도 아니고 정치일군도 아니였기때문이였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그것은 짧은 생각이였다.

채정보는 좀 늦은감은 있지만 인민위원회에 자기가 시민들앞에 할 용의가 있다는 통지를 보냈다.

이튿날 저녁 시공회당에서는 시민들의 기대속에 성대한 군중강연회가 열렸고 채정보가 연단에 나섰다.

차광막을 치고 어유등불을 여기저기에 켜놓은 공회당에서 그는 연설을 시작하였다. 그것은 연설이라기보다는 청중들과 함께 호흡하는 일종의 자연스러운 좌담회라고 할수 있었다.

그는 먼저 자기가 겪은 일들을 그대로 이야기하였다.

인천사람들은 자기네와 처지가 어슷비슷했던 한갖 배군이 해방의 은인이신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의 대해같은 품속에 안겨 지금과 같이 성장하였고 참다운 삶을 누리게 되였다는 사실에서 큰 감화를 받고 우렁찬 박수갈채를 울렸다.

계속하여 채정보는 북조선에서 실시된 제반민주개혁의 성과들과 건당, 건군, 건국의 빛나는 로정을 알기 쉽게 해설해주면서 남녘의 여러분에게도 바로 이런 광명한 앞날이 열리게 되였다고, 모두가 조국의 자유와 통일독립을 위한 성전에 한사람같이 떨쳐나서자고 호소였다.

강연회가 끝나자 채정보는 인민위원회에 들려 위원장과 따로 만났다.

위원장은 나이를 대중할수 없는 얼굴이 창백하고 수척한 사나이였는데 자기 소개부터 하였다.

그는 원래 이곳 토배기로 해방직후 서울 가서 대학을 다니면서 《국대안》반대투쟁으로부터 시작하여 미군정과 리승만의 폭압통치를 반대하는 의로운 투쟁에 나섰다가 서대문감옥에 잡혀들어가 옥고를 치르던 20대의 젊은 사람이였다.

그는 감옥에서 얻은 페염으로 줄기침을 하면서도 인민군대의 땅크가 서대문감옥의 철문을 깨며 들어오던 그 해방의 순간을 감격에 겨워 거듭 이야기하는것이였다.

서로 통성을 한 뒤에 채정보는 위원장에게 얼마전까지 인천시내에 있었다는 고진세를 아는가고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는 몇년동안 자기가 서울에 있는 감방에 앉아있다나니 그런 사람은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였다.

채정보는 그에게 미리 주의를 주었다.

《고진세는 전쟁 초기까지도 중령계급장을 달고 여기 괴뢰해병단에 있었는데 인민군대가 반격해나올 때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후에 고진세가 다시 시내에 잠입한 모양입니다. 아직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이 거리에서 그놈을 본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어째서 여기에 다시 나타났는지 의문입니다. 무슨 파괴암해공작을 시도할수도 있습니다. 시내에 그놈의 낯을 아는 사람이 많겠는데 모두 각성을 높이고 신고체계를 강화해서 시급히 적발해낼수 있게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예- 이를테면 그 지명수배란걸 하면 되겠군요. 알겠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그다음 채정보는 혹시나 해서 물어보았다.

《그리구 림종훈이란 기업가에 대한 얘긴 들어보셨습니까? 여기서 오래동안 선박수리소를 운영해오던…》

《압니다. 내가 어릴 때부터 알지요. 지금 자기 집에 있는것 같던데요. 이웃사람들이 보았다고 합니다.》

채정보는 놀라서 거듭 물었다.

《그가 여기에 있단 말입니까? 그럼 어째서 꿈쩍도 하지 않을가요?》

《아마 앓는 모양이지요. 선박수리소가 폭격에 말짱 타버렸으니 왜 안 그러겠습니까. 제 기업이 망하게 되면 자결하고마는게 기업가들인데…》

《고맙습니다, 위원장선생!》

《하하, 뭐 고마울것까지야 있습니까.》

《고맙구말구요.… 난 그가 우리를 피해 떠나간줄 알았습니다. 그는 내 오랜 친구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위원장도 함께 기뻐하였다.

채정보는 영영 잃을번 했던 옛친구를 다시 찾게 되니 걷잡을수 없이 가슴이 들먹거렸다.

위원장은 림종훈의 집이 멀지 않은 곳에 있다면서 자기가 직접 안내를 해주겠노라고 열성을 보였다.

채정보는 그의 안내를 받으며 어둠이 깃을 펴는 골목길을 따라 시내 유측에 있는 림종훈의 집으로 찾아갔다. 련락병 기태서가 뒤를 따랐다.

채정보는 돌로 쌓은 담장안을 잠간 넘겨다보았다. 함석지붕을 인 네댓칸짜리 빨간 벽돌집이였다.

사람이 산다는 집에 등불 한점 보이지 않고 괴괴한 정적만이 집두리에 무겁게 드리웠다.

채정보는 부름종을 대신하는 옛스러운 대문짝에 매달린 자그마한 망치를 들어 두드리며 목청을 가다듬어 소리쳤다.

《주인 계시오? 나 옛친구 채정보요.》

거듭거듭 주인을 찾았지만 대답이 없었다.

채정보는 의혹에 잠겼다.

림종훈이 집에 있다면 설사 중병을 앓는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침묵을 지킬수 있을가싶었다. 가족들이 대신 나와 문을 열어줄수도 있겠는데…

혹시?!… 고진세가 동창이랍시고 여기에 발을 붙인건 아닐가? 아니, 꼭 그렇다고 선뜻 단정할수야 없지. 그런데 림종훈은 왜 대답이 없는가?…

 

림종훈은 요새 눈확이 푹 꺼져들어갈 정도로 몹시 수척해졌지만 누워 앓고있는것은 아니였다. 그저 대문을 닫아건채 며칠째 옛말 그대로 두문불출하고있었다.

그는 지긋지긋한 리승만 《정권》이 쫓겨간 뒤에 해방의 감격과 신생의 기쁨이 굽이치는 거리에 뛰여나가 활보하고싶었고 더우기 중성 네알을 달고 인천항에 주둔하고있다는 인민군 고급군관이 소문처럼 자기가 알던 채정보가 옳은지 확인하고도싶었다. 정말 옛친우 채정보라면 얼싸안고 쌓이고쌓인 회포를 풀수도 있으리라.

해방전에는 일본재벌들의 등쌀에 기업이 쇠퇴하여 파산직전에 놓였던 림종훈이였다. 그런가 하면 《해방자》라는 미군이 인천부두로 상륙한 후에는 미국놈한테 붙어 폭리를 얻는 매판자본가들의 세력에 밀려 기를 펴지 못했었다. 미국놈들은 조선전쟁을 도발하자마자 자기의 선박수리소까지 폭격하여 재더미로 만들었다.

반격해나온 인민군대에 의하여 이제야 조선사람이 주인이 된 세상이 온것 같았다.

해방의 기쁨에 젖었던 림종훈을 꼼짝 못하게 집안에 못박아놓은것은 나흘전 야밤삼경에 구렝이처럼 소리없이 담을 넘어들어온 고진세였다.

그는 주인이 꺼리거나말거나 2층 다락방에 틀고앉아서 소위 지하본부를 꾸리고 함께 배를 타고 잠입했던 두명의 부하를 더 끌어들였다. 그것도 모자라 시내에 아직 남아있는 이전의 유지나 군관계자들, 주먹패들까지 몰래 불러들여 으름장을 놓으면서 협박을 하거나 무슨 지령을 주기도 하였따.

림종훈은 고진세가 하는짓이 역겹기 그지없었다. 자기 집 다락에 큰 먹구렝이가 또아리를 틀고있는것 같은 기분이였다.

이태전에 상처한 뒤로 집에 식모를 하나 들이고있었지만 전쟁이 일자 나가버리고 의학전문에 다니는 외동딸 혜숙이가 집안동자질을 도맡다싶이 하고있었는데 어제는 느닷없이 울음을 터뜨리며 아버지방에 들어와 설분을 하더니 이제 더는 집에 있지 못하겠다면서 바깥 어디론가로 뛰쳐나가버렸다. 보나마나 고진세가 데리고 들어온 젊은 놈팽이들이 흉심을 품고 혜숙이가 못 견디게 지분거린 모양이였다.

당장 고진세네 패당을 집에서 내쫓아야 하였다.

이놈들과 공모하였다고 새로 선 인민정권기관이 자기한테 죄를 물을것 같아 두렵기도 했거니와 소문처럼 항에 주둔한 장관이 채정보가 옳다면 그를 떳떳이 만나볼수도 없겠기때문이였다.

그래서 오늘은 고진세가 두 부하를 내보내고 혼자 앉아있는 틈에 그를 만나러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담배연기와 쉬여빠진 음식냄새, 퀴퀴한 발땀내가 코를 찔렀다. 혜숙이가 집을 나간 뒤에는 고진세의 밥그릇들을 치워줄 사람도 없었다.

골살을 찌프리고 고진세와 마주앉은 림종훈은 두어번 헛기침을 하고나서 자네 여기서 그만큼 묵었으면 이젠 다른데로 가보는게 어떤가고 허두를 뗐다.

그러자 고진세는 아니, 내가 이 집 말고 시내 어디에 몸을 붙일데가 있는가고 도리여 비위를 부린다. 그는 림종훈을 부유한 축이라고 해선지 아예 자기네 편처럼 치부하고있는터였다.

림종훈은 이젠 에둘러 말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여러가지로 좀 불편해서 그러네. 자네들은 틀려먹었어, 우리 혜숙이가 집을 나간것만 봐도 그렇지…》

《오- 혜숙이 말이지? 그 애가 사상이 상당히 불온하더군. 빨갱이물이 단단히 들었어.》

림종훈은 점점 더 화가 치밀었다.

《이보라구 고군, 이렇게는 못살겠네. 자네네때문에 더이상 두더지처럼 세상을 피해 숨어있지는 못하겠단 말이네.》

《아니, 자넬 누가 집안에 붙잡아두나? 바람도 쏘일겸 시내에도 나가보고 항에도 슬슬 나가보라구. 이를테면 시민들의 동향도 알아보고 채정보도 만나 지금 무얼하고있는가도 알아보란 말이야. 옛 동창들의 해후라 누가 봐두 자연스럽지 않겠나.》

《채정보가 항에 왔다는 소리가 옳긴 옳은가?》 수틀린 상을 하고 앉아있던 림종훈은 그만 얼결에 관심을 드러내고말았다. 그러나 인차 대수롭지 않은듯이 물었다. 《아니지? 물론 뜬소문이겠지?》

《여보게! 내가 무슨 뜬소문이나 듣고 다니면서 작전을 전개하는줄 아는가?》 고진세는 사뭇 엄한 책망조로 말했다. 《분명 채정보야. 기왕에도 자넨 정보와 의가 잘 맞았던것 같은데, 안 그래?》

《그게 언제적일이라구. 이젠 잊어버린지 오래네.》

림종훈은 창황중에 대꾸하였다.

《하긴 그래. 정보와 우린 동기동창이라는 관념을 깨끗이 버려야 하네. 자네의 조촐한 선박수리소가 누구때문에 저렇게 풍지박산이 됐나.》

《남의 아픈데는 왜 건드리나? 거야 구라망편대가 날아들어…》

《자넨 역시 단순하거던. 생각해보라구. 애초에 채정보네가 쳐들어오지 않았으면 미군비행기가 날아들지도 않지. 그리구 말이야, 수리소가 설사 폭격을 면하고 온전히 남아있다 해도 어차피 북의 정권에 죄다 몰수되였을걸세. 자네는 유산자라는 딱지가 붙어 영원히 박해를 받을거구. 그러니 우리가 맥을 놓구 우두커니 앉아만 있어서야 되겠나. 손을 써야지. 행동해야 한단 말일세.》

《무얼 어떻게 한단 말인가?》

림종훈은 짜증을 냈다. 워낙 상선학교시절부터 고진세의 사람됨을 알고도 남음이 있는 그로서는 진세가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곧이 들리지 않았다.

《요즘 채가가 저 앞바다에 기뢰를 부설하고있는건 분명한데 밤에만 기동을 하니 어느 수역에 어떤 기뢰밭을 얼마나 조성하고있는지 그 실상을 알수가 없구만.》

고진세는 생각에 잠겨 고개를 기웃거리다가 갑자기 이를 사려물었다. 두눈에서 시퍼런 불줄기가 뿜어나오는것 같았다.

《하기야 그게 문제가 아니지. 근원을 없애버리면 그만이야.》

《근원을?…》

《부두에 있는 기뢰창고 말일세. 거기다 불을 달면 아마 굉장할걸, 하하하…》

《자네 무슨 끔찍한 소릴 하구있어?! 그래 인천사람들을 다 죽일셈인가?》

《이북정권과 한동아리가 돼서 돌아가는 놈들을 그냥 둬? 통채로 하늘로 날려보내자는거네.》

《자네야말로 무서운 사람이군, 무서운 사람이야!》

림종훈은 온몸에 소름이 쭉 내돋았다.

그러나 고진세는 느물느물 웃는다.

《뭘 새삼스레 놀라나. 자네도 이 일에 어차피 동참해야 할겉?》

《난 그런건 못하겠네. 난 사민이야.》

《허어, 셈판이 없구만. 자네한텐 전시법이 적용되지 않는줄 아나? 그러다가 량쪽 두 총알에 맞아.》

《맘대로 하게!》

림종훈은 고진세의 눈을 곧바로 마주보았다.

느닷없이 누군가가 대문을 두드리면서 주인을 찾고있었다.

다락방에 쭈그리고앉아 다투던 두사람은 귀에 익은 그 목소리를 알아듣자 다같이 화들짝 놀랐다.

 

채정보는 여전히 대문가에서 주인 림종훈을 소리쳐 찾았지만 집안에서는 기척이 없었다.

그는 이대로 물러가고싶지 않았다. 옛친우의 신상에 어떤 불길한 일이 생긴것만 같아 마음이 편안치 않았다. 만일 이 예감이 맞는다면 그저 외면하고 스쳐지나갈수야 없지 않은가.

한참만에 잘그락- 하고 곽쇠가 돌아가는 가벼운 소리에 이어 벽돌집 현관문이 빗서 열리더니 어두운 집안에서 희끄무레한 사람형체가 슬며시 나타났다.

《게 누구요?》

집주인의 목소리가 별스레 가늘었지만 너무도 귀에 익은 소리라 채정보는 대번에 흥분하였다.

《여보게, 종훈이! 나야, 나…》

《뉘신지?…》

《내가 정보라구, 이 사람아…》

《뭐, 정보라구? 거 오래간만이구만.》

《얼른 이 대문부터 열어주게!》

희미한 그림자가 느릿느릿 걸어나와 빗장을 한참 덜그덕거리다가 빼낸 다음 찌그덩하고 대문짝을 열어제꼈다.

채정보는 그의 두손을 붙들고 제잡담 흔들어댔다.

《그새 잘있었나? 응?》

《보는바와 같지. 지금 앓고있네. 집안엔 누구도 없구… 나 혼자뿐일세.》

《아, 그거 안됐군.…》

채정보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는데 인민위원장이 대화에 끼여들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제가 인민위원장입니다만… 저, 세브란스의전에 다니던 따님이 계신다고 들었는데?》

《그 앤 집을 나가버렸지요. 아마 의전학생들과 같이 밀려다니는 모양인데…》

《여보게, 이렇게 만나기도 쉽지 않은데 집안구경이나 좀 시켜주지 않겠나?》

채정보는 지금 림종훈의 태도가 어딘가 이상스럽다고 여기면서도 웃는 낯으로 물었다. 시간을 내여 그와 마주앉아 앞으로 살아갈 일도 의논해주고 뭔가 위로라도 해주고싶었다.

그런데 종훈은 난색을 지었다.

《오늘은 내가 몸이 불편해 그러네. 그럼 실례하겠네.》

《그래… 이담에 또 오지.》

《아니아니, 나를 가만 좀 놔둘수 없나. 자네가 나를 관심해주는게 고맙긴 하지만 요즘 시국이 하두 어수선하니 개인자격으로 찾아오든 점령군 장관의 자격으로 찾아오든 솔직히 그닥 반갑지 않네그려.》

《…》

《제발 부탁인데 내 일엔 일체 상관하지 말아주게. 그럼 잘 가게. 난 몸이 좀 말째서…》

대문이 찌그덩하고 채정보의 코앞에서 닫겼다.

그와 인민위원장이 어안이 벙벙해서 마주 쳐다보았다.

《허허, 좀 소심한분인것 같군요.》

인민위원장이 채정보의 체면을 보아 완곡하게 표현했지만 림종훈이라는 인간을 시대의 흐름에서 밀려난 가련한 존재로 보는것 같았다.

인민위원장과 헤여져 돌아오는 길에서도 채정보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기관단총을 멘 련락병 기태서 역시 묵묵히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이 민감한 젊은이의 마음도 편안치 않았다.

그런 매정하고 례의조차 없는 부자나부랭이를 그래도 동창이라고 찾아갔다가 푸접없이 문전거절을 당한 자기의 상관을 속으로 동정하기도 하고 그 동창에 대한 의분이 솟아올라 혼자 씨근거리기도 하였다.

채정보대좌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련락병을 돌아보았다.

《동무는 이제 위수경무부 정명수중위를 찾아가서 내 부탁을 전해야겠소. 여기 선박수리소 주인 림종훈이라는 사람의 딸이 얼마전에 집을 나갔다는데 그 행처를 찾아보고 나한테 알려달라고 말이요. 이름은 아직 모르지만 세브란스의전에 다니던 학생으로 지금 시내의 많은 청년학생들처럼 인민군대원호사업을 할수도 있고 의용군에 입대하겠다고 운동을 할수도 있다고 하면 십중팔구 찾아낼수도 있을거요.》

《알았습니다. 그런데…》

련락병 기태서는 머뭇거렸다. 내가 이런 사적인 부탁을 전하러 가는사이에 대좌동지신상에 무슨 위험이라도 닥치면…

《밤중에 호위도 없이 어떻게 혼자 가시겠습니까?》

《그런 걱정은 말고 빨리 갔다오오.》

대좌가 이렇게 말할 때에는 련락병도 어쩌는 수가 없다. 절대복종해야 하는것이다.

기태서는 한달음에 시내에 있는 위수경무부로 달려갔다.

대좌의 사적인 부탁을 정명수중위는 신중히 받아들였다.

아마 존경이 가는분이 부탁하는것이니 그럴것이라고 기태서는 생각하였을뿐 이후에는 그 일을 다시 상기할 사이가 없었다. 매일같이 기뢰부설전투가 긴장하게 벌어졌기때문이였다.

그런데 이틀만에 채정보대좌를 만나러 인천항으로 찾아온 학생복차림의 활달한 처녀가 있었다. 그는 련락병에게 림혜숙이라고 자기 소개를 하였다.

련락병 기태서는 그를 지휘부로 데리고 갔다. 대좌는 처녀를 반갑게 맞이하면서 자기가 그를 찾아가려던 참인데 마침 잘 왔다고 못내 기뻐하는것이였다.

처녀는 마침내 대좌앞에서 자기네 집에 고진세라는 《국군》중령이 숨어있다고 실토하였다. 그런 까닭에 자기 아버지가 매우 난감한 처지에 빠졌다는것이였다.

련락병 기태서는 그제야 대좌동지가 림종훈의 집을 찾아갔을 때 랭대를 받은 까닭을 짐작할수 있었다. 분명히 그 집의 다락방창문에서 고진세란 놈이 대문가에 서있던 대좌를 향해 총을 겨누고있었을것이라고 생각하니 기태서는 새삼스레 등골이 다 써늘해졌다. 그래서 림종훈은 본의아니게 옛친구인 대좌를 집에 들여놓지 않고 구실을 대면서 선자리에서 돌려보낸것이리라.

련락병은 만일 대좌가 그때 매정한 림종훈에 대하여 침을 뱉고 돌아섰더라면 친우를 구원할수 없었을뿐아니라 그 집에 기생하고있는 악당들에 대한 정보도 알지 못했을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였다. 곁에서 지내볼수록 속이 깊고 인정이 넘치는 대좌였다.

《난 너의 아버지를 잘 알고있다. 나처럼 믿고있었지. 암, 그렇구말구…》

처녀는 흐느껴울면서 고맙다고 거듭 외우는것이였다.

대좌는 그 자리에서 쪽지편지를 써서 처녀에게 주면서 아버지에게 몰래 전하라고 일렀다.

그러자 처녀는 망설이였다.

대좌가 왜 그러는가고 물으니 그는 집에 다시 들어가기 싫다고, 그놈들이 무서워서 그런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대좌는 처녀를 타일렀다.

《이 일은 혜숙이밖에 할 사람이 없어. 어렵지만 꼭 해내야 한다. 떳떳한 아버지를 다시 찾아야 할게 아니냐.》

마침내 처녀는 눈물을 닦으며 어린애처럼 고개를 끄덕이였다.

이튿날 련락병 기태서가 대좌의 지시대로 림혜숙이 림시 거처하고있는 동창생네 집에 찾아가니 기다리던 혜숙은 아버지의 회답편지를 슬그머니 전해주는것이였다.

며칠동안 련락병은 대좌의 새 쪽지편지를 혜숙에게 전하기도 하고 혜숙에게서 전달받은 림종훈의 편지를 위수경무부에 전하기도 하면서 분주히 뛰여다녔다.

이런 경로를 통하여 채정보대좌와 인천시 위수경무부는 고진세망의 활동을 손금쥐듯 알아낼수 있었다.

련락병 기태서는 고진세패당을 일망타진하는 전투에는 아쉽게도 참가하지 못하였다.

현준대위가 인솔하는 선발된 해병들과 시위수경무부 경무원들이 놈들을 습격하였다.

폭격에 허물어진 양조소건물의 지하실에서 기뢰창고를 폭파하기 위한 마지막회합을 하던 12명의 고진세일당은 거의다 붙들리거나 황천객이 되고말았다.

고진세는 술고으던 빈 발효탕크안에 숨었다가 수류탄이 터지고 탄환이 비발치듯 하는 속에서 귀신같이 빠져달아났다. 아마 회합이 시작되기 직전에 림종훈이 잠간 밖의 동정을 살피러 나갔다오겠다면서 그 자리에서 빠져나가는것을 본 고진세가 무슨 눈치를 채고 미리 몸을 뺄 궁리를 해두었댔는지도 모를 일이였다.…

어쨌든 고진세의 파괴공작이 파탄되게 되자 살고난것은 누구보다도 림종훈이였다.

그는 두팔을 벌리고 채정보에게 달려가 부둥켜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새 생활의 길에 들어선 림종훈은 자기가 데리고있던 기술자들을 배무이장에 데려오고 폭격에 파괴된 선박수리소를 복구하려고 일판을 벌렸으며 용선로를 살려냈다. 부족한 기계들은 시내의 숨죽은 공장들에서 회수해오기도 하면서 채정보네가 배를 수리하고 개조하는데 단단히 한몫을 하였다.

그의 딸 림혜숙은 자기 학급 동무들과 함께 의용군에 입대하였다.

혜숙이가 탄 자동차가 떠나는 날 그의 아버지와 채정보가 함께 손을 흔들며 바래주었다.

 

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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