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 회)

제2편 봉화

8

 

제주도인민유격대 본부에서 열린 회의에 참가하고 돌아온 리덕구는 다음날 아침에 3. 1지대의 중대장이상급 지휘관회의를 소집하였다. 본부에서 받은 중요과업들을 수행하기 위한 협의회였다.

협의회에 참가할 지휘관들이 지대지휘부초막에 다 모이자 리덕구는 송진내가 풍기는 크지 않은 작전용탁자앞에 일어섰다.

《본부지휘관회의에서는 최근 유격대의 대렬이 급속히 장성한 형편에서 각 지대들에서 무기와 식량, 각종 후방물자를 최대한 긴급히 확보할데 대한 문제를 토의하였소. 또한 본부에서는 우리 3. 1지대에 본부에서 사용할 출력이 높은 7구짜리 라지오를 구입해올데 대한 특별과업을 하달하였소. 오늘 협의회는 지대앞에 제기된 이 전투과업들을 수행하기 위한 문제를 토의하려고 하오. 이 문제들에 대해서 본부성원인 리좌구동지가 먼저 본부의 의도를 알려주겠소.》 하고 지대장 리덕구는 허리에 찬 권총을 바로잡은 다음 습관처럼 몸을 곧게 편 자세로 탁자앞에 앉았다. 뒤이어 상체와 어깨폭이 든든하고 키가 큰 리좌구가 일어나 흥분한 목소리로 발언하였다. 그는 4. 3봉기이후 짧은 기간에 유격대의 대오가 놀라울 정도로 엄청나게 급속히 장성된 정형에 대해서 언급하고 이러한 조건에서 무기, 식량, 피복, 각종 후방물자확보가 매우 절박하게 제기된다는것, 현재 제주도인민유격대본부에는 《특별후방조》가 조직되여 활동을 개시하였다는것, 여기에 각 지대들에서도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최대한 활동해야 한다고 력설하였다.

《본부에서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하고 리좌구는 왕성한 열정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일제패망당시에 이곳 제주도에 틀고앉았던 일본군대는 많은 무기와 탄약들을 바다에 처넣었거나 한나산의 수백개 동굴들에 숨겨놓았다고 합니다. 각 지대들에서는 이 무기와 탄약들을 긴급히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찾아내야 하며 식량, 피복 등도 빨리 확보해야 할 과업이 나서고있습니다. 그리고 본부에서 사용할 라지오구입문제는 그 중요성을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도 여기 모인 지휘관동무들은 잘 알리라고 믿습니다.》 하고 리좌구는 뜻이 깊은 표정을 띠고 초막안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리좌구의 발언이 끝나자 중대장들이 일어나 본부에서 하달한 과업들을 수행하기 위한 방도들과 의견들을 제기하였다. 협의회는 오랜 시간 계속되였다.

협의회끝에 식량확보전투조와 한나산의 수많은 동굴들과 바다에 있는 무기를 찾아낼 수색전투조를 편성하기로 결정했다. 무기, 식량, 후방물자확보문제를 락착짓고나서 마지막으로 리덕구지대장이 본부에서 사용할 라지오구입문제를 상정시켰다. 그러자 즉시에 성미급한 3중대장이 먼저 벌떡 일어났다.

《지대장동무, 아, 무엇때문에 우리가 본부의 라지오만 해결하겠습니까! 솔직히… 로골적으로 말해서 제주도인민유격대에서 우리 3. 1지대가 기본이고 가장 강한 지대인데… 그러니 우리 3. 1지대도 본부처럼 라지오를 구해놓고 들으면서 생활하잔 말입니다. 로골적으로 말해서…》 하고 말끝마다 《로골적으로…》라고 습관처럼 외우는 3중대장은 마치 그 누구에게 대들기라도 하듯 머리를 곧추세우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깨폭이 넓고 든든한 가슴우에 묵직한 두팔을 엇걸은채 앉아있던 리좌구가 불시에 껄껄 웃었다.

《여보시오, 3중대장! 그걸 여기 누가 반대하는 사람이라도 있소?》

《아니, 그런 사람은 없지만 자존심이 상해서 그럽니다. 로골적으로 말해서…》

3중대장은 리좌구를 바라보며 멋적은듯 쿵쿵거리며 마른기침을 깇었다.

리좌구는 여유있게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여보 3중대장, 자존심은 자존심이고… 동무에게 라지오를 2대씩이나 구입할 무슨 묘안이라도 있소?》

《묘안이라구요? 있구말구요. 로골적으로 말해서… 제주시를 냅다 들이치구 관덕정에 틀고앉은 제주도 미군정과 제주도경찰서놈들의것을 빼앗으면 될게 아닙니까! 로골적으로 말해서…》 하고 3중대장은 기관총을 쏘아대듯 빠른 어조로 응수했다.

리좌구는 그저 어이없이 웃는데 지대장 리덕구가 정색해서 엄하게 말했다.

《여보 3중대장동무, 그건 그렇게 말처럼 쉽고 간단한 문제가 아니요. 지금 악에 받친 적들은 어마어마한 무력을 증강해놓고 눈이 새빨개서 발광하고있소. 물론 앞으로 제주시를 공격할 때가 올거요. 하지만 지금은 라지오때문에 그런 작전을 벌릴 시기가 아니요!》

《자, 성급해하지 말고 합리적이면서도 실현가능한 방도를 찾아봅시다.》 하고 리좌구는 협의회에 모인 3. 1지대의 지휘관들을 둘러보며 열기있게 말하였다.

협의회에 참가한 지휘관들의 이런저런 의견들이 제기되였으나 별로 신통한 방도들은 없었다.

《그럼… 잠시 휴식하면서 머리를 식히고 론의를 계속하도록 하겠소.》 하고 리덕구지대장이 휴식을 선포하였다.

초막안에서는 즉시에 떠들썩한 웃음소리들이 들리고 담배연기가 뽀얗게 구름처럼 피여올랐다.

그때 초막입구쪽에서 인기척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반백의 머리를 밤송이처럼 깎은 로인이였다.

《여기 대장이 누군고?》 하고 로인은 뉘게라 없이 화를 내듯 감궂게 눈섭을 꺾고 대답을 기다렸다.

초막안의 지휘관들은 불시에 나타난 결패사나워보이는 로인의 거리낌없는 태도에 말을 못하고 주춤거리는데 리덕구가 침착하게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로인님, 제가 지대장입니다.》

《음, 내 대장에게 물을게 있어 찾아왔어. 지금 저 포악무도한 미국양놈들과 역적패당들이 우리 제주도땅을 짓밟고 마을들을 불사르고 사람들을 마구 죽이고있어! 한데 그놈들을 쳐부시는 싸움에 제주도백성들의 남녀로소 층하를 따로 구별하는게 옳은가?》 하고 로인은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쩌렁쩌렁한 굵은 목소리로 결패있게 물었다.

《로인님, 물론 자기 조국, 자기 고향을 사랑하고 지켜싸우는 애국, 애향심에는 남녀로소 구별이 있을수 없습니다. 그러나 각기 싸우는 방법이 다를수 있습니다.》

리덕구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불쑥 나타난 낯모를 로인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로인은 건장한 몸에 풋밤송이모양으로 깎은 네모진 머리가 힘차게 올라앉고 벗어진 관자노리에는 백발의 머리칼이 희슥희슥하였다. 늙은이다운 느슨한 주름살에 뒤덮인 그의 목이 가늘게 떨고있었다.

《옳은 말이야! 대장이 다르군.》 하고 말한 로인은 불시에 감동된듯 허리에 찼던 토목수건을 꺼내들더니 채찍을 울리는듯 한 소리를 내며 코를 풀었다.

리덕구는 소리없이 웃으며 결패사나운 로인을 바라보고있었다.

《참, 로인님은 어디서 오셨습니까?》 하고 리덕구는 정중한 어조로 조용히 물었다.

그때 조천면 신흥리출신인 3중대장이 황급히 일어나서 리덕구지대장에게 다가가 잘 들리는 귀속말로 말했다. 저 로인은 4. 3봉기때에 유격대의 뒤를 따라 입산한 후 떼를 써서 종시 내려가지 않고 지금까지 자기네 중대에 거처하고있는 로인이라고 사연을 밝혔다. 그러고나서 3중대장은 로인에게로 다가갔다.

《로인님, 지금 지휘관들이 모여 회의중인데… 회의가 끝난 다음에 지대장동지를 만나도록 하십시오.》

3중대장은 부드러운 어조로 듣기 좋게 말하며 로인을 지휘부초막밖으로 내보내려 하였다.

《이 사람 3중대장, 자넨 내 일에 참견말라구.》 하고 로인은 주름살속에 묻힌, 색이 죽기는 했으나 흐려지지 않은 까만 눈을 번쩍이며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결패있게 말했다.

《로인님, 하실 말씀이 있으면 어서 하십시오. 저희들에게 로인님이 주는 그 어떤 충고나 조언도 다 듣겠습니다.》

리덕구는 자기가 앉았던 걸상에 로인을 앉히고 옆의 맨 바닥에 앉았다.

《지대장, 내 조천면 신흥리에 사는 김영성이요. 아닌게아니라 꼭 할 말이 있어서 이렇게 문득 뛰여들었소. 한마디로 지대장, 나도 싸우게 해달라는거요. 정식 유격대원으로 받아달란 말이요.》 하고 웨치듯이 노한 로인의 두눈은 애타는듯 지꿎게 리덕구지대장을 바라보았다.

《로인님, 그건…》

리덕구지대장이 난감한 표정으로 하는 말을 로인은 결연히 손을 내저으며 막았다. 이 순간 로인의 얼굴에는 울퉁불퉁 주름살이 잡혔고 눈섭은 찌프린 이마우로 내려쳐졌다.

《그러지 말고 내 말을 마저 들어보라구. 내 지대장얼굴은 처음 보지만 지대장 선친과는 인연이 깊은 사이야. 3. 1운동때 리근훈 자네 선친과 조천면의 만세동산에 올라 목청껏 함께 <조선독립 만세!>를 불렀었지. 그러고는 또 함께 왜놈들 감옥밥도 먹었어.》

근력좋고 결패있는 로인의 목소리는 여전히 쩌렁쩌렁 울렸다.

《아, 그렇습니까! 로인님, 참 반갑습니다. 먼저 찾아뵈웠어야 하는건데 정말 죄송합니다.》 하고 리덕구는 정중히 머리를 숙였다.

뒤따라 리좌구도 로인에게 머리숙여 깍듯이 례를 표했다.

《로인님, 안됐습니다. 일찌기 찾아뵙지 못해서…》

《아니… 아니 그러지들 말라구. 내가 찾아온건 한가지 청원이 있어서요. 내 4. 3때 입산을 했는데 지금까지도 중대에서는 날 마을로 내려보내지 못해 야단이거던. 아무 일에도 참석시키지 않고 나그네대접이란 말이요. 성쌓고 남은 돌 취급이니 그게 노엽단 말이야! 물론 내가 젊은이들처럼 펄펄 뛰지는 못해. 그래두 이 늙은것이… 할수 있는것이 있을게 아닌가! 물을 긷는다든지 젊은이들 해진 옷을 모아 수리하든가, 늙은이행세를 내며 마을에 내려가서 놈들의 동향을 내탐하든가. 이 사람들아, 나도 이 나라 물과 낟알을 먹으며 살아온 백성, 제주도에 태를 묻은 제주도사람이야.》

머리는 반백이 지났으나 놀라울만큼 목소리는 쩌렁쩌렁하였다. 도무지 환갑나이의 로인의 목소리같지 않았다.

《김로인님! 그 마음과 그 말씀만으로도 로인님은 벌써 고향과 조국을 지키는 싸움에 참전하셨습니다. 로인님, 그러나 총잡고 불길속을 헤치는 싸움은 우리 젊은이들에게 맡기고 어서 집으로 내려가시는게 십분 옳다고 저도 생각합니다.》

저으기 감동된 리덕구의 크게 뜬 눈동자의 가운데가 불이 붙은것처럼 번쩍이였다.

《아닐세, 이 사람 지대장, 믿고 찾아왔는데 자네까지 그러니 정말 노여웁구만, 분하단 말이야. 지대장도 좀전에 말했었지. 고향과 나라를 지키는 싸움에 남녀로소가 따로없다고! 옳거니, 자고로 나라지키는 싸움에 우리 백성들은 남녀로소가 따로없었어. 우리 집안은 고려때 몽골침략자들과 싸우다가 저 한나산 정방폭포에서 떨어져 자결한 김통정 삼별초 대장의 자손이요. 김통정 삼별초 대장어르신네의 애국의 피가 지금 내 몸에 흐르고있어. 양놈침략자들과 역적들이 지금 고향땅에 달려들어 불을 지르고 부녀자들을 릉욕하고있는데… 고향 제주도가 짓밟히고 무참히 모욕당하고있는데 내가 늙은이행세로 오불관언하고있으란 말이요? 제주도선조들의 넋이 산과 바다, 하늘에서 우리 후손들을 지켜보고있어. 그런즉 나의 소원은… 이 사람들아, 내 남은 여생을 나라를 지키는 싸움에 바치다가 죽게 해달라구. 내가 이제 살면 얼마나 더 살겠나? 지대장, … 이 사람들아, 내 간절한 청을 물리치지 말라구.》

김로인은 끝내 눈굽을 찍으며 통절히 뇌이였다. 초막안은 고요하였다.

누구 하나 뭐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저 멀리 어딘가 한나산상공의 소리높은 푸른 하늘로 날아가는 철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올뿐이였다.

《김로인님, 정말 훌륭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로인님, 방금 하신 그 말씀만으로도 우리들에게 큰 힘을 주었습니다. 김로인님!》

리덕구는 감동되여 눈물이 나오는것을 눌러 참으며 로인의 꽛꽛한 마른 두손을 꼭 잡고 머리를 숙여보였다.

《고마우이. 한데 지대장, 지금 보니 싸우는 젊은이들에게 식량이며 신발이며… 부족되는게 많더군. 지대장, 내가 할수 있는건 우선 그들의 후방사업을 힘자라는껏 돕겠어. 먼저 시작할게 있는데… 우리 집에는 고조할아버지때부터 가보로 내려오는 오랜 보석반지가 있는데 그걸 내줄테니 그것으로 후방물자구입에 보태쓰라구. 이제 당장 누구 한사람 나와 함께 내려가도록 하면 좋겠어.》

《김로인님, 제가 리근훈의 둘째입니다. 로인님, 후방물자걱정은 마십시오. 방금 우리들은 강력한 대책을 취하도록 결정했습니다. 그러니 가보로 내려오는 보석반지는 그대로 소중히 보관해두십시오.》 하고 감동된 리좌구는 진정으로 만류하였다.

그러자 서리가 내리기 시작한 로인의 수염밑에서는 경련으로 입이 실룩실룩 이그러졌다. 하지만 로인은 놀랍게도 매우 침착하게, 매우 깍듯한 어조로 말을 시작했다.

《음, 임자가 리근훈의 둘째인가. 한데 날더러 걱정말라는건 어떻게 하는 말인고. 지금 보면 도적놈심보인 간특한 왜놈들 대신 오늘은 심통이 꼭 날강도인 포악한 미국양놈들이 달려들어 날치고있는데… 도대체 걱정말라는건 무슨 당치않은 말이요?》

《로인님! 그런게 아니고…》

《이 사람들아!》 하고 김로인은 불시에 두주먹을 부르쥐고 결패있게 웨쳤다. 그 순간 로인의 눈에서 불꽃같은 섬광이 번쩍- 했다. 그는 동안을 두지 않고 련속 부르짖었다.

《나라가 있구야 가정도 있고 가보고 뭐고 하는것도 있는거야.》

《김로인님! 제가 그만… 로인님을 노엽힌 불민한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제가 잘못했습니다. 로인님, 제가 아무래도 오늘 밤 라지오구입차로 마을에 내려가게 될것 같은데 함께 내려가 로인님가정의 가보를 받아서 후방물자구입에 유효히 쓰겠습니다.》

리좌구는 진정으로 사과하면서 로인을 위로하였다.

《아니, 갑자기 라지오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린가?》 하고 김로인은 영문을 몰라하며 말을 덧붙였다.

《산에서 싸우는 임자들에게 라지오가 그렇게도 절박한건가?》

《그렇습니다. 로인님, 라지오만 있으면 인민들이 나라의 주인이 된 북반부의 희한한 소식을 어디서나 들을수 있고 그 소식은 싸우는 우리 제주도인민유격대원들에게 큰 힘과 용기를 주는 중요한것입니다.》

리좌구는 김로인에게 숨김없이 솔직히 그 중요성과 절박성을 술회하였다.

리좌구의 진지한 토로를 잠잠히 듣고있던 김로인은 불시에 철썩- 무릎을 쳤다.

《옳거니! 내가 미처 몰랐었군. 마침일세! 내가 그걸 구해낼 좋은 궁리가 있으니 라지오는 내게 맡기라구.》 하고 김영성로인은 껄껄한 손바닥으로 밤송이같이 깎은 머리를 슬슬 쓸면서 기분이 좋아서 떠들썩하였다.

그때 김로인과 한마을출신인 3중대장이 참견했다.

《할아방이 라지오를요? 그건 중대하고 책임적인 전투와도 같은 신중한 문제라는걸 아셔야 합니다.》

《예끼 이 사람, 임자는 날 산에서 내쫓지 못해 안달복달하는 사람이니 상대하지 않겠어.》 하고 김로인은 비웃듯 뇌이고는 말을 보탰다.

《제주시에 내가 잘 아는 장사치가 있어. 그 작자는 나라걱정보다 제몸의 살가죽을 더 중히 아는 인종지말이지. 그 작자는 라지오, 축음기, 재봉기따위를 파는데 없는게 없구 값은 터무니없이 많이 부르는 지독한 돈벌레야. 그 작자한테서 내가 라지오를 꼭 구입할테니 마음 푹 놓고 내게 맡기라구.》

《순녀 할아방! 그게 빈 장담은 아니겠지요?》 하고 3중대장이 눈을 섬뻑거리며 미심쩍어하였다.

《참견말라구. 내 임자하구는 상대하지 않겠다고 말했어.》

김로인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악의없이 웃었다.

《로인님! 그럼…》

리좌구는 문득 가슴속에서 후더운 피같기도 하고 뜨거운 열같기도 한것이 련속 치밀어올라와 떠듬거리며 계속 말했다.

《그럼… 저와 함께 오늘 밤 산을 내려가는게 좋을것 같은데 로인님생각은 어떻습니까?》

《찬성이야. 한데 말이야, 자네와 언제, 어디서 만날것만 약속하고 따로따로 내려가자구. 난 늙은이행세로 이제 곧 내려가겠어. 두루 알아보고 수소문할것도 있어서 자네는 이제 날이 어두운 다음에 산에서 내려오라구.》

김영성로인은 리좌구와 만날 장소, 시간을 약속하고나서 흐뭇한 기분으로 지대장 리덕구와 초막안의 지휘관들을 둘러보았다.

《자, 그럼 다시들 만나자구.》 하고 활기있는 모습으로 지휘부초막을 나서는 로인의 눈이 젊은이처럼 빛났다.

리덕구와 초막안의 지휘관들이 모두 밖으로 나와 마을로 내려가는 김영성로인을 뜨겁게 바래웠다.

《김로인님! 몸조심하십시오.》

리덕구는 평상시에 보기 드문 흥분한 목소리로 말하면서 머리숙여 절을 하였다.

지휘부초막앞에서 바래는 지대의 지휘관들모두는 로인이 숲사이로 사라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생각에 잠겨 그냥 서있었다.

《만만치 않은 로인이야!》

지휘관들중의 누군가가 감동된 목소리로 혼자소리처럼 뇌였다.

뒤따라 누군가가 열기있게 받아외웠다.

《그게 바로 우리 제주도로인이지!》

… …

등잔불을 아직 켜지 않은 어스레한 방안에서 김삼봉의 자애에 찬 목소리가 들렸다.

《얘, 철이 어멍아!-》

《네!-》

부엌에서 칭얼대는 애를 업고 저녁밥을 짓던 정량이 어스레한 방안으로 들어왔다.

《애를 이리다고.》

김삼봉은 정량의 등에서 칭얼대는 애를 일으키려고 해빛에 타고 로동으로 꽛꽛해진 두손을 내밀었다.

《노할멍! 그만두어요. 제가 업고 해도 일없어요.》 하고 정량은 만류하며 말했다.

《애가 자꾸 칭얼대는데… 내가 얼리며 안고 있으련다.》

김삼봉은 손주며느리 정량의 잔등에서 애를 받아안았다.

《보채는 애를 보느라면 힘이 드시겠는데…》 하고 마음씨고운 정량은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잠시 서있다가 부엌으로 나갔다.

김삼봉은 칭얼대며 보채는 증손자를 추스르며 얼리였다.

《이녀석, 어려서 자꾸 보채는 놈은 커서 사람구실을 못해. 어, 이놈 알아듣느냐?》

김삼봉의 품에 안기자 애는 신기하게도 찍소리없이 조용하더니 버둥버둥 기여나가려고 했다.

그때 문열리는 소리와 함께 연자방아간에 나가있던 며느리 신씨가 어스레한 방으로 들어섰다.

《연자방아질은 끝났느냐?》 하고 김삼봉은 방에 들어서는 며느리에게 나직이 물었다.

《네, 방금 전부 끝내고 돌아오는 길이예요.》

《힘들었겠구나! 자, 어디 네 할멍에게로 기여가봐라.》 하고 김삼봉은 버둥질치며 방바닥에 내려서 기여가려고 하는 증손자를 놓아주었다.

애는 곧바로 신씨에게 벌렁벌렁 기여갔다.

《옳지, 녀석이 제 할멍 보구싶어 칭얼대며 보챘군.》 하고 김삼봉은 조용히 웃고는 곧 시름겹게 한숨을 내쉬였다. 그의 얼굴에는 불시에 까닭모를 수심이 어렸다.

《어멍!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평상시에 말이 적고 과묵한 며느리 신씨는 주의깊게 시어머니 김삼봉의 기색을 살폈다. 불안하고 소란한 세월에 무슨 일인들 없겠는가!

《아직은 집안에 아무 일도 없다. 그런데 한나산에 있는 애아방 순우랑 좌구, 덕구들이 무사히 잘 싸우고있는지? 한시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구나.》 하고 김삼봉은 불도 켜지 않은 컴컴한 방에서 큰며느리에게 자기 심중을 실토하였다.

《어멍, 너무 근심마세요. 다들 잘 있을거예요.》

큰며느리 신씨는 다심하고 시름많은 시어머니 김삼봉을 진정으로 위로하였다. 그러나 위로하는 신씨의 표정도 그리 밝지는 못했다. 요즘 놈들이 별스레 날마다 마을을 돌아치며 총을 쏘아대고있었다. 신씨와 김삼봉은 다같이 수심에 잠겨 한동안 침묵하고있었다.

그때 밖의 마당쪽에서 《누구세요?!-》 하는 불안에 찬 정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땅거미가 내린 어둑어둑한 마당으로 허우대가 큰 장정이 슬며시 기척도 없이 들어섰던것이다.

《정량이냐? 내다.》

《아이고, 좌구삼촌이시군요!-》 하고 정량은 자기도 모르게 나직이 소리쳤다.

《노할멍!-》

정량은 환성을 지르며 건너뛰듯 부리나케 방안으로 뛰여들어왔다.

《좌구삼촌이 오셨어요!-》

《누가 왔다구? 둘째가?》 하고 김삼봉은 불시에 웨치듯이 말했다.

《어머니! 그간 앓지 않으시고… 무고하셨습니까?》

방에 들어서자 리좌구는 곧바로 어머니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절을 드렸다.

《그래… 그래… 고맙다!》

그 순간 늙은 김삼봉의 주름잡힌 두볼로 감격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험한 싸움판에서 무사한 아들을 보니 너무도 반가워 자신도 몰랐던 가슴속 밑바닥에서 눈물이 솟아올랐던것이다.

김삼봉은 이윽고 자기의 심정을 누르고 평온하면서도 애정깊은 목소리로 뇌였다.

《집안은 지금까지 다 무사하다.》

리좌구는 나이많은 형수 신씨에게도 절을 하였다.

《형수님, 그간 고생이 얼마나 많으셨습니까?》

《아이고, 집에 있는 우리야 무슨 고생이랄게… 그저 산에 있는 사람들이 늘 걱정이지. 방금 어멍은 산에서 싸우는 사람들 걱정을 했다우.》 하고 신씨는 조용히 흐느끼며 눈굽을 찍었다.

정말 오랜만의 가족들과의 상봉이였다. 집을 떠난 후 리좌구는 4. 3봉기때에도 집에 들리지 못했었고 어머님도 뵙지 못했던것이다.

《어머님, 셋째 덕구도, 조카 순우도 몸건강히 다 잘 있으니 아무 걱정마십시오. 저는 유격대일로 잠시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리좌구는 세상 떠난 맏형이 항상 그러했던것처럼 어머니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공손히 말하였다.

《그렇다니 한시름 놓이는구나.》

김삼봉은 세상 모르고 벌렁벌렁 기여다니는 증손자를 끌어안으며 만시름을 놓은듯 평온한 목소리로 거듭 뇌였다.

《이녀석아, 작은 할아방이 네 아방소식을 가지고 왔다. 너, 참 기쁘겠구나!》

《어머님, 형수님. 이애의 아버지 순우는 지금까지 본부성원으로 싸우고있었는데 이제 곧 유격대후방물자구입을 책임지고 한동안 섬을 떠나게 됩니다. 그렇게 집안식구들만 알고계십시오.》 하고 리좌구는 신중한 기색으로 조용히 소식을 알려주었다.

《오냐, 알겠다.》

김삼봉은 나직하니 대답하며 자애에 넘친 눈길로 둘째아들 좌구를 바라보았다.

《참 어머니, 저쪽 신흥리에 사는 김영성이란 로인님을 아십니까?》

《신흥리 김영성? … 왕년에 많이 듣던 귀에 익은 이름인데…》

《아버지와 함께 3. 1운동때 만세도 함께 부르고 감옥에도 같이 들어가 고생살이도 함께 했다고 하던데요.》

《너의 아버지하고? … 아, 이제야 생각나는구나. 너의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우리 집에 몇번 찾아왔던적이 있다. 그분이 아직 신흥리에 계시냐?》

《어머니, 그 로인님이 지금 한나산에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뭐라고? … 년세가 그렇게 많은 로인이?》

김삼봉은 놀라워했다.

《로인님이 어찌나 억척스럽고 결패사나운지 산에서 종시 내려가지 않고 싸우는 유격대원들을 돕겠다고… 어머니, 실은 유격대에서 당장 라지오 2대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로인님이 글쎄 몇대째 내려오는 가보로 보관했던 보석반지를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차마 어떻게 로인네 집 가보를 팔아 라지오를 구입하겠습니까. 어머니, 그래서 저의 집에 뭐 좀 있는걸… 어머님이 제 결혼식때 례물로 준것들을 팔아서 쓰려고 하는데… 어머님의향은 어떠하신지요?》

리좌구는 조심스럽게 물으며 머리를 숙였다.

《둘째야, 내 의향은 묻지 말고 네 결심대로 하거라. 너의 마음이자 이 어멍의 마음이다.》 하고 김삼봉은 쾌히 동의하였다.

《어머니, 리해하여주어 고맙습니다!》

《둘째야, 앞으로는 그런 말은 하지 말어라. 그런거야 응당한 일인데 고맙다는게 뭐냐! 참, 내 농짝에도 보태쓸 무엇이 있겠는지 모르겠다.》 하고 김삼봉은 혼자소리처럼 뇌이며 농짝문을 열었다. 리좌구는 펄쩍 뛰듯이 황급히 어머니를 만류하였다.

《어머니, 제발 이러지 마십시오. 제게 있는 물건에다가 다른데서도 도움을 받기로 이미 약속이 되여있습니다.》

《그만해라! 나라를 위한 싸움에 필요하다면 그까짓 집이고 땅이고 재물이 뭐겠느냐.》 하고 현철하고 대활인 김삼봉은 농안에 깊숙이 간수했던 은비녀며 가락지… 등속을 아무런 주저도 없이 꺼내놓았다.

《이것들은 오래전에 내가 시집올 때 너의 외할멍이 례물로 준거다.》

《어머니! 제발 사정합니다. 이러지 마십시오.》

울음섞인 목소리로 절절히 애원하는 리좌구의 얼굴에는 땀방울이 내돋았다.

《얘, 대장부가 뭘 그러냐? 어멍이 하는대로 하자! 나라가 편하고야 한 집안도 편한게 아니냐. 그래, 왜놈때 언제 한번 집안이 편한적 있었느냐!》 하고 김삼봉은 엄하게 둘째아들 리좌구를 꾸짖었다. 리좌구는 머리를 떨군채 눈물을 머금고 침묵하고있었다.

(어머니! 그 정성, 그 말씀을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어느 사이에 정량이가 달려가서 알렸는지 리덕구의 처 량후상과 아이들이 방으로 들어왔다. 먼저 시어머니 김삼봉과 동서인 신씨에게 인사한 량후상은 시형인 리좌구에게 머리숙여 인사하고나서 안부를 물었다.

리좌구는 문득 껄껄 소리내여 웃었다.

《잘 있었소 제수, 애아버지는 지금 건강한 몸으로 잘 있소. 내가 올 때 편지를 보내더군.》 하고 리좌구는 편지를 꺼내주었다. 그 다음 그는 리덕구의 아이들을 덥석 품에 안았다.

《아이구, 이녀석들 몰라보게 컸구나. 장래 대들보감들인걸.》 하고 리좌구는 또다시 유쾌히 껄껄 웃었다.

그때 문득 뜨락쪽에서 인기척소리가 들려와 방안의 사람들은 일시에 긴장했다.

《누구예요?》

방문가까이에 앉아있던 정량이 재빨리 밖으로 달려나가며 나직이 소리쳤다.

뜨락에서 잠시 두런두런하는 말소리가 들리더니 정량이가 방으로 되돌아와 좌구에게 긴장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알렸다.

《밖에 웬 낯모를 로인님이 찾아오셨어요.》

《아, 어서 모셔드려라. 어머니, 신흥리 김영성로인님입니다.》

정량이가 밖으로 나가 로인을 모시고 방으로 들어섰다. 김로인은 방으로 들어서자 곧바로 김삼봉에게 다가갔다.

《내 신흥리 김영성인데 날 모르시겠소?》

《아이고… 왜 모르겠소. 우리 령감 살아있을 때 몇번 우리 집에 오신적도 있고 방금 둘째아들한테서 좋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참, 반갑습니다.》 하고 김삼봉은 목메인 소리로 뇌이였다.

《벌써 찾아뵈워야 하는건데… 그만 인사불성이 됐소이다. 어수선한 세월에 쫓기는 인생이라 사람구실하고 살기도 힘겹군요.》

김로인은 한숨 쉬며 탄식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우. 우리 집 둘째에게서 방금 훌륭한 소식을 전해들었어요. 그 년세에 젊은이들과 함께 싸움에 나섰다니 탄복하게 되고 머리가 숙어지는군요.》 하고 김삼봉은 머리를 숙이며 진정으로 치사하였다.

《그러지 마시우. 백성된 도리를 지킬뿐인데…》

김로인은 결패있게 손을 내저어보이고는 곧 리좌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네하고 따로 할 말이 있는데… 밖으로 좀 나갈가?》

《네, 그럼…》 하고 리좌구가 자리에서 불쑥 일어서는데 김삼봉이 막아나섰다.

《우리가 저쪽방으로 가지. 여기서 할 의논들을 하시우.》

김삼봉은 며느리와 애들을 앞세우고 나가려고 일어섰다.

《가만, 어멍은 앉아계셔도 무방하겠는데…》 하고 김로인이 혼자소리처럼 뇌이자 리좌구가 즉시 받아외웠다.

《어머니, 그냥 앉아계십시오.》

김삼봉이 문가에 앉자 김로인은 라지오교섭에 대해서 자초지종 결과를 리좌구에게 알렸다.

《… 그 장사군놈이 바떼리인지 뭔지까지 합치면 라지오값이 뭐 굉장히 많다고 터무니없이 값을 부르더군. 겨우 흥정을 끝내고 라지오 2개를 가져왔소.》 하고 김로인은 기분이 좋아서 밤송이처럼 깎은 머리를 슬슬 쓸었다.

《로인님, 정말 큰일을 하셨습니다! 오늘 밤 자정이 지나서 약속된 지점으로 한나산에서 유격대원 몇명이 내려옵니다. 그때 라지오를 운반하기로 했으니 우리도 함께 떠나야겠습니다. 참 김로인님, 대금처리는 우리들이 마련했습니다. 그러니 로인님집의 가보인 보석반지는 그대로 두도록 하십시오.》 하고 리좌구는 간곡히 진정으로 로인에게 권고하였다.

뒤따라 김삼봉이 열기있게 공감해나섰다.

《그렇게 하는게 옳은 처사지요.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가보는 후손들이 함부로 처리해서는 안되니까요.》

그 순간 김로인은 리좌구모자의 정면에 대고 폭격이라도 하는것처럼 쩌렁쩌렁한 굵은 목소리로 결패있게 부르짖었다.

《허, 무슨 당치않은 말씀들이시오. 우리 집 가보가 나라를 위한 싸움에 귀중히 쓰인걸 지하에 묻힌 우리 가문의 조상들이 알면 막 춤을 추며 기뻐하고 후손인 나를 칭찬할거요! 우리 가문의 조상들은 다 그런 어르신네들이란 말이요. 그런즉 이후 두번다시 그런 말은 하지 말라구.》 하고 김로인은 두툼한 입술을 꾹 다물고는 다짐이라도 받듯 리좌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로인님!》

《김로인님!》

리좌구모자는 일시에 뜨겁게 뇌이며 숙연히 머리를 숙였다.

어둠에 잠긴 밖에서는 바다쪽에서 쏴-쏴- 파도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고 간간이 집뒤의 산쪽에서 밤새의 처량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접동새일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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