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1 회)

제2편 봉화

9

 

수난많은 제주땅에 비가 내리고있었다. 검은구름이 흘러가는 침침하게 흐린 하늘에서 땅우로 은실을 드리운듯 한 가느다란 보슬비였다.

한나산의 수많은 골짜기들과 거미줄처럼 뻗은 오솔길들로 사람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산속으로 들어가고있었다.

고요한 정적속에 잠겨있던 한나산의 산골짜기와 계곡들, 산등성이… 어디서나 사람들의 떠들썩한 목소리가 들렸다. 가족단위의 사람들 혹은 마을단위의 사람들은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고있었다. 제주도의 동서남북… 제주읍과 화북, 오라면, 북제주군의 구좌, 조천, 애월, 한림면, 남제주군의 대정, 서귀, 남원, 표선, 성산면 사람들이 각기 제 고장과 가까운 한나산으로 들어가고있었다. 이 수많은 사람들은 등산객들도 아니였고 말방목공도 나무군도 아니였다. 질서정연하게 산으로 오르는 사람들의 맨앞과 뒤에는 무장한 제주도인민유격대의 유격대원들이 이들을 호위하고있었다.

한나산으로 오르는 수만명을 헤아리는 남녀로소들이 산의 동서남북을 하얗게 뒤덮다싶이 했다. 수수천년 험난한 풍상을 겪은 태고의 산 한나산이 생긴이래 처음보는 류다르고 특이한 광경이였다.

이들은 바로 오늘, 미제와 역적놈들이 벌려놓은 5. 10망국선거에서 투표를 거부하고 잠시 한나산으로 몸을 피하려고 집과 마을을 떠난 사람들이였다. 이들속에는 남자들뿐아닌 애기구럭을 등에 진 녀인들도 수없이 많았다.

보슬비에 한나산은 축축히 젖어 푸르렀다. 초록색으로 덮인 한나산우로 구을듯이 검은구름이 흘러가고있었다. 바로 그 구름밑에서 수리개 한마리가 헤염치듯 이따금 한번씩 날개를 채고는 그것을 쭉 펴면서 기류를 타고 몸을 기웃거리고 진회색빛갈을 어슴푸레 얼른거리며 점점 멀리 작아지면서 북쪽으로 날아갔다. …

지난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련석회의에서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조성된 조선의 정치정세를 심오히 분석하시고 조선인민앞에 제기된 최대의 과업은 남조선을 미제의 식민지로 만들려는 5. 10망국선거를 파탄시키고 민주주의적원칙에 기초하여 통일적중앙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투쟁하는데 있다는것을 밝히시였다. 회의에서는 그이의 보고를 열광적으로 지지찬동하였으며 미제의 단독선거를 배격하며 그를 인정하지 않는다는것을 온 민족의 이름으로 선언하였다. 이것은 대내외적으로도 커다란 반향과 찬동을 불러일으켰다. 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하고 서울로 돌아온 김구, 김규식까지도 기자회견에서 발표한 공동성명에서 남북련석회의는 민족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조선사람이 주의와 당파를 초월하여 단결할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였다.》고 언명하였다. 이 사실을 서울발 UP통신까지도 보도하였다. 사실상 망국적인 5. 10단선을 지지하여나선것은 다만 매국역적 리승만계렬의 독촉과 《한국민주당》의 친일친미분자들, 한줌도 못되는 민족반역자무리들뿐이였다. 유엔조선위원단까지도 《중요한 우익정당인 한국독립당, 모든 중요한 중간파와 좌익 및 보다 진보적인 좌익정당들이 남조선에서의 선거실시를 반대하고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미제는 인민들의 한결같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5. 10단선을 강행할 흉계를 버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미군정은 《특별사령부》를 설치하고 침략무력을 대대적으로 증강했다.

남조선전역에는 전차, 대포, 기관총으로 장비된 미군기동부대를 배치하였으며 하늘에는 비행기가 선회하고 부산과 인천에는 함대가 대기하고있었다.

선거를 앞두고 반동경찰은 3만 5 000명으로부터 5만명으로 증강되였다. 5월 8일에는 남조선강점 미군부대가 비상경계에 들어갔고 5월 10일 선거당일에는 미군의 살벌한 무장위협과 감시가 감행되는 공포의 분위기속에서 반동경찰과 테로단이 총칼과 몽둥이를 가지고 집집을 수색하여 인민들을 강제로 끌어내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에 대해 미제의 어용통신 UP까지도 서울발 5월 10일 이렇게 보도하였다.

《… 미국의 헌병에 의하여 비호되는 경찰은 실제적으로 남조선에서 모든 도로를 차단하기 위하여 인원을 배치하였다. 검은 상의의 경찰이 카빈총으로 무장하고 여러대의 트럭에 잔뜩 올라타고 거리를 누비였다. 보초가 총검을 번득거리며 투표장입구의 50보도 못되는 곳에 서있었다.》

남해의 섬 제주도는 말그대로 완전전시상태에서 박두한 5월 10일의 선거날을 맞고있었다. 이러한 살벌하고 엄혹한 정세에 대처하여 한나산유격대본부에서는 심각한 론의가 진행되였다. 회의에서는 놈들의 악랄한 선거공세에 맞서기 위한 가장 적극적이고 효과적인 대책들을 토론하고 해당한 결정을 채택하였다.

제주도인민유격대지휘부는 봉쇄된 산중에 갇히다싶이하고 앉아서 소극적인 몇몇 습격조를 파견하여 선거장이나 습격하고 소각하는 형태로는 놈들의 선거를 완전히 파탄시킬수 없다는것을 알고있었다. 때문에 제주도인민유격대지휘부는 대담하게 수백명의 유격대 핵심성원들을 산에서 마을로 내려보내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들을 고향마을에 내려보내여 자기들의 부모, 처자, 친척들은 물론 주변사람들속에서 맹렬한 반선거투쟁에 대중을 동원하는 한편 선거당일에는 집단적인 투표참가거부형태로 주민들을 대대적으로 산으로 오르게 할것을 결정하였다. 이 적후 반선거지하투쟁의 조직집행을 강규찬이 직접 책임지고 실행하도록 하는 한편 제주도인민유격대 대장인 김달삼의 제의로 각종 명칭의 《가장 기동대》, 《가장 경찰대》, 《가장 국방대》가 조직되여 대낮에 적후에 들어가 지하조직과의 련계밑에 대대적으로 기습작전을 벌리기로 했다. 그리하여 바로 오늘 5월 10일, 제주도 각지의 수만명 주민들이 놈들의 선거에서 투표를 거부하고 한나산으로 오르고있었던것이다.

보슬비는 멎었다 내렸다 하면서 차츰 안개비로 변하였다. 북제주군의 조천면과 함덕에서 떠난 주민들은 와산을 거쳐 산으로 오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조천면 신촌리의 8개 마을에서 한나산의 중산지대까지 오른 사람들은 숲속의 이곳저곳에 가족단위로 혹은 두세집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있기도 하였다. 그들속에는 김삼봉일가의 대식솔도 있었다. 김삼봉과 함께 산에 오른 맏며느리 신씨, 손주며느리 정량, 둘째아들 리좌구의 처와 두 아들, 셋째 리덕구의 처인 량후상과 두 아들이 모두 한곳에 앉아있었다. 커다란 우산처럼 넓은 가지를 펼친 해묵은 소나무밑이였다. 거기에는 보슬비에 젖지 않은 오래 묵은 락엽들이 두텁게 깔려있었다. 일가의 어른들은 각기 생각에 잠겨 앉아있었으나 철없는 아이들은 마치 봄산놀이에라도 온듯이 나비도 따라다니고 꽃도 꺾으며 산속을 신명나서 뛰여다녔다. 문득 산속을 뛰여다니던 리덕구의 큰아들인 진우가 무엇때문인지 울상이 되여 할머니 김삼봉에게로 뛰여왔다.

《할멍! 한나산에 올라가면 아방을 만날수 있다고 했지?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없어.》

진우는 금시 울음이라도 터칠듯이 속이 타서 훌쩍거렸다.

《허, 그녀석 제 아방이 퍽 보고싶은 모양이군. 집을 떠날 때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했더니… 새겨두었던 모양이구나. 진우야, 조금만 기다려보자. 이제 만나게 될는지도 모르니까.》 하고 김삼봉은 자애깊은 목소리로 말하며 손자를 품에 끌어앉혔다.

그러나 장난군인 손자는 할머니품에서 빠져나오며 입을 삐죽거리면서 되알지게 소리쳤다.

《거짓말! 할멍은 거짓말해.》

《얘, 진우야. 할멍에게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그렇게 말하면 못써.》 하고 량후상은 짐짓 성난 목소리로 아들을 꾸짖었다.

《어멍, 내가 잘못했어. 난 또 아방을 찾아볼테야.》

진우는 두주먹을 부르쥐고 어느새 나무들사이를 이리저리 빠져 저쪽으로 사라지고있었다.

《얘, 멀리 가면 안된다!-》 하고 량후상은 아들애의 등뒤에 대고 큰소리로 신칙하였다.

숲속에서 자그마한 공지로 나온 진우는 앞의 멀지 않은 산등성이에서 날파람있어보이는 한 유격대원이 총을 틀어잡고 서서 사위를 살피고있는것을 띄여보았다. 진우는 신바람이 나서 그에게로 달려올라갔다.

《유격대아저씨! 어디 가면 우리 아방을 만날수 있나요?》 하고 진우는 달려오느라 숨이 차서 할딱거리며 밑도 끝도 없이 물었다.

긴장하여 사방을 감시하던 젊은 유격대원은 선거투표를 거부하고 입산한 주민들을 여기까지 보위하여왔고 또 지금도 보위할 임무를 수행하고있었다. 그는 머루알같은 새까만 눈을 반짝거리며 또랑또랑 분명한 말투로 묻는 진우에게 빙그레 선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허, 그녀석 서울에 가서 김서방 찾기로군. 참 얘야, 너 혹시 함께 산에 올라온 부모들 있는 곳을 잊어버린게 아니냐?》

새파란 나이의 유격대원은 검실검실 적동색으로 탄 얼굴에 문득 근심을 떠올리며 되물었다.

《아니, 우리 할멍이랑 어멍은 요아래쪽에 있어요. 그리고 우리 아방은 유격대인데요.》

《그래? 너의 아방 이름을 뭐라고 부르느냐?》 하고 총쥔 유격대원은 유쾌한 목소리로 낯모르는 천진한 소년에게 물었다.

진우는 스스럼없이 즉시 대꾸하였다.

《우리 아방의 이름은 리덕구라고 해요.》

《오, 너 참 똑똑한 애구나. 얘야, 너의 아방은 우리 지대장인데 지금 여기에 안 계신다.》

유격대원은 사랑어린 눈으로 소년을 여겨보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러자 진우는 대번에 시무룩해졌다.

《아저씨, 그럼 만나지 못하나요?》 하고 진우는 실망한듯 울상이 되였다.

《얘야, 지금 너의 아버지는 대원들을 인솔하고 놈들의 선거장들을 요정내는 습격전투에 나가셨단다. 아마 이제는 철수하여 여기로 올라오고있는지도 모른다.》

날파람있게 생긴 젊은 유격대원은 실망하여 금시 울음이라도 터칠듯 한 나어린 진우에게 기쁨을 주려고 사실대로 알려주었다.

《유격대아저씨, 그건 거짓말 아니지요?》

《얘, 난 거짓말을 할줄 모른다. 난 그런 사람이야.》 하고 유격대원은 조용히 소리내여 웃었다.

《야, 좋구나! 유격대아저씨, 난 가요.》

진우는 산등성이에서 뽈이 굴러내리듯 빠르게 달려내려갔다. 공지를 지나 빽빽한 나무들사이를 잽싸게 요리조리 빠져 할머니와 어머니가 있는곳으로 신명나게 뛰여갔다.

《할멍! 어멍!》

《이녀석아, 어딜 그리 정신없이 돌아쳐? 모두가 지금껏 너를 찾으며 속을 태웠어!》 하고 김삼봉이 꾸짖으며 한숨을 내쉬였다.

《할멍! 어멍! 저기 총가진 유격대아저씨가 그러는데 우리 아방은 마을의 선거장들을 쳐부시려고 나갔대. 지금쯤은 이쪽으로 올라오고있을거라고 했어요. 그 아저씨는 거짓말을 할줄 모르는 사람이래요.》

환희에 찬 진우의 목소리는 힘찼다.

《원 참, 녀석두! 그애의 열기가 이만저만 아니군. 끝내 제 아방소식을 알아가지고 왔으니…》

《호호, 보통열기가 아니군요. 정말이지…》

모여앉았던 김삼봉일가는 일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마음속의 시름을 잊게 하는 유쾌한 웃음이였다.

《진우야, 그 총멘 아저씨가 어디 있니? 우리 함께 다시 가보자.》 하고 리좌구의 큰아들이 진우에게로 다가가 귀속말로 부추겼다.

《음, 저기 산등성이야. 멀지 않아. 가볼가?》

장난군 손자애들이 설렁대며 다시 그쪽으로 가려는것을 할머니 김삼봉이 엄하게 막았다.

《그만둬라! 그 유격대아저씨는 산으로 올라온 마을사람들을 돌봐주느라고 바쁜 사람이야. 너희들이 몰려가서 성가시게 굴면 방해가 돼.》

할머니의 엄격한 꾸중에 손자애들은 찍소리 못하고 주춤거리며 서있었다.

그러더니 곧 키드득거리며 가까이의 잔솔밭쪽으로 몰려가 장난에 정신팔기 시작하였다.

 

이른새벽에 《가장 경찰대》로 북제주군일대의 각 면들에 진출하여 선거장들을 습격, 파괴, 소각하는 전투를 치른 제주도인민유격대 3. 1지대 유격대원들이 한나산기지로 철수하고있었다. 기세충천한 대원들의 보슬비에 축축히 젖은 머리칼과 옷에서는 물방울이 번쩍거렸다. 대오를 지어 질서정연하게 철수하는 산속에서는 바늘잎의 쨍한 냄새가 상쾌하게 풍기고있었다. 대오속에서 누군가 청좋은 목소리로 흥에 겨워 나직이 노래를 불렀다.

 

    한나산은 태고의 산 내 고향의 산

    우리는 수리개마냥 한나산을 날아 넘었네

    날아 넘었네…

 

기지로 철수하는 대원들과 함께 산으로 오르던 지대장 리덕구는 중간지대의 소나무숲속에서 문득 나어린 소년의 애처로운 울음소리를 들었다.

(?! …)

리덕구는 놀라 눈섭을 치켜들고 울퉁불퉁한 산길에서 울음소리가 들리는 소나무숲속쪽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젖빛나는 버섯이 깔린 소나무숲속에 4~5살가량의 소년이 홀로 외롭게 앉아 서럽게 울고있었다. 군데군데 검불이 묻은 소년의 이마에는 무엇에 짓쪼았는지 풋밤알만 한 멍든 자욱이 뿔처럼 솟아있었다.

《얘야, 너 왜 여기서 혼자 울고있느냐?》 하고 리덕구는 자기의 둘째아들과 나이가 비슷해보이는 소년을 끌어안으며 물었다.

《아방과 어멍이 있는 곳을 찾지 못해서 그래요.》

나어린 아이의 대답은 이외로 분명하고 챙챙하였다.

《오, 그러니 산속에서 길을 잃었구나! 울지 말아. 이제 내가 찾아주지.》 하고 리덕구는 소년을 등에 업고 산길로 나왔다. 그는 철수하는 대오속에서 한 지휘관을 불러 지시했다.

《대렬을 인솔하고 이미 계획된 지점에서 휴식하오. 내 조금후에 뒤따라 가겠소.》

《알겠습니다!》

활기에 넘친 대원들은 대렬을 지어 흥성거리며 유유히 산등성이를 넘어가고있었다.

《얘야, 넌 어느 마을에서 사느냐.》

《신촌 동동부락 고씨촌.》

《오! 동동부락. 너 참, 똑똑한 애구나.》 하고 리덕구는 조용히 웃으며 주민들이 올라와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때 마침 앞쪽에서 《수길아!-》, 《수길아!-》 하고 찾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우리 아방이다. 아방!-》

불시에 소년은 소리치며 리덕구의 등에서 미끄러져내렸다. 그럴 때에 숲속에서 갈중의를 입은 중년의 남자가 부리나케 뛰여나왔다.

《이녀석아, 왜 그렇게 사람속을 태워.》 하고 소년의 아버지는 대뜸 화를 냈다. 그 다음 리덕구를 알아보고는 굽석 머리를 숙였다.

《리덕구선생이시였군요. 이거 페를 끼쳐 죄송합니다.》

《페라니요! 공연한 말씀입니다. 참 궂은 날씨에 고생들이 많겠습니다. 모든게 미국놈들때문입니다.》

리덕구는 풋낯이나 아는 그에게 정중히 대꾸하였다. 신촌리 8개 부락의 800여호에서 사는 사람들을 다는 알지 못하는 리덕구였다. 그러나 신촌리는 물론 조천면과 군의 사람들까지도 리덕구를 교사시절부터 잘 알고있었다.

그들과 헤여진 리덕구는 마을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모여있는 이곳저곳을 돌아보았다. 로인들의 기침소리, 갓난애의 울음소리, 장난에 정신팔린 애들을 꾸짖는 소리들이 그칠줄 모르는 뒤숭숭한 소음으로 얽혀서 고요한 산속의 공간을 꽉 채우고있었다.

리덕구는 이 준엄하고 류다른 광경을 깊은 생각에 잠겨 돌아보고있었다.

(이것은 바로 미제가 강요한 민족의 수난사가 빚어낸 준엄한 광경일것이다!)

리덕구는 미제를 쳐부시고 조국통일을 이룩하는것이 어느만큼 절박하며 어느만큼의 간고한 투쟁을 각오해야 하는가를 또다시 심장으로 절감하고있었다.

(우리 민족은 과거 40여년간 일제의 식민지하에서 온갖 치욕과 모욕을 겪었고 천대와 멸시를 받았다. 그런데 해방된 오늘은 또 미제가 강요하는 민족분렬의 수난을 겪고있다. 원통한 일이다. 우리 겨레만큼 치욕과 애달픔과 서러움속에서 고생하였고 또 현재까지도 분렬의 재난속에 몸부림치는 민족이 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리덕구는 모질게 쑤시는듯 한 가슴아픔을 누르며 잠시 서서 사위를 둘러보았다.

산속에는 어디나 놈들의 선거에 투표를 거부하고 입산한 사람들이 하얗게 모여있었다. 그들에게 다가가 인사도 나누고 힘을 주고 고무하면서 산등성이로 올라가던 리덕구는 문득 커다란 우산처럼 가지를 펼친 해묵은 소나무밑에 어머니와 일가가 모여있는것을 띄여보았다. 그는 그쪽으로 빠르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어머니에게로 다가서던 리덕구는 갑자기 어디가 아프기라도 한것처럼 흠칫- 하고 멈춰섰다. 비에 흠뻑 젖은 옷을 입은 어머니의 앙상하게 마른 어깨며 구붓하게 굽어든 허리, 온통 주름살투성이의 얼굴이 리덕구의 가슴을 아프게 찔렀던것이다.

《어머님!-》 하고 자신을 다잡으면서 리덕구는 짐짓 힘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부르며 다가갔다.

《음, 셋째냐! 그래 어디 상한데는 없느냐?》

김삼봉은 그지없이 애정에 찬 눈길로 오랜만에 보는 아들의 볕에 탄 얼굴이며 어깨… 온몸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어머니! 늙고 병약하신 몸으로 고생이 많으십니다.》 하고 리덕구는 자기도 모르게 목갈린 소리로 말하였다.

《그런 말은 다시 말어라. 고향사람들 남녀로소가 거의 모두다 산에 올랐는데 유독 나만 특별히 고생하는것도 아니다.》

김삼봉은 꿋꿋이 머리를 들고 근엄한 표정으로 뇌였다.

《어머니! 그렇게 말씀하시니 고맙습니다.》

리덕구는 련속 목이 메여오름을 느꼈다. 한편 아버지를 만나보겠다고 그렇게도 극성이던 아들 진우는 정작 총을 차고 엄엄해보이는 리덕구가 나타나자 달려와 매달리지 못하고 머뭇거리고있었다. 안해인 량후상도 말을 못하고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물을 머금고있었다.

《셋째야, 네 형과 순우도 몸성히 잘 싸우고있느냐?》 하고 어머니는 여전히 근엄한 표정으로 물었다.

《네, 건강하여 잘 싸우고있습니다!》

《그렇다니 기쁘다! … 그런데 셋째야…》 하고 김삼봉은 근엄하게 말을 덧붙였다.

《지금 여기 산속 곳곳에 너희 대원들 가족이 놈들의 선거를 거부하고 올라와있다. 어서 그들을 찾아가봐라.》

어머님의 조용하고 평범한 말속에는 무엇인가 심장을 흔드는 힘이 있었다.

《어머니, 방금 대원들의 가족들을 만나보며 오는 길입니다. 이제 또 다른 가족들을 만나보려고 합니다.》 하고 리덕구는 뜨겁게 대답하였다.

《우리들 걱정은 말고 어서 그래라.》

리덕구는 즉시 곳곳의 대원들 가족들과 마을사람들을 찾아가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 작별하려고 어머니에게로 다시 갔다.

《어머니, 전 대원들이 휴식하는 곳으로 떠나겠습니다. 몸조심하십시오.》

《오냐, 집걱정은 말고 몸성히 잘 싸워라.》

《고맙습니다, 어머니!》 하고 리덕구는 허리를 꺾다싶이 구부리고 절을 하였다.

그때 불시에 《아버지!-》 하고 맏아들 진우와 둘째가 달려와 그에게 안겼다. 뒤따라 《삼촌!-》 하고 소리쳐 부르면서 좌구형의 아들들이 달려왔다.

《오, 너희들이구나. 어디 안아보자!- 귀염둥애들아!-》

리덕구는 애들을 한꺼번에 와락 끌어안고 한참동안 빙그르 돌았다.

《자, 됐다. 이제는 그만하자.》

리덕구는 기분좋게 껄껄 웃었다. 그럴 때 사려깊은 표정으로 김삼봉은 셋째며느리 량후상에게 조용히 뇌였다.

《며늘애야, 애아방을 네가 저기까지 바래주는게 어떠냐?》

《알겠어요.》 하고 량후상은 사려깊은 시어머니의 권고에 머리를 숙여보이고 일어나 떠나는 남편을 따라나섰다.

그들은 한동안 아무말없이 생각에 잠겨 묵묵히 숲속을 걸었다. 결혼한지 7년이 지났지만 그간 함께 있은적이 얼마 안되고 줄곧 헤여져 살아온 그들이였다.

《여보, 애들과 가정을 당신에게 맡기고 아무것도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오. 고생많은 당신에게 마음속으로 머리숙여 인사드리오.》 하고 리덕구는 잔잔한 목소리로 진정을 담아 말하였다.

순간 안해 량후상은 외롭고 고독한 나날에 쌓이고쌓인 정신육체적피로가 한순간에 씻은듯이 사라지고 마음이 가벼워짐을 느꼈다. 안해들에게는 살뜰한 남편의 말 한마디가 그렇게 소중한것이다.

《나라위한 큰일에 나선 당신이 무슨 말을 하세요? 그런데… 많이 축가셨어요. 몸을 좀 돌보세요.》 하고 량후상은 애정깊게 조용히 속삭이듯 뇌였다. 그런 다음 그는 만약의 경우를 생각하여 준비하였던 실꾸리와 바늘쌈지를 남편에게 주면서 말을 계속하였다.

《당신을 곁에서 도와드리지 못하니 마음이 편치 못하군요. … 집걱정은 조금도 말고 맡은 일에 전심전력해주세요.》

《고맙소. 후상이! 미제와 역적패당을 쳐부시고 승리하는 날, 우리는 모여서 행복하게 살게 될거요! 믿고 기다리오.》

마치 일상적인 보통말을 하듯이 리덕구는 이 모든 말을 아주 침착하게, 아무러한 과장도 없이 평범하게 말하였다.

(알겠어요. 믿고 기다리겠어요.) 하고 량후상은 문득 따스한 감동을 느끼면서 마음속으로 웨쳤다. 인간은 믿어야 하며 기다려야 한다는 말은 량후상에게 전혀 새롭거나 처음 듣는 말이 아니였다. 그러나 가장 필요한 때에 가장 적절한 장소에서 상기시켜준것이 무척 고마웠다. 생활은 어렵고 험악한 때일수록 기다리는것이고 희망하는것이고 믿는것인지도 모른다.

기다림이 없고 믿음을 상실하고 희망을 잃으면 이 준엄하고 간고한 시절에 어떻게 살아가랴! …

리덕구와 량후상은 가파로운 산등성에서 멈춰섰다.

《자, 이제는 어머님과 아이들한테로 가보오. 여보, 그들을 당신에게 부탁하오. 몸조심하오. 이제 놈들이 더 발악하며 날칠거요.》 하고 리덕구는 눈을 번쩍이며 말했다.

《안녕히! … 몸성히… 잘 싸워주세요… 믿고 기다리겠어요.》

그들은 언제 다시 또 만나게 되겠는지 기약도 없이 산속에서 그렇게 작별하였다.

어느때 어느곳에서 또다시 만나게 되겠는지, 아니면 이것이 마지막작별인지 리덕구도 몰랐고 안해 량후상도 몰랐으며 또 알수도 없었다. 그들은 오직 반드시 앞으로 평화로운 좋은 날이, 승리의 날이 오리라는것을 믿고있었다.

끊임없이 내리던 궂은비는 어느새 멎고 하늘은 활짝 개였다. 작별하는 그들의 앞에는 화창한 봄의 새파란 하늘이 산과 협곡, 가파로운 산길을 뒤덮고있었다. 푸른 하늘, 푸른 산… 산아래 저편에는 검푸른 바다가 펼쳐져있었다. …

후에 알려진데 의하면 이날 5월 10일 놈들의 선거에 참가하기를 거부하고 한나산에 오른 사람은 5만명을 넘었다고 한다. 실상 제주도에서 이날 선거에 참가하는가 거절하는가, 찬성투표하는가, 반대투표하는가 하는 문제는 곧 죽음이냐 삶이냐 하는 첨예한 문제였다. 놈들은 각 지구별 선거구와 선거장들에 중무장한 군대와 기동경찰대, 땅크와 장갑차들을 배치해놓고 제주도사람들에게 생사를 강요했던것이다. 그러나 정의롭고 강의한 제주도사람들은 놈들의 가혹한 폭압에 굴하지 않았다. 그토록 삼엄한 경계속에서도 선거 전날 밤 17개소의 선거장들이 불에 타 다음날 아침 5월 10일까지 연기를 토하여 놈들을 전률케 하였다. 특히 북제주군의 한림면처럼 유격대의 해방지역으로 되였던 곳들은 더했다. 애당초에 립후보자명분도 올려보지 못했거나 선거장마저도 꾸리지 못하고말았다.

서울에서 내려온 조병옥이 모범선거구로 만들겠다고 큰소리치던 한림동 립후보자가 누구한테서인지 뒤통수를 얻어맞고 고기밥이 되여 허연 이발을 드러낸채 바다가에 떠오른 형편이였다. 선거가 진행되였다는 곳들의 실정도 이만 못지 않았다. 선거함을 개표한 결과 갈기갈기 찢어넣은 선거표가 부지기수였다. 각종 생선 말린것들과 미역오래기가 선거표와 뒤섞여 비린내를 풍기는 해괴망측한 일들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어떤 선거구들에서는 개표직전에 선거함이 온데간데없이 없어지거나 텅텅 빈 함통과 감쪽같이 교체된 곳도 있었다. 선거반대투쟁형태가 이처럼 기괴하고 다양한 형태를 띤 전례는 동서고금의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서 있어본적 없었다. 이 거족적인 맹렬한 반선거투쟁앞에 놈들의 내부에서는 분렬이 조성되고 일부 선거위원장, 선거위원들이 임무를 포기하거나 인민들편으로 넘어왔다. 이것은 정의로운 제주도인민들이 죽을지언정 매국정권을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신념의 과시로 되였으며 싸우는 제주도의 슬기로운 아들딸들이 성스러운 투쟁에서 거둔 력사에 기록할만 한 자랑찬 승리였다.

결국 제주도에서 5. 10단선은 완전 참패하였다. 북제주군만 놓고보더라도 세개의 선거구들중 두개의 선거구에서는 선거형식조차 취해보지 못하고 완전 류산되고말았다. 그 참패가 얼마나 비참하였으면 그때로부터 한해가 지나서 매국역적 리승만이 직접 제주도에 건너와 당시 선거법위반으로 갇혀있던 2 500여명의 수감자들한테 《군사명령》을 내리고 귀가시킨 다음 5. 10단선때에 못한 재선거를 실시했겠는가.

놈들이 오산한것은 이뿐만이 아니였다. 제주도에서의 4. 3봉기로 말하면 미군강점후 남조선에서 일어난 첫 대중적인 무장봉기였다. 미제와 주구놈들은 《전후 점령군에 대하여 제주도에서와 같은 격렬한 대중적저항이 분출된 일은 지구상 어디에서도 찾아볼수 없었다.》고 아우성칠만큼 그 규모나 성격에 있어서 심각한 사변이였다. 놈들은 제주도인민들의 4. 3봉기를 타협이나 협상으로가 아니라 《토벌》과 류혈전으로 무자비하게 짓뭉개버림으로써 남조선전역에서 높아가는 반미정신과 특히는 폭력적인 저항의식을 압살해버리려고 획책하였다. 거기다 놈들은 제주도가 바다로 둘러싸이고 고립무원한 섬이기때문에 제주도인민들의 항쟁이 본토의 지원을 받거나 확산될 념려가 없다고 어리석게 타산했던것이다. 그러나 제주도의 용감한 아들들이 일으킨 4. 3봉기는 려수군인폭동으로 줄기차게 이어졌고 계속하여 경상, 전라, 충청도의 삼남 800리를 휘감아 지리산지대의 유격투쟁으로 확대되여갔다. 지리산과 태백산, 오대산줄기들에서 조국통일의 기치를 들고 투쟁을 벌린것으로 하여 미제와 리승만역도가 적극적으로 추진시켜오던 북침전쟁을 근 1년가까이 미루어오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것 역시 전쟁전 남조선전역에서 벌어진 반미, 반《정부》투쟁과 함께 조국통일을 위한 구국투쟁사에 지펴올린 4.3봉기자들, 제주도의 참된 아들들이 남긴 공적이였다.

이러한 력사적의의를 가지는 4. 3봉기는 더욱 줄기차게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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