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3 회)

제2편 봉화

11

 

제주도상공에는 진회색구름이 장막처럼 하늘을 뒤덮고있었다. 하늘에서는 굵은 비줄기가 엇비듬히 쏟아지고있었다. 벌써 며칠째 끊임없이 지루하게 내리는 비였다. 전국적으로 강수량이 가장 많은 지역으로 소문난 제주도였으나 이해 여름처럼 많은 비가 내린적은 별로 없었을것이다.

그날 늦은아침에 제주항가까이로 미군표식의 군함 여러척이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다가오고있었다. 군함들에는 대규모의 증원군대와 경찰들이 꽉 차있었다. 비물에 젖어 푸르스름하게 음산한 빛을 내뿜는 함선들은 사람들의 소름을 끼치게 하는 그 무슨 괴물들처럼 보였다. 아마 제주섬이 생긴이래 이처럼 많은 군함들이 어마어마하게 들이닥치기는 처음일것이다.

제주항에는 제주도의 미군정장관이하 거두급인물들전원이 나와서 비를 맞으며 모여있었다.

제주항에 닻을 내린 군함에서 제일먼저 뭍으로 내려선것은 키가 크고 어깨가 구부정한 미국군인이였다. 허우대가 크고 벗어진 이마에 우묵히 패인 눈자위속에서 파르스름한 두눈이 흉기처럼 날카롭게 번뜩이는 그가 바로 남조선주둔 미군사고문단 단장이며 미국방성에서도 극우파로 알려진 월리암 엘 로버트였다. 뒤따라 그의 부관과 카키색군복의 미군들이 껑충거리며 함선에서 쏟아져내렸다.

제주도전역에서 5. 10단선이 무참히 파탄되자 이에 질겁한 미제는 강경파로 악명높은 로버트를 파견하여 무자비한 강경진압을 명령했던것이다.

미군사고문단 단장 로버트가 군함에서 내려 돌진하듯 몇걸음 내짚자 제주항에 모여있던 거두급인물들이 우르르 달려와 맞이했다.

《바다우에서 별일없었는지요? 숙소도 토벌작전협의회준비도 다 갖추어져있습니다. 저기로…》 하고 마중나온 일동을 대표해서 제주도 미군정장관이 인사하며 대기하고있는 승용차쪽으로 안내하려고 서둘렀다.

《아니요, 난 먼저 제주도를 시찰하겠소.》

로버트는 내려뜬 눈을 들지 않고 알수 없는 웃음을 지으면서 나직이 굵은 목소리로 말을 보탰다.

《나는 먼저 행동하고 다음에 말을 하는것을 좋아하오.》

반들반들 윤이 날만큼 면도를 한 네모진 턱, 악의에 찬 침울한 눈…  말을 할 때마다 로버트의 입술모서리가 푸들푸들 떨렸다. 그는 안내하는 제주도 미군정장관을 본체만체하고 군함에서 내리워진 장갑차쪽으로 비를 맞으며 돌진하듯 걸어갔다. 이러한 로버트의 일거일동은 총포성이 터지는 피의 격전장, 무자비한 대학살의 현장에 나타난 자기의 강한 의지를 보여주려는것 같았다. 영접나왔던 제주도의 거두급인물들은 자기들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데 대해 아연해하였으나 로버트는 눈섭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는 부관이 달려오자 그에게 낮으나 저으기 엄격히, 군말이라고는 없이 판결문을 읽듯 또박또박 명령했다.

《본관은 작전적의도에 따라 제주도를 현지시찰한 다음 여기 제주읍으로 돌아올것이다. 우리와 함께 제주도에 상륙한 각 군의 련대장, 경찰서장급이상은 전원 본관을 따를것.

제주도 현지의 군, 경찰책임인물들은 본관이 호출할 때까지 대기상태에 있을것.》

그 다음 로버트는 그 누구도 쳐다보지 않고 곧바로 와르릉- 굉음을 울리며 서있는 장갑차안으로 들어갔다. 부관을 통해 명령을 전달받은 미군사고문들과 국방경비대의 련대장급이상의 졸개들이 군용차쪽으로 황급히 달려갔다.

로버트가 올라탄 장갑차가 땅을 물어뜯으며 쏟아지는 비속으로 달려나가자 졸개들이 탄 차들이 길가의 진창물을 사방으로 휘뿌리면서 뒤따랐다.

제주읍에서 떠난 로버트는 곧바로 북제주군의 한림에 도착하여 잠시 지형, 지물들을 시찰하고 다시 달려나가 대정면 모슬포근처에서 멎어섰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 로버트는 길가의 숲이나 야산들에서 조금이라도 이상한 징후가 보이면 가차없이 사격을 명령했다. 그때마다 포성이 울리고 기관총이 뚜루룩거렸다. 무자비한 사격을 받은 숲과 야산, 가옥들이 무너지고 불에 탔다.

로버트가 탄 선두장갑차는 안덕면 산방굴사, 중문면의 정방폭포쪽으로 나갔다가 서귀포쪽으로 우당탕- 굉음을 질러대며 내달려갔다. 서귀포에서 얼마간 머무른 로버트일행은 다시 남원, 표선, 성산포를 지나 북제주군 구좌면방향으로 전진하였다. 구좌면으로 들어서던 선두장갑차는 불시에 멈춰섰다.

《무슨 일인가?》

장갑차안에서 로버트가 악문 이발을 거의 떼지도 않고 몰풍스럽게 물었다.

《앞에 갑자기 이상한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장갑차운전사는 코맹맹이소리로 긴장하여 정황을 보고하였다.

《이상한 사람들이?!》 하고 로버트는 사납게 돋은 잔 이발로 입술을 깨물면서 앞을 내다보았다.

미군장갑차가 멎어선 앞의 도로밑의 개울에 마차가 삐뚜름히 빠져있었는데 비물이 흐르는 거기서 농군들로 보이는 남정들 몇명이 고함소리를 질러대며 마차를 도로우로 끌어올리느라 정신없이 벅적대고있었다.

《저놈들을 즉시 소멸하라!-》

로버트는 거쉰 저음으로 주저없이 명령했다.

《저것들은 농군들인데…》

《뭐야, 농군들?》 하고 로버트는 표독스럽게 말을 가로챘다.

《여기는 적지다. 이곳 섬놈들은 거의 모두가 무장봉기에 참가했던 빨갱이들이다! 주저말고 사격하라!》

로버트의 입가에는 싸늘한 랭소가 흐르고 두눈은 모진 증오로 사납게 번쩍이였다.

돌연 장갑차의 포신에서 번쩍- 푸른 섬광이 일고 꽝!- 꽝!- 요란한 포성이 울렸다. 행길가의 도랑에 빠진 마차는 순식간에 풍지박산나서 허공으로 뿌려지고 사람들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터졌다. 뒤따라 뒤의 군용차쪽에서 기관총의 련발사격소리가 자지러지게 울리기 시작하였다.

연방 쏘아대는 기관총의 몰사격에 길가의 작은 마을도 순간에 페허로 되였다. 처참한 파괴… 섬찍한 페허였다.

미군장갑차앞의 도로에는 개미새끼 한마리 보이지 않았다.

장갑차안의 로버트는 만족한듯 싱긋이 미소하였다. 표독스럽고 잔인한, 몸서리치는 미소였다.

《장갑차, 전진하라! 우리가 나가는 앞에 그 무엇도 살아서 나타나지 못하게 하라!》 하고 로버트는 피발이 선 눈으로 앞을 쏘아보며 독살스럽게 명령했다.

장갑차는 다시 우르릉거리며 앞으로 나갔다. 장갑차의 무한궤도에 짓밟히우는 땅이 신음하듯 웅글은 소리를 내였다. 구좌면에 들어선 로버트는 하도리, 상도리, 세화리까지 돌아보았다. 《왕성한 정력》으로 온 제주도를 일주하면서 곳곳의 지형, 지물들을 시찰한 로버트는 그날 저녁무렵에 제주읍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로버트는 제주도의 그 누구도 만나주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좀 늦어 일어난 로버트는 아침식사를 간단히 치르고나서 부관을 불렀다. 대기하고있던 부관이 잰걸음으로 들어오자 로버트는 즉시 명령했다.

《이곳 제주도의 경찰서장들, 모든 지도급인물들… 우리와 함께 군함을 타고 온 증강무력의 련대장급이상의 장교들을 모이도록 하라!》

《로버트각하! 지금 현재 그들이 다 모여 각하를 기다리고있습니다.》

하고 부관은 부동자세로 서서 발라맞추듯이 공손히 보고하였다.

《부관, 안내하라.》

로버트는 일찌기 벗어지기 시작한 머리를 끄덕여보이고는 지체않고 부관을 따라 숙소를 나섰다. 희멀쑥한 그의 얼굴에는 지난밤 잠을 제대로 못 잔 흔적이 퍼렇게 나타나고있었다.

부관의 안내를 받으며 관덕정의 어느 방으로 로버트가 들어서자 방안의 사람들은 벌떡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들 앉으시오.》 하고 엄한 목소리로 짤막하게 명령한 로버트는 잠시 그대로 서서 날카로운 눈초리로 방안의 사람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방안의 사람들의 얼굴은 모두가 긴장되여있었다.

《다들 명심해들으시오. 미군사령부의 위임에 따라 지난 5월 제주도에 왔던 미군정장관은 이미 강경진압을 언명했드랬소. 그런데… 여기 빨갱이 폭도들에게 패전했소. 패전도 처참한 패전이였단 말이요.》

로버트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나직이 말하였으나 무엇인가 몸을 얼어들게 하는 포악함과 랭혹함이 느껴졌다. 지난 5월에 제주도인민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제주도를 행각하였던 미군정장관 띤은 서울로 돌아와서 괴뢰심복들에게 《미국은 군사상으로 필요했기때문에 모슬포에다 비행기지를 만들어놓았다. 미국은 제주도가 필요하지 제주도민은 필요치 않다. 제주도민을 다 죽이더라도 제주도는 확보해야 한다.》는 폭언을 늘어놓았었다.

로버트는 몇순간 분홍색입술을 이지러지게 다물고 그때 서울에서 미군정장관 띤이 독살스럽게 퍼부은 말들을 머리속으로 상기하였다.

《그렇소. 바로 그렇소! 우리 미국은 제주도땅이 필요한것이지 제주도민따위는 필요치 않단 말이요. 잘 새겨들으시오. 여기 제주도민 30여만명중 80%가 무장봉기에 관여했던 폭도이고 빨갱이들이요!》 하고 로버트는 거의 입술도 벌리지 않고 나직하니 증오에 차서 쓰겁게 내뱉았다.

그런 다음 그는 자기가 한 말을 새겨들을 여유를 주려는듯 잠시 동안을 두었다가 악의에 찬 목소리로 말을 계속하였다.

《지난번 경찰고문 코페닝지휘하의 계엄령과 진압작전은 여지없이 실패했소. 거듭 언명하지만 실패도 처참한 실패였단 말이요! 내가 왜 거듭 그것을 지궂게 상기시키는가? 내가 직접 현지에서 지휘하게 될 이번 진압작전은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는것을 언명하기 위해서요! 그렇소, 그런 실패는 다시없을것이요.》

로버트의 눈섭이 갑자기 삼각형으로 꺾이며 바르르 떨리다가 다시 바로 펴졌다. 그는 마치도 로련한 선생처럼 침착하게 그루를 박아가며 말을 이었다.

《모두 알아두시오! 2차대전후 점령군에 대하여 감히 이곳 제주도에서와 같은 격렬한 대중적저항이 분출된 일은 지구상 어디에서도 찾아볼수 없었소. 우리 미국은 이따위 란동을, 감히 엇서나서는 불량배, 폭도들의 무분별한 란동을 철저히, 무자비하게 짓뭉개버릴 결단을 이미 내렸소. 더는 참을수 없단 말이요. 우리 미국에 감히 맞서는자들이 어떻게 비참한 종말을 고하는가를 보게 될거요. 그렇소. 이따위 폭도들의 섬, 전체 섬에 휘발유를 붓고 죽여도, 모두를 죽여도 좋단 말이요. 가능한, 되도록 빨리 깨끗이 해치워야겠소.》

매 말마디를 또박또박 명령문을 읽듯이 말한 로버트는 지난밤 잠을 설친탓에 충혈된 눈으로 방안의 매 사람들의 다름아닌 눈을 면바로 뚫어지게 여겨보았다. 오싹 소름이 끼치는 무시무시한 눈초리였다.

그런 다음 로버트는 《토벌작전》에 투입될 각 부대들의 담당지역들과 작전임무를 하달했다.

《즉시 명령집행에 착수하시오. 협의회는 이상 끝내겠소.》

그 어떤 론의나 질문 같은것도 없는, 로버트의 일방적인 명령뿐인 협의회였다.

방안에 모였던 군대, 경찰의 우두머리들은 걸상에서 일어나 긴장한 기색으로 흩어져갔다.

《련대장 송요찬중령은 남으시오.》 하고 로버트는 무엇인가 생각에 잠긴듯 눈을 가늘게 쪼프리고 나직이 소리쳤다.

방문앞까지 다가섰던 다부진 체격에 두눈이 이상하게 살기를 띠고 번뜩이는 중령직급의 군인이 멎어섰다. 그는 얼마전 부하의 총에 처참하게 사살된 악명떨친 《국방경비대》 박진경련대장의 후임으로 이곳 제주도에 온 송요찬중령이였다.

송요찬은 문앞에서 뾰족한 귀박죽을 쭈빗하고 잽싼 걸음으로 꺽두룩한 로버트에게로 다가갔다.

《앉으시오.》 하고 로버트는 다가온 송요찬에게 자기의 맞은켠 걸상을 시선으로 가리켰다.

그러나 송요찬중령은 마치 미국대통령앞이라도 되는듯 앉지 못하고 송구해하는 표정으로 그냥 꼿꼿이 서있었다. 그러자 로버트는 짐짓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송중령, 앉아도 되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송요찬중령은 우리가 남조선에 제일먼저 설립한 군사영어학교의 제1기 졸업생으로 알고있는데…》

자신의 남다른 결단력과 군사지식, 지혜, 비상한 기억력에 항상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는 로버트였다. 이번에도 그러했다. 아닌게아니라 로버트의 기억력은 자신도 놀랄만큼 정확하였다.

《고문단 단장각하! 영광스럽게도 군사영어학교를 제1기로 졸업한 송요찬입니다. 황송합니다. 저를 기억해주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하고 송요찬은 정확한 영어로 말했다. 그는 자기를 특별히 기억해주고 지금 개별적으로 친절히 만나주는데 대해서 너무도 감격하고 황송하여 걸상에서 용수철이 튕기듯 벌떡 일어났다.

순간 희멀쑥한 로버트의 얼굴에 그 의미를 알수 없는 미묘한 미소가 얼핏 떠올랐다 사라졌다.

《앉아서 말하오, 송중령. 당신은 장래가 촉망되는, 학력과 군사전문지식이 높은 이곳 남조선군인들중에서도 특별히 기대되는 군인으로 알고있소. 물론 이것은 나의 개인적견해요.》

《존경하는 군사고문단 단장님! 분에 넘치는 말씀입니다. … 저는… 소인인 저는 그 말씀만으로도 무상의 영광을 느끼며… 그 어떤 명령도 목숨바쳐 실행하겠습니다.》 하고 울먹거리며 떠듬거리는 송요찬의 눈에서는 금시 눈물이라도 쏟아져나올것만 같았다.

그러자 로버트는 시선과 손짓으로 그의 말을 막았다.

《아니… 아니, 그러지 마오. 송중령! 나는 송중령과 매우 신중한 문제를 상담할것이 있어서 당신을 남으라고 하였소. 훗샤중좌한테서 들은바에 의하면… 당신은 이곳 제주도빨찌산의 리덕구와 가까운 사이라고 나는 알고있소.》

《단장님! … 저는…》 하고 송요찬은 불시에 얼굴표정이 달라지면서 눈시울밑에 불안과 침울한 기색이 번져갔다. 그는 빠르게 상관인 로버트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로버트의 얼굴은 무표정으로 하여 내심을 전혀 알아볼수 없었다. 그것은 그 누구에게도 곁을 주지 않는 랭정하고 차거운 얼굴이였다.

《저는 그와 대학동창이고… 한때는 가깝게 지낸 시절도 있은것은 사실이지만… 해방후부터는 상반되는 인생관의 불일치로 상종이 별로 없었습니다.》 하고 송요찬은 한마디한마디를 저울질하듯이 말하면서 긴 한숨을 내쉬였다.

그 순간 로버트의 얼굴에 알수 없는 미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몇순간 침묵하고 생각에 잠겼던 로버트의 입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송중령, 내가 방금 한 말에 특별히 신경을 쓰며 긴장해할것은 없소. 알려진바와 같이 당신의 대학동창생이고 한때 벗이였던 리덕구는 이곳 제주도인민유격대의 유명한 3.1지대장이요. 정보에 의하면 리덕구가 지휘하는 3. 1지대는 제주도인민유격대에서 가장 전투력있고 핵심적인 기본력량이라고 하오. 그런데 송중령, 리덕구가 대학졸업생의 학력뿐아니라 학도병시절에 군사전문지식까지 소유한 총명하고 굳센 젊은 사람이라는것이 사실이요?》

《정확한 정보입니다. 고문단 단장님.》

송요찬은 한숨을 꺾어쉬면서 대꾸하였다.

《송요찬중령, 그래서 말이요. 우리는 방대한 현대식무기로 폭도들을 철저히 무자비하게 강경진압함과 동시에 회유작전도 벌리려고 하오. 특히 당신의 대학동창생 리덕구를 말이요.》 하고 로버트는 자기의 내심을 처음으로 엿보이면서 말을 계속하였다.

《말해보시오, 송중령, 리덕구에 대한 회유, 포섭작전이 통하겠는지… 회유할 가능성이 있다면 어떤 사전준비가 필요하겠는지 확정하자고 그러오.》

최대로 긴장했던 송요찬은 얼굴에 화색이 돌면서 가늘게 안도의 숨을 내그었다. 그는 불안한 예감과 고통스러운 깡치를 마음속에서 걷어내버리려고 애썼다.

《고문단 단장님! 리덕구로 말하면 대학시절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가정에서 좌익사상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며 자란 명석하고 정의감이 강한것으로 동료들속에 알려진 인물이였습니다. 그리고 식민지지식인의 처지를 자주 한탄하며 반일사상이 강했던것으로, 마음이 선량하고 깨끗하여 학구심이 남달리 높은것으로 알려져있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해방후 고향으로 돌아와 폭도로 된것은 그 누구의 배후조종과 권유, 포섭인지 아니면 자신이 스스로 택한것인지는 정확히 알수 없습니다. 그는 해방후 고향 제주도로 가서 중학교 교사로 조용히 사는것이 자기의 소망이라고 동료들에게 자주 말하군 하였습니다. 실지로 리덕구는 얼마전까지 제주도의 어느 중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조선력사와 지리를 배워주며 조용히 살아왔습니다. 제가 알고있는것은 이것뿐입니다.》 하고 송요찬중령은 한때 가까운 동료였던 리덕구의 인물평을 사실그대로 과장없이 하였다.

송요찬의 말을 중도에서 자르는 일없이 끝까지 유심히 듣고있던 로버트는 아직 그 어떤 책략의 륜곽이 잡히지 않았는지 허공 어딘가에 시선을 박은채 아무 말도 없었다. 이윽고 그는 걸상에서 소리없이 일어나 역시 아무런 말도 없이 생각을 토막치듯 뚜걱뚜걱 방을 거닐기 시작하였다.

남조선주둔 미군사고문단 단장 월리암 엘 로버트-악의 지혜와 비상한 기억력을 가진 이 전형적인 오만한 양키는 자신을 항상 누구나 우러러보는 사람으로 내세우려는 끝없는 욕망에 불타고있었다.

《송중령, 좋소. 어쨌든 가능, 불가능을 따지지 말고 리덕구에 대한 회유, 포섭작전을 시도해봐야 하겠소. 이제부터 송중령은 나와 직접 련계하에 강경진압과 함께 그 인물에 대한 회유작전도 동시에… 만일》 하고 로버트는 우묵히 패인 눈자위속에서 송곳같은 날카로운 눈길로 송요찬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말을 보탰다.

《만일 그 인물, 리덕구에 대한 회유, 포섭심리작전이 성공하면 당신은 일약 남조선군부에서 혜성처럼 솟아오르게 될것이요! 나는 당신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오.》

어딘가 거의 광신에 가까운 자기과신적인 로버트는 마치 측량할수 없을만큼 높은 곳에서 말을 던져주듯이 하면서 송요찬의 어깨를 툭 쳤다.

로버트는 미묘한 미소를 띠고 말을 계속하였다.

《송중령, 한손에는 장검을 쥐고 또 한손에는 감람나무를 쥐고 세계를 향해 우뚝 서있는것이 바로 우리 아메리카합중국이요! 거인처럼 서있단 말이요. 송중령, 만일 리덕구라는 인물과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접촉하게 되는 경우 즉 그가 우리의 요구대로 회유에 응하는 경우 국방경비대 련대장의 자리를 주겠다는것을 약속하시오. 이건 미군사고문단 단장인 내가 직접 담보하는거요. 그리고 송중령의 인물평대로 그가 실지로 군사전문지식이 높고 학식이 특출하면 그 이상의 승진도 가능한거요. 또 본인이 요구하면 그를 우리 미국의 명망높은 1류급군사학교 혹은 대학에 류학시켜주겠소. 우리 미국에는 우리에게 충실한 우방국가의 인재들이 필요하오. 무슨 말인지 알겠소, 송중령!》

《고문단 단장님! 말씀의 뜻을 명심하고 리덕구와의 접촉을 맹렬히, 각종 방법으로 시도해보겠습니다.》 하고 송요찬은 꼿꼿이 서서 흥분한 목소리로 웨치듯이 대답하였다. 자신의 승진도, 동료 리덕구의 승진도 담보하는 상전인 로버트의 격려에 그는 몹시 감격했던것이다.

《좋소. 송중령, 오늘은 이만합시다. 명백히 말해두는데… 기본은 강경진압과 물리적인 폭력을 선행하는것이요. 방대한 무력과 강경한 의지시위! 무자비한 진압! 그 다음에 포섭이란 말이요.》

로버트는 독살스럽게 곱씹었다.

《무자비한 진압! 그래야 포섭이란것도 쉽게 통하는 법이요.》

《단장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돌아가겠습니다.》

송요찬은 딱 소리가 나게 군화발을 모으고 례를 표한 다음 기분이 좋아서 어깨를 눈에 띄게 실룩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

그날부터 마을에서 마을로 사람들이 사는 제주도의 모든 곳으로 무시무시한 소문이 바람처럼 퍼져갔다.

소름끼치는 흉한 소문은 헛소문이 아니였다. 실지로 온 제주도는 불길에 휩싸이기 시작하고 하늘과 땅, 바다에서 류례없는 살륙이 시작되였던것이다. 로버트의 살인명령에 따라 놈들은 《제주도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방대한 지상부대와 비행기, 함선까지 동원하여 전쟁을 방불케 하는 진압작전을 벌리였다.

섬에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18척의 군함으로 제주도의 해안을 완전봉쇄하였으며 주민들의 자유로운 통행도 금지시켰다. 놈들은 제주도인민들에 대한 《토벌》작전에 내몬 군, 경찰, 테로단의 살인마들에게 《업적을 위한 살륙경쟁》까지 부추겼으며 살인, 방화, 초토화를 내용으로 하는 《삼광작전》, 토끼몰이식《투망작전》 등 상상을 초월하는 인간도살의 창안품으로 제주도인민들을 무참히 학살하기 시작하였다. …

후일 남조선의 한 시인은 그때의 살륙만행을 두고 이렇게 썼다.

 

    가축보다도 간단하게

    비바람에 우는 야초보다 간단하게

    마치 큰 산마다 채벌당하듯이

    살해된 사람들이 나무쪼각처럼 굳고

    그 피는 온 섬을 물들였다

    …

    래일쯤 죽이면 누군가가 묻어줄것이라는

    생의 마지막꿈조차 없는

    우리들 모두모두가 오열하는 거리

    짧으면 오늘, 길면 래일

    죽어서 모두 없어져버릴 거리

 

세월이 지나면 여기서 저지른 전대미문의 학살만행은 전세계인류의 규탄을 받을것이며 력사의 준엄한 심판대에 오르게 될것이다. 그러나 그때 학살만행을 조직지휘한 미군사고문단 단장 로버트는 그런것을 생각지도 않았으며 또 생각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오직 자기들에게 굴복하지 않는 제주도인민들에 대한 증오와 악의와 분노뿐이였다.

 

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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