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 회)

제2편 봉화

12

 

한나산 탐라계곡의 옆골짜기에 자리잡은 3.1지대 림시지휘부초막안에서는 온밤 등잔불이 끄물끄물 타오르고 어렴풋한 불빛이 비치고있었다.

밤도 이슥한 밤, 리덕구는 초막안의 크지 않은 탁자우에 팔굽을 짚고 깊은 생각에 잠겨 까딱않고 앉아있었다. 밖에서는 태고연한 수림속의 깊은 정적속에 피를 짜내는듯 한 소쩍새의 울음소리가 때로는 멀리에서 때로는 가까이에서 들려오고있었다.

(… 적들의 발악적인 《토벌》공세는 날이 갈수록 점점 엄혹해지고있다. 미제침략자들과 매국노들은 벌써 군함으로 섬을 완전봉쇄했다. 놈들은 비행기까지 동원하여 날마다 무차별폭격을 감행하고있다. 적들은 하나의 전쟁을 치를만 한, 지금까지 없었던 방대한 무력을 투입하여 하늘과 땅, 바다에서 《강경진압》에 혈안이 되여 발광하고있다. 이런 준엄한 때에… 내가 과연 제주도인민유격대 대장이라는 중임을 감당해낼수 있겠는가?)

리덕구는 자신도 모르게 탁자앞에서 일어나 소리없이 초막안을 거닐기 시작하였다. 지금 그는 자기자신과 싸우고있는것 같았다.

(나는 지금까지 오직 나라를 위한 싸움에 한목숨 기꺼이 바칠 불같은 각오를 안고 살아왔다. 나의 희망, 열정, 감정, 정서… 모든것은 거기에 집중되여있었다. 물론 이 시각에도 그 각오, 그 신념, 그 의지는 변함이 없다. 영원히 변함이 없을것이다. 그러나… 그러나 적들의 《토벌》공세가 류례없는 지금 내가 과연 전체 제주도인민유격대를 자신있게 지휘할수 있겠는가?)

초막안을 거닐던 리덕구는 뙤창가에 멈춰서서 밖을 내다보았다. 달빛은 스러지고 사위는 검은 안개같이 어둠속에 잠겨있었다.

리덕구는 바로 오늘 오전에 (이제는 밤 1시가 훨씬 지났으니 아마 어제일것이다.) 제주도인민유격대 지휘관회의에서 전 유격대장 김달삼을 대신하여 제주도인민유격대 총대장의 임무를 인계받았다.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리덕구는 줄곧 무엇인가 무거운 짐이 커다란 중량으로 자신의 어깨를 내려누르는감을 느끼고있었다. 그것은 맡겨진 무거운 임무에 대한 책임감, 사명감의 무게일것이다.

(재난속의 제주도 수십만 인민들이 우리 유격대를 구원의 애타는 눈길로 바라보고있는데… 나는 이제부터 폭풍우속으로 무거운 짐을 실은 배를 저어가야 한다.) 하고 리덕구는 뙤창가에 서서 마음속으로 뇌였다.

… 제주도인민유격대는 지금까지 증강된 적《토벌대》들과 과감한 전투를 벌려 수많은 전과를 올렸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지하조직과의 긴밀한 련계밑에 영명하신 김일성장군님께서 제시하신 남북총선거를 충실히 실행보장하기 위한 사업에서 거둔 성과가 가장 빛나는것이였다. 적구에서 남북총선거를 성과적으로 보장하는것은 놈들의 5. 10단독선거를 파탄시키는 투쟁보다 결코 헐치 않는 피어린 투쟁이였었다. 그리하여 제주도에서 전 지역 선거를 성과리에 보장하였고 드디여 전체 도민들의 지지찬성으로 강규찬, 김달삼, 고진히 등 대표를 선출하였다. 이들은 곧 이곳 제주도에서의 선거정형과 자료, 문건들을 가슴에 품고 평양에서 열리는 중앙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떠나가게 될것이다. 이렇게 되여 평양으로 떠나가는 김달삼을 대신해서 3.1지대장 리덕구는 제주도인민유격대의 총대장으로 되였던것이다. …

리덕구는 자신을 다잡으려고 애쓰면서 뙤창가에서 잠자리로 돌아와 눈을 꾹 감고 누웠다. 그러나 끊임없이 떠오르는 무거운 생각으로 도저히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새벽이 가까워오고있었다. 그는 종시 잠을 포기하고 항상 하는 습관으로 새벽산책을 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느때보다는 좀 이른 산책이였다.

초막밖으로 나오니 신선하고 산뜻한 산속의 공기가 달아오른 그의 몸을 감쌌다.

뒤따라 쿡 찌르는것 같은 기분좋은 냄새가 가슴에 사무쳤다. 산들바람에 실려오는 솔잎향기였는데 그것은 리덕구가 제일 좋아하는 냄새였다. 여느때 같으면 마음속이 순간에 확 열릴것이였지만 오늘은 그렇지 못했다. 그는 지금까지 체험해보지 못했던 무거운 생각에 잠겨있었던것이다.

어느새 날이 희붐히 밝아오고있었다. 려명이 깃들기 시작한 여름의 산속은 고요하였다. 온밤 자지 못했을 때 그렇듯이 리덕구에게는 주위의 모든것이 또렷하고 지나칠만큼 생생하게 보였다. 그는 무거운 걸음으로 지휘부초막주위를 천천히 돌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리덕구는 웃가지가 넓게 퍼진 해묵은 소나무의 벌거우리한 줄기에 기대고 섰다. 거기서 멀지 않는 곳에 단풍나무 한그루가 서있었다. 한여름 화려하게 자란 그 단풍나무의 가지들은 마치 땅우에서 날아오르려는 전설속의 새의 날개처럼 활짝 퍼져있었다. 리덕구는 오래동안 그 희한한 모양의 단풍나무를 홀린듯이 바라보고있었다. 그에게는 무엇인가 새로움과 뜻이 차고넘치는 류다른것으로 생각되였던것이다.

그때 숲앞의 밋밋한 비탈을 이룬 공지쪽에서 누군가 서슴서슴 리덕구에게로 다가왔다.

《누구요?》

리덕구는 문득 깊은 생각에서 빠져나오듯 머리를 들고 낮으나 잘 울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외다!》

석쉼한 목소리로 대꾸하며 어스레한 숲속에서 뜻밖에도 김로인이 침착한 걸음으로 마주 걸어왔다.

《아니? 이 새벽에 김로인님이 어떻게?》

리덕구는 늘쌍 마음속으로 존경하는 로인에게로 빠르게 마주 걸어갔다. 언제, 어느곳에서나 김로인을 친아버지처럼, 선량하면서도 결패있고 정의감이 강한 고향 제주도인민들의 마음과 민심을 대변하는 《전권대표》처럼 항상 존대하는 리덕구였던것이다.

김로인은 보통때와는 다르게 마주선 리덕구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을 헤아려보려는듯 내려덮인 짙은 눈섭밑으로 그를 찬찬히 여겨보았다.

《대장, 밤을 새웠나?》

《김로인님, 그럴만한…》 하고 리덕구는 빙그레 웃었다.

《음…》

김로인은 무슨 말인지를 하려다가 그만두고 발밑의 락엽무지에 앉아 잎담배를 말기 시작하였다.

《김로인님, 젊은 사람들과 함께 산속에서 생활하기가 무척 힘들지요? 》하고 리덕구는 그의 곁에 앉으며 진정어린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아니야, 난 오히려 매일매일 사는 보람을 느끼네. 사람이 산다는게 뭐겠나? 지금 난 진정으로 사는것 같아. 난 내 여생을 원쑤들과 싸우는 사람들속에서 끝맺고싶어. 한데 대장, 어제 온밤 지휘부초막에 불이 켜져있는것 같더군. 이 사람 대장, 몸도 돌봐야 하느니…》

김로인은 구수한 잎담배연기를 날리며 띠염띠염 침착하게 뇌이였다. 외래침략자들과 최후순간까지 싸우다가 장렬하게 자결한 삼별초 항전군 대장의 후손임을 자부하는 김로인은 언제나 강인하고 침착하였으며 꿋꿋하였다.

《김로인님, 고맙습니다. … 저야 젊은 몸인데 열밤을 새운들 뭐랍니까? 념려마십시오.》 하고 리덕구는 소리없이 웃었다.

《덕구 이 사람, 이제는 여기 3. 1지대 지휘부를 떠나겠구만. 언제 떠나려나?》

《김로인님, 오늘 오후에는 유격대본부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김로인님, 어쩐지 한량없이 무거운 짐이 어깨를 누르는것 같아서 지난밤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하고 리덕구는 김로인에게 자기 마음속을 그대로 솔직히 고백하였다.

그러자 김로인은 불시에 절을 하듯 머리를 깊숙이 숙이며 쇠스랑같은 꽛꽛한 손을 뻗쳐 리덕구의 두손을 힘있게 틀어잡았다.

《덕구 이 사람, 내 그럴줄 알고 이렇게 새벽에 자네를 찾아온거야! 덕구대장, 정말 기쁘고 감사하네. 자 내 절을 받으라구.》

김로인은 다시 머리를 숙이며 감동에 젖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김로인님, 왜 이러십니까? 이러지 마십시오! 이러시면 안됩니다.》 하고 리덕구는 당황하여 나직이 소리쳤다.

《아니야! 자네는 내 절을 받을만 한 속이 깊은 제주도의 아들이야! 그래서 마음에 들거던. 헐치 않은 제주도인민유격대 대장의 중임을 맡고 응당 어깨의 무거움을 느끼면서 깊이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는것이 십분 옳은 처사일세. 숱한 사람의 생사를 책임지고 또 큰 싸움을 이끌 중임을 맡고도 지망지망하면 큰일을 그르치는 법이네. 그런 사람은 큰뜻으로 뭉친 유격대오를 이끌지 못하네.》

김로인은 결심하고 찾아온듯 기탄없이 말을 계속하였다.

《덕구대장, 중요한건 가슴속에 간직한 굳은 마음의 대가 흔들리지 않는거야! 자네들이 늘 말하는 백번 죽어도 신념을 굽히지 않는거지. 일단 싸움에 몸을 던진만큼 끝까지 속대를 꺾이지 말고 싸워야 해. 난 덕구 자네가 끝까지 제주도의 아들답게 그러리라고 믿어! 애국선렬들이 그러했던것처럼 놈들과 꿋꿋이 싸우면 제주도백성들도 성심성의로 도울걸세. …  덕구대장, 내 제주도에 태를 묻은 백성의 한사람으로 부탁하는것이니… 나무람하지 말라구.》

(김로인님! 이렇게 찾아와 힘을 주고 고무해주시니 고맙습니다!)

리덕구는 한나산우에 끝없이 펼쳐진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묵묵히 서있었다.

비바람과 초연에 그슬린 리덕구의 수척한듯 한, 그러면서도 격렬한 싸움의 나날에 벼려지고 벼려진 적동색얼굴, 바람에 날리는 류달리 새까만 머리카락, 그 깊이를 가늠할수 없는 준엄한 눈길과 자세는 인생의 온갖 고초와 시련을 이겨내며 굳세게 살아온 제주도의 억센 아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있는것 같았다.

날은 어느 사이 활짝 밝았다. 산아래 바다쪽에서 해가 장엄하게 솟아오르고있었다.

한나산의 탐라계곡과 곳곳의 수많은 골짜기들에서는 신령스럽게 느껴지는 김이 굼실굼실 떠오르고있었다.

《김로인님, 좋은 말을 해주어 감사합니다. 힘이 생기는군요!》

리덕구는 김로인의 마르고 꽛꽛한 손을 모두어잡고 머리숙여 감사를 표하였다. 그는 진정이 느껴지는 뜨거운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김로인님, 오늘 저와 함께 유격대본부로 가서 생활하지 않겠습니까? 본부에서 김로인님은 휴식하면서 지휘관들에게 힘이 되는 말도 해주시고…》

《덕구대장, 고마운 말이지만…》 하고 김로인은 불시에 말을 가로챘다.

그런 다음 김로인은 반대의사를 표시하듯 밤송이처럼 깎은 반백의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야. 거기 가면 중임을 맡은 대장과 지휘관들에게 거치장스럽고 짐이 될수 있거던. 난 여기 중대에서 젊은이들의 옷도 깁고 빨래도 해주고 이것저것 거들어주겠어. 이따금 마을로 내려가서 놈들의 동정도 살피고… 나이든 로인이니 놈들의 의심도 덜 받거던.》

김로인은 밤송이같은 머리를 습관처럼 슬슬 쓸면서 내려뜬 눈을 들지 않고 빙그레 웃었다. 그러다가 로인은 불쑥 무엇인가 정성껏 꼼꼼히 싼 묵직한 보꾸레미를 내밀었다.

《본부로 떠날 때 가지고 가서 몸보신에 쓰라구.》

《김로인님, 이건 뭡니까?》 하고 리덕구는 주춤 놀라며 김로인을 쳐다보았다.

《오래 묵은 산청이야. 며칠전에 구새먹은 오랜 느티나무에서 뜬건데 피곤도 풀고… 우선 대오를 이끄는 선두의 유격대장이 건강하고 힘이 있어야 하느니.》

《이러지 마십시오, 김로인님! 그건 김로인님이 건사해두고 자주 잡수셔야 합니다.》 하고 리덕구는 펄쩍 뛰듯이 물러나며 사양했다.

《이 사람, 덕구대장. 늙은이의 진정을 마다하면 못 쓰느니. 받아두라구. 작고한 자네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나라위한 싸움에 앞장선 장한 아들에게 무엇인들 아꼈겠나. 그러니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받아두라구.》

김로인의 목소리에는 가벼운 나무람이 비껴있었다.

《김로인님!》

《덕구대장, 이제 싸움은 더 어려워지게 될거야. 미국양놈들과 역적배들이 숱한 무리를 끌고 와 하늘, 땅, 바다… 사면팔방에서 이리떼처럼 달려들고있는데 유격대에는 인원도, 무기, 탄약, 식량도 부족하거든…》

김로인은 목소리가 갈려서 기침을 하였다.

《김로인님! 옳습니다. 적들과의 싸움은 점차 간고해질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희생을 각오해야 합니다. 하지만 김로인님, 너무 걱정마십시오. 전체 제주도유격대원들은 모두가 용맹한 제주도의 아들들입니다. 우리들은 그 이름을 절대로 더럽히는 일없이 끝까지 싸울것입니다.》 하고 리덕구는 자기가 이미 생각하고 또 생각한바를 말했다. 그의 짙은 눈섭밑에서 두눈이 불타듯 번쩍거렸다.

그는 반백의 머리를 끄떡이며 감동으로 축축히 젖은 눈굽을 누르면서 혼자소리처럼 뇌이였다.

《그래… 그럴테지. 모두가 굴할줄 모르는 억센 제주도의 아들들이니까!》

김로인은 작별의 표시로 애정깊게 리덕구를 끌어안으며 목메인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장하이!》

《김로인님! 몸조심하십시오. 우리는 자주 만나게 될것입니다.》

김로인과 헤여진 리덕구는 지휘부초막앞으로 걸어왔다. 떠오른 해빛에 번쩍거리는 지휘부초막가까이의 숲속에서는 갖가지 꽃들의 그윽한 꽃향기가 풍기고 머리우의 나무가지들에서는 새들이 지저귀고있었다. 리덕구는 부지중 우뚝 멈춰섰다.

(얼마나 아름답고 수려한 내 나라, 내 고향의 태고의 산인가. … 그런데… 그런데…)

그 순간 산아래쪽에서 쏘아대는 적들의 포성이 마치 산속 땅밑에서라도 나는것처럼 웅글게 꾸릉꾸릉 울려왔다.

(안된다!- 아무리 발광해도 우리는 네놈들을 징벌할것이다!)

리덕구가 지휘부초막안으로 들어오니 뜻밖에도 본부에서 활동하는 좌구형이 탁자앞에 등을 굽히고 앉아있었다.

《아니, 형님이 어떻게?》 하고 리덕구는 갑자기 나타난 그를 보고 놀라워하였다.

《오늘 계획했던 일정을 바꾸어 본부에서는 모두 여기로 온다. 이제 강규찬동지와 김달삼대장, 각 지대장들이 곧 도착할게다. 평양회의에 참가할 대표들이 새로운 정황이 생겨 앞당겨 급히 떠나게 되였다. 그래서 떠나는 길에 이쪽에 들리기로 했다. …》

리좌구는 제주도지하조직에 조성된 급변한 정황들을 차근차근 이야기하고 그에 따라 대표들이 하루 앞당겨 제주도를 떠나게 된 사연을 알렸다.

《그래요? … 난 조금후에 여기를 떠나 본부로 가려고 했었는데 하마트면 길이 어긋나서 랑패할번 했구만요!》 하고 리덕구는 소리내여 껄껄 웃었다.

《참, 순우가 후방물자를 구입해가지고 어제 본부에 도착했다. 놈들의 해안봉쇄를 뚫기가 이만저만 간고치 않았던 모양이더군.》

《순우가 돌아왔다구요? 그애가 당당히 한몫하는구만요.》 하고 리덕구는 기쁨에 넘쳐 다시 소리내여 웃었다.

《그래, 그애도 당당히 한몫하지, 어릴 때부터 키는 작지만 난돌이였으니까! 오늘 나를 따라 여기로 오겠다는걸… 몸상태가 좋지 않은것 같아서 내가 막았다. 그건 그렇고…》

문득 무거운 생각에 잠겼던 리좌구는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 너의 어깨가 더 무겁게 됐구나! … 지난밤 나는 그 생각으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하지만 셋째야! 지나치게 걱정하지는 말자꾸나. 우리 더 용기를 내여 싸우자. 나라를 위한 싸움에 죽음을 각오하고 나선 우리들이 아니냐! 너는 나에게 늘 말했었지. <우리들 개인의 죽음은 작은것이고 나라위한 싸움은 크고 신성한것…>이라고!》

리덕구는 그 순간 낯익은 둘째형의 시꺼먼 눈섭밑에서 무척 낯익은 두눈이 불타오르는것을 보았다. 불시에 리덕구는 뻐근할 정도로 허리를 쭉 폈다.

《형님, 고맙습니다. 앞으로 많이 도와주기 바랍니다.》

《힘자라는껏 돕겠다. 그런데 셋째야, 너 송요찬이란 놈과 잘 아는 사이냐?》

《송요찬이요? 그렇습니다. 그는 나의 대학동창생이니까요. 그와는 이런저런 인연으로 얽혀져있습니다.》 하고 리덕구는 조금도 주저않고 정색해서 대꾸하였다.

《그런가? 한데 그 송요찬이 이번에 비명에 죽은 국방경비대 박진경련대장놈의 후임으로 미국놈의 군함을 타고 제주도에 기여들었다.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송요찬이가 너를 만나 협상하려고 한다는구나. 그러면서 음흉한 놈들은 한편으로 너뿐아니라 지대장급이상의 유격대지휘관들의 목에 수백만원의 현상금까지 내걸었다.》

코웃음치며 말하는 리좌구의 청동색얼굴에는 놈들에 대한 랭소가 눈에 띄게 떠올라있었다.

《송요찬, 그놈은 대학시절부터 공명심으로 빚어놓은 놈으로 소문났었지. 공명과 리속을 위해서는 그 어떤짓도 서슴지 않더니 끝내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의 시궁창에 떨어졌군!》

리덕구는 솟아오르는 분노와 경멸감을 누르며 쓰디쓴 웃음을 지었다.

초막밖에서 여러 사람의 발자국소리와 두런두런하는 말소리가 들리더니 강규찬이 앞서고 뒤따라 김달삼과 각 지대장들이 초막안으로 들어섰다. 크지 않은 초막안은 사람들로 순식간에 꽉 찼다.

《여보, 여기서는 또 가족주의요? 문제가 있소. 좌구동무가 별스레 서둘러대며 앞서간다 했더니 가족주의를 하기 위해서 그랬구만. 좋지 않소.》

강규찬이 껄껄 통쾌하게 웃으며 롱담을 던졌다.

《네, 가족주의를 좀 했습니다. 문제가 있는건 사실입니다.》 하고 리덕구는 탁자앞에서 일어나 년장자이며 선배인 강규찬을 반갑게 맞으며 즐겁게 롱조로 응수하였다.

한동안 떠들썩하게 웃고 웅성거리던 초막안은 모두가 자리에 앉자 이윽고 정숙해졌다. 그들은 지체않고 앞으로의 투쟁방향과 전투작전들을 진지하게 토의하였다. 겸해서 평양으로 떠나가는 대표들의 신변안전을 보장하는 문제, 대표들이 출발할 어항, 배, 선원, 무장인원… 등 신중한 문제들을 오랜 시간 론의했다.

유격대지휘관들의 협의회가 일단 끝나자 전 대장 김달삼이 웃으며 리덕구에게 말을 던졌다.

《리덕구대장! 갑자기 일정이 변경됐으니 작별연준비도 못했겠구만. 하지만 싱겁게 멀둥멀둥 마주보며 헤여질수야 없지 않소? 있는대로 뭘 좀 내오라구.》

《걱정마시오. 다 생각하고있으니 잠간만 앉아서 기다리오. 곧 진수성찬을 섬겨다 바치리다.》 하고 리덕구는 의미있게 웃으며 초막밖으로 서둘러 나갔다. 뒤따라 리좌구가 부리나케 나갔다.

잠시후에 3. 1지대의 지휘관들과 대원들이 간단한 제주도의 토색짙은 음식 몇가지와 산과실들, 김로인이 좀전에 주고 간 산청을 순식간에 탁자우에 차려놓았다.

《어이구… 제주도 토색음식에 산청까지… 역시 리덕구대장이 할줄 아누만, 만족이요!》 하고 강규찬이 안경을 벗으며 기분이 좋아서 웨치듯이 말했다.

그때 지대장 조몽구가 술마시는 시늉을 하며 시까스르듯 한마디 던졌다.

《무엇인가 뜻있게 갖추느라 했는데… 유감인걸, 이게 없단 말이요.》

《아, 여보, 무슨 말을 하오? 그건 안돼! 지휘관들인 우리가 규률을 위반하고 술을 마셔서야 되겠소. 절대로 안되오.》 하고 김달삼이 펄쩍 뛰였다.

그랬으나 지대장 조몽구는 여유있게 시물시물 웃으며 트집을 잡듯이 한마디 더했다.

《그래두 어쩔수 없는 특수한 경우라는게 있지 않소. 제주도사나이들의 뜻깊은 작별인데 어떻게 맨숭맨숭해서 헤여진단 말이요.》

《그건 십분 옳은 말이요.》 하고 누군가 나직이 공감했다.

그때 초막문앞에서 리덕구의 의미심장한 목소리가 울렸다.

《조몽구지대장, 걱정마오. 그것도 준비되여있소.》

《리덕구대장동무, 그만두오. 우리는 누구보다 앞장서 유격대의 엄격한 규률을 지켜야 할 사람들이요.》

강규찬이 직급상으로 또한 년장자답게 엄한 목소리로 정색해서 막았다.

《그러지 마시오. 내가 준비한 이걸 마셔보시오. 이건 의미깊은 천년주요!》 하고 리덕구는 불시에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천년주라니? 그건 무슨 술이요?》

강규찬은 너무도 뜻밖인듯 이마에 주름을 모으며 내려덮인 눈섭을 쭝긋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다름아닌 리덕구의 눈을 찌르듯이 바라보았다.

《이건 저 백록담의 맑고맑은 천년수요. 고향 제주도를 떠나는 대표들에게 고향을 잊지 말라고 특별히 대접하면서 부탁하는 술이요!-》 하고 리덕구는 까딱하지 않는 그러면서도 뜻이 깊은 표정을 띠고 열기있게 말하였다.

순간 초막안은 일시에 숙연한 기분에 잠겼다. 모두가 말없이 생각에 잠겨 침묵하고있었다. 그들은 준엄한 투쟁속에서 인연을 맺은 동지, 일생토록 잊을수 없는 동지들과의 작별의 실감이 밀물처럼 가슴에 가득차오르고있음을 느끼고있었다. 고요한 초막안으로 저 멀리 어딘가 소소리높은 한여름의 푸른 하늘로 날아가는 철새 한떼의 가늘고 먼 울음소리가 들려오고있었다.

문득 가슴우에 묵직한 두팔을 포개얹고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강규찬이 껄껄 소리내여 웃었다.

《역시 리덕구대장이 리덕구대장이구만! 고맙소. 내 평생을 어디 가나 잊지 않겠소. 의미깊은 한나산 백록담의 샘물로 작별주삼아 바래주는 동무의 뜨거운 마음을 말이요. 정말 생각이 깊어지오!》

모두들 조용히 백록담의 맑은 물과 토색짙은 제주도음식들을 먹고 마시며 뜻깊은 작별의 한때를 보냈다. 드디여 작별의 시각이 왔다. 이제 강규찬과 김달삼은 한나산을 내려 신흥리의 작은 어촌으로 떠나가게 된다. 거기서 김달삼, 강규찬, 고진히 등 대표들은 배를 타고 깊은 밤 평양을 향해 떠나가게 될것이다.

《자, 이제는 작별합시다.》 하고 강규찬이 먼저 탁자앞에서 일어났다. 초막안의 사람들은 모두가 일어나 말없이 섰다.

《잘들 싸워주오! 동지로서의 부탁이요.》

강규찬은 나직이 웨치듯이 말하고 리덕구의 앞으로 다가갔다. 리덕구 역시 그에게로 마주 걸어갔다. 그들은 큼직큼직한 걸음으로 서로 가까이 다가서더니 장벽안을 들여다보듯 서로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즉시에 그들의 눈에서는 벙긋 하고 불꽃이 튕겼다. 그것은 서로 잘 아는 사이, 인생에서 년령이나 직급을 초월한 사람들사이에 일어나는 그런 불꽃이였다. 이 순간에 강규찬은 리덕구에게서 무엇인가 친근하고 이미전부터 잘 알고있는 아주 귀중한것을 보는것 같았으며 가슴에 뭐라고 형언할수 없는 기쁨과 감동이 끓어오르는것을 느꼈다. 강규찬은 믿음과 신념, 강의한 의지로 싸울 결의에 충만된 리덕구를 뜨겁게 끌어안았다. 지금 그들은 민족이 겪는 수난과 조국통일이 어느만큼 절박하며 어느만큼의 간고한 투쟁을 각오해야 하는가를 서로 절감하고있었다.

조금후 김달삼은 리덕구의 탄탄한 손을 뜨겁게 잡았다.

《리덕구대장! … 가장 어려운…》 하고 갈린 목소리로 뇌이는 그의 얼굴아래쪽에 무엇인가 꿈틀 지나갔다. 평상시 통이 크고 굳센 의지와 언변좋기로 소문났던 지식인출신의 제주도인민유격대 전 대장인 김달삼은 가슴속에서 이름할수 없는 격정이 련속 솟구쳐올라 여느때없이 말을 떠듬거렸다.

《… 가장 어려운… 때에 무거운… 짐을 동무에게 떠맡기고… 이렇게 떠나가오. 덕구동무, … 잘 싸워주오! … 난 그러리라고… 믿소!》

김달삼과 강규찬은 초막안의 매 사람의 손을 잡고 작별인사를 나눈 다음 밖으로 나갔다.

리덕구는 숲속길 멀리까지 따라나가 그들을 바래웠다.

《동무들, 한가지 부탁이 있소.》 하고 엄숙한 목소리로 말하는 리덕구의 크게 뜬 눈동자가 번쩍거렸다.

강규찬과 김달삼은 리덕구의 목소리에서 무엇인가 류다른 의미심장함을 느끼면서 멈춰섰다.

《무슨 부탁이요?》

《어서 말하오!》

리덕구는 평소에 보기 드문 엄숙한 기분에 잠긴듯 잠시 말이 없었다.

《동무들, 평양에 가서 우리 민족이 낳은 전설적위인이신 김일성장군님을 가까이에서 뵈울 행운이 차례지거든 여기 싸우는 제주도 수십만의 인민들, 제주도아들들의 축원의 인사를 드려주오! 그리고…  통일의 날, 여기 남해의 섬 제주도에 장군님을 모시게 될 영광의 그날을 학수고대한다고 말씀드려주시오.》 하고 리덕구는 꾸밈없는, 순결한 열정이 담겨진 목소리로 부탁하였다. 그는 경건하고 정중한 몸가짐을 하고 서있었다.

《리덕구동무! 그 부탁을 심장에 새겨두겠소.》

김달삼은 일찌기 없었던 엄숙함과 경건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그 신성한 부탁을 언제든지 잊지 않겠소!》 하고 강규찬은 숙연한 기분에 잠겨 뇌였다.

그런 다음 강규찬과 김달삼은 리덕구와 헤여져 골짜기밑으로 내려갔다.

리덕구는 본부의 지휘성원들, 지대장들이 대기하고있는 초막으로 돌아왔다.

잠시후 초막안에서는 래일 진행할 전투에 대한 지휘관들의 작전토의가 시작되였다. 이제부터 보다 가혹하고 피어린 힘겨운 싸움이 그들을 기다리고있었다.

준엄한 성전은 계속되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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