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 회)

제2편 서해에서 남해에로

8

 

리설경은 광주천기슭으로 나왔다. 찔광이덤불이 우거진 기슭의 너럭바위옆에 쪼그리고앉은 그는 호- 하고 가는 한숨을 내쉬였다. 앞날에 시아버지로 모시게 될 채정보대좌였지만 그와의 관계가 점점 버그러져간다.

그는 방금 채정보의 방에서 억이 막혀 뛰쳐나오는 길이였다.

처음 이 부대로 찾아왔을 때만 해도 설경은 부대장의 건강을 꼭 회복시키리라고 단단히 마음먹었었다. 군의로서의 의무감도 있었지만 며느리된 마음으로 시아버지를 돌본다는 감정이 은연중 작용한것도 사실이였다.

그런데 지금까지 지내보니 채정보부대장은 그의 심정을 알려고도 하지 않는것 같았다.

더우기 어깨에 별을 단 자기를 사랑스러운 막내딸 취급하면서 치료받는것을 회피하군 하였다.

오늘 일만 해도 그랬다.

아침에 수신한 무전문의 내용은 목포앞바다에서 적함선집단의 기동이 강화되고있다는것이였다.

며칠전에 목포에서 돌아온 채정보는 다시금 그곳으로 떠나자고 서둘렀다.

그런데 지내 과로한탓인지 고질적인 천식이 도졌다. 오랜 기간 바다우에서 떠돌이생활을 할 때 얻은 병이였다. 이런 환절기에 도지기 쉬운 병인데 군의로서 응당 관심하여야 하였다.

그는 전번에 부대장을 따라 군산으로 떠날 때처럼 다시는 얼리워넘어가지 않으리라고 마음을 도사려먹었다. 그때 군산으로 갔다가 거기서 배를 타고 목포로 항해하는 부대장을 줄곧 뒤따라다녔지만 치료 한번 제대로 하지 못했었다.

리설경은 마음을 다잡고 부대장의 앞에 나타나 단호하게 언명하였다.

《대좌동지, 전 군의로서 허용할수 없습니다.》

《그건 무슨 소리요?》

채정보는 정말 알아듣기가 힘든지 탁앞에서 엉거주춤 일어나기까지 하였다.

《목포로 나가시는것 말입니다. 대좌동지 병이 심상치 않습니다.》

《아, 기침하는거… 이따금 이러다가 절로 낫군 했지.》

《안정하면서 치료대책을 세워야겠는데 이제 또 먼데로 가시면 어떻게 합니까.》

리설경이 안타까이 말했다.

그러나 채정보대좌는 또 에누리를 하며 빠져나가려고 하였다.

《음, 기침약 같은걸 가지고 떠나면 안되겠소?》

《안됩니다. 여기서 안정을 하면서 집중치료를 받으셔야 합니다.》

단호한 소리에 대좌는 수그러드는것이 아니라 제편에서 오히려 답답하다는 기색이다.

그러더니 성을 내기 시작하였다.

《안정이라구? 군의동무, 편안히 앉아 치료받을 새가 있소? 적의 함선집단은 상륙하기에 유리한 항구쪽으로 기동하면서 대세를 역전시키려고 발악하고있소. 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기뢰전을 더 과감하게 벌려 적들의 기도를 파탄시켜야 할게 아니겠소. 필요하다면 목숨까지 바쳐서라도 말이요. 지금 내가 기침이나 하는게 무슨 대수요?》

《어쩌면 그렇게… 생명과 관련되는 말씀을 쉽게 하십니까.》

리설경은 눈물이 그렁해서 소리쳤다.

그러나 채정보는 연약한 군의의 말같은건 무시한다는 태도였다.

리설경이 다시 생각해보니 그는 얼음같이 랭정한 사람이였다.

《난 군의동무와 더 이야기할 시간이 없소. 그만하고 가서 자기 일을 보오.》

대좌는 그와는 더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

억이 막힌 리설경은 고개를 숙이고 방에서 나와버렸다. 더 서있느라면 금시 눈물을 보일것 같아서였다.

언제나 친아버지처럼 엄한 티를 내면서도 그속에 떠도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던 그가 언제 저렇게 무뚝뚝하고 랭랭한 사람처럼 변했을가싶었다.

밖에 나와 이렇게 홀로 앉아있으려니 참았던 설음이 왈칵 치받쳤다. 채정보에 대한 야속한 마음이 앞섰다.

내가 나 개인을 위해서 그러는가. 부대장의 건강이 부대의 전투력과 관련된다는것을 그자신은 모른단 말인가.

그는 내가 군인이라는걸 잊은것 같다.

나는 입대할 때 군관으로서, 군의로서 전우들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모든것을 다하겠다고 굳게 결심했고 또 정성과 실력만 있으면 문제될것이 없다고 믿었었는데…

그는 지난날 곡절도 겪었지만 자기의 노력으로 길을 열었고 한번 결심하면 해내고야말았었다.

리설경은 북청태생이였다.

부모들은 외동딸인 그를 어떻게 하나 아들 열 못지 않게 잘 키우자고 애썼다. 파산될 형편에 이른 철공소를 운영하는 아버지의 보잘것 없는 수입과 어머니의 삯빨래와 삯바느질로 버는 돈을 가지고는 딸을 공부시키기가 어려웠다. 주변사람들은 철공소집아낙네가 그런 궂은일을 한다고 손가락질을 했지만 어머니는 그런 말엔 개의치 않았다. 그저 딸을 상급학교에 보낼수 있는 돈을 벌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일도 하려고 하였다. 설경은 부모의 고달픈 그 정상과 사람들의 뒤소리가 듣기 싫어 자기는 상급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우겨보기도 했지만 도리여 어머니의 노여움을 자아냈다.

집안일을 좀 거들자고 해도 어머니는 딸의 손끝에 물 한방을 묻히지 못하게 했다.

어느날 어머니가 부랴부랴 보짐을 쌌다.

《어머니, 왜 그래요?》

《어서 차비를 해라. 우리 서울로 가자!》

《?! …》

《왜 멍청해있니? 웃집 섬돌이네 모자가 그제 서울로 갔다더라, 아들을 공부시키겠다면서. 우리라고 남에게 짝질테냐? 내 물지게를 지더라도 널 기어이 공부시킬테니 긴말할게 없다.》

《그럼 아버지는 누가 돌봐드려요?》

《다 생각이 있다. 고모사촌이 와서 동자질을 해주기로 했다.》

어쩔수없이 설경은 어머니를 따라 서울장안에 들어왔다.

그는 세브란스의전에 입학하였다.

온 가정에서 털어낸 돈은 입학금밖에 되지 않았다.

학비를 마련하기 위한 어머니의 고행이 시작되였다. 물지게를 지고 넓고넓은 서울바닥을 힘겹게 다니는 어머니의 모습은 리설경이 피나게 공부할 의지를 가다듬게 했다. 그는 학급적으로 언제나 첫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

그러던차에 나라가 해방되였다.

해방 초기 남녘의 어수선한 정세속에서도 리설경은 교실과 도서실에서 머리를 동여매고 책에만 파묻혀있었다. 자기의 전공을 내놓고도 그가 독파해나가는 지식의 령역은 넓고넓었다.

환경이 어떻게 달라지고 정세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그는 알지 못했다.

각이한 정치세력들이 모여들어 와글거리며 각축전을 벌리는 서울거리에 미군이 들어왔다.

시내엔 살벌한 분위기가 떠돌았다.

높이 내걸었던 인민위원회간판이 나떨어져 미군용찌프차의 배기가스가 자욱한 거리 한복판에 나딩굴었다.

매일과 같이 애국자들이 검거, 투옥되고 그들을 학살하는 어지러운 총성이 그칠줄 몰랐다.

그러던 어느날 설경에게 상서롭지 못한 일이 생겼다.

학교에서 돌아와 하숙집 퇴마루에 심란해 앉아있는데 어머니가 나타났다.

마당에서 세면을 한 어머니가 곁에 앉으며 물었다.

《넌 왜 얼나간 사람처럼 그렇게 앉아있니? 책도 안 보고…》

리설경은 《호-》 하는 소리가 들릴만큼 한숨을 내그었다.

어머니는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

리설경이 무슨 말을 하려고 고개를 드는데 눈에 이름 못할 불안이 짙게 비껴있었다.

《어머니, 학교측에서 래일 날 보고 미군입성환영식에 나가 꽃다발을 주래요. 몇몇 애들을 뽑아서 강당에 따로 불러놓고 사교춤까지 배워주는데… 좋아하는 애도 있고 나처럼 빠져나오는 애도 있어요. 어쩐지 무서운 일이 생길것 같아요. 난 학교에 못 다닌다 해도 그런데는 나가기 싫어요.》

딸의 등을 어루쓸며 먼 하늘너머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두눈은 피빛석양에 불그스레 물들어있었다.

《그래, 일이 심상치 않구나.…》

어머니는 치마바람을 일구며 휭 일어났다.

《이젠 고향으로 가서 아버지랑 같이 살자. 북에선 영명하신 김일성장군님께서 개선하시여 인민을 위한 정사를 펴나가신다누나. 거기 가면 공부도 마음껏 할수 있다더라. 기왕 여기서 배우던걸 마저 배우고 졸업증을 타가지고 가자던노릇이… 안되겠다. 래일이라도 당장 떠나자.》

리설경은 어머니의 모습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물지게를 지고 서울의 거리거리와 골목골목을 다 돌아다니더니 보고들은것도 많고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나름대로 정확히 보고 판단을 내리시지 않는가.

그들모녀는 떠나올 때처럼 부랴부랴 짐을 싸들고 아직은 설핀 38°선의 철조망을 빠져 북으로 들어왔다.

어머니의 말은 옳았다.

나라에서는 리설경에게 배움의 길을 활짝 열어주었다.

학교를 졸업한 그는 자진하여 해군에 입대하였다. 군복을 입게 된데는 어머니의 간곡한 당부도 있었다.

《너도 겪어보아서 알겠구나. 지금 남조선에 기여든 미국놈들이 우리를 어째보겠다고 날치는데 녀자라고 가만있으면 되겠느냐. 난 네가 군복을 입었으면 한다.》

리설경은 그런 어머니가 자랑스러웠다.

그는 기꺼이 어머니의 뜻을 따랐다.

해군복을 타입고 렬차에 오르던 날 어머니는 남조선땅에서 겪은 일을 잊지 말고 조국을 잘 지키라고 당부했다.

설경은 군의로서, 군인으로서 언제나 자기의 본분을 잊지 않았으며 준엄한 정세에 맞게 자기를 단련해나갔다.

동시에 그는 청춘의 년령기였다. 망울졌던 꽃이 마침내 아름답게 피여나 향기를 풍기는것과 같다고 할가.

그에게도 사랑이 찾아왔다.

그날은 마가을이여서 살에 물이 닿기만 해도 헉 하고 흐느낄만큼 차거웠다.

리설경은 간호원을 데리고 동항에 정박해있는 함선들을 찾아가고있었다. 해병들에 대한 정상적인 검진을 위해서였다.

그들은 잔파도가 밀려들었다가 물러가는 백사장에 발자국을 찍어가고있었다. 파아란 하늘은 가슴이 확 트일만큼 높아졌다. 노래라도 부르고싶을만큼 쾌청한 날씨였다.

간호원이 문득 멈춰서며 탄성을 올렸다.

《저게 어뢰정이 아니예요?》

《어뢰정?》

어뢰정이라는것을 처음 보는 리설경은 간호원이 가리키는쪽을 호기심을 가지고 바라보았다.

몇번 부두에 나왔지만 여적 보지 못하던 배였다.

어찌나 번개처럼 달리는지 두줄기의 흰 물갈기가 바다우에 일어나고있었다.

《저렇게 빠른게 어뢰정이였구나.》

그들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얼마간 걸어가는데 쏴- 하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변이냐?

그들이 고개를 드는데 웬걸, 난데없는 멀기같은 파도가 기슭으로 덮쳐왔다.

큰일났구나! 그들은 기급해서 뒤걸음을 쳤지만 바다물에 허리노리까지 젖고말았다. 그들은 비명을 지르며 다음파도가 또 밀려들기 전에 기슭에서 멀리로 뛰쳐나왔다.

그들의 얼굴은 금시 울상이 되였다. 치마는 말할것도 없고 장화안엔 물이 들어가 천근을 단듯 무거웠다.

《이걸 어쩌니? 아이, 속상해.》

간호원은 발을 동동 굴렀으나 리설경은 심어박은듯 까딱않고 서서 물에 푹 젖어버린 자기의 옷주제를 어이없이 내려다보았다.

간호원의 푸념은 계속되였다.

《이 꼴을 해가지고 어떻게 해병들앞에 나서요?》

리설경은 맞장구를 치지 않았다. 떠든다고 해결될것도 아니였다.

그는 스적스적 해빛이 따스히 비치는 도래굽이의 바위쪽으로 다가갔다.

뜨뜻하게 달아오른 바위에 기댄 그는 간호원에게 오라고 까닥까닥 손짓을 했다.

《어쨌든 우린 함선에 가야 하니까 장화만이라도 대충 말리우자.》

그들은 안깐힘을 써가며 물에 불어난 가죽장화를 벗었다. 그것을 비스듬히 누운 큰 바위우에 올려놓고 앉아있노라니 느닷없이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왔다.

이윽하여 물통을 맞든 두 해병이 나타났다.

난데없는 그들의 출현에 처녀들은 놀랐다.

허나 더 놀란것은 해병들이였다. 바위우에 바닥이 우로 가게 거꾸로 놓여진 장화, 빨갛게 얼어든 장딴지, 화락하게 젖은 치마는 금시 손으로 짜서인지 아직도 물이 떨어지고있었다. 처녀들은 발이 시려오는것도 잊고 젖은 군복과 드러낸 다리를 보여주지 않으려고 바위너머에 급히 숨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우리가 도울 일이라도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군관견장을 단 채진경이 다른쪽으로 눈길을 돌리며 물음을 던졌다. 처녀들을 저 지경으로 만든 장난군이라도 있으면 당장 요정을 낼듯이…

《어서 갈길이나 가시라요.》

간호원이 당황해서 소리쳤다.

리설경은 친절한 군관에게 역시 친절하게 대답하고싶었다.

《저, 다른게 아니라 갑자기 큰 파도가 밀려드는통에…》

《큰 파도라니? 그런 파도가 어떻게…》

출렁이는 바다를 둘러보던 채진경은 그제야 자기들의 어뢰정이 동항에 입항하며 일으킨 파도가 바다기슭에 있던 이 처녀들을 이런 꼴로 만들었다는것을 알아챘다.

채진경은 사죄를 했다.

《이거 우리때문에… 안됐습니다.》

그는 옆에 있는 숲속으로 들어갔다.

물결을 가르는 고속정들의 뒤에서 일어나는 물줄기가 큰 파도를 일으키며 기슭으로 밀려든다는것을 알길없는 처녀들은 그가 왜 밑도끝도없이 안됐다는 소리를 하는지 알수 없었다.

잠시후 해병들은 바싹 마른 삭정이를 아름이 벌어지게 안고나왔다. 그걸 바위곁에 털썩 내려놓고는 제꺽 불을 지폈다. 불길이 확 일자 해병들은 쑥스러운지 간다온다는 말도 없이 사라졌다.

물통을 든 그들이 가버리자 간호원이 키득키득 웃었다.

《별 싱거운 사람들 다 봐요. 우리 옷이 젖었는데 저희들이 미안할게 뭐람.》

뜨거운 불에 쪼인 처녀들의 옷에서 더운 김이 문문 피여났다.

리설경이는 웃지 않았다.

그런데 자기로서도 이상한것은 마른 삭정이를 해오던 그 해군군관의 모습이 눈앞에 새록새록 떠오르며 사라지지 않는 그것이였다.

리설경은 다른 항구에 있는 어뢰정대가 여기로 합동훈련을 위해 오늘 새로 입항한것을 지금껏 모르고있었다. 어쨌든 아까 만났던 군관이 간호원의 말처럼 싱거운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어딘가 고지식하면서도 강직한 인품이 느껴져서였다.

그후 설경은 그 군관을 다시 만나게 되였다.

어뢰정훈련을 하던 그날은 날씨가 음산한데다 파도가 몹시 사나왔다. 하늘도 바다도 온통 재빛으로 변했는데 비방울들인지 물보라인지가 허공을 메우며 회오리쳤다.

리설경은 훈련지휘성원들과 함께 경비함에 올랐다. 명색이 해군군의로서 응당 바다물의 짠맛도 봐야 한다는 생각을 하던 리설경이로서는 마침 좋은 기회였다.

경비함에 오른 그는 주변바다에서 어뢰정들이 훈련하는것을 구경하였다.

어뢰정우에서 훈련하는 해병들속에서 전번에 삭정이불을 피워준 군관이 있는가 찾아보았다. 그러나 기관장의 전투위치란 갑판아래에 있는 기관실이였으므로 배의 구조를 모르는 설경의 눈에 뜨일리 없었다. 물갈기를 일으키며 《적진》을 종횡무진하는 어뢰정우에서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경탄과 놀라움속에 훈련을 지켜보던 설경은 점점 속이 후리후리해지더니 멀미가 나서 정신을 차릴수 없었다. 자기가 탄 배가 금시 아득한 산마루로 치솟아오르는듯 하더니 이어 산같은 파도사이에 생긴 천길나락으로 떨어져내려가는것 같았다. 그는 배전을 두손으로 붙들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훈련이 끝나자 경비함에서 가까이에 있는 어뢰정을 호출했다. 리설경이 해병들의 부축임을 받으며 어뢰정으로 옮겨탔다. 그는 해군군의로서 지금 이렇게 맥없이 늘어지면 웃음거리가 된다는것도 알고있었고 풀자루같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자신이 매우 꼴불견이라는것도 알고있었지만 어쩌는 수가 없었다.

배는 전속으로 뭍을 향해 달리였다.

어뢰정이 부두에 가닿은 다음 흥떡이는 배의 기관실에서 갑판우로 올라온 채진경이 거의 초절임이 되여 비청거리며 부두우에 올라서는 녀성군관을 띠여보았다.

《누구요?》

《사령부 녀군의랍니다.》

누군가가 대답했다.

그러자 채진경의 빈정거리는 말이 뒤따랐다.

《저런, 배에 녀자까지 태우구?》

《지휘성원들의 부탁으로 정장동지가 태웠는데…》

《그래도 배야 배지. 원래 녀자를 배에 태우면 되던 일도 안된다고 했는데…》

부두에 내려 몇걸음 옮기던 리설경이 그 소리를 듣고 홱 돌아섰다.

새파랗게 질렸던 처녀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였다.

《동지, 그건 누구의 견해인가요?》

《아, 저… 이건 옛날 배사람들이 하던 소리요.》

《그래서 옛날 배사람들이 가엾은 처녀를 림당수에 재물로 바쳤군요?》

《그건 실지 있은 이야기가 아니라 전설이요.》

채진경의 얼굴에 환한 웃음발이 퍼졌다.

《군의동무, 그렇게 남의 말을 알아들을 정도면 멀미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

리설경은 그제야 그가 자기 들으라고 부러 큰소리로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을 하였다는것을 알았다.

아닌게아니라 좀전까지 구토를 하며 정신을 휘휘 잡아돌리던 어지럼증이 가셔지고 온몸이 날아갈듯 거뿐해졌다. 뭍에 올라서 땅내를 맡으니 멀미가 좀 가셔진데다 손에 기름이 밴 장갑을 낀 군관의 어처구니없는 말에 발끈해서 내쏘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정신이 들었던것이다.

그런데 유심히 쳐다보니 그가 바로 전번에 삭정이불을 놓아준 그 군관이 아닌가!

보면 볼수록 웅심이 깊고 남을 념려해주는 사나이였다.

얼굴이 빨개진 설경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넓은 부두를 꿰질러 종종 걸음을 놓았다.

어느날 해군사령부 마당에서 그를 세번째로 만났을 때 리설경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먼저 말을 걸었다.

《전번엔 정말 고마왔습니다. 불을 피워준거랑… 그리고…》

그의 인사말에 도리여 채진경이 당황한듯 목덜미에 손을 가져갔다.

《응당 그렇게 하는게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어째서요?》 설경은 그가 좀 과장된 소리를 하는듯싶었다.

《녀성군인들이야 언제나 우리들의 특별보호속에 있어야지요.》

《잘못 아셨군요. 사실은 우리 군의들이 해병들을 돌봐주고 구원해줄 사명을 지니고있답니다.》

《그럴수 없습니다. 그 반대지요.》

《이제 어려운 때가 오게 되면 알게 되실거예요.》

《아- 그렇지! 우리가 부상을 입는 경우를 두고 하는 얘기군요. 하하… 하지만 아마 그런 일은 없을겁니다.》

《저도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래요.》

그들은 즐겁게 웃었다.

웃음이 그들사이를 더 가깝게 해주었다.

채진경이 웃음을 거두며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저는 군복입은 녀성들을 볼 때마다 생각이 깊어지군 합니다. 지난 여름철에 기관부속품때문에 기계공장으로 떠나다가 아침녘에 휴양소구내로 통과하게 되였지요. 녀성휴양각을 지나칠 때였습니다. 방금 세면을 끝냈는지 열려진 창문으로 녀성들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그 웃음소리와 함께 연한 화장내가 풍겨나왔습니다. 세면을 마치고 화장을 하며 웃고 떠드는 소리였지요.

내 눈앞에는 총기름내와 소독수내가 배인 군복을 입고 인민들의 행복을 지켜 초소에 선 녀성군인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들이라고 왜 처녀다운 꿈이 없겠습니까? 화려한 차림으로 거리에 나서고싶을것이고 곱게 화장도 해보고싶을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기상구령에 따라 세면를 하고 땀배인 군복을 입고 대렬행진을 하고있겠구나 하고 생각하니 비록 화장은 진하게 하지 않았어도 우리 녀성군인들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돋보이더군요.》

그들은 바다쪽으로 뻗은 길을 향해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리설경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 휴양소 녀성들도 조국이 요구하면 어느 초소이든 어떤 어려운 일이든 마다하지 않을거예요. 조국보위는 공민모두의 신성한 의무니까요.》

《그래도 녀성의 몸으로 군복을 입는 그런 용단을 내리기는 쉽지 않지요.》

《너무 비행기를 태우는군요. 저는 해군복을 입었지만 바다물결의 변화를 분간 못해 물벼락을 맞았답니다. 멀미도 이겨내지 못하고…》

채진경이 고개를 젖히고 크게 웃었다.

《멀미때문에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주 배를 타보느라면 저절로 없어지지요.》

《정말 그렇게 될가요?》

《그럼요.》

《호호, 제가 또 배에 오르면 옛날 배사람들처럼 되던 일도 안된다고 이야기하지 않겠어요?》

《아, 그건 롱담입니다, 롱담!》

채진경이 다급히 변명하는 바람에 설경은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관계가 보다 친밀한 우정으로 가까와짐을 다같이 느꼈다.

날이 갈수록 그 우정은 사랑의 감정으로 무르익었다.

전쟁의 나날에 그들의 사랑은 더 불타올라 총각의 부모들까지 눈치채게 되였다. 설경이가 여기 남해로 떠나올 때 바래주던 안풍심어머니의 부드러운 눈길이 웅변으로 그것을 증명해주었다.

채정보대좌도 이미 그런 사정을 알고있는것 같았다.

대좌의 대범한 언행가운데는 자기를 친자식처럼 각별히 아껴주는 후더운 정이 흐르고있음을 리설경이 모를리 없었다.

그럴수록 부대장인 그의 건강을 더 위해주고싶은 마음이였다.

허나 날이 갈수록 대좌의 건강은 더 악화되고 치료를 회피하다못해 오늘은 심각한 언쟁까지 하게 된것이였다.

이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안타깝기만 했다.

설경은 강물속에 손을 잠그었다.

시내 여기저기서 타래쳐올라 꾸역꾸역 밀려가는 포연과는 딴 세계에 잠긴듯 광주천의 푸른 물결은 무등산에 시원을 두고 그 이름도 아름다운 영산강으로 흘러들었다.

그는 두손을 오무려 강물을 떠서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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