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9 회)

제3편 성전

5

 

한나산의 성널오름은 태고연한 정적속에 잠겨있었다. 아흔아홉골짜기를 끼고있는 성널오름에는 참나무, 소나무숲이 소리도 새여들지 않을만치 꽉 들어차있다. 태고밀림이 우거져있는것이다.

한나산과 맥락이 잇닿은 제주도의 모든 크고작은 산이름들은 대체로 《악》 혹은 《오름》이라고 부른다. 성널오름, 로로오름, 돌오름, 개월오름, 천아오름, 록하지악 등 많은데 이것은 모두가 제주도의 고유어휘이다. 오름이라는 어휘는 현대조선말사전에 올라있지 않다. 다만 오름길, 오름줄, 오름대… 라는 말이 올라있는데 모두다 《올라가다.》, 《오른다.》, 《오르다.》로 해석되여있다.

대자연의 모든것이 아직은 잠속에 빠져있는 이른새벽에 리덕구는 습관처럼 일찍 깨여났다. 성널오름의 림시지휘부안은 어둡고 고요하였다. 그는 잠에서 깨여나는 순간 어인 일인지 자신이 파도사나운 바다에서 무거운 짐을 실은 배를 힘겨웁게 저어가는듯 한 기분을 느꼈다. 몸도 마음도 무겁고 어디라 없이 지근지근 쑤시는것 같았다. 어제 밤늦게까지 림박한 조천읍에 대한 기습전, 증강된 적들의 《토벌》대대를 타격할 전투작전을 토의하고 전투개시와 철수에 이르는 모든 세부까지 작성한 리덕구였다.

(마음속에 묻어둔 비분과 지속되는 긴장감때문인가?)

기실 지금 그의 크게 뜬 눈동자에는 마음속의 비분이 내비치고있었다.

바로 며칠전에 리덕구는 자기의 사랑하는 맏아들 진우와 조카 성우가 놈들에게 무참히 총살당한 비보를 들었었다. 뒤이어 꽃다운 나이의 함덕국민학교 교사가 아무런 죄도 없이 놈들이 지른 불에 새초밭에서 불타죽었다는 치떨리는 소식을 전해듣고 분노로 온몸을 떨었었다.

(음… 어찌 그들뿐이겠는가. … 수많은 제주도의 로인들과 녀인들, 철부지아이들까지 참화속에 울부짖으며 쓰러지고있다!)

리덕구는 컴컴한 림시지휘부의 자리에 누운채 슬며시 눈을 감았다. 눈구석이 아픈듯 한 피곤이 느껴지는것으로 보아 자신이 퍽 쇠약해진것 같았다.

(이 시각에도 제주도땅 어디에서나 무고한 인민들의 피가 흐르고있을것이다! … 포악한 미제는 《엄청난 군사전략적의의를 가진 제주도땅이 필요하지 사람은 필요치 않다. 모조리 죽이고 모조리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린지 오래다.)

놈들은 한나산어구와 중산지대의 부락들을 초토화하였으며 산아래에는 집단부락까지 만들고 거기에 화점들까지 설치해놓고 《폭도》들을 완전소멸하려고 미친듯이 발광하고있었다.

(날이 갈수록 유격대는 탄약과 식량결핍으로 모진 시련을 겪고있다. 해안선과 산이 모두 봉쇄, 포위되여 어디서 보충구입할 방도도 막연한 형편이다.)

현재까지 엄혹한 정세와 난관에 부닥칠수록 견인불발의 강렬한 투쟁의욕으로 유격대오를 이끌어온 리덕구였다. 그동안 험악한 정황속에서도 도청습격, 비행장습격… 등 수많은 전투를 과감히 벌려 놈들에게 된타격을 안기였었다.

리덕구는 림시지휘부안에 여전히 눈을 꾹 감은채 까딱않고 누워있었다.

정적… 정적… 미명속의 뙤창밖은 태고연한 정적속에 잠겨있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얼마나 초인간적인 힘을 발휘하여 적들과 싸워왔는가! … 그러나 앞으로 시련은 더 클것이고 언제 어느때 막대한 희생을 가져올 최후의 결전이 닥쳐올지 예측할수 없다. 제주도인민유격대의 래일, 제주도인민들, 어머니와 가족들의 운명은? …)

리덕구는 아직 20대말의 젊은이로서 생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있었다. 그러나 그 애착이 아무리 강하다 하여도 귀중한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할 필요가 있다면 기꺼이 바칠 불같은 그의 각오는 그보다 더 강렬했다.

미제침략자들과 추악한 그 주구놈들에게 나라를 사랑하는 조선사람, 제주도의 아들들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게 하리라! … 하고 굳게 마음만 다지면 투지는 저절로 용솟음치고 뜨거운 밀물마냥 온몸에 새 힘이 넘치군 하던 리덕구였었다.

(그런데…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포악하고 막강한 무력을 가진 미국이라는 괴물과 그와 야합한 매국노들의 엄청난 도전에 나는 지금 지쳤는가…)

리덕구는 꾹 감고있던 눈을 번쩍 떴다.

(사람의 생이란 무엇인가. 행복이란 인간의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것인가? … 그렇다. 생명보다 귀중한 조국, 내 고향 제주도를 지키는 성전에 한목숨바치는것보다 더 장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것이 인간의 가장 큰 행복임을 나는 이미 깨닫고있지 않았는가. 나는 지금까지 신념의 투철성, 죽음에 대한 값높은 리해, 지능의 완강성을 마음속으로 자부해오지 않았는가. 그런데…)

리덕구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뙤창밖은 어느새 환히 밝았다.

림시지휘부에서 밖으로 나온 그는 페부깊숙이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였다.

산산한 1월의 울창한 숲속공기는 그 무엇에도 흐려지지 않은 수정같이 깨끗하고 맑은 대기였다. 산밑의 골짜기에서는 뭉게뭉게 차거운 안개가 일고 찬서리에 부대낀 소나무숲은 쿡쿡 상긋한 냄새를 풍기고있었다.

리덕구는 해묵은 락엽들이 두텁게 깔린 소나무와 참나무숲속을 거닐었다.

그는 새벽일찍 일어나 산새들의 지저귐소리를 들으며 산속을 거닐기를 좋아하였다.

마치 살아서 싸우는 인간이 삶의 보람을 한껏 맛보듯이.

지금 리덕구는 산새들이 떠오른 아침해에 인사를 보내듯 간간이 중단되는 경쾌한 지저귐소리를 들으며 소나무사이를 걷고있었다. 그런데 어인일인지 리덕구는 부지중 자기의 발걸음이 여느때보다 무거움을 느꼈다.

(아직까지 내 가슴속에 무엇인가 말 못할 불안의 그림자가 숨어있는가?) 하고 그는 마음속으로 생각하면서 류별나리만큼 두드러지고 억세게 생긴 오래 묵은 소나무앞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럴 때 문득 리덕구의 의식속에 아무런 련관도 없이 철없던 어린시절에 있었던 일이 회상되였다.

… 그날 마을의 행길가에 나가서 놀던 소년 리덕구는 엉엉 소리내여 울며 집으로 돌아왔다. 조천면 경찰지서장의 아들놈이 소년 덕구에게 《곰보딱지! 곰보딱지! 가라, 재수없어!》 하고 놀려대면서 쫓았던것이다.

소년 덕구는 분김에 대들었으나 발길에 채우고 너무 분해서 그만 소리내여 울며 쫓겨온것이다. 그때 어머니가 방안에서 정신없이 달려나와 왜 그러느냐고 다급히 물었다. 소년 덕구는 자초지종을 그대로 울면서 호소하였다. 어머니는 늘 어린 아들이 어디 가서 수모를 받을가봐 신경을 쓰면서 매일 새벽 마을의 샘물터에 나가 덕구의 얼굴을 씻어주군 했었다.

그렇게 하면 혹시 홍역으로 얽은 얼굴의 흠집자국이 씻겨 없어지지 않을가 기원하면서…

어머니는 덕구의 우는 사연을 듣고 펄펄 뛰면서 손목을 잡아끌고 당장 행길로 나가 왜놈아이에게 앙갚음하려고 하였다. 그때 마당에 나와있던 아버지가 (허리를 쓰지 못해서 걷지 못하였다.) 꽥 고함을 질렀다.

《그만둬! … 늘 그렇게 부모들이 편역을 들며 키워선 안돼! 이리오라!-》

어머니는 하는수없이 소년 덕구의 손목을 잡고 아버지 리근훈앞으로 다가갔다.

순간 《시라소니같은 자식!》 하고 아버지는 불이 나게 어린 아들의 귀뺨을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이놈아, 너를 모욕하고 깔보며 수모하는 왜놈자식한테 해보지 못하고 징징 울며 다녀? … 너도 사내자식이야? …》

《여보, 너무 모질구려! 면경찰지서장놈의 애새끼는 우리 애보다 5살이나 더 먹은 큰애인데 어떻게 이애가 맞서본단 말이우!》 하고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두둔하였다.

《힘이 모자라면 물고뜯으면서라도 해봐야지! … 길가에 돌멩이는 없던가! 터무니없이 모욕하고 억누르는 놈과는 죽는 한이 있어도 싸우는게 사나이야!》

아버지는 노발대발하여 고함쳤다. 아직까지 자기에게 그처럼 노하여 소리치는 아버지를 본적 없는 어린 덕구였다.

《아방!-》

어린 덕구는 그때 무엇인가를 깨달은듯 울음을 뚝 그치고 아버지앞에 무릎을 꿇고앉아 머리를 숙였다.

성널오름의 억센 소나무앞에 선 리덕구의 눈은 지금 아무런 계기도 없이 떠오른 아버지에 대한 회상으로 축축히 젖어있었다. 제주도 3. 1운동의 지도자들중의 한사람이였던 아버지는 대바르고 강직한 제주도의 남아였다.

리덕구의 꾹 다문 입가에는 서글픈 미소가 떠올랐다가 곧 보다 중요한것에 의해 밀려난듯 인차 사라졌다.

아버지! 그때처럼 지금 저를 때려주십시오! 아버지, 수천년력사를 흘러오면서 언제나 여기 우리 고향 제주도사람들이 그랬던것처럼 어려운 때일수록 조국과 고향을 지켜싸우며 자기의 몸으로 막아야 함을 한시도 잊지 않고 살아온 저, 불민한 아들 리덕구입니다. 아버지, 만약 그 길에서 잠시라도 지쳐 허둥거리거나 주저앉으면 저를 지하에서라도 그때처럼 가차없이 꾸짖고 아프게 때려주십시오! 하고 리덕구는 유난히 푸르고 억센 소나무앞에 까딱않고 서서 마음속으로 조용히 주문처럼 외웠다.

산봉우리너머 저쪽 성산일출봉쪽에서 마치 모닥불이 타오르는듯 하더니 태양이 서서히 솟아올랐다. 그러자 성널오름과 사위는 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하였다.

그날, 1949년 1월 어느날 아침에 성널오름의 유격대지휘부에는 많은 사람들이 라지오앞에 모여앉아있었다. 유격대본부에서는 아침마다 라지오에서 보내는 조국의 방송보도를 청취하는것이 일과처럼 되여있었다.

정각 9시, 라지오에서 음악이 멎자 귀에 익은 방송원의 힘차고 랑랑한 목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 보도입니다. 어제 나라에서는 인민군대 및 내무성군관들과 영웅적투사들에게 국기훈장수여식을 거행하였다.

 

국기훈장 제1급- 최용건

국기훈장 제2급- 강건, 김달삼, … 김일, 최용진, 박달, 최현

국기훈장 제3급- … 김봉률, … 오진우, … 리덕구…

영예의 국기훈장은 애국투사들의 앞가슴에 빛났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훈장을 받은 투사들과 악수를 하시였다.

김일성장군님을 중심으로 영예의 투사들의 기념촬영이 있었다.

평양에서 보내는 방송보도가 끝났으나 몇순간 주위는 숨소리 하나없이 잠잠하였다.

그 다음 사람들은 일시에 와!- 환성을 올리며 리덕구를 담벽처럼 둘러쌌다.

《대장동무! 높은 수훈을 받은 대장동무를 축하합니다!》

《축하합니다!》

《대장동무의 경사를 축하합니다!》

사람들의 목소리는 동지적인 뜨거운 축하인사의 어조로 울렸다. 유격대의 림시지휘부주위에는 바람에 설레이듯 사람들이 흥성거리고 환성소리가 퍼졌다.

《자, 대장동무를 들어올립시다!》 하고 누군가 노래라도 부르는듯 한 고음으로 웨치자 모두가 몰려와 와-와- 하고 허공으로 리덕구를 추켜올리며 떠들썩하였다.

그랬으나 리덕구는 자리에 앉아 흐느끼며 조용히 울었다.

《?! …》

떠들썩하던 대원들과 지휘관들은 일시에 놀랐다.

《아니, 이 기쁜 날 웬 일입니까. 대장동무!》 하고 말하는 껑충한 키의 한 지휘관의 목소리에는 웃음의 음조가 울리고있었다.

그러나 리덕구는 한동안 조용히 흐느끼며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이 사람들아, … 왜 대장이 울지 않겠나? … 저 멀리 평양에서 조국의 최남단 이 외진 곳의 대장의 공훈까지 헤아려… 잊지 않고 높은 수훈을 내려주었은즉…》

김로인은 눈물을 머금은채로 기쁜듯 버룩하니 웃으며 떠듬떠듬 말을 보탰다.

《어허… 얼마나… 고마운 우리 조국인가. … 조국은 싸우는 머나먼 제주도의 아들들을 잊지 않고… 이 사람들아, 잊지 말자구. 이런것이 바로 자식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어머니의 자애깊은 품이란것을 말이야!》 하고 김로인은 얼굴에 주름을 잡고 웃으면서 기쁨에 넘쳐 웨쳤다.

그러자 왁작 떠들며 웅성이던 사람들은 순간에 잠짓했다.

그때 조용히 흐느끼며 울던 리덕구가 자기를 다잡은듯 머리를 들고 기운차게 일어났다.

《유격대원동무들! 항일의 전설적영웅이신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우리 제주도에서 평양으로 간 김달삼동무의 손을 친히 잡아주시고 함께 사진까지 촬영하셨습니다. 동무들, 나는 김달삼 전 대장동무와 여기 한나산에서 작별할 때 김일성장군님을 만나뵈올 행운이 차례지거든… 우리 제주도인민들의 뜨거운 감사의 인사를 드려달라고 간곡히 부탁했었습니다. 그리고 통일된 그날 장군님을 우리 고향 제주도에 모시고싶다고! … 분명 김달삼동무는 어제 장군님께 우리 제주도 전체 인민들의 감사의 인사를 전해드렸을것입니다. … 동무들, 우리 제주도인민유격대의 전 대장이였던 김달삼동무가 받은 영광은 바로 우리 모든 유격대원들과 제주도사람들이 받은 영광이고 영예인것입니다.

동무들, 오늘은 내 일생에서 가장 기쁘고 행복한 날로 영원히 기억될것입니다! 오늘 같은 특이한 날에는 좀 울어도 무방하리라고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렸으니 모두들 리해하여주시오!》

리덕구의 격동에 찬 목소리는 신념과 의지에 사로잡힌 애국투사, 제주도의 싸우는 아들의 웨침이였다. 지금 그 어떤 비상한 힘, 신비한 힘이 그를 추동하고있는것 같았다. 그의 진정에 찬, 꾸밈없는 열정이 담겨진 목소리는 전체 유격대원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그날 조천읍습격전투에 선발된 100여명의 습격조원들앞에서 리덕구는 듣는 사람들의 가슴을 치는 흥분과 격동으로 목이 갈린 음성으로 호소했다.

《동무들! 우리의 힘겨운 유격투쟁과 그 과정에 겪은 시련과 괴로움은 그자체가 보람과 긍지에 넘친, 우리들만이 느낄수 있는 커다란 인생의 행복일것이다! … 우리에게는 무기, 탄약, 식량의 보급기지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이 길에서 싸우다 죽더라도 그것은 영원히 빛나는 죽음으로 될것이다. 동무들, 우리모두 일생토록 잊지 말자. 김일성장군님께서 싸우는 우리 제주도인민유격대원들에게 베푸신 사랑과 영예를!》

습격전투에 참가할 대오는 리덕구대장의 직접 인솔하에 조천면을 향해 험한 산을 내리기 시작하였다.

신촌리마을상공에는 만월에 가까운 창백한 달이 거의 별도 없는 검푸르고 차거운 겨울의 하늘에 높이 걸려있었다. 바다쪽에서 구슬픈 소리를 지르며 기승을 부리던 차거운 겨울바람은 마을로 거침없이 휘몰려와 집들의 이영을 와스스 들추어내고 먼지와 검불을 날렸다. 바람이 많기로 유명한 제주도에서도 이런 바람은 드물었다.

어디선지 불쑥불쑥 차거운 밤의 어둠속에서 탕-탕- 죽음의 씨앗을 휘뿌리는듯 한 총소리가 들려온다. 몸도 얼어들고 마음도 얼어드는듯 한 불안하고 음산한 동란의 제주도의 겨울밤이다.

이밤 김삼봉은 캄캄한 방안에서 잠들지 못하고있었다. 그는 옷을 입은채로 반듯이 누워 한나산에서 총잡고 싸우는 두 아들과 맏손자를 생각하고있었다. 이 음산한 겨울밤 어디에서 떨고있는지 아니면 잘못되였는지도 모를 자식들을 생각하며 잠 못 들고 뒤척거리였다.

(살아서… 어떻게 싸우며… 몸들은 상하지나 않았는지…)

잠 못 드는 이밤 김삼봉의 가슴속에는 오만가지 근심과 불안, 시름이 여울치고있었다.

(… 둘째와 막내 덕구 그리고 맏손자 순우! … 그애들은 싸움의 길에 나선이래 단 한번도 사사로이 집에 들린적이 없었지. 사내대장부가 응당 그래야지! … 그런데 막내 덕구는 자기의 큰아들이 놈들에게 무참히 학살된 가슴아픔을 어떻게 이겨냈는지? …)

김삼봉은 그 생각이 미치자 돌연 가슴이 송곳으로 들쑤시는듯 한 아픔을 느꼈다.

(비렬하고 악착한- 짐승만도 못한 놈들! … 철없는 어린애를 그처럼 악독하게 죽이다니…) 하고 생각하는 일순간 그의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해방후 한때 희망에 찬 생활이 흘러가던 김삼봉일가는 제주도에 기여든 미제에 의해 처참한 비운을 맞이했다. 일가의 남자들은 모두 집을 떠났고 가정에는 녀인들과 철없는 어린아이들만 남았다. 마을의 다른 집들에도 젊은 남자들은 거의나 없었다.

마을에서는 무시무시한 학살만행의 광란이 계속되고있었다. 밤을 자고나면 여기저기 새로운 시체들이 늘어났다. 그 시체들속에는 마을사람들도 있고 낯모를 다른 마을사람들도 있었다.

뜨락의 컴컴한 돌울타리쪽에서 현줄을 튕기듯 고즈넉이 울어대는 이름모를 밤새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모질고 험악한 동란의 세월일수록 기운을 잃어서는 안되지! 지금 집안의 며느리들과 손자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고있는데…)

김삼봉은 이윽고 불안과 근심에 내맡겼던 자신을 다잡기 시작했다.

(그래, 집안의 모두가 나를 쳐다보고있어! …) 하고 그는 자리에서 불쑥 일어나 창가림을 열려고 서슴서슴 창가로 다가갔다.
창가림을 벗기자 달빛은 이미 오래전부터 지키고 서서 그러기를 기다리고나 있었던듯이 방안으로 흘러들었다.

축축한 습기와 랭기가 떠도는 뜨락은 훤하였다. 거기에는 한쪽이 검고 다른 한쪽은 은빛으로 환히 밝혀진 가지들을 다스려주지 못한 귤나무와 감나무가 사색에라도 잠긴듯이 서있고 그밑에는 꽃대신 줄기와 가지만 남은 꽃나무들이 은빛으로 번쩍이고있었다.

김삼봉은 문득 깊고도 짧은 한숨을 내쉬며 검푸른 하늘을 쳐다보았다.

별찌 하나가 린빛의 꼬리를 끌면서 한나산쪽으로 살같이 떨어져내렸다.

(이 추운 겨울밤… 어느 산속에서 무엇을 먹고 잠은 어디서 자며 어떻게들 지내고있는지? …)

김삼봉은 살틀한 정으로 엮어진 자식들을 줄곧 생각하였다.

달은 밝으나 찬바람이 불어 몹시 싸늘한 겨울밤이다. 멀지 않은 집들너머 밭과 행길쪽에서 호각소리가 들려오는듯 하였다. 아마 그것은 착각일것이다.

지금은 땅도 하늘도 제주도의 온 산천이 분노와 울분으로 치를 떠는 시절이니 그렇게 들렸을지도 모른다. 김삼봉은 건너방에서 증손녀의 칭얼대며 보채는 소리와 뭐라고 달래는 손자며늘애의 말소리가 들리자 방문을 열고 나와 사랑채로 갔다.

그가 들어서자 어두운 방안에 누워있던 맏며느리와 손자며늘애가 일어나 앉았다. 그들도 불안하고 어수선한 이밤 잠들지 못하고있었던것이다.

《어멍… 이 밤중에 어떻게?》 하고 맏며느리 신씨가 조용히 들어서는 김삼봉에게 어딘지 열에 지치고 앓던 사람같은 목소리로 나직하니 말했다.

《웬 일인지 잠이 오지 않는구나. 참, 너희들도 마음이 어수선할테지, 그러나…》

《할멍! 저희들은 그저 산에서 싸우고있는분들에 대한 생각뿐이예요. 몸성히 잘들 싸우고있는지, 혹시 이 추운 겨울밤에 앓지나 않는지 걱정이군요. 집안의 저희들이야 무슨 고생이겠어요!》 하고 맏손자며느리 강정량이 또렷하고 잘 울리는 목소리로 빠르게 말하였다.

《고맙다. 손주며늘애야! 오냐, 그래야지. 하지만 사처에 무고한 사람들의 피가 흐르는 이 험악한 시절에… 우리모두가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하느니라. 미국양놈들과 그 앞잡이놈들이 짐승의 무리처럼 분별을 잃고 날탕치는 때이니 언제 무슨 일이 닥쳐들지 모른다!》

김삼봉은 속깊이 품고있던 생각을 침착하게 피력하였다.

맏며느리 신씨는 강의한 표정을 지을뿐 말 한마디 없는데 상냥하고 마음씨 고운 손주며느리 강정량이 언제나 그러하듯이 또렷하고 잘 울리는 목소리로 응수했다.

《할멍! 우리는 이미 강심을 먹고있으니 너무 걱정마세요. 할멍, … 밤도 깊어가는데 어서 방에 가서 쉬세요!》

《오냐, 고맙다. … 그런데 둘째네와 셋째네 식구들은 어떻게 하고들있는지… 더우기 셋째네는 진우가 놈들에게 학살됐으니 상심이 이만저만 아닐텐데…》 하고 김삼봉은 허공 어딘가를 바라보며 나직이 탄식했다.

《그래요, 그런 엄청난 불행을 겪었으니 얼마나 비통하겠어요. 저는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살이 떨리고 눈물이 나와요!》

손주며느리 강정량은 왈칵 눈물이 쏟아지려는것을 강잉히 참고 소리없이 어깨를 떨며 흐느꼈다.

《아무래도 내가 당분간 셋째며늘애와 함께 있어야 할가부다. 그래, 내가 그리로 가겠다!》

언제나 사려깊고 인정많으면서도 승벽이 세고 강직한 김삼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멍!》

지금까지 말없이 조용히 앉아있던 과묵한 맏며느리 신씨가 놀라듯 나직이 소리치며 만류해나섰다.

《이 깊은 밤에… 바람도 세고 날씨도 찬데 날이 밝은 다음에 가시지요!》

《아니다. 멀지도 않고 늘 다니던 길이니 걱정하지 말아라!》 하고 김삼봉은 그 깊이를 가늠할수 없는 엄하고 굳센 어조로 뇌이고 밖으로 나왔다.

인생고초속에 다져진 강직한 성품, 일단 한번 마음먹은 일은 기어이 하고야마는 김삼봉의 성질을 잘 알고있는 맏며느리 신씨와 손주며느리 강정량은 더이상 막지 않았다.

밖의 어둠에 묻힌 골목길에는 바다로부터 건건하고 축축한 바람이 치불어오고있었다.

허우대가 큰 김삼봉은 치불어오는 바다바람을 맞받아 허리를 구부정하고 어스름속을 늙은이의 걸음걸이로 더벅더벅 걸어갔다. 예전처럼 김삼봉의 집에서 마차길을 건너 남쪽에는 둘째아들 좌구네일가가 살고있었고 그 사랑채에는 셋째 덕구의 처자가 살고있었다.

김삼봉은 둘째 좌구의 집뜨락으로 들어섰다. 안채와 사랑채모두가 깊은 밤의 정막속에 잠겨있었다.

모두들 잠든것 같았다. 김삼봉은 나직이 기침소리를 내며 사랑채로 다가갔다. 그때 안에서 문득 셋째며느리 량후상의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누구세요?》

《오, … 내… 어멍이다!》

김삼봉은 돌연 자기도 모르게 가슴속 밑바닥에서 누르고 눌렀던 슬픔이 솟구쳐오르는것을 느끼며 목이 멘 소리로 대꾸하였다.

《아이! 이 깊은 밤중에 어멍이 어떻게 오시나?!》

안에서 놀라는 목소리…

김삼봉이 문열고 들어서니 방안에는 둘째아들 좌구네 가족들모두가 사랑채에 모여있었다. 아마 생때같은 아들을 잃은 상처를 안고 슬픔에 잠긴 덕구의 안해 량후상을 위로하느라 사랑채에 모여 함께 밤을 보내고있는 모양이였다.

《어멍! 우리들 걱정때문에 이 밤중에 오셨군요. 어멍, 그러지 않으셔도 되실걸…》

량후상은 7살짜리 맏아들을 잃은 아픔과 슬픔이 되살아나는듯 울먹이며 밤길을 걸어온 시어머니의 손을 꽉 잡았다. 그리고는 끝내 참아내지 못하고 흐느끼며 조용히 울음을 터뜨렸다. 의식의 한끝에서는 시어머니앞에서 이래서는 안된다고 리성은 꾸짖고있었지만 량후상은 그냥 울었다.

리성의 목소리와는 관계없이 감성은 감성대로의 자기 힘이 있었던것이다.

어린 자식을 잃은 모성의 슬픔의 힘은 너무나 강했던것이다.

《며늘애야, 이제는 그만 그쳐라!》 하고 김삼봉은 자기의 눈에도 눈물이 차오르는것을 느끼며 목갈린 소리로 엄하게 말했다.

《어…멍! …》

《얘야, 혹시 우리 가정에만 이런 슬픔과 아픈 상처가 있다고 생각하는건 아니냐?》

《어멍! 그런건 아니지만… 참고 이겨내기가…》 하고 량후상은 괴로움에 모지름을 쓰며 입술을 깨물고 흐느꼈다.

김삼봉은 눈물을 삼키며 한참동안 침묵하고있었다.

《며늘애야! 우리모두의 가슴도 찢어질듯 아프다. … 피눈물이 흐른다! 하지만 얘야, 지금 온 제주땅이 불길에 잠기고 무서운 재난을 겪고있다. 재난속의 제주땅 어느곳에서나 말로는 다할수 없는 고통과 … 사람의 피가 흐르고있지 않느냐! 여기 제주땅 어느 가정인들 이런 참화를 겪지 않는 집이 있겠느냐!》

김삼봉은 까딱하지 않는 그러면서도 뜻이 깊은 표정을 띠고 의미심장한 어조로 말하였다.

《어멍! 저도 알고있어요. … 알고있어요! 하지만… 하지만 너무도 괴롭고 아프군요!》 하고 량후상은 거의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나직이 지르며 몸을 떨었다. 그 녀자는 종시 시어머니앞에 엎드려 흐느끼며 열에 뜬 목소리로 련속 부르짖었다.

《어멍! 어쩌면 철없는 그 어린것을 총으로 쏘아서… 그놈들이 아버지를 찾아가라고 철없는 애를 산으로 떠밀어보내고는 숱한 놈들이 총을 쏘아… 어쩌면 그렇게도 비렬하고 악랄할수가 있어요!》

《며늘애야, 그 인간백정놈들도 사람이려니 하고 생각지 말아라! 그놈들이 앞으로 더 악착하게 무슨짓을 감행할지 모른다. 그런만큼 우리모두는 억세게 강심을 먹고 살아나가야 한다.》

김삼봉의 침착한 그러면서도 비장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에는 무엇인가 기운을 솟게 하는 힘이 있었다.

《어멍! 알겠어요. … 어멍, 제가 그만 자신을 걷잡지 못하고… 안됐어요!》 하고 량후상은 자기의 감정을 수습한듯 머리를 들고 몸을 일으켰다.

《오냐. 고맙다!》

그럴 때 불시에 조천읍쪽에서 벼락치는듯 한 자지러진 총성과 수류탄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따라 마을의 저쪽 톱날처럼 들쑥날쑥한 집들너머에서 화광이 번쩍거리고 련속 울리는 총성은 그칠줄 모르는 재봉침소리처럼 박기도 하고 엮기도 하고 누비기도 하는것 같았다. 간간이 꽝-꽝- 수류탄터지는 소리가 이곳 신촌마을까지 진동하는듯 하였다. 그 다음 일시에 쏘아대는 보총사격의 화광이 바늘같이 뾰족뾰족 솟아오르고있었다.

《얘들아, 저 총소리를 무심히 듣지 말아라! 저건 틀림없이 산에서 내려온 유격대가 놈들을 족쳐대는 소리일게다. 그래… 그래, 저 총소리는 놈들에게 무참히 아들을 잃은 애의 아버지와 유격대원들이 복수하는 총성이 분명하단 말이다! … 너희들에게는 그렇게 생각되지 않느냐!》 하고 열기있게 뇌이는 김삼봉의 눈은 불이 붙는듯 번쩍거렸다.

《옳아요. 그럴거예요! … 그럴거예요!》

량후상은 눈물을 머금고 격동적인 어조로 공감하였다.

방안의 사람들은 한동안 말없이 조천읍쪽에서 자지러지게 울리는 총소리에 귀를 기울이고있었다. 얼마후 콩볶듯 울리던 총소리는 뚝 멎었다.

이따금 산발적인 총성이 탕-탕- 울리더니 그마저 멎고 어둠속의 사위는 고요하였다.

지금 김삼봉과 그의 일가 사람들은 방금 울린 총성들이 유격대가 적들을 족치는 소리라는것을 생각했으나 리덕구대장의 직접 지휘하에 조천면 경찰지서와 괴뢰군대대를 습격소탕하는 전투라는것을 정확히 알지 못하였고 또 알수도 없었다.

어디선가 새벽닭이 울었다.

《자, 이제는 잠시라도 눈들을 붙이자꾸나. … 벌써 날이 지새려나보다!》 하고 김삼봉은 류달리 생각깊은 목소리로 말하면서 먼저 자리에 누웠다.

그는 고향땅 제주도에 미제와 그 주구들이 몰아온 재난의 크기를 알고있었다.

수난의 비바람속에 상처입고 슬픔받고 고통당하고 괴로움에 시달리며 오랜 세월 살아온 그는 로년의 경험과 육감으로 이제 놈들이 더욱 발광하며 별별짓을 다하리라는것도 느끼고있었다. 김삼봉은 이 험악하고 괴로운 때에 죽은 남편과 맏아들의 묘소를 찾아가고싶은 생각이 들었다. 집안에 괴롭고 불행한 일이 생길 때마다 김삼봉은 살아있을 때 그렇게도 강직하고 담찼던 남편과 효성이 지극했던 맏아들의 묘소를 찾아가 마음속의 고통을 털어놓군 했던것이다. …

날이 푸름푸름 밝아오는 이른새벽에 김삼봉은 일가의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집을 나섰다. 밖에서는 눈이 내리고있었다. 제주도에서는 지금의 1월이 가장 추운 때라고는 하지만 눈이 내려와 쌓이는 때는 거의나 없다. 김삼봉은 마을에서 7~8리가량 떨어진 빌레못가 둔덕에 있는 남편과 맏아들의 묘소쪽으로 걸어갔다. 준엄한 제주땅에 새해의 첫눈이 펄펄 날리며 그냥 내리고있었다.

빌레못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산너머 골짜기로 유격대원들이 행군해가고있었다. 그들은 불의에 적들을 치고 빠지는 전법으로 조천면 경찰지서와 괴뢰군대대를 기습하고 철수하는 유격대원들이였다. 전투는 적들이 예상치 못했던 시간에 시작되여 정신을 차릴 사이도 없이 끝났었다. 되게 두들겨맞은 적들이 도망치고 갈팡질팡하고있을 때 유격대오는 로획한 무기와 탄약, 후방물자들을 가지고 지금 한나산쪽으로 강행군하고있는것이다.

《량동무!》 하고 유격대원들과 함께 빠른 기동으로 철수하던 리덕구는 대오속에서 누군가를 찾았다.

《네!》

엄격한 표정의 젊은 지휘관이 민첩하게 리덕구대장에게 달려왔다.

《내 잠간 들려보고 갈 곳이 있소. … 량동무가 대오를 제2지점까지 인솔하오. 거기에 도착하면 휴식시키시오. 내 곧 뒤따라 가겠소!》

《대장동무, 이제 놈들이 더욱 발악하겠는데… 인원을 몇명 데리고 가지 않겠습니까?》 하고 30대 초반기로 보이는 젊은 지휘관은 씁쓸한 담배내를 풍기며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그럴 필요없소. 여기서 멀지 않은 곳이고… 잠간이면 되오!》

단호한 어조로 잘라말하고나서 리덕구는 즉시 잡관목을 헤치고 빌레못가쪽으로 가는 산길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그는 무엇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산등성이를 넘고 풀숲을 헤치며 빌레못가 둔덕, 아버지와 큰형의 묘소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하늘에서는 이해의 첫눈이, 흰눈송이들이 서로 부딪치면서 미묘한 가락을 울리며 쏟아져내리고있었다.

(나는 이제 그렇게도 외적들을 증오하고 그렇게도 견결하고 강직했던 아버지와 큰형에게 마음속의 말을 하고 또 하리라! … 아버지, 큰형님, 기뻐하십시오. 우리 제주도인민유격대 대장이였던 김달삼이 절세의 애국자 김일성장군님을 만나뵈운 행운을… 장군님께서는 평양으로 간 김달삼의 손을 따뜻이 잡아주시고 사진까지 함께 찍어주셨습니다! 저는 오랜 세월 대대로 섬놈들이라고 천대와 수모만을 받아오던 우리 제주도사람들에게 베푸신 사랑과 은정이 너무도 크고 고마워 대원들앞에서 그만 눈물을 쏟으며 울었습니다. 아버지, 그리고 큰형님, 기뻐하십시오! … 응당 할 일을 한 저에게 조국에서는 높은 영예의 표창을 안겨주었습니다. 이름난 항일투사들과 영웅적투사들에게 수여하는 그런 영예의 표창을!)

리덕구는 자기의 가슴속에서 후더운 피같기도 하고 뜨거운 열같기도 한것이 세차게 뒤번지는것을 느끼며 달리듯 빠르게 걸어갔다.

(아버지, 큰형님, 꼭 전해드릴 경사가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 저를 끝없는 사랑과 엄한 꾸짖음과 헌신으로 이끌어주고 키워주며 고무해주던 아버지와 큰형님, … 자주 찾아와보지 못해 죄송합니다! …)

아버지와 큰형의 묘소가 있는 빌레못가의 둔덕에 이르렀을 때 그는 주춤 멈춰섰다.

누군가 흰옷입은 녀인이 먼저 묘소앞에 앉아있는것을 보았던것이다.

(?! …)

잠시 서서 앞을 주시하던 그는 돌연 가슴이 후두둑 뛰는것을 느꼈다.

푸름히 밝은 이른아침의 눈발속에서 그는 어머니를 알아본것이다.

《어머니!-》

리덕구는 나직이, 그러나 가슴속에서 절절히 울려나오는 목소리로 소리치며 무엇엔가 발을 걸채면서 앞으로 달려나갔다.

순간 무슨 생각에 옴해있던 흰옷입은 어머니는 조용히 아들쪽으로 머리를 돌리였다.

(셋째가?! … 분명 덕구인가?)

어머니는 꿈인지 생시인지 믿어지지 않는 표정으로 달려오는 아들을 바라보고있었다.

《어머니! 저 덕구입니다!》 하고 리덕구는 어머니에게로 가까이 다가가 머리숙여 절을 하였다.

《정녕, 너 덕구이구나!》

《어머니!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 돌봐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리덕구는 마음고생으로 더 늙고 쇠약해진 어머니를 눈물겹게 바라보았다.

(수많은 자식들과 일가의 숱한 걱정거리를 걷어안고 한생을 고생속에 살아오신 어머니!)

《그러지 말아라. 내 고생이야 산에서 피흘리며 싸우는 사람들에게 비기겠니? … 그래 어디 다친데는 없느냐?》 하고 어머니는 조용하면서도 자애가 느껴지는 음성으로 아들에게 물었다.

《저는 보시는것처럼 건강합니다. 어머니, 우리는 어제 깊은 밤에 조천읍을 들이치고 지금 산속의 기지로 철수해가는 길입니다!》

《그래!》 하고 어머니는 대견한듯 초연에 그슬리고 해볕과 바람에 거멓게 된 사랑하는 아들을 자애에 찬 눈길로 찬찬히 여겨보았다.

《어머니! 기뻐하십시오! 엊그제… 1월…》

리덕구는 아버지와 형님의 묘소앞에 하고싶었던 경사소식을 어머니에게 그대로 전하였다.

《어머니! 이처럼 장군님께서는 우리 제주도사람들에게 크나큰 영광을 안겨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유명한 항일투사들과 영웅적애국투사들의 이름과 함께 수훈자명단에… 신문과 방송으로 전국에 알려졌습니다!》

《큰 경사로구나. 지금 여기 묘소의 아버지와 큰형이 얼마나 기뻐하겠느냐! 그래, 정말 우리 고향 제주땅이 생겨 아직 여기 섬사람들이 그런 영광을 받아본적이 없었지! … 두고두고 제주도사람들이 옛말처럼 전해가리라고 생각되는구나!》 하고 어머니는 눈굽을 찍었다.

리덕구는 손목시계를 보고 아쉬운듯 한 표정을 지었으나 단호히 일어섰다.

《어머니, 전 이만 떠나겠습니다. 그런데 마지막부탁이 있습니다!》

《말해라. 너의 부탁이 뭐냐?》

《어머니, 되도록 빨리 여기를 떠나 다른 고장으로 피신하셔야겠습니다. 이제 놈들은 더 잔악한짓을 감행할것입니다. 유격대장의 어머니라고 놈들은 처형할것입니다. 제게는 600만원의 현상금이 붙어있으니까요!》

어머니는 한동안 말없이 앉아있었다. 이윽고 《셋째야!》 하고 나직이 무겁게 뇌이는 어머니의 얼굴 입모서리에는 엄한 주름살이 잡혀있었다.

《너와 함께 산에서 싸우는 사람들의 부모들은 다 피신했느냐?》

《어머니, 수많은 대원들의 부모들과 가족들은 아직…》 하고 리덕구는 말을 맺지 못했다.

《그런데두 나만은 피신하라는거냐?》

《어머니!-》

《아니다, 유격대 대장의 어머니인 내가 어떻게 나만 살겠다고 피신하겠느냐? 그래서는 안되느니라! … 셋째야, 옳은 일에서는 우리모두의 죽음을 각오하자!》

어머니의 조용하고 진정에 찬 말속에는 무엇인가 심장을 흔드는 비상한 힘이 있었다.

《어머니! 장하십니다! … 장하십니다!》 하고 리덕구는 너무도 감동되여 눈물을 머금고 어머니앞에 엎드려 큰절을 하였다. 그는 자애롭고 현철한 어머니를 가졌음을 자랑스럽게 가슴에 새기며 마음속으로 뜨겁게 거듭 뇌이였다.

(장하십니다! … 어머니!)

자식앞에 선 어머니는 언제나 스승 아닌 스승이라고 누군가 얼마나 정확히 말했던가! …

리덕구는 처음으로, 성인된 이후 처음으로 어머니앞에서 소리없이 울었다. 가슴이 후련해지는 울음이였다.

김삼봉은 잠시 엄한 기색으로 침묵하고있었다.

《머리를 들어라! … 얘야, 너와 함께 생사를 같이하는 대원들의 어머니들모두가… 제주도의 어머니들모두가 다 그런 녀인들임을 잊지 말아라!》 하고 어머니는 과장없는 평범한 어조로 깨우쳐주듯 말했다.

《어머니! … 말씀을… 새겨듣고… 있습니다!》

리덕구는 목메인 소리로 띠염띠염 뇌이며 눈물을 떨구었다.

《셋째야, 눈물을 거두어라! … 유격대 대장도 우느냐?》

《어머니, 이건 눈물이 아닙니다! … 흔한 눈물이 아닙니다!》

《자, 이젠 그만 떠나거라! 우리 집안사람들은 어떻게든 이 시련과 불행을 우리들대로 이겨낼테니까. 너는 오직 나라를 위한 싸움에 심혼을 바쳐라! … 이건 내 말만이 아닌, 여기 묘소에 잠들어있는 너의 아버지와 큰형의 부탁이기도 하다!-》

《어머니, 그럼…》

리덕구의 목소리는 목안에서 잦아들고말았다. 늙고 병약한 몸으로 온 일가를 돌보는 어머니, 이제 어떤 재난이 닥쳐올지 모를 어머니와 아무런 기약도 할수 없는 리덕구의 아픔은 너무도 컸던것이다.

《어머니!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하고 리덕구는 허리를 깊숙이 숙이고 작별의 절을 하였다.

《몸성히 잘 싸워라! … 함께 싸우는 사람들을 잘 돌보고… 그들모두가 제주도의 아들들이 아니냐!》

어머니는 묘소앞에 그냥 서서 아들을 바래웠다.

리덕구는 빌레못가의 둔덕을 떠나 수림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다시한번 뒤돌아보았다.

흰옷입은 늙으신 어머니는 묘소앞에 서서 줄곧 이쪽을 바라보고있었다.

리덕구는 이윽고 울창한 숲속으로 들어섰다. 눈발사이로 바라본 흰옷입으신 어머니… 그것이 리덕구의 생애에서 마지막으로 본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가장 가까웠던 어머니의 모습이였다.

 

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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