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1 회)

제3편 성전

7

 

제주도인민유격대에 대한 적들의 《토벌》공세는 날이 갈수록 더욱 악랄해지고있었다. 한개 전쟁이라도 치를만 한 대규모병력을 제주도에 끌어들인 적들은 미항공대와 함선들의 막강한 지원을 받으며 참빗으로 훑듯이 한나산을 샅샅이 뒤지면서 련일 발광적으로 달려들었다.

제주도인민유격대는 이러한 류례드문 엄혹한 정세속에서 그때그때 정황에 맞게 소부대로 분산하여 적들의 뒤통수를 치기도 하고 때로는 삽시에 집결하여 적의 기본대렬을 기습하고는 바람처럼 사라지기도 하면서 피어린 성전을 벌리고있었다.

그해 2월, 리순우가 지휘하는 소부대는 적련대본부를 불의에 들이치고 철수하던중 적들과 뜻밖에 조우하였다. 소부대는 불의에 조우한 적들과 결사의 각오로 전투를 벌렸다. 적들은 력량상의 우세를 믿고 유격대의 10여명의 소부대가 차지한 산등성이를 둘러싸고 포위환을 좁히고있었다.

적기관총이 쏘아대는 웅글은 소리, 사방에서 일제사격으로 쏘아대는 미국제기관총의 째는듯 한 울부짖음, 이따금 터지는 유격대 소부대의 대응사격소리…

퓨우우우- 총탄의 요란한 휘파람소리가 날아왔다가 청각에서 벗어져나가면서 픽- 하고 끊어져버렸다. 쑤시는듯 한 날카로운 총성이 콩볶듯 울리고 불시에 귀가 멍멍해지면서 화약내가 코를 찔렀다.

리순우는 지금 이 시각 운명이 완전히 정해진 이상 뒤로 물러설 길이 없다는것을 알고있었다. 때문에 빠져나갈 출로와 행동방향을 신속히 결정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주위를 예리하게 살펴본 그는 순간에 한가지 가능성을 찾아냈다.

적들은 바싹 마른 잡관목숲을 의지삼아 몸을 숨기고 한발자국 한발자국 죄여들고있었다.

《뚜루룩 뚜루룩 따따 뚜루룩…》

적들이 쏘아대는 미국제기관총이 련속 불을 토하고있었다.

(그렇다. 잡관목숲에 불을 지르자! … 적들이 몰켜있는 저기에 불을 지르면 놈들은 당황망조하여 부상당하거나 전투력을 상실할것이다. 그럴 때 대원들을 그쪽으로 빠져나가게 하자.)

마침 바람은 잡관목숲의 적들쪽으로 세차게 불고있었다.

《동무들! 매 사람이 사격을 중지하고 불뭉치를 만드시오!》 하고 리순우는 나직이 소리쳤다.

그런 다음 그는 동안을 두었다가 순간에 떠오른 전투구도에 따라 바람을 타고 자기가 만든 불뭉치를 던지면서 침착하게 웨쳤다.

《불뭉치를 일시에 적들이 있는 잡관목숲으로 던졋!-》

그러자 10여개의 불뭉치가 화염을 날리며 적들이 다가드는 잡관목숲쪽으로 날아갔다.

리순우는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바람아, 더 세차게 불어라! 더 세차게! … 너도 우리 제주도바람이 아니냐!)

적들이 다가오는 바싹 마른 잡관목숲은 삽시에 욱-욱- 무섭게 소리를 지르며 타번지기 시작하고 적들속에서 아우성소리가 어지럽게 들려왔다.

그 순간을 기다렸던듯 리순우가 즉시에 소부대성원들에게 단호한 목소리로 명령하였다.

《불길방향에 일제사격으로 적들을 제압하면서 빠지라.》

리순우는 소부대성원들이 일제사격을 퍼부으며 달려나가게 될 그 순간을 위하여 적들이 다가드는 왼쪽 소나무숲쪽으로 달려가 엎드렸다. 거기서 그는 적들에게 사격을 개시했다. 그러자 순우가 엎드린 소나무숲쪽으로 적들이 쏘아대는 총알들이 집중되기 시작하였다. 북이라도 두드리는것 같은 적기관총의 급사격이 자지러지게 탕탕 울리고 그의 머리우로 핑핑 아츠러운 금속성을 울리며 지나갔다. 뒤따라 적들이 순우쪽으로 내던지는 수류탄이 흙덩어리와 소나무가지와 솔잎들을 날리며 꽝-꽝 터졌다. 적들의 급사격이 순우에게 집중된 바로 그 순간 소부대 10여명 대원들이 벌떡 일어나 일제사격으로 불타는 잡관목숲쪽의 적들을 제압하면서 달려나갔다.

《리순우동지!》 하고 애젊은 대원이 내달려가며 챙챙한 고음으로 웨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빨리- 따라- 오십시- 오!》

그러나 순우는 소부대가 완전히 빠져나갈 때까지 민첩하게 좌우로 이동하면서 적들을 향해 총탄을 퍼부었다. 악에 받친 적들은 련속 순우쪽에 기관총련발사격을 하였고 수류탄이 날아와 가까이에서 폭발했다. 그 요란한 소음은 의식도 지각도 모두가 일시에 뽑아버리는것 같았다.

순우는 적들을 향해 련발사격을 퍼붓고 즉시에 돌아서서 소부대가 빠져나간 불탄 잡관목숲쪽으로 내달렸다. 그 순간 그는 갑자기 무엇인가 자기의 다리를 후려치는것 같은 강한 타격을 느꼈다. 순우는 신음소리를 씹어삼키며 그 자리에 모재비로 쓰러졌다. 뒤에서 날아온 적들의 총알이 그의 오른쪽다리를 꿰뚫고 지나간것이다.

순우의 찢어진 바지가랭이짬으로 앵두처럼 빨간 피줄기가 뿜어나왔다.

총성은 잠시 멎었다. 산속의 적막속에 역한 화약내가 떠돌고 심한 출혈로 순우의 의식은 가물거렸다. 그는 자기의 희미해지는 의식을 다잡으려고 애썼다.

(내가… 이렇게 여기서 죽는단 말인가? … 죽을 때는 죽더라도 좀더 싸우다가 죽어야겠는데…)

순우가 쓰러진 뒤쪽에서 괴뢰군놈들이 뭐라고 욕지거리를 하며 다가오고있었다. 순우는 부상당한 다리의 동통을 누르느라 모지름을 쓰면서 적들에게 총을 겨누었다. 적들이 쓰러진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왔을 때 순우는 불의에 사격했다. 적들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기도 하고 놀라 황급히 물러갔다. 뒤따라 사방에서 멎었던 총성이 일제히 다시 울리기 시작하였다. 순우는 혼미해지는 의식을 다잡으며 다가오는 적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그때 돌연 순우의 가까이에 수류탄이 날아와 터졌다. 푸실푸실한 흙덩이들과 락엽들이 분수처럼 솟아오르고 순우는 바위밑 홈채기로 굴러떨어졌다. 가까이에서 적기관총이 뚜루룩거리고 탄알들이 획획 날아와 박히였다. 그러나 리순우는 총소리를 듣지 못했다. 가물가물 사라져가는 어렴풋한 의식속에서 그는 무엇인가 안타깝고 서글프고 괴로운감을 느끼고있었다. 그러다가 모든것이 사라지고 캄캄해졌다.

드디여 총성은 멎었다. 얼마후 의식잃고 쓰러진 순우에게로 조심조심 다가온 괴뢰군하사관놈이 악에 받친 목소리로 고함을 질러댔다.

《손들엇!》

《…》

불편한 자세로 홈채기에 쓰러진 리순우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그놈은 죽었는가? …》 하고 서두르지 않는 걸음으로 다가온 괴뢰군 소령이 말상의 하사관에게 물었다.

《글쎄요. 이놈은…》

말상의 하사관놈은 기다란 허리를 굽혀 순우에게로 기웃하더니 질겁해서 후닥닥 뒤로 물러났다.

《지독한 이 폭도놈이… 아직 살아 숨쉬고있습니다요!》

《살아있다고?! …》 하고 나직이 놀라 소리치는 괴뢰군 소령의 얼굴에는 웬 일인지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마음이 비꼈다가 곧 사라졌다. 뒤로 물러났던 말상통의 하사관놈은 의식잃고 쓰러진 순우에게 엠완총을 들이대고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개자식! 목숨이 질기기도 하다. … 네놈을 내가 죽여주지!》

《쏘지 말앗! … 끌고 가자. 이제 정신을 차릴테니까!》 하고 소령은 하사관놈을 제지시키며 나직이 명령했다.

《아니? … 허소령님, 이런 악질폭도놈을 살려두어 뭘 합니까요? … 이따위 폭도놈은 제때에 징벌해야지…》

말상의 하사관놈은 못마땅한듯 게두덜거리였다.

《그만 지껄여라! … 죽이는건 아무때나 할수 있는거야!》 하고 허소령은 얼굴을 찌프리고 사납게 소리쳤다.

제주도출신의 허소령은 쓰러진 리순우를 벌써부터 알아보았었다. 그들은 해방전 일본에 건너가 전문학교시절에 알게 된 사이였다. 그 시절에 허소령은 순우의 두해 선배였으나 같은 조선사람, 한고향사람으로서 서로 마음이 통하여 가까이 지냈었다.

허소령은 지금 정신잃고 쓰러진 순우를 앞으로 어떻게 처리할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명확한 결심도 없었다. 총성이 멎은 격전장의 사위는 죽음과도 같은 무거운 정적속에 잠겨있었다.

불탄 잡관목숲, 거뭇하게 탄 소나무가지들의 흔들림, 바람에 날리는 락엽들과 매캐한 재가루…

괴뢰군놈들은 리순우를 산아래로 끌고 내려갔다.

그날 밤에 놈들은 산아래 장촌마을에서 하루 묵었는데 리순우는 새벽녘이 되여서 의식을 차렸다.

(여기가 어딘가? … 지금 내가 어디에 와있는가?) 하고 그는 한껏 잠에 몰려 쓰러져자다가 깨여난듯이 자기 주위의 사물을 알아보려고 애쓰면서 혼자소리로 뇌였다. 온몸은 맥 하나 없이 나른하였다.

리순우는 자기가 두손을 묶이운채 불타다 남은 인적없는 산간마을 외딴집의 허청간 나무단우에 누워있음을 알았다.

(음, 그런즉 내가 의식잃고 놈들에게 끌려 여기까지 왔는가…) 하고 그는 잠잠히 누워 생각했다.

《어, … 이 폭도놈이 마침 정신을 차렸군. … 일어서라! … 네놈이 푹신하게 깔고있는 그 나무단을 가져가야겠다!》 하고 머리칼과 눈섭이 불에 그슬린 괴뢰군사병놈이 발길로 차서 순우를 일으켜 세우면서 련속 지껄이였다.

《네놈을 불태워죽일 나무단이야! 네놈이 산우에서 어제 우리 사람들을 불태워죽였으니 그 값을 톡톡히 치러야지! … 개자식! …》

머리칼과 눈섭이 불에 그슬린 괴뢰군사병놈은 순우가 깔고 누웠던 나무단을 어디론가 날라갔다.

순우는 맨땅우에 앉아서 그놈이 나무단을 날라가는 곳을 침착하게 살펴보았다.

괴뢰군놈들은 외딴집 뜨락 건너편의 자그마한 공지에 나무단을 쌓아놓고있었다.

(음… 놈들이 한개 중대가량이 녹아났으니 그 앙갚음으로 나를 불태워죽이려나보군.) 하고 리순우는 별로 놀라지 않고 태연히 생각하였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만 죽음을 앞둔 이 시각 이처럼 태연하고 마음이 편안함에 순우는 자신도 놀라웠다.

(허, 그런즉 내가… 동네늙은이들이 늘쌍 외우던 호걸풍의 대장부인가! …)

순우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 꿈을 꾸는것도 아니고 잘못 생각하는것도 아니다.

죽음앞에 서니 모든것이 더욱 명백해진다. 조국을 위한 피어린 성전에서 적들과 싸우다 전사하는것은… 영예로운 죽음이 아닌가. 굴할줄 모르는 우리, 제주도아들들의 넋은 없어지지 않을것이다. 그래… 그 넋은 후대들의 정신속에 살아있을것이다. …

괴뢰군놈들은 한편에서는 나무단을 쌓느라고 분주탕을 피우고 다른쪽에서는 외딴집뜨락가까이의 뾰족바위우에 주먹만 한 동그란 돌을 올려놓고 총으로 쏘아맞출내기를 하면서 벅적 떠들어대고있었다. 그런데 개개명창으로 어느 한놈도 목표를 명중하지 못했다. 차례로 나서서 연방 쏘았으나 모두가 어방없이 빗나갔던것이다.

그때 문득 껄껄 조소하는것 같은 통쾌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

괴뢰군놈들은 모두 일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헛간뒤 버성긴 울바자에서 체포되여 두손을 묶이운 순우가 배포유하게 경멸하듯 큰소리로 웃고있었다.

《뭐야! 이놈아, 웬 웃음이야! … 빨리 죽고싶어 안달이야?》

《허, 이제 불타죽을 놈이 웃어? … 무사태평한 놈이로군!》

《미친게 아니야? … 정신이 빠져나가 헛소리치는게야!》

괴뢰군놈들은 중구난방으로 지껄여댔다.

순우는 그에는 개의치 않고 여전히 거리낌없이 웃었다.

《여, 솜씨들이 그게 다야? … 나도 그 총쏘기놀음에 끼워주지 않겠는가? … 내 한번 명사수솜씨를 보여주지!-》

순우는 태연한 기색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힘겹게 비청거리며 놈들이 모여선 곳으로 걸어갔다. 기실 그는 보총으로 어떠한 거리에서 어떠한 표적이든지 실수없이 쏘아 떨어뜨릴수 있는 으뜸가는 명사수였다.

《뭐야? … 당장 불타죽을 놈이 사격놀음에 끼워달라구? … 개자식이 미쳤군!》 하고 표독하게 생겨먹은 최중위가 순우를 쏘아보며 턱을 들까불었다.

《여보 중위! … 죽을 때는 죽더라도… 나도 그 사격놀음에 끼워보자구!》

순우는 조금도 주저하는 기색없이 태연자약하게 말을 던졌다. 그의 거동이며 말투가 어찌나 거침없고 대범하며 태연하였던지 놈들은 어안이 벙벙하여 서로 마주보면서 수군거렸다.

《그 자식 길은 헛들어 폭도가 되였지만 남아다운 기백이 있는 놈이군.》

《사내다운 놈인데… 아깝군.》

《정말이지 보기 드문 담찬 놈이야!》

그때 밖에 나와 그 광경을 지켜보며 서있던 허소령이 그들에게로 다가섰다.

《아, 최중위, 요구대로 한번 쏘아보게 해주라! … 탄알 한발만 주라. 그것으로 저기 바위우의 목표를 명중하면 상으로 살려주도록 하라.》 하고 허소령은 짐짓 롱담조로 말을 던졌으나 표정은 웬 일인지 성난것처럼 뿌루퉁하였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 최중위가 다가와 순우의 묶인 손을 풀어주고 총알 한발을 재운 총을 내밀었다.

《이놈아, 어디 한번 잘 쏴봐라. … 명중만 하면 혹시 운이 트일지도 몰라.》

최중위놈은 뾰족한 턱을 들까불며 야비하게 이죽거렸다.

하자 순우는 이번에도 껄껄 큰소리로 웃으며 역시 롱조로 응수했다.

《그렇다? … 명중하면 운이 트인단 말이지? … 하하하… 목숨을 건 경기라니 손이 막 떨리는걸.》

그런 다음 순우는 묶이웠던 손목을 몇번 휘둘러보고나서 바위우의 목표쪽으로 시선을 집중했다. 주위의 괴뢰군놈들이 숨을 죽이고 그를 지켜보고있었다.

이윽고 총성이 울리고 바위우에 올려놓았던 주먹만 한 돌은 명중되여 눈깜빡할 사이에 산산쪼각이 나서 밑으로 떨어졌다.

《허, 그놈 총쏘는 솜씨가 귀신같은걸! …》

《드문 명사수가 분명해.》

놈들속에서 가벼운 탄성이 울리고 뭐라고 수군대는 소리가 물결처럼 퍼져갔다. 그때 최중위놈이 독을 쓰며 순우에게로 다가와 표독스럽게 소리쳤다.

《이 개자식아! … 네놈이 그 총쏘는 재간으로 숱한 우리 사병들을 죽였겠구나. 너는 열백번 불에 태워 죽여도 씨원치 않을 놈이야. … 어이, 이 개자식을 나무단우에 어서 올려놓아! …》 하고 최중위놈은 악에 받쳐 씨근거리며 순우에게 말을 덧붙였다.

《뭐 네놈을 정말 살려줄줄로 알았어? … 어리석은 개꿈은 꾸지 말아.》

최중위놈의 마음속에서는 눈먼 증오심이 발작적으로 고동치고 때려죽이고싶은 욕망이 두손에 쥐가 일 지경인것 같았다.

순간 리순우는 또다시 거침없이 웃었다.

《핫하하… 나 역시 애당초 그걸 바라지도 않았어! … 네놈들은 지금 무슨짓을 하고있는지도 모르는 청맹과니들이니까.》

《야, 빨리 저놈을 나무단에 올려놓고 불태워죽이라. … 그 다음 우리는 빨리 여기를 떠나자.》

최중위놈이 사병들에게 눈알을 부라리며 거쉰 목소리로 호통치자 사병 몇놈이 우르르 순우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때 묵묵히 서있던 허소령이 무엇인가 결단을 내린듯 명령조로 나직하니 소리쳤다.

《그만두라! … 약속대로 살려줘야 한단 말이다.》

허소령은 무엇인가 자기자신에게 역증을 내는듯이 소리치고는 착잡한 생각에 잠겨 뒤돌아보지 않고 뚜걱뚜걱 뜨락을 지나 방안으로 들어갔다.

표독한 최중위놈은 불만으로 잔뜩 얼굴을 찌프리고 혼자소리로 뭐라고 투덜거렸다. 놈의 매서운 두눈이 한결 더 날카롭게 번뜩이고 입가의 근육이 덩달아 씰룩거렸다.

리순우는 별로 기뻐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고 또 그렇다고 절망적인 표정도 띠지 않고 덤덤히 잠시 말없이 서있었다. 그러다가 무엇인가를 결심한듯 한 기색으로 허소령이 사라진 방쪽으로 다가가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허소령은 무엇인가 무거운 생각에 잠겨 컴컴한 얼굴로 뽀얀 담배연기속에 홀로 앉아있었다.

《허소령! … 나를 살려준데 대해서 대단히 고맙게 생각하오. 하지만 나는 당신을 두고 여길 떠나지 않기로 결심했소.》

호기있게 단호한 어조로 언명하는 리순우의 새까만 눈은 무엇인가 알수 없는 신비한 정열로 불타듯 번쩍거리고있었다.

《순우군! 그건 무슨 당치않는 소리야.》 하고 허소령은 벌컥 성을 내며 목이 멘듯 한 갈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순우는 얼핏 낯익은 그를 쳐다보면서 몇순간 머나먼 추억을 더듬었다.

그러자 그 짤막한 몇순간에 전문학교시절의 허봉식이 떠오르면서 그 시절에 수많은 회상으로 엮어진 애틋한 감정을 느꼈다.

(그래… 그 시절의 허봉식선배는 얼마나 깨끗하고 선량한 새파란 청년이였던가.)

순우는 자신도 모르게 백록담의 흰눈처럼 새파란 기운이 도는 이속을 드러내고 소리없이 미소하였다. 그러나 허봉식선배는 지금 뽀얀 담배연기속에 미간을 찌프리고 무엇인가 고뇌에 잠겨있었다.

리순우도 허소령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방안에는 침묵이 흐르고 담배연기가 서로의 얼굴을 가려보지 못할 지경으로 꽉 찼다.

《허봉식소령!-》 하고 이번에도 리순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미군과 그에 추종하는 매국노들을 반대하여 성전을 벌리고있는 나를 체포했다가 살려보내는것자체가 당신들로 볼 때 범죄일것이다. 그리고 이번 전투에서 불타죽고 총에 맞아죽은 당신네 거의 한개 중대가 녹아난 책임을 어떻게 지겠는가? 이제 허소령은 돌아가면 무사치 못할것이다.》

순우는 아무런 과장도 없이 보통어조로 말하며 련속 담배를 피우고있는 허소령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만두라, 리군! 자기 목숨에 대해서나 생각해! … 그러니 어서 여길 급히 떠나가라. … 이제 무슨 일이 생길지 누가 알겠는가.》 하고 허봉식소령은 성난 소리로 부르짖었으나 박력이 없었다.

《아니, 난 나 하나의 생명만을 생각하지 않소. 허소령! 미제침략자들과 리승만사대매국노를 반대하는, 진정한 조국을 위한 싸움에서 그 얼마나 많은 제주도사람들이 피흘리며 희생되였소? … 허소령, 생각해보시오. 그들이 다 공산주의자들이겠는가? … 아니요. 나라를 사랑하고 고향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요. 그들속에는 로인도 있고 소년들도 있소. 난 민족적량심을 지닌 당신을 버리고 갈수 없소. 난 결코 당신이 인민의 적으로, … 력사앞에 추악한 죄를 짓는 악당들속에 있는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수 없소. 당신은…》

《건방진 소리말아.》 하고 허소령은 참지 못하고 순우의 말을 중도에서 꺾었다.

《다시 그따위 소리를 하면 용서치 않겠다. 나는 내 길을 찾고있어.》

《아니요! … 나는 하고싶은 말을 계속하겠소, 허소령.》

리순우는 불을 토하는듯 한 열기있는 목소리로 웨치듯이 계속 말했다.

《허소령, 놀라운건 당신 같은 량심적인 지식인이 정치적으로 모호한 그것이요. 생각해보시오. 지금 제주도의 백수십개 마을들가운데서 절반이상의 마을이 불타고 남제주군 남원읍 수망리와 북제주군 조천읍 북촌리를 비롯한 여러개 마을에서는 전 주민이 몰살당하는 참상이 빚어졌소.》

순우는 말을 하면 할수록 너무도 격하여 눈앞이 뿌예지고 심장이 활랑거렸다. 그는 어렸을 때 사나운 꿈을 꾸던 때처럼 숨이 막히고 답답함을 느꼈다.

《허소령! 지금 제주도 섬전체는 <피의 섬>으로 전변되고 인민들의 원한은 구천에 사무쳤소.》 하고 순우는 힘과 젊음이 차넘치는 목소리로 비통하게 부르짖었다.

허소령은 순우의 말을 막아버리기라도 하려는듯 몸짓을 하더니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나 낯을 찌프리고 방안을 왔다갔다하기 시작하였다.

순우는 하던 말을 계속하였다.

《허소령! 가슴이 떨리지 않는가! … 통분하지도 않는가! … 제주도 수천년력사에 언제 어느때 이런 치떨리는 참상이 있었는가! … 이것이 바로 제주도에 기여든 미제와 사대매국노들… 당신들이 저지른 천추만대에 잊지 못할 만행이 아닌가! … 이러한 야수도 낯을 붉힐 만행은 인류력사가 아직 많이 알지 못하고있소! … 알지 못하고있단 말이요.》 하고 순우는 준렬하게 곱씹었다.

허봉식소령은 어디가 심히 아프기라도 한듯 얼굴을 찌프리고 어딘가 허공을 응시하며 침묵하고있었다.

밖에서는 대렬을 모으는 소리가 한동안 부산스레 들리더니 최중위가 방안으로 들어와 허소령에게 보고하였다.

《소령님! 대렬은 떠날 준비를 완료하고 대기중입니다.》

《최중위, 먼저 대렬을 인솔하고 떠나시오. 내 곧 따라가겠소.》 하고 허봉식소령은 뜻밖에도 매 말마디들을 또박또박 떼여 발음하면서 엄격히 명령했다.

괴뢰군 최중위가 밖으로 나가자 허소령은 순우에게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침착하게 말을 던졌다.

《난 당신의 말을 신중히 들었소. 감사하오! … 그리고 내 운명은 내가 책임지겠으니 속히 여길 떠나시오.》

《허선배, 당신은 돌아가면 위험하오.》

《내 운명은 내가 책임진다지 않소.》 하고 허봉식소령은 박력있게 단호히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군! 후에 다시 만나게 될수도 있을거요. 오늘은 여기서 이렇게 작별하자구. 잘 가오.》

허소령은 결단성있게 말하며 처음으로 서글픈 미소를 짓고 순우의 어깨를 툭 치고는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가 대렬을 따라갔다.

며칠이 지난 후 허봉식소령은 악질 련대장을 쏘아죽이고 한개 중대를 이끌고 제주도인민유격대편으로 넘어왔다. 그는 끝내 수치스러운 과거와 결별하고 인민의 편으로 돌아온것이다.

 

 

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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