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9 회)

제 3 장

비애의 바다너머

10

 

수난의 강토여! 너는 어쩌자고 이 곤욕의 목숨들을 낳아 길렀더냐. 너의 력사, 너의 문화, 너의 도덕이 그렇게도 빛나고 아름다왔던것은 두발 가진 야수들에게 무참히 짓밟히기 위함이였던가!

윤영태가 자라난 강토여, 손보금의 어린 두 딸이 자라고있는 강토여!

남의 땅, 남의 나라로 팔려가는 자식들을 붙잡지 못한다면, 사랑하는 아들딸들을 외화와 바꾸어 팔아먹는 흉악무도한 역적들을 쳐죽이지 못한다면, 자식들은 낳아 무엇하며 쓸개는 두어 어디다 쓴단 말이냐?

단칸초막에서도 장검을 벼리여 외적을 맞받아 나아가던 땅, 나라와 민족의 원쑤가 나타날 때면 잔치날의 새색시도 랑군을 준마에 태워주던 땅을 보라! 무수한 손보금이 얼굴을 가리우고 울고있으며 그들의 무참한 주검이 널렸다.

남조선녀성들에게 그 무서운 타락과 륜락을 강요한자가 어느 놈이며 그들을 오늘도 비탄과 죽음의 골짜기로 몰아넣고있는 놈이 어느 놈들이냐?

누가 손보금을 죽였느냐? 누가 신경애를 울리고있느냐? 누가 김윤옥에게 손보금과 신경애를 두고 오늘도 눈물을 흘리게 하고있느냐?

수난의 강토여!

너의 품에서 자란 젊은 아들들도 번호가 붙은 상품이 되고있다. 이름도 없는 노예들은 미국놈의 총알받이로 윁남의 불속에서 타죽었다. 한줌의 재가 되여 비닐봉지속에 담겨온 그들의 유골을 앞에 놓고 누이와 안해들이, 어머니와 아버지들이 통곡할 때 수많은 윤영태의 원혼이 이역의 쓰거운 흙을 물고 함께 울고있다. …

이 참을수 없는 분통과 분노를 안고 지금 창수는 남조선대사관 강균참사관앞에 서있다.

《왜 대답을 못하오? 손보금을 죽인 범인을 당장 내놓으란 말이요. 누가 죽였소?》

창수가 또 한번 책상을 치자 강균의 눈섭이 꿈틀거렸다.

《여기가 어덴줄 알고 행패냐?》

《잔말말고 범인을 내놓으란 말이요!》

창수는 주먹을 쥐고 흔들었다. 강균은 실눈을 하며 창수를 보고있더니 불쑥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렇게 보고싶으면 내가 보여주지. 날 따라와!》

강균은 앞장서서 뚜벅뚜벅 걸었다. 순간 창수는 가벼운 불안을 느끼며 반사적으로 약간 주저하다가 분기에 못이겨 그를 따라나갔다.

문화과 참사는 대사관마당에 내려섰다. 그가 내려서자 곧 자동차 한대가 소리없이 다가왔다. 강균은 차문을 열며 창수를 뒤돌아본다.

올라타라는것이다. 그는 타지 않으려고 한걸음 물러섰다.

그러나 어느새 주변에서 나타난 두 사나이가 억지로 그를 차안에 밀어넣었다.

창수는 저항했으나 벌써 량켠에 붙은 두놈이 그의 팔을 비틀어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운전사옆자리에 앉아가던 강균이 뒤돌아보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자네가 원하는 사람이 이제 곧 나타날거네.》

자동차는 본시내에 들어서자 밖을 내다볼수 없는 차광유리를 올렸다. 자동차는 시내를 몇바퀴 돌고는 도로 대사관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창수는 자기가 다시 대사관으로 끌려오는것을 모르고있었다.

자동차는 곧바로 대사관지하실로 들어갔다. 강균은 지하실에 있는 또 하나의 다른 고문실에 창수를 집어넣었다.

《자, 더 물어볼것이 있으면 물어봐!》

강균은 쌀쌀하게 웃었다. 이미 그곳에서 대기하고있던 문화과 요원들이 와이샤쯔바람으로 창수를 노려보더니 눈을 들어 강균의 지시를 기다렸다. 강균은 갓 면도질을 한 파르스름한 턱을 한손으로 쓸며 그들에게는 주의를 돌리지 않고 지하실안쪽에 놓인 탁자앞으로 창수를 끌고 갔다.

《거기 앉아!》

창수는 그대로 서있었다. 강균의 태도가 일변했다. 마치 자기가 가리킨 걸상에 창수가 앉지 않은것에 분통이 터졌다는듯이…

《이 새끼! 그따위 곤죠는 어디서 배웠어?》

그의 주먹이 창수의 턱을 향해 날아왔다. 날쌔게 몸을 뺀 창수는 한걸음 옆으로 물러나며 소리쳤다.

《네놈이 살인자이지?!》

《이 새끼가 아직도 입이 살았군.》

강균은 칼날같은 손과 발길질로 창수를 내리쳤다.

온몸이 불이 돼서 창수는 일어났다. 그는 앞으로 내달으며 동시에 발과 주먹으로 준비없이 서있던 강균을 호되게 차고 때렸다. 사타구니를 채우고 관자노리를 얻어맞아 비틀거리는 강균을 또 한번 쳐갈겨쓰러뜨린 창수는 놈을 짓밟으며 부르짖었다.

《이 인간백정들아! 죽어도 좋다, 해보자!》

그러나 창수의 공세는 즉시로 꺾이고말았다. 세놈의 깡패가 앞뒤로 달려들어 그를 강타했다. 발길질이 들어오고 곤봉이 날아왔다.

놈들의 타격이 가해질수록 놈들을 규탄하는 창수의 목소리는 더욱 높아갔다.

그러나 싸움이 될리 없었다. 이쪽 구석에서 가슴을 채워 저쪽으로 물러서면 그쪽에선 몽둥이가 머리와 가슴을 내리쳤다.

창수는 쓰러졌다가도 다시 일어서서 피흐르는 머리를 내두르며 소리쳤다.

《이 매국노들아! 네놈들의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 손보금을 죽인것이 네놈들이였지!》

창수는 다음말을 이을수 없었다. 쓰러진 그의 잔등을 놈들은 구두뒤꿈치로 조기기 시작했다. 그는 드디여 의식을 잃고말았다.

그가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는 지하실엔 아무도 없었다. 촉수높은 전등이 휑뎅그렁한 지하고문실내부를 비치고있었다. 넘어진 걸상이 눈에 들어왔다. 쩝쩔한것이 목구멍으로 넘어왔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방바닥을 짚고 겨우 일어서려는데 손바닥에 미끄러운것이 만져졌다. 자신이 흘린 피였다. 그제서야 창수는 자기가 어떻게 되여 여기 지하실에 끌려오게 되였으며 강균과의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졌던가를 깨닫게 되였다.

그는 곁에 넘어져있는 걸상다리를 짚고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앉은걸음으로 겨우 문쪽으로 다가가서 문을 밀어보았으나 열리지 않는다. 밖으로 자물쇠가 걸려있었다.

짓밟히고 으깨여진 잔등의 상처에 참을수 없는 동통이 왔다.

그는 신음소리와 함께 쓰러졌다.

창수는 엎드린채 몸을 비틀었다.

자꾸만 눈까풀이 내려오고 마치 지하갱도로 오르내리는 승강기에 오른것처럼 둥- 몸이 떠올랐다.

그의 눈앞으로 시꺼먼 파도가 끊임없이 밀려왔다.

밤벌레들이 반짝거리며 날고있다. 암벽에 부딪친 검은 파도가 길길이 솟아올랐다가 소리없이 그의 잔등에 무너져내렸다.

일찌기 윤옥을 생각하며 고향 남해기슭에서 바라보던 그 파도였다.

그는 곧 죽음과 같은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러갔는지…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상하게도 머리가 맑아졌다. 그는 몸을 가누어 일어나려고 모지름을 썼다.

지금 이 시각에는 세멘트바닥에서 일어서는것이 유일한 희망이며 살길인것처럼 느껴졌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짓이겨진 잔등의 상처가 더 쓰리고 아려왔다. 창수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대로는 죽지 않는다! 이대로는 결코 죽을수 없다! …

그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그는 짚고있던 걸상과 함께 옆으로 나가넘어졌다. 그는 자기의 그 모습을 누가 보고나 있는듯이 점직한 웃음을 띠우고 넘어진 걸상을 발로 밀어버렸다. 그리고는 두손으로 세멘트바닥을 짚은채 이윽토록 앉아있었다.

나에게는 조국이 있다! 네놈들이 아무리 발악을 하고 몽둥이와 칼을 들어도 그것만은 나에게서 빼앗아내지 못할것이다.

《나에게는 조국이 있다!》

창수는 소리내여 외웠다. 그의 두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하준혁이 들려주던 새 나라, 북에 펼쳐진 자유롭고 행복한 새세상을 그는 보고있었다.

문이 열리더니 이마에 피멍이 든 강균놈이 다시 취조를 하려고 들어섰다. 그는 저으기 놀라고있었다. 반주검이 되도록 매를 맞고 뒹굴던 창수의 얼굴에 희열과 자부심이 가득차있었기때문이다.

강균은 판단이 가지 않아 된매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어리둥절해있었다. 그런 강균의 얼굴을 쏘아보고있는 창수의 얼굴에는 랭소가 어려있었다.

분격하여 주먹을 들고 대사관으로 몰려갔던 사람들이 다 돌아왔으나 창수만은 며칠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윤옥은 원쑤놈들에 대한 증오로 몸을 떨면서 창수의 친구들인 도익과 재균에게 그 일을 상의하는 한편 하준혁을 만나기 위해 급히 함부르그로 떠났다.

윤옥으로부터 창수가 대사관에 구금된 사실을 알게 되고 그것이 손보금의 피살사건과 관련된것임을 듣게 된 준혁은 격노하고있었다.

준혁은 그 사건을 비단 손보금간호원과 자기의 제자인 리창수 한사람에게만 관계되는 문제가 아니라 해외 특히 서도이췰란드땅에 와있는 모든 남조선교포들의 문제로 보았다.

동시에 그것은 서도이췰란드당국에서도 응당 책임을 져야 할 일인것으로 보고 여러 방면으로 여론을 일으키기에 힘썼다. 뿐만아니라 루르지방에 다시 와서 여러모로 그 사건의 진상을 더 깊이 료해하고 창수의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힘을 쓰기도 했다.

윤옥은 이미 창수의 신상에 빚어진 불의의 사태앞에서 눈물만 흘리던 어제날의 그가 아니였다.

더우기 자기를 지켜준 손보금의 죽음을 보게 된 그는 입술을 깨물고 그 원쑤를 갚으려고 일어섰던것이다.

그의 쉼없는 활동으로 양로원 간호원들뿐만아니라 경애가 있는 종합병원 간호원들도 술렁대기 시작했다.

경애가 앞장에 나서서 일을 그만두고 모두 대사관으로 항의하러 가자고 했을 때 백은덕대표간호원이 선참으로 지지해나섰다.

손보금의 죽음을 통해 남조선간호원들은 자기들이 처해있는 괴롭고 쓰라린 처지를 새삼깊이 느끼고 더욱 잘 알게 되였으며 더우기 얼마전에 남편을 잃은 경애가 앞장에 나서서 움직이고있는데서 가만히 보고만 있을수가 없었던것이다.

한편 도익과 재균은 탄부들속에서 활발히 여론을 일으키고있었다.

매일 위험한 갱구로 들어가는것이 지옥길로만 여겨지던 탄부들은 창수의 석방을 요구하는 동시에 자기들을 언제 치일지 모르는 죽음의 막장으로 몰아넣은 대사관관리들 특히 수석로무관을 문죄하자는데로 의견을 모으고있었다.

대사관에서 보기에는 쉽게 처리할수 있겠다고 했던 그 사건은 날이 감에 따라 그들의 예상을 뒤집고있었다.

남조선류학생들속에서까지 그 사건을 둘러싸고 대사관과 나아가서는 남조선《정부》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류학생들속에서 이와 같은 동포들에 대한 뉴대감과 관심이 높아진데는 하준혁의 활동이 크게 작용했다.

대사관에서 두려워하는 또 하나의 사태가 벌어지고있었다.

손보금간호원의 죽음과 그것으로 인해 일어난 리창수의 피검사건은 서도이췰란드의 신문들에까지도 널리 보도되기 시작한것이다.

한 신문에는 트루게정비공을 비롯한 서도이췰란드로동자들이 남조선대사관과 서도이췰란드정부 그리고 탄광당국자들을 규탄하는 항의문까지 나있었다.

일이 이렇게 벌어지자 제일 당황한것은 윤종기수석로무관이였다.

그는 탄부들과 간호원들의 취역과 그 《선도》를 직접 맡아보고있을뿐만아니라 손보금간호원의 랍치사건에 가장 깊이 관여하고있었기때문이였다.

윤종기수석로무관과 강균 문화과 참사사이에는 여러차례 이 문제를 두고 의논이 오고갔다. 그 결과 창수를 비롯한 일부 탄부들을 아무도 모르게 본국으로 끌고 가려던 계획을 취소하지 않을수 없었다.

대사도 두사람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리하여 대사관에서는 외화획득을 저해할수 있는 탄부들과 간호원들의 소요를 미연에 방지하며 《국권침해》라는 여론이 분분한 서도이췰란드사회계가 더 떠들썩하기 전에 그것을 무마하기 위해 리창수탄부를 내놓지 않을수 없었다.

윤종기는 시초에 이 일을 서툴게 처리한데서 이런 결과를 빚어낸 책임을 강균에게 넘겨씌우려고 했으나 강균은 오히려 그 책임은 수석로무관에게 있다고 맞섰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윤종기와 강균사이에 매우 심각한 갈등이 생기게 되고 그것이 본국에까지 알려져 강균보다 렬세에 빠졌던 윤종기를 위해 그의 부친 윤영조가 발벗고 나서지 않을수 없게 된것은 그후에 있은 일이다.

그 일이 어쨌든 남조선탄부들과 간호원들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과 서도이췰란드사회여론에 질겁한 대사관에서는 창수를 내놓지 않을수 없었다.

 

독자감상글쓰기
Change the CAPTCHA codeSpeak the CAPTCHA code
 
홈페지봉사에 관한 문의를 하려면 여기를 눌러주십시오
Copyright © 2003 - 2018 《조선륙일오편집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