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0 회)

제5장 담판대표

5

 

가또 기요마사는 서생포의 군영루각에 거만스럽게 앉아 저 멀리 도래굽이쪽 전방초소를 지꿎게 바라보고있었다.

지금 그의 시선이 향한 전방초소에선 장삼을 걸치거나 군복차림을 한 네 사나이가 파수군들과 마주서있었다. 극상 다해 넷밖에 안되는 그들이 《조선사신 대선사 북해송운》이라는 명함을 가지고 가또군장과 담판하러 오는 조선대표일행이였다.

칼 한자루, 활 한대 품지 않은 맨몸인 부하 셋만을 달고 나타난 조선승병총대장인 금강산 중을 보느라니 두해전 안변고을에서 군장방에 홀몸으로 찾아들었던 그를 만날 때처럼 자연히 감탄을 하게 됐다.

《역시 저 승장은 담이 큰 사내야.》

구레나룻턱을 주억거리던 가또는 돌계단아래에 쌍뿔투구를 쓰고 꼿꼿해서 대령하고있는 참모 요시하찌한테 얄궂은 말투로 뇌까렸다.

《우리를 찾아 불원천리 수고스럽게 달려온 사절들인데 친절히 맞아들여라.》

《하잇.》

참모가 쿵덩거리며 사라진지 얼마 안 있어 뚜우- 하고 주라가 울더니 잇달아 북소리가 둥둥둥 요란하게 터져올랐다.

검은 갑옷을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요시하찌참모가 살진 군마를 타고 영문밖으로 달려나갔다.

전방초소에 이른 요시하찌는 쌀쌀한 표정으로 조선승병대장일행과 마주섰다.

《당신네가 저쪽에서 온 사람들이요?》

《저쪽사람? 아니요. 우린 조선정부에서 파견된 담판대표요.》

유정이가 장발의 수염을 희끗 날리며 당당하게 대척했다.

《대표? 흥, 일국의 대표치고는 행장이 지내 초라하구만.》

《행장타발하는걸 보니 담판에 흥미가 없는것 같군. 그럼 우린 돌아가겠소.》

낯색이 홱 달라지던 유정이 오던쪽으로 되돌아섰다.

그러자 요시하찌는 당황해났다. 상전한테 대사를 망쳤다고 된추궁을 당할것이 우려된 그는 오만하던 태도를 버리고 조선승병총대장앞에 어깨를 낮추었다.

《손 맞잡고 흉없이 화친을 할 상대여서 롱을 좀 한것이니 량해하시오.》

이러고는 말에서 내려 유정이네를 영문쪽으로 이끌었다.

유정은 뒤틀렸던 속이 풀린듯 헌거롭게 웃으며 제잡담 앞장에서 휘휘 활개쳐걸었다. 겉으로는 배포유한 자세였으나 사실 내심은 긴장된 상태다.

유정이 도원수의 령을 받은 후 적진에 들어가 큰 장수를 직접 만나기로 작정한것은 오직 그렇게 해야만 왜군내부실태와 명나라와의 강화담판내용을 자상히 알수 있다는 타산때문이였다. 아울러 만날 대상자로 가또를 선정한것은 그가 왜군측에서는 제노라 하는 군장이여서 군사비밀을 수태 알고있는데다가 이미 자기와는 면식이 있어 생뚱같은 놈을 만나기보다 성격이나 기질은 물론 취미까지도 말짱 파악한 가또를 만나는게 한결 수월해서였다. 가또의 과단성을 역리용해 엇걸이를 뜨면 능히 속대문을 열어젖힐 승산이 있었다.

존마께를 늘여뜨린 왜병들이 활과 조총을 멘채로 조선군대표를 구경하려고 몰려들었다. 좀상스러운 상판에 야수의 기질이 비낀 그자들은 승병이란게 진짜중이 맞는지, 또 저들의 등줄기를 호되게 후려치던 수염쟁이승대장이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이번 기회에 똑똑히 보아두려고 저마다 자리다툼까지 벌려대며 길 량쪽에 오구구 붙어서서 눈알을 희번뜩거렸다.

길다란 수염발을 미풍에 가볍게 날리며 태연히 적들속을 뚫고나가던 유정은 생김새나 의복차림은 각이해도 몰골이 하나같이 험상한 왜병들을 한인끔으로 두루 휘둘러살피다가 벙끗 웃음을 지었다.

《퍼그나 낯이 익은걸. 가만, 내가 이녀석들을 수락산에서 봤더라? 아니, 의령성전투때 만났던것 같아. 하여튼 반가우이. 헌데 야들이 타국에 와서 꽤나 고생이 많구만. 제 집 뜨뜻한 아래목에 잔등을 지지고 있을게지, 원.》

이러며 기가 차서 혀를 쯧쯧 끄르는데 조선말에 웬간히 미립튼 왜병 몇은 자기네를 조롱하는 소리인줄 낌새채고 조총과 화살을 재워들기까지 했다. 절컥 칼을 뽑아드는 놈도 있었다.

계명이, 창해, 오팔은 앞에서, 옆에서, 뒤에서 도총섭을 빈틈없이 옹위하고서 주변을 예리하게 살피면서 불의의 정황에 대처할 자세로 한걸음, 두걸음 신중하게 옮기고있었다.

잔뜩 긴장되여 얼굴근육마저 굳어진 제승들을 본 유정은 그들의 얼어든 심기를 눙쳐주느라 우스개를 펼쳤다.

《이보라구, 오늘 왔던김에 저것들한테서 땅세를 탁탁히 받아가야겠네. 이 절승의 땅에서 휴양생활을 늘어지게 하고있으니 말일세. 저것들이 왜서 기를 쓰며 바다를 건너와 이 땅을 가지려는가 했더니 과시 탐을 낼만도 하구만. 보라구, 배산림수라더니 지세가 얼마나 신통한가. 이 사람 계명이, 우리 전쟁이 끝난 다음 저 산에 절을 크게 짓고 여기 와서 살자구.》

그랬으나 계명이네는 조금도 긴장을 풀지 않았다. 흡사 먹이를 덮치는 맹수의 아가리마냥 량쪽으로 스산하게 쫙 벌리고있는 군영문안에 들어설 때에는 도총섭을 더욱더 억척같이 둘러싸며 적의 복병이 살이라도 날릴가봐 음침한 구석들을 날카롭게 경계했다.

영문을 지나 루각계단과 잇닿은 공지에 나서던 유정은 웃음기를 거두고 두발을 벋디디며 멈춰섰다.

쌍뿔을 무섭게 돋군 황금색투구를 쓰고 쇠비늘이 번쩍거리는 갑옷을 위풍있게 차려입은 팔척장신의 장수가 창과 칼을 추켜든 군사들의 호위속에 우뚝 뻗치고서서 눈총을 사납게 쏘고있었던것이다.

유정은 첫눈에 그가 적진의 우두머리인 가또 기요마사임을 알아보았다.

(가등청정 이놈, 드디여 다시 만났구나.)

피가 끓어올라 불끈 주먹을 틀어쥐였다. 그러다가 다음순간 자기가 이곳에 온 사명감이 되새겨져 가까스로 흥분을 눅잦혔다.

두사람의 날카로운 시선은 허공에서 맹렬하게 부딪치며 불꽃을 튕겼다.

(승병장, 마침 잘 왔다. 어디 이번통에 내맛을 단단히 보거라.)

(흥, 여기가 뉘땅이게 오만무례하게 노느냐?)

쓰거운 조소를 눈가에 담던 유정은 천연스럽게 먼저 말을 걸었다.

《군장, 그간 어떻게 지내셨소?》

가또곁에 붙어서있던 왜인통역이 가운데 끼여들어 그들의 대화를 이어주었다.

《덕분에 이렇게 비좁은 해변가에서 불편히 지내고있소.》

《비좁으면 저 넓은 바다로 나가시구려, 하하.》

《…》

말문이 막힌 가또는 꼬리가 사납게 치째진 큰 눈을 희번뜩이다가 칼집에 손을 가져갔다.

(이 하찮은 중대가리가 감히 대군장을 희롱해?)

왈칵 밸통이 뒤번지여 당장 칼을 뽑아들어 조선승병대장을 일도량단하려던 가또는 태합의 명령서가 떠오르는 바람에 애써 분기를 참았다. 전에 조선측에서 담판할 의향을 알려왔을 때 가또는 그 사실을 본토의 태합 도요또미 히데요시한테 보고했었다. 그러지 않아도 한해 넘게 질질 끌어오던 명나라대표와 고니시의 강화담판에 대해 불만이 가뜩 찼던 히데요시는 가또한테 조선측과 직접 담판하여 일본의 리익을 실현한 다음 빨리 전쟁을 결속짓게 하라는 지령을 보내왔다. 전쟁이 장기화되며 군비가 바닥나고 군사원천이 고갈되자 히데요시는 명나라까지 먹으려던 애초의 욕망을 포기하고 조선의 령남지방이나 떼가지고 명나라황실의 인정을 받아 자기가 일본국왕으로 책봉되는것으로써 조선전쟁을 끝낼 작정을 한것이다.

(태합의 군령만 아니라면 내 그저…)

이발을 으드득 갈던 가또는 할수없이 칼자루에서 손을 떼였다.

그의 과격스러운 거동을 덤덤히 지켜보던 유정이 짐짓 너그러운 태도를 지어보였다.

《오늘은 우리가 벗으로 사귀자고 왔으니 배짱놀음은 그만하고 들어가 얘기나 나누기요. 어, 먼길을 걸어왔더니 다리가 다 얼얼한걸.》

《하긴 화해를 하러 진중에 찾아든 손님이니 박대해서야 안되지.》

가또는 유정이네한테 길을 틔워주며 막료들쪽에 대고 웨쳤다.

《여봐라- 이들을 병실에 모셔라.》

요시하찌참모가 유정이네를 지휘부곁의 어느 한 막사로 데리고갔다. 대마직천으로 천정을 씌우고 차일을 친 넓다란 방안엔 얇은 통나무를 모아붙여 만든 침대가 여러개 있고 다리 긴 원탁이 하나 가운데 놓여있었다.

요시하찌는 목추김이나 하라면서 차잔과 주전자를 내놓더니 슬쩍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록차를 한모금씩 부어마시면서 얼마간 다리쉼을 하고난 유정이네는 모여앉아 앞으로 취할 행동방향을 의논하였다.

성미가 과격한 가또한테서 인차 무슨 반응이 있을것 같아 대항할 차비를 하고 기다렸건만 그는 막사에 나타나지도 않았고 유정이네를 군장방으로 부르지도 않았다.

가또가 술책을 쓴다는것을 간파한 유정은 장삼을 벗고 침대에 편히 드러누우면서 제승들한테도 한잠씩 푹 자라고 일렀다.

정오때 서종군졸이 잡곡밥 네그릇과 불에 구운 염물고기 네마리를 달랑 가져다놓고 간 후로는 사람그림자 하나 얼씬 안했다. 해질녘에야 요시하찌참모가 소리없이 나타나 방안동태를 한참 엿보다가 슬며시 들어왔다.

유정은 놈들의 속궁냥을 알고싶어 그자의 자존심을 슬쩍 건드렸다.

《명성높은 가또장군이 거느리는 우군이 어째 이렇게 조용하오? 지금 고니시장군네 좌군에선 대국인 명나라와 강화를 맺는다, 화친교류를 한다 하며 세상이 들썩하도록 일을 치르고있는데 이러다가는 본토의 태합이 좌군만 안중에 둘가봐 걱정되는군.》

그러자 요시하찌의 입가에 싸늘한 비웃음이 언뜻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국가대업을 이루는데는 다 때와 적임자가 있는 법이요. 지금 좌군이 하는 일은 바람잡아먹고 구름똥 싸는것과 같은 허황한짓이요. 명나라가 아무리 대국이래도 조선에 관한 문제에서야 무슨 권한이 있겠소. 우리 군장님께서 이미전에 벌써 좌군장의 일이 제대로 안될것이라고 하셨소.》

요시하찌는 이 말을 내뱉고는 기분이 상한듯 씽 찬바람을 일으키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유정은 그의 반응을 보고 우군장수들이 좌군에서 진척시키는 강화교섭이 성사되지 않기를 은근히 바라고있으며 군장들인 가또와 고니시사이에 알륵관계가 존재한다는것을 간파했다.

적군내부를 분렬리간시켜 수월하게 리득을 보는 계책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놈들의 약점을 일시에 꿰뚫어보고 그에 맞는 대응안까지 세운 유정은 록차 한고뿌를 맛나게 들이킨 후 누가 오겠으면 오고 부르겠으면 부르고 관계치 않고 배포있게 누워 코를 드렁드렁 골며 깊은 잠을 잤다.

이튿날 중낮때야 가또가 참모를 보내 유정이네를 군장방으로 불렀다.

유정은 자기를 호위하느라 따라서는 계명이, 홍창해, 오팔을 그곳에 눌러앉혔다.

《너희들은 놀음이나 하며 여기 있거라. 내 이 사람네 어른과 조용히 상론할게 있어 그런다.》

《스님, 혼자선 절대로 못 가오이다.》

계명이가 큰일이나 난것처럼 들썩하는것을 엄한 눈짓으로 겨우 떼여버렸다. 전복차림에 칼까지 찬 휘하장수들을 량쪽으로 엄엄하게 늘어세우고 자기는 그 한가운데의 범가죽을 씌운 상좌에 틀스럽게 앉아있던 가또는 유정이가 홀몸으로 흔연스러운 태도를 취하며 들어서자 멋적은감이 들었던지 부하들을 내보내고 통역만 남게 했다. 그리고는 턱짓으로 유정이한테 작전탁 건너편의 통나무걸상에 앉으라고 권한 후 롱조로 물었다.

《몸쉼을 잘했소, 승장?》

《두해동안 전장에서 겹쌓였던 피로를 여기 와서 다 풀었소. 마치도 놀러온 기분이요. 경치좋은 바다가 산등에서 파도소리를 들으며 달게 자느라니 이곳에 내 개인별장을 하나 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란 말이요.》

유정이가 천연스럽게 맞받아 희롱조로 대꾸하자 가또는 쓴웃음을 씩 지었다.

《당신이야 부처를 섬기며 절간에서 사는 중인데 개인별장은 해서 뭘하겠소.》

《하긴 그렇지… 이곳을 군장한테 주었으면 좋겠는데 할수 없구려, 당신은 일본사람이니. 예로부터 조선사람들은 자기 모국의 땅과 재물을 다른 나라 특히는 일본인처럼 탐욕스러운 나라 사람들한테 주는것을 좋아 안했소.》

《…》

가또는 두툼한 눈시울을 찌불써하니 내리뜨리며 코김만 흥흥 불었다. 그는 사실 어제 유정이네가 불안에 시달리며 스스로 기가 위축되여 허리를 숙이게 만들자고 온 하루 병실속에 격리시키는 술책을 썼었다. 그런데 기가 위축되긴 고사하고 오히려 더 뎅뎅해져 천연스럽게 롱질까지 걸며 자기네의 명줄을 거머쥔 장수를 시까스르는 유정을 보고는 담이 크고 속이 웅큼한 그한테는 어제같은 얕은 수법이 통하지 않으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차라리 그와 사내답게 대하는것이 낫겠다고 생각하고 본론에로 들어갔다.

《승장도 알다싶이 우리 태합님께선 조선정부에 오래전부터 강화를 요구해왔소. 헌데 조선정부에서 대의명분이요, 뭐요 하면서 응하질 않아 할수없이 저쪽 명나라와만 그 일을 추진시켜온것이요. 그 전례를 깨뜨리고 조선측에서 직접 강화담판대표를 파해주니 고맙긴 하면서도 한쪽으론 무슨 꿍꿍이를 꾸미지 않나 해 의심도 되는구려. 여하튼 당신과 나는 서로 원한이 큰 적수이긴 하지만 현재는 두 나라 대표로 마주앉았으니 대업을 위해 옛 감정을 버리고 웃으면서 국사를 론의하기요. 불원천리 수고로운 걸음을 하신 승장한테 먼저 언권을 드리는바이니 어서 말씀을 하시오.》

《내가 군장한테 하고싶은 말은 간단히 두가지요.》

《아니, 숱한 품 들여 만났는데 도제 두가지밖에 할 소리가 없단 말이요?》

《허허, 두가지긴 하지만 스물, 이백에 못지 않게 크고 심중한 얘기요. 내가 여기 온건 첫째로, 당신네가 필요없는 고생을 그만두고 제 나라로 돌아가도록 타이르기 위해서이고 둘째로는 군장이 제 먹어야 할 밥도 못 찾아먹고있는것이 안타까워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요.》

《음… 그 첫번째 문제는 리해가 되오, 조선의 땅과 재부를 빼앗으려는 우리 일본군사들이 당신네한테는 좋게 여겨질리 만무하니까. 헌데 내가 제 먹어야 할 밥도 못 찾아먹는다는건 무슨 소리요?》

《군장도 알다싶이 지금 좌군장은 명나라와 강화를 체결했소. 이제 본토의 독부에서 어떻게 여길것 같소? 일본의 대외적권위를 높이고 원정군이 손실을 적게 보며 많은 성과를 거두게 된것을 다 좌군장의 공적으로 인정할거란 말이요. 그땐 당신한테 가또, 넌 대체 밥먹고 뭘하는 놈이냐 이런 추궁과 책벌이 차례질것이고. 까놓고 말해 좌군장이 당신한테 대상이나 되오? 난 군장과 서로 적국간이긴 하지만 당신의 출중한 무예와 지략, 무사다운 인품과 기질을 높이 보오. 일본의 운명을 떠메고나갈 장상재목이 좌군장같은 하찮은 장수한테 뒤지면 되겠소?》

유정은 고니시와 명나라대표와의 강화교섭내용을 모르는지라 이런 식으로 슬쩍 찔러보았다.

가장 아픈 곳을 건드리운 가또는 우둥퉁한 볼살을 푸들푸들 떨다가 벌떡 일어나 서류궤짝안에서 문서장을 하나 꺼내 유정이앞으로 픽 던졌다.

《그게 어디 쉽사리 성사될 일이요?》

통역이 의아해하는 유정이한테 문서장에 씌여진 글을 읽어주었다.

 

첫째: 명나라공주를 일본왕의 후비로 삼는다.

둘째: 조선의 4개 도를 일본국에 소속시킨다.

셋째: 예전처럼 교린을 계속한다.

넷째: 조선에서 왕자 한명을 일본에 보내여 영주시킨다.

다섯째: 조선의 높은 관리를 일본에 인질로 들여보낸다.

 

유정은 그것이 고니시와 명나라대표 심유경사이에 론의되는 강화담판내용임을 알았다. 이곳에 온 기본목적의 절반을 손쉽게 달성했으나 그의 가슴속에선 기쁨이 아니라 분노가 살아올랐다. 유정은 통역이 내려놓은 문서장을 주먹으로 꾹 짓눌렀다.

《이건 도저히 성립될수 없는 불법무례하고도 강도적인 요구조건이요-》

《?!…》

《부당하고도 허황한 개꿈이요. 왜냐면 첫째로, 명나라공주를 일본왕의 후비로 보내라 했는데 그게 성립될수 없다는건 소먹이고 나무하는 아이들까지도 알것이요. 황실의 성녀를 어찌 수만리 떨어진 창파건너에 보내여 결혼을 시키겠다 하겠소? 둘째로, 조선의 네개 도를 일본의 령토로 되게 한다는것은 애당초 있을수도 없는 일이요. 비록 한줌의 흙이나 한포기의 풀이라 할지라도 조선임금의 땅이 아닌것이 없고 조선백성의 촌토가 아닌것이 없거늘 어이 감히 조선사람들을 제껴놓고 남의 나라 사람들끼리 결정할수 있으며 또 누가 달란다고 해서 조상대대로 물려오는 강토를 홀홀히 내놓을수 있단 말이요? 제 나라, 제 고향땅을 목숨보다 더 귀히 여길줄 아는게 조선사람들이요. 셋째로, 종전처럼 일본과 조선이 교린한다는것도 실현불가능하오. 조선사람들이 자기네 임금을 도성밖으로 내쫓고 부모형제를 무참히 살해한 원쑤와 어찌 가깝게 지내겠다 하겠소? 천지간에 그러한 도리는 없소. 넷째로, 조선국왕자를 일본에 영주시킨다는것은 도무지 리치에 맞지 않소. 일본국의 죄행으로 이 나라 신하와 자식들모두가 복수의 일념으로 불타고있는데 어찌 왕자를 그 야만의 나라에 가서 살게 하겠소? 다섯째, 조선의 대신을 인질로 보낸다고 했는데 조정에서 설사 승낙하여 령을 내린다 해도 어느 관리도 응하지 않을거요. 이렇듯 다섯가지 조건들은 모두 대의에 맞지 않으므로 결코 성사될수 없소. 백번 죽음을 당하더래도 우린 이 조건들을 결코 받아들일수 없소.》

유정의 사리정연한 반박과 당당한 주장앞에서 가또는 할말이 없는듯 수박통같은 이마를 수굿한채 손가락으로 작전탁만 다독였다. 장기간의 전쟁을 통해 조선민족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잘 아는 그는 고니시의 강화교섭을 애초부터 시답게 여기지 않았었다. 종이장에 씌여진 저 안을 실현하자면 리해나 설복, 강요 같은 말질보다도 강위력한 군사적행동만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비록 현재 일본군한테 조선을 단매에 쓰러뜨릴 힘이 없긴 해도 고니시처럼 큰 나라 대신을 찾아가 머리를 조아리면서 졸망스러운 구걸질은 하고싶지 않았다. 지금도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조선과 강화교섭을 체결하라는 태합의 명령만 안 받은 몸이라면 당장 고니시의 착상품인 저 강화안이 적힌 종이장을 발기발기 찢어던지고싶은 심정이였다. 하지만 그것을 쉬이 내색할수가 없었다. 자기앞에는 조선국의 승병총대장이 앉아있었기때문이다. 적대국의 장수앞에서 같은 일본군의 장수들끼리 물고뜯는 취약성을 드러내고싶지는 않았다. 그렇다, 어떻게 하나 참아야 한다. 풀떡이는 속을 진정시키느라 괜히 차주전자만 들었다놓았다하던 그는 홍차를 한고뿌 부어 천천히 들이키다가 동에 닿지 않는 소리를 한마디 퉁 내뱉았다.

《예로부터 조선은 동방례의지국이라 하던데 당신네 나라 도덕이 왜 그 모양이요?》

《?!》

《내가 포로됐던 왕자들(림해군과 순화군)을 돌려보내주었는데도 사례하는 편지 한번 보내오지 않소?》

《그건 왕자 송환의 공이 당신에게 있다는것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기때문이요. 고니시군장이 우리 사람들한테나 명나라사람들한테나 자기가 선의를 베풀어 조선왕자들을 돌려주게 했다고 말하다나니 모두 그의 공덕으로 알고있소.》

《왕자들이 내 손에 있었는데 고니시가 무슨 상관인가?》

가또는 증이 나서 버럭 고함을 지르며 차고뿌를 탕 내려놓았다. 그러다가 《앗차!》 하며 혀를 깨물었다. 자기가 지금 엉큼하기 그지없는 조선중의 계책에 넘어가고있다는 느낌이 피뜩 들었던것이다.

(이자가 36계의 하나인 차도살인(자기편끼리 싸워 죽게 하는것.)계책을 쓰는게 분명하다. 제발 자중하자.)

가또는 소꼬리같은 존마께를 슬슬 쓸어넘기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머리 큰것들이 애들처럼 말씨름질이나 하다말겠소? 오늘은 이쯤하고 바다구경이나 하기요.》

《…》

《경치좋은 이곳에 당신의 절간이 세워지겠는지 내 별장이 세워지겠는지는 모르겠는데 여하튼 함께 돌아보면서 명당자리나 하나 잡아보잔 말이요.》

《거참 좋구려, 마침 나도 속이 답답하던 참인데.》

유정이도 쾌히 응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가또의 뒤를 따랐다. 밖에 나선 그는 저으기 놀랐다.

언제 왔는지 문가에서 대기하고있던 계명이, 홍창해, 오팔이가 안도의 기색을 지으며 곁에 슬며시 다가붙어 호위를 서는것이였다.

(녀석들두!…)

유정은 코마루가 찡해졌다. 미더운 부하들로 해 절로 마음이 든든해졌다.

가또는 유정이네와 한담을 하면서 그들을 슬슬 어느 한 산골짜기로 이끌어갔다. 넓다란 골안에는 조련장이 있었다. 그곳에서는 왜군들이 한창 군사조련에 열을 올리고있었다. 마주서서 악악 고아대며 칼싸움을 벌리는자들이 있는가 하면 올리뛰고 내리굴면서 창대를 홱홱 휘둘러대는자들도 있었다. 또 한쪽에선 기마병들이 말타고 달리면서 화살로 솔방울을 쏘아떨구고 다른쪽에선 보군들이 목표판을 마주하고 서서 탕탕 조총사격을 해댔다. 하나같이 싸움에 이골이 찼다는게 알리였다. 왜군들의 눈빛과 거동에선 마주 대하기 스산할 정도로 광기가 풍겼다. 실전을 방불케 하는 병졸들의 조련모습을 흡족해서 둘러보던 가또는 유정이가 《군장네 부하들은 날램과 용맹에 있어서 항우의 군사들을 찜쪄먹을 정도요.》 하고 추어주자 사기가 나서 어깨를 으쓱이였다. 그러다가 불쑥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씨물거리면서 유정의 자존심을 간지럽히는것이였다.

《승장, 당신네 부하들의 솜씨를 한번 보여주지 않겠소?》

《미흡한 재주를 어이 감히 대군장앞에서 펼친단 말이요.》

이러며 유정이가 겸손한 태도를 취하자 가또는 흥미가 한층더 동해 바싹 달라붙었다.

《아아, 지나친 겸손은 교만이요. 이번엔 우리가 서로 원쑤로서가 아니라 두 나라의 화친대표들로서 만났으니 허물없이 한때를 즐기기요.》

보기만 해도 증오스러운 왜놈들과 어울려노는것이 싫어 그 능청스러운 호의를 거절하려던 유정은 아무래도 조선의병들의 솜씨를 한번 보여 놈들의 기세를 꺾어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홍창해한테 슬쩍 눈짓을 했다.

홍창해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도총섭의 암시를 뿌리칠수가 없어 행장을 풀었다. 그는 어줍은 자세로 공지에 나서다가 가또한테로 문득 몸을 돌렸다.

《미안하오만 칼을 열자루쯤 빌려주오.》

《카알?… 요로시, 칼은 많소다.》

가또는 군사들의 조련을 주관하던 게이찡을 시켜 전투용장검을 창해한테 가져다주도록 했다.

칼집을 뽑은 장검을 열서너개 받아 품에 안은 창해는 심호흡을 두어번 하더니 몸을 벌떡벌떡 뒤로 공전하면서 한고패 뒤집을적마다 칼을 한자루씩 뿌렸다. 윙 바람소리를 내며 날아간 칼은 열개가 넘는 조총사격목표판들의 중심에 순서대로 푹 꽂혀 자루를 부르르 떨었다. 칼을 다 줴뿌린 창해는 《야앗-》 기합술을 쓰면서 몸을 공중으로 날리더니 산기슭에서 자라는 사스레나무중둥이를 모두발로 들이찼다. 꽤 굵직한 나무가 우지직 소리를 내며 맥없이 허리를 꺾더니 털썩 나떨어졌다.

창해의 동작을 지켜보던 왜군들의 눈이 둥그래졌다.

다음은 계명이가 출연했다. 그는 칼을 든 왜군 다섯놈과 맨손으로 격투를 벌렸다. 전쟁기간에 택견술이 보다 능숙해진 그는 무자비하게 날아드는 칼날을 날쌔게 피하면서 박력있는 발휘둘러차기와 손끝급소찌르기로써 놈들을 순식간에 쓰러뜨렸다.

마지막으로 오팔이가 장삼을 벗어던지고 공지로 나섰다. 그는 통나무같은 다리통과 팔뚝을 흔들면서 가또한테 벌쭉거렸다.

《난 원래 둔한 사람이라 막씨름밖에 할줄 모르오. 일본 스모(씨름)를 했으면 하는데.》

《음…》

신음 비슷한 한숨을 괴롭게 내뿜던 가또는 저쪽에 몰켜서서 웅성거리는 병졸들한테 손짓을 하며 뭐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곰처럼 생긴 왜군 하나가 옷을 활활 벗어놓고 훈도시바람으로 나왔다. 다른 왜군이 얼른 뒤따라 공지에 나와 막대기로 금을 둥그렇게 긋더니 소금을 뿌리는것이였다.

그 커다란 원안에서 오팔이와 왜군이 맞붙었다. 왜인들의 씨름이란 지금처럼 둥근 금안에서 샅바도 없이 훈도시바람으로 마구잡이둘러메치기라 수법과 힘을 가늠할수가 없었다.

힘이 장사라고 남들의 부러움을 받아오던 오팔이였으나 처음 해보는 스모라 가까스로 적수를 잡아메치였다. 첫놈이 패하자 우직스럽게 생긴 자들이 거퍼 뛰여나와 오팔이한테 달려들었다. 오팔은 네놈을 자빠뜨리고 다섯번째만에야 기운이 진해 두손으로 땅을 짚으며 넘어갔다.

조선담판대표호위병들의 출중한 인격과 기막히게 놀라운 무술솜씨에 탄복한 왜군장졸들은 혀를 끄르고 손을 흔들며 법석 떠들었다.

그러는 부하들을 가또는 도끼눈을 해가지고 흘겨보며 속으로 밥통같은것들이라고 쌍욕을 퍼부었다. 사실 지금 조련장에 있는 군사들은 가또가 담판하러 오는 조선대표를 위축되게 만들려고 의도적으로 모집해 찰기장밥에 고기국까지 끓여먹이면서 훈련시키던자들이였다.

자존심이 상하고 기분이 잡쳐 쓴입만 다시던 가또는 제가 직접 나서서 조선승병총대장인 금강산 중과 한판 겨루어보고싶은 충동이 부쩍 일었다. 의령성전투때 중도에서 그친 격투를 마저 결판지을 생각이였으나 현재는 형식상이나마 화친담판중이고 또 체면도 있는지라 애써 자중했다.

한편 유정은 저를 수행해온 젊은이들을 심정이 흐뭇해서 미덥게 여겨보았다. 평시에는 량반선비는 물론이요, 최하층 고리백정한테서까지 천한 동냥중이라고 멸시를 받아오던 계명이네와 격군출신으로서 본의아니게 인생의 우여곡절을 겪던 홍창해가 국난을 가시는 길에서 애국공신으로 성장한것이 더없이 대견했다. 얼마나 장한 젊은이들인가! 이들이 바로 정직하면서도 지혜롭고 근면하면서도 용맹무쌍한 우리 백성이다. 이런 열혈장부들한테 의지하면 앞으로도 못해낼 일이 없고 못 쓰러뜨릴 적이 없다는 생각으로 해 절로 마음이 든든해졌다.

시쁘둥해서 수염만 잡아뜯던 가또는 어서 가 명당자리나 잡자면서 유정이네를 딴 곳으로 이끌고갔다.

산서덜 외통길을 톺을 때 유정이와 가또의 시선이 어쩌다 마주쳤다.

(허허, 맛이 어떻소?)

(기뻐하지 말라. 이자것은 한갖 놀음에 불과하다. 우리의 승부는 아직 나지 않았다. 진짜 대결은 앞으로 있을것일다. 그때 결산을 깨끗이 하자.)

서생포의 이곳저곳을 돌아보며 왜군의 병력수와 방비상태 그리고 병쟁기와 군량소유정도를 내탐하고난 유정은 요리조리 구실을 대며 강화담판을 질질 끌다가 며칠후에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남기고 적진을 떠났다.

본영에 돌아온 유정은 《가또 기요마사 영중탐정기》를 작성해 조정에 올려보냈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뒤늦게야 명나라대표와 고니시의 강화담판내용을 알고 해당한 대책을 취했으며 유정이가 정탐해온 왜군의 실태에 맞게 군사작전을 벌리였다.

유정은 이해 7월과 11월에 또다시 적진속으로 들어가 가또와 담판하면서 놈들의 강도적인 강화조건을 일축하였고 적정도 내탐해왔다. 그 과정에 아슬아슬한 죽음의 고비를 수차례나 넘기였다.

진눈까비가 날리던 초겨울의 어느날 묘향산의 중 칠범이 불쑥 승병대에 나타났다.

그는 서산대사가 보낸 솜을 두고 누빈 겹천저고리와 편지를 유정이앞에 내놓았다.

유정은 후더운 심정으로 스승의 서신을 읽었다.

 

도총섭.

원쑤를 격멸하고 나라를 되살리자면 아직도 멀고 험한 길을 가야 할것이요. 너무도 많은 일감이 그대의 손에 놓이고 중하가 어깨에 실렸으니 부디 건강에 주의하오. 그리고 성과에 현혹되여 과신에 빠지지 않도록 항상 자각하길 바라오.

 

《아, 스님!…》

눈내리는 밖에 나선 유정은 멀리 서북쪽하늘가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련재
[장편력사소설]사명당 제1부 (제3회)
[장편력사소설]사명당 제1부 (제4회)
[장편력사소설]사명당 제1부 (제5회)
[장편력사소설]사명당 제1부 (제6회)
[장편력사소설]사명당 제1부 (제7회)
[장편력사소설]사명당 제1부 (제8회)
[장편력사소설]사명당 제1부 (제9회)
[장편력사소설]사명당 제1부 (제10회)
[장편력사소설]사명당 제1부 (제11회)
[장편력사소설]사명당 제1부 (제12회)
[장편력사소설]사명당 제1부 (제13회)
[장편력사소설]사명당 제1부 (제14회)
[장편력사소설]사명당 제1부 (제15회)
[장편력사소설]사명당 제1부 (제16회)
[장편력사소설]사명당 제1부 (제17회)
[장편력사소설]사명당 제1부 (제18회)
[장편력사소설]사명당 제1부 (제19회)
[장편력사소설]사명당 제1부 (제20회)
[장편력사소설]사명당 제1부 (제21회)
[장편력사소설]사명당 제1부 (제22회)
[장편력사소설]사명당 제1부 (제23회)
[장편력사소설]사명당 제1부 (제24회)
[장편력사소설]사명당 제1부 (제25회)
[장편력사소설]사명당 제1부 (제26회)
[장편력사소설]사명당 제1부 (제27회)
[장편력사소설]사명당 제1부 (제28회)
[장편력사소설]사명당 제1부 (제29회)
[장편력사소설]사명당 제1부 (제31회)
[장편력사소설]사명당 제1부 (제32회)
[장편력사소설]사명당 제1부 (제33회)
[장편력사소설]사명당 제1부 (제34회)

독자감상글쓰기
Change the CAPTCHA codeSpeak the CAPTCHA code
 
홈페지봉사에 관한 문의를 하려면 여기를 눌러주십시오
Copyright © 2003 - 2018 《조선륙일오편집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