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소설

첫 시련

                                              전 주 설

제 1 장

1

 

탄광에서는 날마다 그날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로동자들에게 전표 한장씩 내주었다. 전표도 여러가지였다. 갱내 로동자와 갱외 로동자가 다른것은 물론하고 같은 갱내 로동이라 해도 채탄공과 동발공, 굴진공과 운탄공이 서로 다른 전표를 받았다. 일에 따라 임금액이 다르기때문에 전표도 다르기마련이였다. 그 임금액-하루품삯이 얼마라는것이 전표에 적혀있었다. 보통 백원안팎인데 갱내에서 10여년씩 채탄공으로 일한 선산부(탄광에서 앞에 서서 채굴을 맡아하는 로동자)가 극상 많이 받아서 150원이고 갱외에서 선탄부로 일하는 처녀들의 경우에는 고작 80원밖에 되지 않았다. 쌀 한말 값이 2천원 고개를 오르내리는 세월에 그 품삯이 너무나도 눅거리인것만은 사실이지만 아무렇든 그 액수의 차이가 곧 전표의 종류를 구분해주었던것이다. 그밖에는 서로 다른 점이 하나도 없다. 어느 누가 받은 전표이건 똑같이 크기가 우편엽서의 절반만 하고 임금액을 표시한 수자아래에는 《대한민국 상공부직할 대한석탄공사 ××광업소》라는 네모진 도장이 꾹 찍혀있었다. 그 뒤면은 곡괭이를 든 탄부를 그린 선전화와 《산업재건》, 《내핍절약》이라는 표어로 장식해놓았다. 모자라는것을 참고 금전을 아껴쓰라는 표어까지 써놓기는 했으나 로임날이 돼야 그 전표와 현금을 바꿀수 있었다.

광업소에서는 매달 초하루날에 전달분 로임을 내주군 했다. 그날이 오기를 기다리며 탄부들은 저마다 매일매일 타는 전표를 기름종이 같은데 싸서 정히 간수해두었다.

그런데 올봄에는 사정이 달랐다. 4월분 로임을 내주어야 할 5월 초하루아침에 탄광정문 게시판에 《사정에 의하여 로임지불을 연기함》이라는 공시문이 나붙더니만 다음달 초하루날에도, 다시 한달이 지난 7월 1일에도 같은 내용의 공시문이 탄부들의 시선을 끌어당겼던것이다. …

 

7월 초순 어느날.

선탄부 옥희는 차곡차곡 접은 전표 열장을 쥐고 다른 한손에는 빈 쌀자루를 들고 마령감네 싸전으로 갔다.

《열장이예요. 오늘은 흰쌀을 주세요.》

두툼한 비단방석우에 올방자를 틀고앉아 슬슬 부채질을 하고있던 마령감은 그의 말끝이 채 떨어지기 전에 얼른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제 손에 전표를 받아쥔 다음부터는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구김살을 손바닥으로 꼭꼭 눌러 펴기부터 했다. 손바닥에 지내 힘을 주느라 그러는지 팔자수염을 기른 웃입술이 연방 씰룩거렸다. 구김살을 다 펴자 이번에는 엄지손가락에 침을 발라가지고 한장한장 세여보기 시작했다.

《열장이래두요.》 하고 옥희가 거듭 일러주었는데도 마령감은 들은체를 안하고 제 할 일을 계속했다.

《…일곱이라, 여덟, 아홉이라, 으흠… 열장이 맞군.》

손수 장수를 확인해본 그는 잠시 우묵한 눈을 감고 중얼중얼 입속말로 몇마디 웅얼거렸다. 아마 값을 따져보는 모양이다. 따져보았대야 옥희의 전표가 80원짜리니까 열장이면 800원이다. 마령감은 그것을 6할 금새로 계산해서 그 값만치 쌀 두되 좀 남짓이 줄것이다.

옥희는 오늘 처음으로 이 싸전에 온것이 아니다. 광업소에서 로임을 안내주기 시작한 이후로 열흘분 혹은 보름분 전표를 들고 와서 역시 6할 금새로 쳐서 보리쌀이나 호밀 몇되박씩 받아가군 했다. 그것은 옥희 혼자의 식량으로도 턱없이 부족한것이였지만 그에게는 몇해째 페를 앓고있는 아버지와 동생 둘이 달려있었다. 흰쌀로 받으려면 분량이 더 적다. 그러나 아버지가 요새 또 열이 오르며 기침이 잦아지는 바람에 약을 살념을 못 내고 그대신 흰쌀죽이라도 몇끼 쑤어드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는 빈 자루를 만지작거리며 마령감이 얼른 쌀을 주기를 초조히 기다렸다.

먼지가 뽀얗게 낀 손바닥만 한 창문으로 어설프게 흘러들던 홍감색노을이 자취도 없이 사라지더니 어느덧 땅거미가 기여들기 시작했다. 이제 뛰여가 죽을 쑤어도 늦은저녁이 될것이다. 워낙 선탄장에서 해가 저물 때 일손을 떼고 나왔기때문에 자연 저녁차비도 늦어지고말았다. 쿨럭쿨럭 기침을 하며 누워있을 아버지와 문밖에서 자기가 돌아오기를 이제나저제나하고 기다리고있을 동생들의 모습이 눈앞에 얼른거렸다. 아침에 밀가루를 한공기 섞어넣은 나물죽 한사발씩 마신 후로 여태 굶고있으니 오죽 배들이 고프랴. 옥희자신도 진종일 선탄작업을 하고난 그 피로까지 겹쳐서 현기증이 나고 아래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가까스로 서있는 형편이였다.

그러나 마령감은 상아물부리에 담배를 꽂아물더니 이번에는 전표를 한장한장 전등불빛에 앞뒤를 비쳐보기 시작했다.

《사무실에서 탄게 틀림없겠지?》

마령감은 눈을 치켜뜨며 옥희를 넌지시 건너다본다. 가짜가 아니냐는 뜻이였다.

옥희는 슬그머니 약이 올랐다. 오늘이 처음이라면 또 몰라도 매번 올적마다 그런 의심을 하니 말이다. 아무리 가짜가 흔한 세상이라도 자기에게는 티끌만큼도 남을 속이려는 흑심이 없노라 생각하는 옥희였다. 그는 새침해져서 우정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때 웬 할머니가 싸전안으로 들어왔다. 그도 역시 전표를 가지고 량식을 바꾸러 온 사람이였다.

마령감은 옥희를 제껴놓고 그 할머니에게 먼저 보리쌀 두되가웃과 밀가루 네봉지를 내주었다.

그것을 받으며 할머니가 이빠진 소리로 중얼거렸다.

《저 처녀가 먼저 왔는데 내가 먼저 받느먼.》

《괜찮아요, 어두운데 먼저 받아가지고 가세요.》

옥희는 할머니에게 조그만 자루나마 이워준 다음 이젠 자기에게도 주려니 하고 빈 자루를 벌리며 마령감앞으로 다가섰다.

《가만 좀 있어.》

마령감의 어조는 의외에로 쌀쌀했다.

옥희는 의아쩍은 심정으로 다시 돈궤앞의 비단방석에 가앉는 그의 거동을 지켜보았다. 그러고보니 오늘따라 유별스레 더 늦장을 부리며 얼른 쌀을 주지 않는품이 무엇인가 딴 속심이 있는것 같았다.

아니나다를가 마령감의 입에서 뜻밖의 선고가 튀여나왔다.

《이번건 말이야, 에헴. 집세로 받아둘테니 그리 알아둬.》

《네?》

옥희의 낯빛이 당장 해쓱해졌다. 그들이 지금 살고있는 집이 마령감의 소유인것만은 사실이였다. 그리고 전달분 집세를 아직 물지 못했다는것도 옥희는 알고있었다. 그러나 그 전표 열장을 집세로 빼앗기고나면 당장 저녁거리가 없어지고말지 않는가.

《아이, 그렇게 하면 우린 어떡해요? 집세는 요다음 전표를 가지고 와서 물겠어요.》

《그때는 래달치를 물어야지.》

《아이참… 좋아요. 그럼, 그때 두달분을 한꺼번에 물어드릴게 오늘은 쌀을 주세요.》

옥희는 거의 불가능한 일인줄을 알면서도 어떻게 해서든지 두달분 집세를 한꺼번에 마련하겠다고 마음먹으며 이렇게 간청했다.

《난 제 날자에 한달치씩 받는 사람이야.》

마령감은 돈궤우에서 수판을 집어들고 번대머리를 숙이더니 무어라고 웅얼거리면서 수판알을 딸가닥거린다. 더 들을 말이 없다는 태도다.

옥희의 입에서는 호- 하고 가냘픈 한숨이 새여나갔다. 바싹 말라붙은 입술을 감빨며 한번 더 사정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지만 할아버지… 제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정말이예요. 꼭 두달분을 한꺼번에 드리겠으니 오늘은 쌀을 주세요. 네, 할아버지?》

마령감은 들은체를 않고 새까맣게 때가 낀 손가락으로 수판알을 튕기며 한마디도 응대를 하지 않았다.

《네, 할아버지, 사정 좀 봐주세요. 집에서 아버지랑 동생들이 저녁도 못 먹고 저를 기다리고있어요. 그런데 제가 빈손으로 돌아가면… 글쎄, 생각해보세요.》

옥희는 애끊는 목소리로 간청했다. 목석이 아닌 이상 옥희의 그 간절한 목소리에 충격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없을것이다. 그러나 마령감의 번대머리는 여전히 까딱 움직이지 않았고 재깍재깍 수판알을 튕기는 소리만 들렸다.

드디여 옥희의 연한 눈섭이 파르르 신경질적으로 떨리기 시작했다. 보풀이 인, 약간 봉긋이 돋아난 입술에도 가벼운 경련이 일었다. 왈칵 설음이 북받쳐오르고 약이 올랐다.

《너무해요. 아무러면 이렇게까지 야박할수가 있어요. 사람이면 남의 사정도 봐줄 때가 있어야 되잖아요? 너무해요, 너무…》

그제서야 천천히 번대머리를 쳐든 마령감은 눈물이 가랑가랑 맺혀 쏘아보는 옥희의 눈을 바라보며 넙적한 입을 벌렸다.

《허, 그 계집아이 무슨 말버릇이 그 본새야. 엉?》

이때 로조지부장 리달수가 싸전안으로 쑥 들어왔건만 옥희는 그를 미처 보지 못한채 악에 받친 소리로 쏘아붙였다.

《말버릇이 뭐 어떻다는거예요. 더 험한 말이 떠오르지 않은게 되려 분해요.》

《저런 고얀 년 봤나, 썩 나가. 덜된 개수작말고 냉큼 내 가게에서 나가란 말이야.》

리달수가 손을 내저으며 두사람사이에 나섰다.

《왜들 이러오? 점잖은 령감과 이쁜 처녀가, 예?》

리달수는 색안경을 벗어들고 두사람의 표정을 번갈아 살폈다. 밤에도 색안경을 끼고 다니는 취미도 별난것이지만 칼날같이 주름을 세운 백세루바지에 구김살 하나 안 잡힌 옥양목반소매샤쯔를 거뜬히 받쳐입은 그의 옷차림도 이 탄광마을에서 보기 드문것이였다.

그는 제법 눈치가 빠른 젊은이여서 마령감이 무슨 일로 그렇게 호통을 쳤는지를 대강 짐작했다.

《령감, 왜 또 전표를 가지고 사람을 앨 먹이며 야단이요?》

리달수는 내 짐작이 맞지 않느냐고 묻는 시선으로 옥희를 돌아보고 다음 말을 이었다.

《전표장사를 그만두라고 내 저번때도 말하잖았소?》

마령감은 눈이 휘둥그래지며 놀란 시늉을 했지만 속으로는 코웃음을 쳤다. 리달수가 암만 을러대여도 계속 전표를 사들여서 현금과 바꿀 작정이였다. 그는 이미 광업소 경리과와 뒤구멍교섭이 돼서 6할 금새로 산 전표들을 꼭꼭 제 옹근값에 쳐서 현금과 바꾸고있었다. 이만저만한 돈벌이가 아니였다.

그걸 그만두다니, 천만의 말씀이다.

그러나 만약 로조에서 거기에 눈을 밝히고 왜 탄부들에겐 로임을 안 내주고 마령감의 전표만 바꿔주느냐고 광업소에 시비를 걸면 시끄러운 말썽이 생길것만은 사실이다.

허지만 마령감이 알기엔 리달수는 아직 광업소에 시비를 걸지 않고있다. 광업소에 항의를 들이댈 대신 한두번 지나는 길에 싸전안으로 들어와 《왜 자꾸 전표장사를 하는거요? 로조에서 문제를 세우기를 기다리는거요?》 하고 을러대기만 할뿐이였다.

마령감은 그 엄포를 자기나름으로 생각했다. 몇푼 얻어먹겠다는 수작이겠지. 탄부들을 착취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전표장사로 번 돈에서 개평을 좀 달라는 암시로 해석한것이였다.

그러지 않아도 마령감은 로조에서 시끄러운 말썽을 일으키지 않게끔 예방하기 위해 리달수에게 뢰물을 먹일 생각이 없지 않았다. 먹이되 눅거리로 적게 먹이고도 효과가 크게 나는 방도를 궁리하는중이였다.

마령감의 그런 속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달수는 재차 호통을 쳤다.

《내 말을 알아들었소? 정신을 똑똑히 차리란 말이요. 그런데 옥희씨 전표를 왜 공짜로 삼켜버리려고 그 야단이요? 당장 도로 주든지 제값대로 다 쳐주든지 하오.》

《아… 아니, 지부장님, 거 모르는 말씀을 작작하시오. 공짜가 다 뭡니까?》

마령감은 펄쩍 뛰면서 집세이야기를 했다.

리달수는 그의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고 옥희의 손에서 빈 자루를 뽑아내여 마령감에게 훌 던졌다.

《좋소, 좋소. 긴말할것 없이 쌀이나 한자루 담소, 얼른.》

마령감은 한마디도 군소리를 안하고 쌀을 퍼담기 시작했다. 되로 되지도 않고 그저 한자루 가득 채우기만 했다. 그러면서 이따금 고개를 쳐들 때마다 리달수의 반소매샤쯔 왼쪽주머니에 불룩하게 들어있는 돈지갑에 눈독을 들일 대신 홍당무처럼 새빨개진 옥희를 능청맞은 미소를 띤 눈으로 살펴보군 했다.

당황한것은 옥희였다. 자루를 빈채로 도로 달랄수도 없고 쌀을 채워주기를 멍청히 서서 기다릴수도 없었다. 뜻밖의 행운을 받은것 같기도 하고 무슨 놀림을 당하는것 같기도 했다. 도무지 무슨 영문인지 알수 없었다. 마령감이 능청맞은 눈웃음을 치며 쳐다보는 까닭은 더욱 알수 없었다.

이윽고 마령감이 자루에 쌀을 가득 채우자 리달수가 그것을 번쩍 들어 옥희의 머리우에 올려놓았다.

《자, 됐어요. 이고 가시오.》

옥희는 엉겁결에 받아 이기는 했으나 그 다음 처신을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몰랐다. 무턱대고 그냥 이고 가자니 부끄러움이 앞서고 그렇다고 선뜻 내려놓을 용기도 나지 않았다. 머리를 내려누르는 무게가 벌써 이상한 힘으로 그를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던것이다. 그는 리달수가 왜 자기한테 호의를 베푸는가를 생각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남달리 친한 사이도 아닌 그가 이런 호의를 베푸는 까닭이 쉬 떠오를리가 없었다. 얼굴만 더욱 화끈 달아오를뿐이였다.

눈치빠른 리달수가 어느새 그의 마음속을 꿰뚫어보고 자못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달리 생각할건 없어요. 로조에서 뒤처리를 해줄테니 안심하고 가시오. 그리고 앞으로도 혹시 어려운 일이 있으면 사양마시고 우리 로조사무실에 오시오. 로조란게야 원래 탄부들을 도와주기 위해 만든 조직이 아닙니까. 하하하…》

리달수의 호탕한 웃음에 이끌리며 옥희도 부지중 미소를 머금었다. 언제인가 리달수의 연설을 들은 일이 생각났다.

네댓달전 어느날이였다. 그날 리달수는 선탄장에 나타나서 선탄부들을 한자리에 모여놓고 《국가재건시기 산업전선에 헌신한 녀성로동자들의 권익옹호와 로조의 사명》이라는 긴 제목으로 일장 열변을 토했었다. 연설을 마친 후엔 선탄부들더러 애로조건이 있으면 제기하라, 로조지부에서 광업소측과 절충해서 해결해주겠다고까지 했다. 그러나 리달수곁에 현장감독이 도끼눈을 하고 앉아있었기때문에 아무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제기하고싶은 애로조건으로 말하면 임금이 너무 적다느니, (그땐 아직 로임이 체불되기 전이였다.) 로동시간이 너무 길다느니, 현장감독의 비행이 여사여사하다느니 그밖에도 로동조건, 위생시설 등 열가지, 스무가지를 넘고도 남았지만 감독앞에서 그런 불평을 서뿔리 입밖에 내다간 십중팔구 감독의 눈밖에 나서 해고나 당하게 될것이기때문에 잠자코 있었던것이다. 리달수도 그런 사정을 아는지 후에 자기에게 찾아와서 애로를 제기하면 개별적으로 해결해주겠다고 장담하였다. 그 《개별적해결》방도의 하나가 이런 식으로 쌀자루를 이워주는것일가?

옥희는 혼자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어쨌든 리달수의 처사가 고마왔다. 그가 때마침 나타나서 마령감을 윽박질러놓지 않았으면 필경 빈 자루만 들고 가게 되였을것이다. 그의 덕분에 아버지와 동생들을 굶기지 않게 되였다. 천만다행이였다. 쌀자루만 이고있지 않으면 머리숙여 절이라도 하고싶었다.

《어서 가보시죠. 댁에서 기다리고있을텐데. …》

《네, 감사해요.》

옥희는 겨우 한마디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원, 천만의 말씀을… 로조에서 진작 방조를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이래저래 바쁜 일에 몰리다보니 옥희씨네 형편을 미처 몰랐지요. 이젠 저도 대강 알았으니까 앞으로 종종…》

웬 아낙네가 급한 걸음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리달수의 이야기가 중둥무이돼버렸다.

새로 들어온 아낙네는 걸음도 빠르고 말씨도 빨라서 《바람개비》란 별명이 붙은 나이 마흔댓살 돼보이는 녀자였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전표 열장을 마령감에게 내밀며 잽싸게 입을 놀렸다.

《오늘은 값을 좀 잘 쳐주세요. 굴간에서 칠성판을 지고 번건데 6할이 다 뭐예요? 글쎄, 아까 해질녘에 밤골갱에서 탄차가 굴러서 또 사람이 상했대요. 원, 기막혀서… 이 전표 한장 벌려구 그 참변 당했으니 원, 령감님도 그런줄이나 알고 이젠 값을 좀더 쳐달라구요.》

옥희는 밤골갱이라는 소리에 당장 낯빛을 흐리며 그 아낙네곁으로 다가섰다.

《여럿이 상했나요?》

《난 또 누구라구. 참, 옥희네 집에 잘 다니는 그 인배라는 젊은이도 거기에 있었대.》

《상한 사람은 한사람뿐이라더군요.》

옆에서 리달수가 한마디 끼여들었다.

《그게 누군지 모르시겠어요? 혹시 인배씨가… 네, 지부장님.》

옥희가 다우쳐물었다.

《글쎄요, 저도 방금 누구한테서 피뜩 듣고 오는 길이 돼서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아니, 그런데 인배씨와는 어떻게 친척간이라도 되는가요?》

리달수는 왜 그런지 빈정대는 어조로 물었다.

옥희는 뭐라고 대꾸하려다말고 힝 밖으로 달려나갔다. 한손으로 머리우의 쌀자루를 붙잡고 다른 한손으로는 활개를 치며 달려가는 그의 모습은 미구에 어둠속에 사라져버렸다.

리달수는 옥희의 모습이 사라진 후에도 이윽토록 행길쪽을 내다보며 한자리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마령감이 그의 곁으로 어기정어기정 다가왔다. 그 역시 잠시 어두운 행길쪽을 말없이 내다보며 팔자수염을 쓰다듬었다. 문득 그의 눈에 아까 쌀을 퍼담으며 옥희를 쳐다볼 때와 같은 능청맞은 미소가 떠올랐다.

《지부장님!》

《쌀값 말이요?》

리달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퉁명스럽게 물었다.

《거야 어련히 주실테지만 어떠시오? 그 나이에 혼자 지내시기도 적적하실텐데…》

마령감은 리달수의 귀에 입을 대고 다음 말을 이었다.

《그만하면 괜찮은 처녀지요. 전에 춘천바닥에서 학교물도 좀 먹어서 그런지 촌티도 덜 나구 얼굴도 반반하구…》

《그러니 어쨌다는거요?》

《지부장이 원하신다면 내 그 처녀 아비한테 혼사말을 붙여보지요.》

《허튼수작 관두오!》

리달수가 어찌나 갑작스레 소리를 질렀던지 마령감은 화닥닥 놀래여 두어 걸음 뒤걸음을 치기까지 했다. 그리고는 모를 일이라는듯이 머리를 설레설레 내젓더니만 한참후에 다시 우묵한 눈에 웃음을 띠였다. 무엇인가 제딴에 자신이 있는 계교가 생겼다는듯 한 웃음이였다.

한편 리달수는 그 자리에 못박힌듯 서서 무엇에 사뭇 구미가 당긴 사람마냥 입맛을 다시며 바깥을 내다보더니 쌀값도 내지 않고 훌쩍 나가버렸다.

 

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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