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소설                                          (제 1 회)

빛을 따라

                                              정 창 윤

제 1 장

어 둠

 

기계연구사 김응빈과 나는 현지연구실 난로곁에 앉아있다. 창밖엔 눈이 내리고 밤은 깊었다. 저탄장으로 오고가는 전차소리만 들려올뿐 ㄱ탄광지구는 조용하다.

나는 오늘 아침차로 여기에 왔다. 목적은 연구사 김응빈의 새 연구제품인 유압식종합기계동발에 대한 취재에 있다. 그의 새 연구제품은 지금 최종적인 개작설계중에 있다.

김응빈은 말하고있고 나는 듣고있다. 우리는 초면이 아니다. 10년전에도 이처럼 밤을 새워가며 이야기를 나눈적이 있다. 그때의 김응빈은 지금의 기계동발이 아니라 무연탄광들에서 사용할 새로운 채탄기를 연구하고있었다.

장소 역시 그때엔 여기가 아니라 서부탄전지구였다. 그리고 이보다 더 앞서서는 피의 격전장이였던 락동강근방에서 함께 싸운 일이 있다.

 

벌겋게 단 난로우에서 물주전자가 끓는다. 물주전자가 끓는 소리를 들으며 눈이 쌓인 창밖을 내다보는것은 북방땅의 독특한 정취다.

자기 연구제품에 대한 김응빈의 설명은 계속되고있다.

머지않아 탄생할 기계동발의 덕택으로 우리 나라 무연탄광들에서는 막장동발의 시공과 해체 그리고 이설작업을 기계로 하게 되는것이다. 이 새로운 기계동발은 천반을 덮고 스스로 전진하면서 보습식채탄기나 원통식채탄기와 함께 일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 나라 탄광의 막장들에서는 삽과 곡괭이를 영영 축출해버리게 된다.

유압식종합기계동발, 이 새 설계제품의 구조는 복잡하며 그 작용원리나 기술적요구는 완전한 의미에서 현대적이다.

나는 이렇듯 우리의 기술혁명에 이바지할수 있는 무연탄대형채굴기계의 설계가가 김응빈이라는데 새삼스레 놀란다. 김응빈, 정말 동무가 발명가로 되였단 말인가?

나는 옛 전우의 성공에 감격을 금할길이 없다.

세월과 더불어 파묻혀버렸던 추억들이 떠오른다.

락동강, 락동강, 피흐르는 격전터, 조국의 남단.

 

…우리는 사단에서 파견할 대대를 기다리고있었다. 하루가 될는지 이틀이 될는지 그건 아무도 모르는것이였다.

약속된것은 상봉지점뿐이였다. 그리하여 여기 경상산줄기의 험준한 적후밀림속에 소형천막을 쳤다.

우리의 임무는 두가지였다. 첫 임무는 남진하는 인민군대에 의해 락동강이남의 협착한 지역으로 몰리게 된 미제침략군사단들과 괴뢰군사단들의 보급기지인 ㅂ시가에 대한 정찰행동을 하는것이였다.

차후임무는 약속된 지점에 대기하고있다가 ㅂ시가를 불의공격할 임무를 띠고 나타날 대대를 맞이하여 안내하는것이였다.

우리는 여섯사람이였다. 그런데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여 3개의 2인분조로 나뉘여져서 행동하고있었다. 이 정찰분조들은 대기지점 역시 각이했다. 사단참모부의 지도상에서만 이 분조들은 하나의 콤파스원형선속에 있게 되였다. 이것은 비록 우리가 두사람씩 떨어져있기는 하지만 어덴가 이웃지점들에 전우들이 있다는것으로 하여 외로움을 모르게 했다.

변덕이 심한 날씨였다. 아침엔 해가 났고 낮부터는 흐려졌으며 저녁엔 바람이 불었다. 9월이지만 지대가 높다나니 서늘한 기운이 천막속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풋잠에 들었다가 천막지붕을 두드리는 비방울소리에 눈을 떴다.

《비가 내리는군요.》

그때까지 자지 않고 앉아서 담배를 피우던 병사 김동무의 말이였다.

나는 로획품인 야광판시계를 들여다보았다. 12시 5분이다. 들리느니 바람소리와 비방울 떨어지는 소리뿐이다.

《졸리지 않소?》

《아닙니다.》

나는 이 의용군출신 신입병사가 잠을 적게 자는걸 고맙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분조활동을 시작한이래 우리는 위험한 고비를 여러번 겪었는데 그중 몇번은 그가 잠을 적게 자는 덕에 무사할수 있었기때문이다. 김동무의 잠귀는 매우 밝아서 바스락소리에도 눈을 뜨군 했다.

나는 말이 적고 잠이 적으며 언제나 조용하게 지내는 병사 김응빈에 대하여 아는것이 별로 없다.

그가 우리 소대에 온것은 서울을 좀 지났을 때부터였다. 련일 포연속을 뚫으며 전진해야 하는 로상에서 그는 우리들과 만났고 인사를 주고받았다. 했을뿐 너무도 바쁜 때라 별다른 이야기 한번 나눠볼 기회는 없었다. 군화끈 한구멍, 단추 한구멍 풀어놓는 일이 없는 김동무였다. 규정식몸가짐에서 탈선할가봐 긴장해있었고 자기 기분이나 자기 생각을 밖으로 드러내는 일이 없는 사람이였다.

전투없이 행군하는 때나, 전투가 반복되는 날이나 그의 얼굴표정과 몸가짐은 한가지-정숙, 정숙 그것뿐이였다.

나는 이번 정찰행동을 그와 한조가 되여 하게 되였을 때 얼마간 실망했었다. 한것은 그가 단독출전이나 2인출전을 할만 한 전투원의 표징을 못 지녔다고 생각되였기때문이다.

창백한 얼굴과 허약한 인상을 주는 육체적준비도 그러했거니와 중요한것은 그의 성격때문이였다. 항상 그 무슨 생각에 잠겨있는듯 한 맑은 눈과 길다랗게 퍼진 속눈섭이 녀성적인감을 주는데다 행동 역시 지나치게 조용했다. 이런 그가 적후로 파견되는 전투원들의 명단에 적혀있었을 때 우리모두는 크게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대대장과 중대장 그리고 정찰참모가 심중한 토론끝에 작성한 명단이여서 의견을 갖는 사람은 있을수 없었다.

병사 김응빈의 이름이 대렬앞에서 호명되고 뒤따라 그가 대렬앞으로 3보 나섰을 때 우리들의 입은 크게 혹은 작게 벌려졌을뿐이였다. 그것은 한다하는 전투원들도 적후파견대의 성원으로 선발되기가 쉽지 않았기때문이다. 하지만 지휘관들은 우리가 놀란다고 해서 명단을 변경하지는 않았다. 그날밤 대렬앞에서 호명된 여섯명 정찰조는 련대 정찰참모의 지휘아래 전선을 넘어 적후로 들어왔다.

그리고 분조를 편성할 때에 우리는 제3조로 되였는데 조장에 나, 조원에 김응빈을 임명했다. 했을 때 동무들의 시선은 일제히 나에게로 쏠렸다. 그것은 내가 이런 조편성을 어떤 심정으로 접수하는지 알고싶었기때문이다. 그때 나는 외형상 태연을 보이려 했지만 사실은 실망한 기분이였다. 이런 처녀 같은 사람과 적들이 욱실거리는 ㅂ시내로 들어간다는것은 마음 든든치 못한 일이였다.

그러나 나의 이런 실망은 공연한것이였다. 2인행동의 나날은 그가 결코 처녀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것을 보여주었다. 정찰활동의 매 걸음에서 그는 예리하게 적들의 동태나 위험을 감득할줄 아는 병사로서 그리고 그 위험과 역경속에서 빠져나올줄 아는 용감성과 침착성을 충분히 지니고있는 병사로서의 자기를 보여주었다.

한번은 ㅂ시내의 인적없는 골목에서 순찰중에 있는 미군과 불의에 격투를 하게 되였다. 피해설 곳 하나 없는 길쭉하고 좁은 골목에서 2대8의 비률로 싸운다는것은 힘겨운 일이였다. 나는 신입병사 김동무가 이 피투성이가 될 격투를 원만히 겪게 될는지 크게 걱정했다.

그랬지만 그가 바람처럼 휙 날아서 놈들의 복판에 뛰여든 다음 단검과 주먹으로 쓸어눕히는것을 볼 때에 하마트면 소리라도 지를번 했다. 적들을 개굴창에 처박거나 숨통을 눌러버리는 그 정확한 손동작과 발동작도 동작이려니와 원쑤에게 보이는 무자비성과 증오심은 불덩이와 같은것이였다.

우리가 적후로 파견될 대대와 만나기로 약속된 지점인 여기 경상산줄기의 103호구역에 천막을 친것은 어제 저녁부터였다.

노래를 불러도 일없을상싶으리만큼 주위는 안전했다.

예견컨대 아군대대는 바쁘게 이리로 나타나지는 않을것이다. 왜냐하면 이 103호구역은 현재의 적아무력배치정형으로 보아 아군지대나 다름없이 되였기때문이다. 그러니 무료한 시간을 이제부터 얼마나 보내게 될는지 모를 일이였다. 밤이 되면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어쨌든 적후인만큼 두사람 다 함께 잠들수는 없는 일이였다. 우리는 교대하여 자기로 했는데 대체로 초저녁엔 김동무가, 뒤엔 내가 앉아있기로 했다. 오늘 밤 역시 잠자는 순서는 이러했다.

《인젠 자오.》

나는 가볍게 몸을 일으킨 다음 천막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잠이 오지 않습니다.》

《그래도 누워있느라면 잠이 오지.》

그 다음 두사람사이엔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응빈은 눕지 않을 작정인듯싶었다.

《대대가 오지 않는건 일기조건때문이 아닐가요?》

그는 어째서 사단으로부터 파견될 적후습격대대가 한시간이라도 빨리 오지 않는지 몹시 궁금한 모양이였다.

그는 아직 신입병사이니 군사작전에 대한 예견성을 정확히 가질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대가 오늘 밤쯤 나타나리라고 믿었던것 같다.

《그럴는지도 모르지.》

《비방울이 굵어지는데요.》

천막출입구를 통해 밖을 내다보며 생각에 잠겨진 응빈이였다.

《비소리를 들으니 김동무의 마음에 변화가 생기는것 같소.》

《이상해집니다, 조장동무. 지나간 날들이 떠오릅니다.》

《…》

《…》

다시금 우리 두사람사이엔 말이 끊겼다.

나 역시 깊은 밤에 이런 산속에서 비소리를 듣는다는것은 좋지 않았다. 천막지붕을 두드리는 비방울과 나무잎들에 떨어지는 비방울소리에 귀를 기울이고있느라면 어쩐지 적막을 느끼게 되는것이다.

적막, 어둠, 이런것을 견디지 못하리만큼 싫어하는 나였다.

나는 담배를 피우려고 성냥을 켰다. 순간 김동무의 얼굴에 실린 서글픈 빛을 보았다. 그 서글픈 빛은 고통과 뒤섞여있는것처럼 생각되였다.

지나간 날들에 대한 생각… 성냥불에 비쳐진 얼굴빛… 그렇다면 김동무의 그 지나간 날들에 대한 회상이란 슬픔뿐이란 말인가?

《괴로운 회상이요?》

《그렇습니다, 조장동무. 고통을 주는 회상들이지요.》

바람세가 사나와지더니 천막을 찢어놓을듯이 울부짖는다.

나는 듣는다. 비소리, 바람소리 그리고 김동무의 그 지나간 날들을…

…이슬비 내리는 거리. 밤의 서울.

짧은 곤색코트를 입은 청년 김응빈은 어둠속을 걷고있다.

보통키, 둥근 얼굴, 어깨는 넓다. 서울은 이 시골청년을 짓밟았다. 짓밟힌 청년은 거리를 헤매고있다. 검은구름을 뒤집어쓴 하늘엔 별 하나 얼굴을 내밀 틈이 없다.

지금은 한 건물앞에 그가 서있다. 무거워보이는 높은 집이다. 그 집 층층마다의 창문들에서는 불빛이 쏟아져나온다. 청년은 그 창문들에서 시선을 옮겨가지 못한다. 코트주머니에 두손을 찌른 그는 짙은 어둠속에 박아놓은 철의 조각상처럼 움직일줄 몰랐다.

대학이여! 청년은 너를 보며 굳어졌다. 그에게 대학은 희망의 전부였다. 미래였다.

하건만 오늘로서 이 청년에겐 그 희망의 전부가, 그 래일이 사라졌다.

대학은 공납금없는 이 고학생청년에게 새 학기부터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할수 있는 모든것을 다하여 2년간의 대학생활을 해온 그였다. 대학을 마치고 기계공학자가 되려 했건만 끝내는 쫓겨나고야말았다.

자기의 순결한 가슴에 그렇듯 큰 상처를 입힌 대학이기에 영원토록 기억에 새겨두려고 이렇듯 그는 서있다.

밤, 밤, 검은구름을 뒤집어쓴 하늘엔 별빛 하나 흐르지 않는다.

서울이여! 너의 밤은 너무도 어둡구나. …

의용군출신병사 김동무의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였다.

…래일을 잃어버린 청년 김응빈은 어둠속을 걸어가고있다.

어데로? 무엇때문에? 이것 없이 밤거리를 헤매는 그였다.

총총한 집들의 창문마다에서는 불빛이 밝게, 흐릿하게 비쳐나오고있건만 이 슬픔많은 청년의 얼어든 몸과 찢어진 선전화와 광고쪽지들이 진창길우에 딩굴다가 발끝에 휘감기는 서울의 밤거리엔 소름끼칠 정적만이 길게 드러누워있었다.

응빈은 걷다말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하늘도 그의 래일처럼 어둡다. 반가운 별 하나 반짝이는 곳이 없다.

래일, 래일, 그 래일에 나는 어데로 가야 하나?

응빈은 아득히 뻗은 두줄기 철길우로 달리는 차칸에 앉은 자기 모습을 그려본다. 고달픈 생령들의 얼굴마다에 무거운 절망의 기색만이 짙은 3등차칸이다.

숨가쁘게 덜커덩거리며 달리던 그 3등렬차는 거리도 골목도 사람들도 검은빛일색인 어느 한 탄광지구에 이르러 서서히 멎는다.

고향, 응빈은 머리를 들고 정깊은 산천들을 바라본다. 성공하고 돌아오리라 속다짐하고 떠났던 고향, 그 고향에 너무도 초라한 행색으로 돌아온것이다.

흐린 하늘을 흔들어놓으며 고동소리가 들려온다.

응빈은 세상에 나면서부터 이 고동소리를 들었다.

날밝기를 기다린듯 탄부들을 굴속으로 끌어가는 고동은 어제도 오늘도 변함없이 탄광촌의 흐린 하늘에 울려퍼졌다.

아버지 김길영은 고동소리에 놀라 깬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온순하게 문밖으로 나선 다음 굴쪽으로 향하여 갔다.

아들 역시 커가면서 고동이 울리면 아버지를 따라 굴밖까지 함께 갔다. 그 다음 아버지는 굴로 들어가고 아들은 굴밖 개울에서 뚝도 막고 물싸움도 하면서 발가숭이 다른 애들과 함께 아버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하늘높이 떠서 열을 쏟던 해도 기울어지고 땅거미가 지면 지칠대로 지친 탄부들이 걸음조차 제대로 옮기지 못하면서 굴밖으로 나왔다. 애들은 달려가 아버지들의 손에서 밥그릇보자기를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마을로 내려가는 둔덕길우에 올라섰다.

아버지들은 걸음도 더디였고 말도 적었다.

《아버지, 힘들어?》

《응, 힘들지.》

그러면 해종일 기다리다가 아버지를 만난것으로 하여 빛나던 애들의 눈엔 그늘이 졌다. 그러면 아버지들은 아들들에게 롱말을 걸었다.

《너희들이 어서 커서 탄을 캐는 기계를 만들어내렴.》

비록 아버지들은 롱말을 했지만 코흘리개아들들은 생각에 잠기군 했다. 정말 아버지들의 힘을 덜어줄 기계를 만들어낼수는 없을가? 옛말에 나오는 기계, 산을 헐어내고 강을 뒤집고 바다를 땅으로 만들기도 한다는 기계, 그 기계의 빛갈은 붉고 푸르고 희고 노란것이였다.

그런 기계를 만들어 아버지들의 일손을 도와줄수는 없을가?

그리하여 아들들은 자신들이 직접 그런 기계들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고무신짝을 매단 쇠줄로 삭도선을 늘이기도 하고 저절로 내려박혔다가 솟구쳐오르는 수수대곡괭이도 만들었다. 꼬마들의 탄캐기기계의 연구활동은 이런식으로 쉬임없이 계속되였다. 했지만 그 어린 기계발명가들은 아버지들이 그러했던것처럼 뼈도 굵기 전에 굴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들자신이 품팔이탄군이 되여 먹을것을 벌어야 했고 저녁이면 비칠대면서 마을로 내려가는 둔덕길우에 나서야 했다.

응빈이 역시 탄광 철공부에서 함마질을 하여 먹을것을 벌었다. 그러면서 기를 쓰고 야간중학교에 다녔다. 고달프게 한자한자 배워가는 이 탄부의 아들은 코흘리개시절부터 품었던 뜻에 항상 충실했다.

《내가 기계를 만들어내리라. 탄캐는 기계, 탄나르는 기계, 산을 허무는 기계. 그리하여 아버지처럼, 나처럼 뼈가 휘도록 일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리라.》

이러는 사이 응빈은 자기가 세상에 태여난것은 기계발명을 위함이나 되는것처럼 생각하게 되였다.

그는 기계발명을 위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라면 어떤 대가도 즐겨 치르었다.

배울수만 있다면… 그 길과 통한 대학이며 도서관, 그곳들에 갈수만 있다면… 일하며 걸으며 자면서까지 생각하는것은 이것뿐이였다.

응빈은 종종 이것들을 꿈에 보았다. 구석구석에서 수백년 묵은 책들이 곰팡이냄새를 풍기는 도서관의 서고속에 그가 앉아있었다. 그는 그 책 한장한장을 넘기며 자기 이전의 모든 기계발명가들이 어떻게 일했고 생각했으며 해놓았는가를 읽었다. 간혹은 대학강의실에 앉아 복잡한 기계원리가 표시된 흑판을 보며 깊이 취해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기도 했다.

희망은 이처럼 불탔건만 그 희망과 련결된 길과는 너무도 멀리 떨어져 사는 응빈이였다. 눈뜨자부터 고동소리에 몰리여다니는 자신의 처지와 희망을 두고 그는 몸부림치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세월은 흘렀다. 1년, 2년… 내 일생은 결국 이렇게 끝날수도 있지 않을가?

다감한 청년은 남 다 자는 깊은 밤에도 잠들지 못하고 뒤치락거렸다. 때로는 해질무렵의 강변 잔디우에 엎디여 먼 하늘가로 공상의 나래를 펴기도 했다.

《가자. 어데든 좋다. 배울수만 있다면…》

결심은 매번 이러했지만 가난뱅이청년이 고향을 떠나기란 쉽지 않았다. 어언 반백이 되여 허리 구불기 시작한 아버지를 두고, 오빠라고 아침저녁 매달리는 동생들을 두고 고향집을 하직하기란 못 견딜 정도로 가슴쓰라린 일이였다. 그리하여 또다시 깊은 밤이면 뒤치락거리며 한숨을 지었고 강변 잔디우에 누워 탄광마을의 쓸쓸한 석양녘 풍경을 보며 하늘가 먼곳으로 공상의 나래만을 폈다.

아버지 김길영 역시 아들을 떠나보내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두고 아들처럼 잠들지 못했다.

그러다가 어느날 밤 아버지와 아들은 마주앉았다.

일생을 두고 큰소리라고는 누구에게나 한번도 쳐본 일 없는 아버지 김길영은 땅이 꺼질듯 한 긴 한숨을 내쉰 끝에 입을 열었다.

《그럼 떠나거라.》

그리하여 아들은 떠났다. 기어이 성공하고 돌아오리라 배웅나온 가족들과 친지들, 친우들에게 몇번이고 맹세다지고 떠난 응빈이였다.

그때로부터 날품팔이군대학생으로 2년, 고학생의 하루하루는 힘겨워 간혹 문턱을 넘어서려다 쓰러지기도 했다. 그래도 《내 성공하리라. 기어이 대학을 마치리라.》고 결심을 굳게 하며 일어서군 했다.

하지만 인제는 그 쓰라린 고학생생활마저 끝장이 났다. 대학은 더이상 이 날품팔이군고학생과 《외상》거래를 하지 않으려 했다.

다시한번 응빈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묻는다. 래일은 어데로 가야 하나?

하지만 대답은 들을 길이 없다. 그 누구도, 그 어데서도 손 내밀어 맞아주는 사람 하나 없는 나그네, 방황하는 길손, 외로운 청년이였다.

응빈은 인적끊긴 골목을 지나가고있다. 키낮은 집들이 처마와 처마를 잇대고 비좁게 선 길다란 골목이다. 잡동사니를 팔던 가게방들도 문을 닫아맨 시각이다.

그 집들의 앞에 매달린 간판의 모양이란 한번씩은 눈이 가리만큼 해괴했다.

집보다는 간판이 더 커보이는것이 있는가 하면 역해서 보지 못할 천박한 그림을 그려놓은것들도 있다.

골목은 이쪽 거리에서 저쪽 거리로 나가면서 점차 경사를 이루었다.

응빈은 자기앞에 얼마쯤 사이를 놓고 한 처녀가 힘들게 한발자욱한발자욱 옮기면서 걸어가는것을 보았다. 집들의 처마밑에 매달린 전등빛이 미치는 곳들에서는 그 처녀의 모습이 나타났고 그렇지 못한 곳들에서는 어둠속에 묻혀졌다.

처녀는 무거운 짐꾸레미를 량쪽손에 하나씩 들고 가는것이였다. 그러다가 어느 한 가게방앞에 달린 전등이 희미하게 빛을 뿌려주는 올리막길에서 미끄러지는듯 중심을 잃고 허청거리더니 한쪽켠 손에 잡았던 짐을 놓쳐버리는것이 보였다. 처녀의 손에서 벗어난 짐은 그가 올라간 둔덕을 도로 굴러내려갔다.

한동안 굴러내리던 짐은 응빈이앞까지 와서 멎었다. 그런데도 처녀는 그 짐이 굴러내려가는것을 지켜볼뿐 따라 내려올념을 하지 않았다. 짐작컨대 처녀는 지칠대로 지친것이여서 숨을 돌린 다음 천천히 내려오자는것 같았다.

응빈은 가는 길이니 들어다 주려고 그 짐을 잡았다. 첫손에 무게가 느껴지는 묵직한것이였다. 그것은 처녀가 밤중에 들고다니기엔 어울리지 않는 굵은 쇠줄퉁구리로 짐작이 갔다. 여러해동안 탄광 철공부에서 일해온 응빈은 그것이 쇠줄퉁구리라는것을 인차 알아맞힐수 있었다. 하지만 이처럼 깨끗한 방수포로 정성스레 감싼 쇠줄퉁구리를 보기는 처음이였다.

처녀는 응빈이가 그 짐을 들고 자기앞까지 왔건만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저 침착하게 주시할뿐이였다. 근방의 인단광고판우에 매달린 불빛은 그 처녀의 얼굴에 나타난 지친 기색을 알아보게 했다.

순간 응빈은 이 처녀가 우야 굴려버린것을 자기가 들고 온것이나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얼른 그 짐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마주보았다. 푸른 비옷을 입은 단발머리를 한 날씬하고 탄력이 느껴지는 몸매의 녀대학생이였다. 두사람의 시선은 짧은 순간 마주 향했다가 아래로 떨어졌다. 틀림없이 처녀의 시선속엔 고맙다는 뜻을 표하는 부드러움이 있었다. 하면서도 《당신은 누군데 밤중에 처녀의 뒤를 따르며 청하지 않은 친절을 보이는거예요?》하는 뜻으로밖에 해석할수 없는 경계심도 느껴지는 시선이였다. 응빈은 이때문에 거북했으므로 그 처녀의 목다리 짧은 흰 장화를 한번 스쳐보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얼마후엔 그 처녀를 저만큼 뒤떨구었고 쇠줄퉁구리며 그 처녀의 감사와 경계심이 한데 섞여있던 눈빛이며를 잊어버렸다. 그런것을 더이상 생각할 마음의 여유를 못 가진 응빈이였다.

비방울은 점점 굵어지기 시작했다. 응빈은 촉수낮은 전등이 으스름한 빛으로 색날은 간판을 비쳐주는 만두국집앞에 와서 멎어섰다. 그 간판을 대하고나니 비로소 자기가 그때까지 점심도 저녁도 먹지 않았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응빈은 그 만두국집의 문턱을 넘어 들어섰다. 오래되여 기름때가 반들거리는 계산대곁에 앉아서 두손바닥짬에 살진 턱을 눌러대고 졸던 서른댓 나보이는 녀자가 비에 젖어 후줄근해진 손님을 보자 기지개를 켜며 일어섰다.

응빈은 텅 빈 식탁주위를 둘러보았다. 한쪽구석에 중년사나이가 외토리로 앉아있을뿐 손님이란 없었다. 응빈이처럼 늦은 밤거리를 헤매인듯 비에 젖은 그 중년사나이는 순대가 성글게 담긴 접시를 놓고 쓸쓸한 기분으로 반나마 마셔버린 술병을 기울이고있었다.

응빈은 그 사람과는 반대쪽 구석에 자리를 정했다.

《술도 가져올가요?》

졸던 녀자가 다가오며 굵은 성대로 물었다.

《저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그렇군요.》

알겠다는듯 그 녀자는 물러나서 주방쪽으로 들어갔다.

응빈은 먹을것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식탁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눈이 시릴 정도로 흰 식탁보를 내려다보는 응빈은 끝없이 헤매며 지나온 거리의 풍경들을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굳게 닫긴 교문앞에 그린듯 오래동안 서있었던 자기 모습을 그려보았다. 처량한 그 모습, 응빈은 이 모든것을 생각지 말자고 천장 한구석으로 시선을 옮겨갔다. 그러면 가슴아픈 일들과 영상들은 저절로 사라지리라 믿어졌다. 하지만 그 비오는 거리와 교문과 골목은 떠날줄 몰랐다.

잃어버린 희망, 짓밟힌 청춘, 나는 이제 어데로 가야 하나?

또다시 아득히 뻗어간 두줄기 철길우로 달리는 3등차칸이 떠오른다. 다음엔 탄광마을, 쓰러져가는 판자집거리, 술취한 탄부들이 세상을 저주하는 욕지거리와 류행가소리가 뒤섞이는 탄광마을거리, 그 거리로 지나가는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르고 자기 모습이 떠오른다.

결국 내가 다시 갈 곳이란 거기뿐이 아닌가? 응빈의 입에선 한숨이 새여나왔다.

졸던 녀자가 인젠 잠을 말짱히 깨고 가벼운 걸음걸이로 밥을 날라왔다. 그 녀자는 돌아서려다가 젊은 손님의 울분에 찬 한숨소리를 들었다.

《아이.》

그 녀자는 긴숨을 내쉬더니 응빈이앞에 앉았다.

《우리 집은 설음을 덜어놓는 정거장이라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눈물을 뿌리고 가는지 모르는걸요. 접땐 학생처럼 잘 생긴 도련님 하나가 이렇게 밤중에 찾아들어 눈물을 흘리더니만 한강에 떨어져버렸다오. 너무도 슬픔이 많은 세상인걸요.》

저만치 떨어진 구석에 외토리로 앉아 술을 마시던 중년사나이가 응빈이와 주인녀자쪽을 측은한 시선으로 건너다보더니 조용히 일어나 문밖으로 사라졌다.

《학생은 시골서 오셨죠?》

《…》

《취직때문인가요?》

《…》

《그럼…》

호기심많은 녀자였다.

《…》

《이런 설음, 저런 설음 묵새기며 사는게 인생인걸요. 못견디게 설음이 북받칠 때엔 낯모르는 사람에게라도 한바탕 털어놓으면 시원해진다오. 한번은 웬 어른이 아침부터 찾아들어 술만 퍼마시더니 제 설음을 털어놓는게 아니겠어요. 서울로 공부하러 온 외아들이 혈액은행에 피를 팔다가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나요. 고약한 세상, 고약한 세상 하고는 가슴을 치는게 아니겠어요. 이 집에 오는분들치고 이놈의 세상을 저주하지 않는이는 하나도 없어요.》

《…》

응빈은 들을뿐이다. 처음 대하는 이 녀인이 전하는 소식 역시 밝은 기분을 주는것은 아니였다.

《우리 집엔 점잖은 손님들도 간혹 오신다오. 학자님네들이나 대학선생님들도 여러분 오시는걸요. 우리 집 국맛이 좋은데다 오래되였으니깐요. 어찌면 이리도 어수선한 세상일가요? 매일이다싶이 학생들의 시위대렬이 지나가며 <미군 나가라!>, <리승만정권 타도하라!>고 웨치고들 있지 않아요. 아마도 이 세상을 그냥 두면 사람들에겐 고통만 차례지는가보지요.》

그러는 사이 비방울이 더욱 굵어진듯 비내리는 소리가 제법 요란하게 들려왔다.

문이 열리더니 새 손님 하나가 들어섰다. 비를 피하기 위해 들어온듯 한 손님이다. 비옷을 벗어 가볍게 터는 처녀손님, 그 손님은 주인녀자와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박사님네 아씨가…》

주인녀자가 놀라서 달려가더니 그 처녀의 손에서 비옷을 받아든다.

《나 더운 국 좀, 비를 맞으며 온걸요.》

처녀손님은 문옆 식탁에 앉으며 팔목시계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늦었는데 어데 가셨던가요?》

《심부름요. 오빠를 도와주려고요.》

《그럼 잠간만.》

주인녀자는 안으로 들어갔다. 혼자 남게 된 처녀는 그때야 텅 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응빈이와 시선이 부딪쳤다. 순간 두사람은 약속이나 한듯 가벼이 놀랐다. 그것은 응빈이도 처녀도 아까 인단광고판에 매달렸던 외등이 희미하게 빛을 던져주던 둔덕길에서 한동안 마주섰던 일이 상기되였기때문이다. 두사람은 서로가 아까의 일을 생각하고는 어색해져서 외면해버렸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다시금 시선을 마주 향하게 되였는데 이번엔 그 어떤 기억을 더듬으면서 서로가 확인할것이 있는듯 한 침착성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두번째로 부딪친 그들의 시선은 한동안 그대로 멎어있었다.

(어데선가… 그것도 매우 의의있는 장소에서 만나본 일이 있는것 같은데…)

두사람 다 생각은 이러했지만 그것이 어데였던지 딱히는 떠오르지 않았다. 먼저 시선을 옮긴것은 응빈이였다. 응빈은 자기가 그 처녀를 어데선가 본듯 한것은 착각일것이라고 단정해버렸다. 설사 어데선가 본 일이 있었다하더라도 지금의 자기 처지에서 그런걸 확인해내느라고 기억을 더듬는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되였다.

도시의 근심걱정을 모르고 자라난 녀대학생들에게서 흔히 볼수 있는 《귀족적교만성》에 모욕감을 느끼며 고학생시절을 보낸 응빈이였다. 오늘 밤 역시 그는 이 녀대학생에게서 따뜻한 시선을 받지는 못했다.

응빈은 더이상 식탁우로 얼굴을 들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갔던 주인녀자가 김이 나는 국그릇을 들고나오더니 처녀에게로 다가가서 마주앉았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주인녀자의 목소리가 눈을 내리깐채 앉아있는 응빈에게까지 들려왔다. 그다음엔 더운 국을 한모금 마시고난 처녀의 속삭이듯 나직이 묻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저 사람을 아세요?》

《근심에 싸인분 같애요. 글쎄, 천장을 보며 한숨을 짓지 않아요.》

다음부터는 그들이 들리지 않는 소리로 말을 주고받았다. 그러다가 주인녀자는 새로 들어온 한 손님때문에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응빈은 일어섰다. 또다시 어두운 거리로 나가야 했기때문이다. 굵어지기도 하고 가늘어지기도 하면서 창밖에선 여전히 비가 내리고있었다.

응빈은 처녀의 식탁옆으로 빠져 출입문쪽으로 가려 했다. 했을 때 아직 국그릇을 앞에 놓고 앉았던 처녀가 일어서며 앞을 막았다.

《아까는 참, 고마왔어요. 그리고 실례했어요.》

《…》

응빈은 뜻밖의 일이여서 대답을 선뜻 하지 못했다.

《대단히 불쾌하셨던가보죠?》

《아니요. 별반…》

응빈은 그 처녀와 세번째로 시선을 부딪친 이 순간에 자기가 이 녀학생을 어데선가 본듯 한것은 결코 착각이 아니였음을 비로소 확인할수 있게 되였다. 그래서 응빈의 침울한 얼굴엔 한순간 사람을 반기는 밝은 빛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처녀는 응빈의 얼굴에 나타났던 그 일순간의 변화를 놓치지 않고 주시하더니 방금전과는 전혀 다른 어조로 물었다.

《저를 알아보신게죠?》

《뜻밖입니다. 윤희씨.》

《여기 좀 앉으세요. 바삐 가셔야 하는가요?》

《아니요. 갈 곳도 없이 된 몸입니다.》

두사람은 식탁을 가운데 놓고 천천히 마주보며 앉았다.

…《국대안》반대 대학생시위대와 저지선을 친 경찰대와는 일진일퇴의 혈투를 벌렸다. 대학생들은 피투성이가 되여 거리바닥에 쓰러졌다. 소방차가 내쏘는 물총이 그물을 치며 앞을 막았고 곤봉들이 대학생시위대의 머리우에 떨어졌다.

어제도 그제도 거리는 싸움의 마당이였다.

경찰들은 곤봉과 총탁으로 대학생들을 까눕힌 다음 트럭우에 던져싣고 가버리군 했다.

응빈이도 경찰들의 곤봉에 맞아 거리바닥에 쓰러졌다. 상처입은 뒤머리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의식이 점점 희미해져가기 시작했다. 의료대성원들이 달려와서 머리에 붕대를 감고 어데론가 운반해간다는것을 기억하고는 완전히 의식을 잃어버렸다. 그가 의식을 도로 찾은것은 행길가의 어떤 낡은 목조가옥 2층에서였다. 반나마 창문이 깨여진 그 2층집 널마루는 차거웠으나 자기처럼 부상을 입고 누워있는 시위대원들이 빼곡하게 차있었다.

응빈은 깨진 유리창으로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오늘도 역시 시위대와 경찰들과의 혈투가 벌어졌던 석양의 거리는 음산하였다. 찢어진 프랑카드들이 바람에 너풀거리고 끊어진 곤봉대며 짓밟혀 걸레쪽이 된 경찰모들이 너저분하게 흩어져있었다.

항쟁의 파도가 휩쓸고간 적막한 거리로 경찰차 한대가 거칠것 없이 내달려갔다.

《끝났는가요?》

응빈은 자기 머리에 붕대를 갈아대주기 위하여 다가온 약학대학의 녀학생에게 물었다.

《대렬은 저지선을 뚫고 다른 거리로 옮겨갔어요. 싸움은 래일도 모레도 계속될거예요.》

진한 눈섭밑에서 맑은 눈이 반짝이는 그 녀학생은 입술을 사려물면서 놈들에 대한 증오로 하여 목소리를 떨었다.

심한 부상들을 입고 이곳 의료대본부까지 업혀온 대학생들이건만 아무도 앓음소리를 내지 않았다.

밤이 깊어 응빈은 열이 높아졌다. 의료대들이 달려와서 주사를 놓고 곁을 지켜주었다. 낮에 응빈에게 붕대를 감아주던 그 약학대학의 녀학생이 자리한번 뜨지 않고 응빈의 곁에 앉아있었다.

《동통이 오죠?》

《아니요.》

응빈은 견딜수 없으리만큼 상처부위가 쑤셔나고 목구멍이 타드는듯 했으나 앓음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이발을 앙다문채 움직이지 않았다.

이것은 응빈이 한사람만이 아니였다. 팔이 부러진 학생도, 어깨가 부스러진 학생도 모두다 이처럼 자기들곁을 지키고 앉아있는 의료대학생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아픔을 참아내고있었다. 그리하여 이 부상자들이 모여있는 방엔 신경을 자극할만 한 소리란 아무것도 울리지 않았다. 얼핏 보면 모두가 고요히 잠든듯 했다.

했을 때 갑자기 이 고요함을 깨치며 저쪽 구석에서 한 부상당한 대학생의 목소리가 울렸다.

《너무 조용하군요. 적막이 싫습니다. 노래를 불러주십시오.》

의료대의 한 녀학생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직하지만 마디마디에 힘을 주어 부르는 그 녀학생의 맑은 노래소리는 처음엔 몇사람의 목청과 합쳐지더니 나중엔 그 방안 사람들전부의 목청과 합쳐졌다.

응빈은 한밤중에 동통이 너무 심하여 몸을 비틀다가 눈을 떴다. 그러자 등갓을 씌운 전등불아래에 초저녁과 같은 변함없는 자세로 약학대학의 녀학생이 앉아있는것을 알게 되였다.

《몹시 아프죠?》

그 녀학생의 눈에는 피곤이 실려있었다.

《아니요.》

그 다음 두사람은 오래동안 마주 바라보았다.

《잠드셔야 해요.》

녀학생은 자기의 손수건으로 응빈의 얼굴을 가리워주었다. 그 얼마후에 응빈은 잠들었고 아침엔 다시 어제와 같이 시위대렬에 참가했다. …

그때로부터 2년이 지나갔으나 오늘까지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고 또 이렇게 만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던 그들이다.

《갈 곳이 없이 된 몸이라 하셨지요?》

《대학은 저를 내쫓았습니다. 공납금때문이지요.》

《…》

《…》

윤희는 놀라지 않았다. 그대신 동정이 담긴 눈으로 응빈을 건너다보다가 반쯤 아래로 향해버렸다.

《어쩐지 응빈씨를 알아본 첫 순간에 그런 예감이 들었댔어요.》

《저 혼자 이런 불행을 겪는건 아니지만 정말 분합니다. 마지막으로 대학과 리별하고 오는 길이지요.》

안으로 들어갔던 주인녀자가 나오다가 두사람이 그 어떤 다정한 표정들로 마주앉은걸 보고는 첫 얼마동안 놀란 기색이더니 되돌아서서 조용히 사라졌다.

《이젠 어데로 가시죠?》

《새벽차로 고향에 가렵니다.》

《고향에 가시면 무슨 일을 하시게 되는가요?》

《탄부가 되지요. 고향사람들모두가 그런것처럼 저에게도 그 길만이 있지요.》

《달리는 길을 찾지 못하시는가요?》

《이 저주할 세상에서는 저같이 가난한 시골청년이 기계공학자가 되려는 포부를 지닌다는건 비극일뿐입니다.》

응빈은 이 말을 끝맺으면서 두다리와 두주먹에 불쑥 힘을 주었다. 비오는 밤거리를 헤매이면서 그리고 자기를 내쫓은 대학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면서 그는 오늘 밤 온몸이 젖어드는것도 모르고 절망과 울분에 잠겨있었다. 그는 자신의 이 울분에서 벗어나려고 몇번이고 주먹을 부르쥐여보군 했다. 혼자소리로 웨쳐보기도 몇번이였다.

《미련을 버려라. 서울에 침을 뱉으라. 이놈들과 등져라. 바보처럼 절망에 잠기지 말고 머리를 식혀라. 그리고 이 불공평한 세상을 짓밟고 일어설 용기를 키우라.》

했으나 절망과 슬픔은 너무도 컸고 또 이 웨침이 울분을 이겨내기엔 아직 시간이 너무도 짧았다.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 큰 고통을 주는 땅이 어데 있을가요? 저 역시 새 학기부터 대학을 그만두려고 생각하고있어요. 오빠의 형편은 말이 아니예요. 오빠는 지금 매우 곤난한 처지에 이르렀어요. 하지만 오빠가 응빈씨를 도울수 있을는지도 모르겠어요.》

반쯤 내리깔았던 윤희의 눈이 떠지며 응빈을 다시금 건너다보았는데 그의 맑은 눈은 응빈을 곧바로 건너다보고있었다.

《고맙습니다, 윤희씨.》

윤희의 그런 눈을 마주보는 응빈의 가슴은 더욱 쓰라리였다. 2년전 항쟁시위대에서 부상을 입고 고통을 참느라고 몸부림치던 때에도 윤희의 이처럼 부드럽고 맑은 눈이 물기에 젖은채 내려다보았었다.

응빈은 아직 이 마음착한 녀학생의 오빠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했다. 그런것까지 알리만큼 이 녀학생과는 사귈 처지도 아니였고 또 그런 기회조차 없었다. 했음에도 윤희가 이처럼 말할수 있었던것은 응빈이가 기계공학을 전공하는 학도인것만큼 명성높은 공학박사인 자기 오빠를 이미부터 알고있으리라 믿어졌기때문이였다.

두사람은 거리로 나왔다. 비는 멎었으나 하늘은 여전히 걸레쪽같은 검은구름으로 덮이여있었다. 두사람은 하나씩 짐을 갈라들고 인적끊긴 길로 걸어갔다.

《오빠는 기다리고계실거예요. 예정보다 퍽 늦어졌으니까요.》

윤희는 외통골목이 뻗어나가다가 이리저리 갈라진 길목에 이르러 주위의 보통집들을 내려누르듯 둔덕우에 묵직하게 앉아있는 ㅁ자집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응빈은 윤희네 집을 올려다보았다. 세멘을 입힌 높은 담벽이 둘러쳐진 큰집이였다. 그 집은 돌층계로 올라가서 대문을 열고 들어가게 되여있었고 담벽밑엔 굵직굵직한 돌로써 축대가 쌓여져있었다.

한동안 처녀가 가리킨 집의 위용에 위축된채 집주위를 살피던 응빈은 삐걱하고 거치장스러운 소리를 내며 그 집 대문이 열리자 시선을 그리로 돌렸다.

《윤희냐? 너를 찾아나서는 길이다. 공연히 너를 보냈다고 후회를 많이 했다.》

대문밖으로 나온 중년남자는 키가 후리후리한 신사였다. 높은 돌층대를 한단씩 딛고 내려오는 그의 한손엔 우산이, 또 다른쪽 팔우엔 비옷이 얹혀져있었다.

《오래 기다리셨지요? 그나마 이분이 도와주어서 간신히 올수 있었는걸요.》

그러자 신사는 응빈을 바라보았다. 응빈은 그 신사에게 굽석 허리를 굽혀 절을 하였다.

《감사하오, 청년. 군은 어데 있지요?》

그 신사는 자기 녀동생을 도와준 이 청년에게 관심이 생긴듯 부드럽게 물었으나 자세는 도고하였다.

《어제까지는 기계공학을 공부하던 학생이였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응빈은 어둠속이여서 신사의 표정변화는 볼수 없었으나 어조변화만은 즉시에 느낄수 있었다.

《…》

응빈은 대답을 선뜻 하지 못했다. 오늘은 대학에서 내쫓긴 고학생… 진실 그대로를 말하면 이 신사가 어떻게 대할것인가?

그런 때에 윤희가 대신하여 나서주었다.

《공납금때문에 내쫓기였어요. 밤거리를 헤매다가 저를 만났지요. 저와는 2년전에 알게 되였어요.》

《…》

그러자 신사는 한동안 침묵하였다. 다만 응빈을 뚫어지게 내려다볼뿐이였다. 그의 눈표정이 어떠했는지, 그의 얼굴표정이 어떠했는지는 어둠때문에 볼수 없었다.

길다란 침묵끝에 신사는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인제부터는 직업도 거처도 없단 말이지요? 거리에 내쫓긴 청년이란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더 정확히 말씀드리면 갈 곳을 찾아 방황하고있는중입니다. 서울에서는 저 같은 시골청년이 취직조차 할길이 없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도 윤희가 응빈의 말을 보충해주었다.

《그래서 고향으로 가신대요. 탄부가 되는 유일한 길이 있을뿐이라고 했어요. 응빈씨는…》

《탄부? 고향? 기계학도가? 응빈군이라 했지…》

그리고도 신사는 응빈의 사람됨됨을 속속들이 알아내기라도 하려는지 한동안 그냥 뚫어지게 내려다보았다. 그런 후에 무엇인가를 결심한듯 짤막하게 말을 했다.

《불행한 일이요. 청년, 우리 집으로 들어갑시다.》

신사는 돌아서더니 돌층계를 오르기 시작했다.

윤희가 나직하게 안도의 긴숨을 내쉬며 응빈을 돌아보았다.

《들어가요.》

응빈은 그들남매의 뒤를 따라 층계를 오르기 시작했다. …

상공에서 비행기소리가 들렸다. 틀림없이 우리의 머리우를 선회하는 비행기소리였다. 천막밖으로 뛰쳐나온 우리는 캄캄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적후인만큼 사소한 외부의 소음변화도 그대로 스쳐버려서는 안되는 우리였다.

우리는 적들이 혹시 아군지상기습대가 이 지대로 뚫고들어온다는것을 눈치채고 비행화력으로 길을 차단하려들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되였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적군비행대는 우리의 머리우를 몇번 돌다가 가버렸다.

놈들은 아마도 자기네 작전지구내에 이상한 현상이라도 일어나지 않나 하여 비행감시를 하고있는듯싶었다. 비행기소리가 멀어지다가 전혀 들리지 않게 된 후에도 그대로 서서 북쪽하늘을 바라보았다.

바람소리와 비소리로 하여 어덴지 꼭 알아맞히기 어려운 한 전선지구로부터 아군포병대의 일제사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의 사단들은 이 궂은비 내리는 밤에도 원쑤들의 숨통을 누르며 진격의 길을 다그치고있었다.

다시금 천막안으로 들어온 우리는 담배를 한대씩 피워물었다.

《그 집은 이름높은 기계발명가인 박사 박순현의 연구소였습니다.》

응빈은 중단했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발명가와 연구소, 그 집이 이런 집이라는것을 알게 되였을 때의 저의 흥분이란 어떠했겠습니까? 그렇게도 열렬히 동경하고있지만 아직은 한번도 본 일이라군 없는 발명가와 연구소였습니다. 발명가로 될수만 있다면 그 어떤 희생조차도 기꺼이 치를수 있는 각오속에서 살고있던 나는 어릴 때부터 기계연구소의 풍경을 자기류로 그려두기까지 했더랬습니다. 그 공상속에 그려지군 하던 기계연구소의 구석구석을 지금도 그대로 기억해낼수가 있습니다. 온갖 실험기재들이 빠짐없이 갖추어져있는 방들, 그 방마다에는 흰 작업복을 입은 연구사나 조수들이 앉아있을것이였습니다. 그들이 대하고 앉아있는 제도판우엔 국부조명을 받는 도면지가 아니면 가려볼 길조차 없이 복잡한 기초계산의 수자들이 깨알처럼 적힌 종이장들이 수북이 쌓여있을것이였습니다. 또한 그 방들의 한쪽 벽면이나 두쪽 벽면 혹은 창문벽을 제외한 마지막벽면까지가 무게있는 책들로 가득차있을것이였습니다. 연구소는 하나의 정원속에 자리잡고 신비로운 상념에 잠긴듯 고요히 앉아 밤을 보내고 아침을 맞이할것이였습니다. 그 연구소의 복도나 현관입구엔 인류과학에 공헌한 대학자들의 사진이 있어 이 집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정숙이 자리잡게 될것이고 과학이 인류의 진보를 위해 한 거대한 수고를 생각하며 옷깃을 여미도록 할것이였습니다.

연구사들과 조수들은 반복되는 실험들과 계산을 하느라고 밤가고 아침이 오는지조차 모르다가는 한참씩 그 푸른 나무잎 무성한 정원길을 거닐며 청신한 대기를 즐길것이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들 연구사들과 조수들은 아직 이 세상에 한번도 있어본 일이라고는 없는 기계들을 사람들에게 선물할것이고 그로 하여 인류는 또 한걸음 진보하게 될것입니다.

제가 그때까지 그려봤던 기계발명가들의 연구소풍경은 이러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본 발명가 박순현과 그의 이름을 단 기계연구소는 쓸쓸하기가 이를데없는, 도가와 흡사한 집이라 할가요? 있다면 건물뿐이였습니다. 그것도 연구기관으로 건축한 집이 아니라 박순현자신이 대를 이어가며 물려받은 보통기와집이였습니다. 그나마 구석구석에서는 곰팡내가 풍겼습니다.

이름높은 신사이며 박사인 발명가 박순현은 이 집에서 녀동생 윤희와 단둘이 살았습니다. 그의 착실한 방조자였던 안해가 두 자식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이래 그는 재혼을 포기하고 이처럼 독신으로 학문탐구에만 종사했습니다. 자식들마저 외가에서 키워준다면서 데리고 갔습니다. 그러고보니 약학대학에 다니는 녀동생 윤희가 이 집의 안팎살림을 도맡아보고있었습니다. 정말 내가 본 그 집은 얼마나 허전했던지요? 박사의 서재 하나만이 내가 그려보던 그런것이였습니다. 그외엔 실험기재 하나, 실험시설 하나 변변한것이 없는 연구소였습니다. 일본제금속구부림 피로시험기 한대, 충격시험기 한대, 용수철시험기 한대, 기타 몇가지의 측정기류들과 현미경류들이 있었을뿐이였습니다. 박사는 연구조수마저 한사람 채용하지 못하고있었습니다. 내가 박사의 녀동생 윤희를 알게 된 그밤에 그가 들고 오던 무거운 쇠줄퉁구리는 바로 실험용이였습니다. 박순현은 본래 괜찮은 재정적기초를 가지고 발명가생활을 시작했지만 발명가생활을 계속하는 사이에 이처럼 령락해버렸던것입니다. 그의 녀동생 윤희도 오빠의 재정적부담을 약간이나마 덜어주려고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하면서 조수일을 돌봐주는듯싶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내가 그 집 사람들과 알게 되였지요. 그날 밤 박사는 나에게 이런것저런것 묻고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를 좀 도와줄수 없겠습니까? 저에겐 지금 일손이 대단히 귀합니다.》

박사의 이런 제의는 나를 기쁘게 해주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날부터 나는 박순현연구소의 조수이자 실험공이기도 했고 잡부이기도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외사부장이자 자재구입원이기도 하면서 각종 일을 도맡아보는 유일한 직원이 되였습니다. 봉급은 생기는 달도 있었고 없는 달도 있었는데 그 봉급 역시 보잘것없는것이였습니다. 나는 실험실 옆방을 차지하고 거기서 살았습니다.

《우리 연구소가 하는 일은…》하고 그날 밤 박사는 내가 자기와 함께 있겠다고 하자 알려주었습니다.

《그건 신통한것이 못됩니다. 일해나가는 과정에 실망할가봐 군에게 미리 알려드리는바입니다만 우리는 지금 서울의 모든 학자들과 연구소가 그러한것처럼 엄격한 의미에서의 학문탐구는 못하고있습니다. 현재 서울엔 몇개의 해당 분야 전문가들이 자기 연구소들을 가지고있기는 합니다만 처지는 모두가 한가지입니다. 본격적인 연구나 설계를 하는것이 아니라 주문설계나 겨우 담당하는것으로 생명을 이어가고있습니다. 우리 연구소에 들어오는 주문설계란 현존 공장설비의 개조가 아니면 현재 리용되고있는 기계들의 개조에 지나지 않습니다. 무엇때문에 이 땅의 기계연구사들이 이렇게밖에는 달리 살수 없는가 하는 문제는 군자신이 얼마후면 스스로 알게 될것입니다.》

이 말을 할 때의 박사는 40대가 아니라 70대의 로인처럼 무력한 그리고 통탄밖에는 할것이 없는 사람의 길다란 한숨을 내쉬였습니다. 그리고는 방안을 이리저리 거닐다가 자기 방으로 가버렸습니다.

《기계발명가가 되시기를 진정으로 원하세요?》

오빠가 나가자 윤희는 나에게 안정감이 있어보이는 푹신한 안락의자에 옮겨앉을것을 권하면서 물었습니다.

《…》

나는 이것을 묻는 윤희의 눈에 어덴가 서글픈 그늘이 비껴감을 볼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대답을 못하고 방안을 두루 살폈을뿐이였습니다. 박순현연구소의 응접실은 그 방을 꾸리고 거두는 윤희가 알뜰하고 검박함을 알도록 화분 하나도 제자리를 찾아 단정하게 놓여져있었습니다. 나의 침묵은 윤희를 딱하게 만들었던것 같습니다.

《그런걸 묻는다고 달리 생각지는 마세요. 저는 오빠의 오늘이 너무도 비참하여 물었을뿐이예요. 혹시 래일의 기계발명가들에겐 행운이 차례질는지도 모르지 않아요. 래일, 래일은 정말 어떠할가요? 전날 제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대학에 다니다가 방학이 되여 온 오빠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군 하셨어요.

<전공학문을 바꿈이 어떠냐? 이 땅에서 기계공학자가 무엇을 하겠니. 기계제작공업이 없는 나라의 기계발명가란 무엇이겠니. 안 그러냐?>

그러면 오빠의 대답속엔 힘과 믿음이 있었어요.

<래일은 이 땅도 달라집니다. >

그랬던 오빠의 그 래일이란 오늘이였어요. 재사니 수재니 기계신이니 하면서 출판물들은 오빠를 칭송하지만 그 칭송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슬픔은 더욱 깊이 우리 집의 곳곳에 자리잡아요.》

그러다가 윤희는 문득 나의 얼굴을 겁질린 시선으로 건너다보고는 더이상 말을 잇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이 교양있는 처녀가 기계발명가가 되기를 열렬히 희망하는 사람에게 실망과 환멸을 주는 이야기를 하게 된것을 후회하는 뜻이였습니다. 사실 윤희의 이 말은 나에게 상당한 정도로 작용했습니다. 그날 밤이 새기까지 잠들지 못했으니깐요.

래일, 그 래일은 정말 어떠할것인가? 하는것을 두고 생각해보느라고 말입니다. …

 

아까보다는 가까와진 거리에서 아군포병대의 일제사격소리가 울려왔다. 우리는 한동안 하던 말을 끊고 그 포병대의 사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적들의 포병대 역시 대응사격을 하는듯 했다. 적아 쌍방 포병대의 화력교전은 오래동안 계속되다가 멎었다. 그 다음엔 또다시 비소리와 바람소리만이 아까처럼 우리가 자리잡은 수림속에 가득차군 했다.

《계속하오.》

나는 김동무의 이야기를 마감까지 듣고싶었다.

《계속할가요.》

김동무는 피워물었던 담배를 다시금 비벼끄고는 그후 이야기를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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